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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기(新婚記)
염 상 섭
1
피로연이 7, 8 분이나 어우러져 들어가서 둘쨋번으로 일본 사람편의 축사가 끝이 나려 할 제, 누구인지 ‘푸록코트’짜리가 바깥으로서 들어오더니 신랑의 귀에다 입을 대고 소곤소곤하는 사람이 있었다. 신랑은 채 다 듣지도 않고 귀를 떼며 매우 난처하다는 듯이 잠깐 멀거니 앉았다가 고개를 숙이며 신부의 옆구리를 꾹 찌르고 몇 마디 중얼중얼하니까, 신부도 역시 눈살을 잠깐 찌푸리는 듯하더니,
“아무려나…….”
라고 겨우 들리게 대답하였다.
신랑은 인제야 확신이 있는 낯빛으로 대답을 기다리고 옆에 섰던 ‘프록코트’
짜리를 쳐다보며,
“그럼 얼른 분별을 시키렴.”
하며 일러 보낸다.
이것을 눈치챈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증이 나서 연해 신랑 신부편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으나 실상은 그리 궁금해 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피로연이 파한 뒤에 시아버니에게 폐백을 드리자는 의논이었다.
원래 신랑 아버지는 이번 혼인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을 아니하였다.
“내야 아니, 너 알아 하렴. 이 집안에 주장할 사람이 너밖에 누가 또 있단 말이냐.”
하며 못마땅해서 역정이 난 수작인지, 상당히 행세도 하는 장성한 자식일 뿐 아니라 재취 장가를 가는 노신랑이니까 모든 것을 믿고 그리하는 수작인지 어떻든 끝끝내 ‘내야 아니, 내야 아니’하고 머리를 내두르며, 시골 구석에 가만히 앉았었다. 실상 말하면 덮어놓고 간섭을 하려고 덤비는 것보다는 다행한 일이지만 누가 자기를 내대지나 않는가 하는 꼬부장한 생각으로 너무도 야릇하게 구는 데에는 도리어 성이 가셨다. 모든 준비가 다 되어서 내일 예식을 거행할 터이니 올라가자고 한 때에도,
“내야 올라가 무얼 하니? 애비를 애비로 알거든 어느 때든지 생각날 제 너희들이 찾어와 보면 그만 아니냐?
하며 애꿎은 둘째 며느리까지도 올라올 수가 없게 고집을 세웠다. 그러나 밤 사이에 무슨 꿈을 꾸고 어떻게 마음을 돌렸던지 별안간 오늘 아침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뛰어올라온 것은 의외이었을 뿐 아니라 집안 식구들도 인제는 마음을 놓게 되었다. 그러나 인사들이 끝난 뒤에,
“그래두 궁금하던가 보구려. 어떻든 잘 되었소.”
하며 마누라가 이렇게 한 마디 하니까, 여전히 벌레 먹은 배춧잎 같은 상을 응
둥그리고,
“젊은것들이 올러오지를 못해서 날 쳐죽일 듯이 여간 지랄들을 해야지. 내야
보든 마든 상관 있소마는…….”
하며 입을 비쭉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비위가 가라앉지 않은 모양. 대체 이 ‘내야’라는 소리는 손자새끼까지나 보아야 그만둘는지, 혼인 문제가 일어난 뒤로는 ‘내야’가 유난히 늘었다.
그는 그렇다 하더라도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다든지 또는 어떻게 잘못되리라는지 말도 시원히 하지 않고 벙어리 냉가슴 앓듯 혼자 눈살만 잔뜩 찌푸리고 있는 것이 송구스러워서 못 살 일이다.
그래서 자기는 마치 아들의 집이나 지켜 추러 왔다는 듯이 쓸쓸한 집 속에 혼자 채를 잡고 앉아서 예식에도 얼씬을 아니하고 피로연에도 기어코 얼굴을 보이지 않고 말았다.
처음 예정으로는 부친이 종시 올라오지 않으면 예식은 예식대로 하고 다시 날을 잡아서 시골로 내려가 폐백을 드리든지 잔치를 하든지 하는 수밖에 없고, 다행히 올라오면 아주 식장에서나 피로연회에서 절이나 한 번 하여 떼어 버리려고 하던 차에 마침 올라와 주기 때문에 한시름 잊었었고, 그 중에도 이 말을 들은 신부는 머릿살 아픈 폐백이니 무엇이니 하는 것을 아니하게 되어서 천만 의외에 다행으로 알았던 것이라서,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신부부터 실쭉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안에서들은 조비비듯 성화가 나서 먹을 것도 마음을 놓고 찾아 먹지들을 못하고 분주히 돌아다니며 뭇 사람들을 붙들고,
“이왕 언제든지 하고야 말 것이니 오늘 아주 폐백을 드려 버리면 소원도 풀어 드리고 군일도 덜리지 않겠느냐.”
고 충동여서 신랑 신부의 승낙까지 받게 된 것이었다.
이처럼 불시에 꾸미는 일이라, 피로연회는 신랑 신부에게만 맡겨 두고 뒷구멍으로는 사람을 삼지 사방으로 늘어놓아서, 시부모가 입을 사모 관대며, 큰머
리와 나삼을 세물전에서 빌려 들인다, 수모를 부르러 간다, 안에서들은 자동차
를 몰아서 집으로 선통을 놓으러 간다 하며, 수군수군 갈팡질팡하는 일편에, 요릿집 숙설간에서는, 대추를 꿰는 빛에, 편포를 괴는 빛에, 신부를 주려는 것인지 시아버니를 공궤하려는 것인지 큰 상을 차려 가는 빛에 한참 어수선한 동안에 안손님들은 어디서 얻어 들었던지 신랑집으로 구경 가자는 소리가 이 이 입 저 입에서 발론이 되어 연회가 파하기도 전에 우으들 일어나서 악을 쓰고 제각기 앞장들을 선다.
그리하자 연회도 그럭저럭 파하고, 손님들이 하나 둘씩 헤어져 가는 틈을 타
서 신랑 신부를 외따른 방으로 데려 들여다가 예식에 쓰던 면사포를 다시 씌우고 치장을 차리면서 신랑집에서 통기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다.
동생과 동무들이 옹위를 하고 치장을 차려 주는 대로 가만히 체경만 들여다보고 섰던 신부는, 뒤에서 자기 오라버니를 따라들어오는 신랑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벙글벙글하는 얼굴이 체경 속에 비추이는 것을 보고 그대로 선 채,
“아, 어떻게 된 셈예요.?”
하며 마치 체경 속에 있는 사람에게나 수작을 건네듯이 물었다.
“어떻게 되긴 무에 어떻게 돼. 호텔루 가는 길에 시아버니께 뵙고 가란 말이지……. 그러나 그렇게 꾸미고 보니까 정말 이쁘구나? 허허허.”
오라비는 거울 속에 비추인 누이동생의 볼그레하게 상기가 된 얼굴을 바라보며 유쾌한 듯이 웃었다.
생전 분이라곤 발라 본 일이 없는 계집애를 곱게 단장을 시켜서 아래위를 하얀 비단으로 휘감고 하드르를한 면사포를 뒤로 넘기어 꾸며 놓고 보니 한층더 어울려 보였다. 얼굴 전체로 보면 그리 남에 없이 예쁘달 것도 없고, 똑바로 뜬 눈, 오뚝 선 코, 꼭 다문 입, 여무지게 모인 살갗……, 어디로 보든지 좋지 못하게 말하면 결기가 있는 기승스런 얼굴이라 하겠지만 조금 큰 듯한 입귀를 삐뚜름하게 꼭 다문 위에 조그만 코가 조용히 휩싸고 앉았는 것이 어디라고 꼭 집어 낼 수는 없어도 침착하고 냉정한 이지(理智)와 굳은 심지(心志)가 있어 보이었다. 그러나 좁은 듯한 이마 아래에 박힌 큼직한 눈은 시원하고도 다정하여 보이었다. 그 중에도 ― 얼른 보아서는 모르지만 ― 약간 길까 말까 한 속눈썹이 더욱이 조화가 되어 보이었다. 만일 이 여자에게 이 눈이 없었더라면 그 얼굴에서는 다만 쌀쌀한 바람이 돌 뿐이요, 자칫하면 기승스러운 억지가 비집어 나왔을 것이다.
말하자면 코와 입에서 억눌린 열정도 이 눈에서 쏟아져 나오고, 이지와 의지
만 대그럭거리는 가슴 속의 빈 구석을 챌 만한 그 무엇도 이 눈으로 빨아들이려는 것 같았다.
“……아 폐백을 드린다면서요?”
누이도 생긋 웃으며 이마에 쐰 면사포의 끈 아래로 늘어진 머리카락을 자기 손으로 다듬어 올리었다.
“글쎄요. 그예 식장엔 안 오시고 마셨으니까, 가서 뵈입는 길에 폐백두 아주 드려야 하지 않어요.”
이번에는 신부 뒤에 서서 여전히 웃는 낯으로 거울 속에 있는 신부의 눈을 쏘듯이 들여다보고 섰던 신랑이 대답하였다.
“그리구서니 오다가다 별안간에 폐백은 무슨 폐백이에요. 당초에 왜 이리 모셔 오지를 못했더람.”
신부가 ˙마음에 싸지 않은 듯이 이렇게 혼자말처럼 한 마디 하니까, 곁에 섰던 어머니가 쫓아들어온 손님들과 재껄재껄하던 말을 뚝 끊고, 이리로 고개를 돌리면서,
“별소리를 다 듣겠구먼, 시집가는 년이 시부모께 폐백드리기를 다 싫다는 년이 어데 있단 말이냐. 눈을 감기구 큰절이나 시켰더라면 큰일날 뻔했군.”
하며 나무라듯이 말을 가로막고 나서 계집애들을 돌아다보며,
“인제 그만 해 두구 거기 좀 앉히려무나. 잠깐 섰기루 우리들 시집갈 때 모양으로 가래톳이야 스랴마는. 자! 자네두 저기 좀 앉구려.”
하며, 사위를 치어다보고 웃었다. 말이 새 사위지 보기는 이태나 두고 보았지만 어쩐지 ‘하게’가 대따라지게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아 참 우리들 시집갈 때야 어디가 꿈쩍이나 해 보았나? 혼인날이 닥쳐올수록 입맛을 잃구, 가슴만 두근거리구, 집안 식구 앞에선들 얼굴이나 변변히 들어 보았나요?……. 그걸 생각하면 요새 얘들은 너무 팔자들이 좋아서 지랄발광들예요. 아마 우리가 못 해 본 대신에 기를 써 보랴는지…….”
어머니는 누구인지를 붙들고 이런 술회를 하고 섰다.
“그야 말씀하실 게 무에 있습니까. 세상이 바뀌었는데…….”
하며, 며느리가 가로채며 쓸쓸한 웃음을 띠어 보인다.
ㅡ 나두 학교에나 다녔더면…….
하는 생각이 없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녜요, 너무 좋아서 보채 보는 수작이랍니다. 아이들이란 너무 좋으면 복받쳐 나오는 웃음을 감추려고 짜증을 내어보고 싶은 법입넨다.”
이번에는 오라비가 진정으로 귀엽다는 듯이 화기 만면하여 거울 속에 비추인 새 부부를 나란히 들여다보면서 입을 벌렸다.
“듣기 싫어요……. 인제 오빠의 그 잔소리를 안 듣게 돼서 정말 시윈해……
하하하.”
“기껏 시집을 보내 놓으니까 그따위 소리나 하구……. 그것두 내 잔소리를 좀 더 듣구 시집을 갔더면 좋았을 걸. 허허허.”
하며 웃으면서도 어쩐지 형용할 수 없는 섭섭하고 언짢은 생각이 들어서 말끝이 풀리고 웃는 얼굴이 이상하게 뒤틀린다. 이러한 감정은 신랑만을 빼놓고 그
방에 있는 사람에게 일시에 모두 옮았다. 여러 사람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돌아간 영감을 생각하였던지 눈물까지 핑 도는 모양이었으나, 그것을 감추느라고 애를 써서 웃는 낯으로,
“그만 앉히라니까 ! 좀 쉬어야지……. 우리두 좀 앉읍시다.”
하며 자기부터 앉았다.
신랑 신부도 앉았다. 이때까지 신랑은 거울을 사이에 두고 거울 밖에 섰는 자기는 거울 속에 있는 신부를 바라보고, 거울 속에 있는 자기는 거울 밖에 있는 신부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인제야 체경에 등을 지고 기역자로 앉은 신부의 얼굴을 거울에 비추지 않고 마주보게 되었다. 그러나 광선의 작용으로 그러한지 신랑의 눈에는 거울 속에서 보던 얼굴이 더 화려한 것 같아 보였었다. 그래
도 여러 사람의 눈을 꺼리면서 애를 써 가며, 힐끈 마주치는 그 눈만은 ― 마음의 비인 곳을 채려고 무엇인지 호소하며 찾는 듯한 그 눈만은, 여전한 것을 깨달았다.
여러 사람들은 잠깐 동안 물끄름말끄름 바라보며 입을 닫치고 앉았다. 신부의 오라비도 어느 틈에 나가 버렸다.
신부는 무슨 생각을 하였던지,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가 별안간 얼굴을 쳐들며,
“그러나저러나 폐백은 어떻게 드리는 거람?”
신부는 참 정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수모를 불렀으니까 시키는 대로만 하려무나.”
어머니는 달래듯이 말대답을 하고 나서 큰절이란 아주 퍼더버리고 앉는 것이니까, 앉기 전에 두 발을 모으고 서는 것이 편하다느니, 수모에게 너무 매달
지를 말라느니 하며 절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 옷을 입고 큰절이 다 무어예요. 아무렇게나 우물쭈물 해 버리지……. 도
무지 예식이니 무어니 하는 구살머리쩍은 그까진 장난 없이는 못 사나!”
신부는 혼자말처럼 또 한 번 짜증을 내어 보았다.
폐백이라는 것이 그다지 어려워서 그리하는 것도 아니요, 가서 절 한 번만 하고 대추 한 줌을 받아 가지고 왔으면 그만인 줄도 자기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지마는, 영희는 그것이 어쩐지 자기의 마음을 속이는 것 같아서 속으로는 혼자 부끄러웠다.
소위 결혼식 이라는 것을 당초부터 무시하던 영희로서는, 사회와 싸우면서라도 구습과 제도에 반항하여 어디까지 자기의 주장을 세울 만한 용기가 없어서 그리하였던지, 여러 사람의 눈에 띄는 번화한 예식을 거행하여 보려는 일종의 허영심을 이기지 못하여 그리하였던지, 어떻든 신식으로 예식은 하였다 하더라도, 또다시 구식으로 폐백을 드리느니, 다례를 지내느니 하는 것은 의식을 허례라고 배척하역 오니만큼,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 살피고 비평하는 눈이 밝고 날카로울수록, 영희에게 고통이 아니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희의 생각은, 이 방에 앉았는 아무도 알아 줄 사람은 없었다.
“그럼 예식은 왜 했누? 신식이나 구식이나 예식은 매한가지지.”
어머니는 이렇게 핀잔을 주듯이 한 마디 하였다.
“…….”
영희는 눈을 내리깔고 어머니 말이 아니 들린 듯이 천연히 앉았다.
어머니의 말이 딸의 생각을 잘 알고서 한 것은 아니지만 확실히 경위 있는 말이기 때문에 딸의 귀에는 찌르듯이 들리었다.
“어떻든 예식이란 그리 중대하게 볼 것은 아니지만, 필요하기야 필요한 것이겠어요.”
신랑은 체경 앞에 앉은 신부를 잠깐 치어다본 후에, 눈을 장모에게로 옮기며 다시 말을 이어서,
“……하지만, 다만 문제는 그려면 구식은 아주 타파하겠느냐, 조금쯤은 참작을 하겠느냐는 것이지마는, 제 생각같애서는 암만 해두 구식은 무의미한 일이겠어요.”
하며 동의를 구하듯이 다시 신부를 바라보았다. 신부는 잠자코 신랑을 마주보며 방긋 웃는 듯하였으나 그것은 분명히 코웃음이었다.
신부 신랑이 단둘이만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더라면 일대 논전이 일어났을 것이었다. 결혼식 문제가 일어났을 때에도 둘이 한참 싸운 것이지만, 지금 영희의 어머니가 한 말과 같이 ‘대체 무슨 까닭으로 신식은 의미가 있고 구식은 쓸데가 없다고 하는가. 의미 없기로 말하면 신구식 이 매한가지가 아니냐.’는 것이 영희의 주장이다. 지금도 뱃속에서는 불끈하였으나, 코웃음만 치고 잠자코 앉았는 것이다.
이때에 마침 나갔던 오라비가 목사와 자기 친구인 교회 사람 두서넛을 데리고 들어 왔다.
“아 여기 계신 걸 ! 참 감사합니다.”
목사는 이때껏 찾아다녔다는 듯이 이렇게 한 마디 하고 우둑우둑 일어서는 사람에게 일일이 인사를 하고 신랑과는 악수를 한다.
“선생님 저리 좀 앉으시지요. 너무 얘를 쓰셔서 참 미안합니다.”
신부의 어머니는 집안 식구 중에 제일 독실한 신자이니만큼 목사라면 선교사만은 못 하더라도 어떻든 천당 가는 인도자쯤으로는 믿고 있는 것이다.
“아, 관계찮습니다. 가는 길에 좀 찾아뵙고 가랴구…….”
목사는 곧 갈 듯이 뒤에 섰는 일행을 돌려다보더니, 다시 신부에게로 향하며,
“영희씨 참 놀랐습니다. 참 웅변이시드구먼요. 하지만 영희씨의 의견에는 찬
성할 수 없던데요.”
하며 목사는 지나는 말처럼 껄껄 웃었다.
“어째서요?”
“……모든 의식이 종교적 배경을 가진 습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은 그럴듯하지만, 그렇다고 영희씨 말씀처럼 ‘자각 있는 사람은 모든 의식이나 관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하셔서야 되겠습니까?……더구나 예수교 식까지를…….”
이것은 아까 연회석상에서 신랑이 답사를 한 뒤를 이어서, 신부도 한 마디 한 것을 목사는 그때부터 입을 삐쭉하고 앉았더니, 그예 여기까지 쫓아와서 짓
궂이 끄집어내는 것이다.
그야 영희로 말하면 시집가는 처녀로 스물네다섯 살이나 되었으니, 나이도 찰 만큼 찼다 하겠고 또 실연이라는 인생의 면하지 못할 첫째 관문을 지났으니까 보통 여자보다는 일되었다.고 하겠지만, 책상물림의 젊은 남녀가 가질 듯한 허영심도 있을 것이요, 동경 음악 학교를 버짓이 나온 영희에게는 남만한 교양도 견식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희가 피로연에서 답사 비슷한 연설을, 도도히 하였다는 것은 다만 남에 없는 중뿔난 짓을 해 보리라는 단순한 허영심으로만 그런 것이라고는 못할 까닭이 있다.
이지적 자기 비판력(理智的自己批判力)과 명민한 자기 반성력을 가진 영희에게 대하여 사상과 실행 사이에 틈이 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자기가 믿는 바의 사상대로 실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양심에 부끄런 일이요 마음의 고통이었다. 그러나 어느 때든지 자기의 신념대로 용감하게 실행하느냐 하면 그렇지는 못하였다. 이것이 이 여자에게 대하여는 무엇보다도 괴로운 일이지만,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하는 수 없이 다른 이유나 이치를 끌어 대어서 변명이라도 하는 수밖에 없다. 자기를 변명하는 그것도 역시 자기 마음에 편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라도 아니하면 안심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이 여자의 병이다. 이러한 것은 피가 괄하고 성벽이 많으며 자신이 만만하면서도, 비상히 신경질로 생긴 사람에게 보통 있는 일이지만, 영희도 말하자면 그런 종류의 여자이다.
영희가 이번 자기 결혼에 대하여 제일 큰 걱정거리는 예식 문제였다. 이때까지의 주장대로 하면 물론 예식을 아니하는 게 옳겠지만, 그리하려면 남의 첩장
이란 말을 달게 들을 결심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죽어도 못 될 일이었다. 그것도 첫사랑에 홈빡 빠져서 미쳐 돌아다니던 3년 전만 같으면, 그만한 용긴 없지 않았겠지마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결혼이란 무엇인지, 쓴맛 단맛 다 알고, 인제는 사랑이니 깨몽둥이니 하며 꿈 속 같은 생각만 할 때가 아니라 일평생 몸을 의탁할 곳을 찾으려는, 말하자면 주판질도 해 보고 앞뒷 경우 다 재 본 뒤에 하는 일이라, 그런 객기를 부리기에는 한풀이 꺾였을뿐더러, 지금 이 사나이에게 그만한 희생까지도 돌보지 않고 머리틀 싸매고 덤비기에는 자기가 너무 아까웠다.
그러므로 신랑편의 주장대로 마지못해 끌리어가는 것처럼 내버려 두기는 하였지마는, 그래도 이때껏 예식 이란 쓸데없다고 입찬 소리를 하고 돌아다니던 사람이, 별안간 예배당에서 목사의 딸인지 하느님의 딸인지 되어서 ‘아멘 ’을 불러 가며 신통한 꼴을 보이는 것은, 자기가 생각을 해 보아도 낯이 간지러운 일이었다.
사상 문제로 사귄 S 나 P 나 A는, 말은 아니할망정,
‘너도 하는 수 없나 보구나? 여자란 건 허영심에는 이길 장사 없지.’
하며 속으로 웃으려니 하는 생각을 하면 금시로 어깨가 움츠러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때껏 내가 주장하여 온 것은 헛소리가 아니었다. 다만 세상과 싸워 나갈 용기가 없어서 실행할 수가 없을 뿐이다. 더구나 순택씨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순택씨를 사랑하기 때문이니까, 이 경우에 자기의 주장을 희생하고 저편의 소원대로 소위 신식 예식이라는 것을 하였을 뿐이다. 이것까지를 허영심이 시키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심한 말이다…….
영희는 속으로 이러한 변명을 자기에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군색한 변명을 친구들에게 묻기도 전에 제풀에 입 밖에 내기는 열없었다. 그러므로 이것저것을 생각하면 피로연회에서 아주 자기의 변명하고 싶은 말까지를 끄집어내서 피로를 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피로연회에서 도도한 연설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목사의 수작이, 조롱하는 것 같기도 하고 시비를 거는 것도 같기도 한 데에는 심사가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의 변명이 군색하니만큼 더욱 화가 났다.
영희는 아까 예배당에서 목사 앞에 섰었던 것처럼, 면사포를 늘이고 고개를 소곳하고 선 채 얼굴이 발개지며,
“글쎄요. 말이 잘못되었더라도 너무 노하시진 마십쇼.”
하고 그리 말대꾸를 하기 싫다는 듯이 입을 닫쳐 버렸다.
“천만에 노하긴 누가 노한단 말씀예요. 다만 그런 말씀을 하시면 공연히 세
에 오해만 받기 쉽단 말씀이지요.”
목사는 타이르듯이 이렇게 대답을 하였다.
“선생님 말씀이 옳으시지요.”
신랑은 이렇게 찬성은 하면서도, 영희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여 눈치를 보며 힘없이 말끝을 흐려 버렸다.
2
신랑 신부의 자동차가 시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길어 갈 대로 길어진 늦은 봄 해도 벌써 넘어가고 전등불이 막 들어왔다.
신부가 들어온다는 바람에, 집 안이 급작스레 떠들썩하여지고, 아까 피로연회에 왔던 사람, 아니 왔던 사람 할 것 없이 뒤덤벅이 되어서, 대문간에서부터 발을 들여놓을 틈도 없이 빽빽이 늘어섰다.
신랑 신부는 예식장과 달라서 팔을 맞걸고 나란히 걸어 들어올 수도 없던지, 신랑부터 앞장을 서서 길을 헤치며 들어가는 뒤를 따라 신부의 일행도 마루 앞까지 왔다. 마루 끝에 섰던 신랑의 어머니가,
“넌 사랑으로 나가서 아버님부터 먼저 뵙고 들어오렴.”
하며 주의를 시키는 대로 신랑은 사랑으로 나가고, 신부 일행은 건넌방으로 들
여다 앉히었다.
그러나 웬 셈 인지 구데데구데데한 여편네들이 방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겨끔내기로 이 문 저 문에서 통을 데우고 기웃거릴 뿐이요, 그 말썽 많은 폐백이라는 것은 언제나 드릴 작정인지 안팎이 다 감감하다.
영희의 눈에는 되지도 않은 외주물것 같은 것들이 들여다보며,
“이쁜걸 ! 게다가 학문이 많대 !”
“응 아까두, 뭐? 피로연인가 무언가 할 때 연설을 다 했대 !”
“정말? 에그머니나 ! 신부가?”
하고 놀라는 눈이 동그래진다.
“하지만 그리 이쁠 건 없군! 저 계집앤 누군구?”
“신부 동생이래 !”
“뭐 ? 에그 망측해라. 말만한 처녀가 후배를 서 왔어?”
영희의 귀에는 아무 종작도 없이 들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저희끼리 수군거리는 것이 귀에 거슬릴 때마다 영희는 괘씸도 하고 갑갑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된 까닭인지 그럭저럭 한 시간이나 된 모양인데 좀처럼 폐백드릴 준비를 하는 것 같지도 않고, 애가 말라서 들락날락하는 수모도 쫑쫑댈 뿐이요,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소식밖에는 들을 수가 없다.
“아마 폐백을 아니 받으신다는 게로군. 그러기루서니 무슨 이야기가 저렇게
도 긴구?”
이것은 수모가 속살거리는 소리다. 영희도 벌써부터 그만 짐작은 하고 앉았었다. 그러나 필경에 그렇게 된다면 무슨 꼬락서니가 될꾸? 하는 생각을 해보고 영희는 벌써부터 얼굴이 벌겋게 상기가 되었다. 여기로 올 때까지는 예식이란 허식이다, 전폐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던 죄로 구식까지 톡톡히 다 해보는구나 하고 불쾌히 생각하였지만, 지금은 또 폐백을 못 드리게 될까 보아서 걱정이다.
‘며느리를 보아 오지 않고, 난봉 자식이 기생첩이나 떼어 들였더란 말인가…….’
영희는 이런 생각을 속으로 하고 혼자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하였다.
건넌방에서 동으로 벽 한 겹만 격한 사랑에서는, 중얼중얼하는 소리가 어느 때까지 끊지지 않더니, 나중에는 꽥꽥 소리를 지르는 것이, 신부가 앉았는 이 방에까지 커닿게 들린다. 수모는 참다 못하여,
“어디 좀 나가 봐야!”
하며 발딱 일어나서 촐랑거리며 또 나간다. 사랑 편은 다시 잠잠하고 안에서들만 여전히 법석이다. 부엌에서는 무엇을 차리는지 한참 부산한 모양.
……조금 있더니 누구인지 사랑에서 황황히 들어와서 수군수군하는 기척이 난다. 주인 마님 이 뒤따라나갔다. 아마 마님께 영감님을 달래라는 모양이다. 무어라 하는 소리인지 사랑에서는 주인 마님의 소곤소곤하는 소리만 나는 것 같다.
신부는 별로 낭패될 것은 없으나, 아무갯집 색시는 신식이기 때문에 폐백을 안 드렸다는 것과 달라서 못 드렸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실없이 심사가 나
지 않을 수 없다.
별안간 후당퉁탕하며 미닫이 여는 소리가 사랑에서 난다. 안손님은 이때껏 재껄대던 소리를 뚝 그치고 사랑 쪽으로 귀를 기울이며 물끄름말끄름들 서로 치어다만 본다. 영희도 숨을 죽이고 동정만 살피었다.
“쾅 !”
하는 마루를 디디는 소리가 조용한 밤을 깨뜨린다.
“……옛, 망할놈들, 조상두 모르고, 제 집구석을 내버리고 호 호텔이 다 무어야? 이리구 집안이 잘 잘 되겠니 !”
막걸리 동이나 없앤 듯한 거센 목소리다. 아마 이것이 시아버지의 목소린가 보다. 손님들은 무슨 구경이나 난 듯이 우으들 뜰로 내려가 사랑문 밑에서 기웃거린다. 또 한참 잠잠하고 사랑 뜰에서 무어라고 수군수군 하는 소리가 나더니, 인력거를 불러 오라는 앳된 소리와 ‘그만두어라 그만두어 !’ 하는 거센 소리가 엇매껴 난다. 잠깐 잠잠하여졌다. 그예 영감은 걸어서 어디로인지 나가고만 모양이다. 구경을 나갔던 사람들은 웬 셈인지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한 얼굴들이다.
여러 손님들에게 옹위가 되어 들어온 시어머니는 아랫입술을 악물고 마루 끝에 걸터앉는다.
“……그것두 무슨 산소 탓이지, 그저 트집만 잡으려구 판을 차리는 성미가 무슨 부어 터져 죽을 성미야……. 신식으로 하였든 호텔에 가서 자든 젊은것들의 일생의 행락이니, 저희끼리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으면 고만이지, 한두 살 먹은 어린애람?…… 어떻든 자기 할 도리만 차려서 이리이리 하라고만 일렀으면 채례를 지내든 폐백을 드리든 할 것을 이게 무슨 꼬락서니람.”
영감을 붙들려다 못 하고 지쳐서 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으나, 난가가 된 이 모양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좋을지 민망하기도 하고, 또 무어라고 손님들에게 변명을 하여야 좋을지 몰라서 두서를 차리지 못 하면서도 치받쳐오르는 분을 참지 못하여 한바탕 푸념을 시작한다.
“그렇구 말구요.”
“그야 구식 양반은 무두 다 못마땅해하시는 것도 괴이치 않지만 너무 심하세요.”
누구들인지 이렇게 위로를 하며 연해 ‘그렇구말구요.’, ‘그렇다뿐예요.’ 하는 소리가 젊은 여자들의 입에서 장단을 맞추어서 나온다. 신부도 ‘그렇구말구요.’ 소리가 나오다 말았었다.
시어머니가 선을 본 것도 아니니 오늘이 처음이지마는, 영희는 벌써 시어머니의 선악을 알아차렸다. 지금 하는 말을 들으면 얼굴이나 목소리로 짐작한 자
기의 눈이 틀리지 않았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는 막연하게 안심 이 되기도 하여서 분한 생각이 풀리어 갔다.
신랑 형제는 대문 밖까지 아버지를 따라나가다가 들어와서 뜰 한 구석에서 또 한참 수군거리더니 아우만 배웅을 가는지 모자를 쓰고 나가 버렸다.
어쩐지 집안이 수성수성하여 손님까지 어색한 듯이 별로 입을 벌리려는 사
도 없이 얼빠진 것같이 멀거니들 앉았다.
축대 위에 우두커니 섰던 신랑은 어머니 앞으로 오더니,
“어서 올라가시지요. 되어 가는 대로 하는 수밖에요……. 하여간 너무 늦기 전에 우리는 가야 할 텐데…….”
하며 자기부터 마루 위로 올라와서 열어제쳤던 건넌방 문을 연해 기웃거리며 서성댄다. 신랑은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모르거니와 이러한 광경이 ,그리 불쾌할 것도 없고 걱정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신부에게 무어라고 변명을 해야 좋을지 그것이 무엇보다도 난처하고 열없은 일 같았다.
수모는 신부 앞에 앉아서 하는 거동만 보다가, 발딱 일어나서 마루로 나오더니 마님의 귀에다 입을 대이고,
“어떻게 할까요. 신부는 어데로 가시나요?”
하고 묻는다.
“응, 무어든지 멕여야 보내지……. 어서 신부상부터 차려라.”
시어머니는 이렇게 한 마디 일러 놓고 올라와서 건넌방으로 들어간다. 신랑도 따라 들어갔다.
“어서 앉아라 앉어. 좀 늦었지만 시장할 테니 무어나 든든히 먹고들 가거라. 너의 시아버지께서는 공연히 객기가 나셔서 가셨지만, 네게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어떻게 알지 말고 안심하고 앉았거라.”
시어머니는 진정으로 가엾은 듯이 이렇게 신부를 위로하고 나서 사돈 아가씨를 건너다보며,
“댁에 가건 어머니께 얼마나 섭섭하시냐고 하시구, 시아버니 되시는 이가 급한 볼일이 계셔서 급작시레 시골로 다시 떠나시느라고 폐백을 물려받으시게 되었다고 말씀해 주슈.”
하며 모두들 서 있는 게 불안하다는 듯이,
“고만 앉아라.”
하고 나가 버렸다. 이 시어머니란 이는 서울서 자라난 이니만큼 앞뒤 인사가 휘동그랗다.
시어머니가 나간 뒤에 신부 일행 이며 수모까지 앉았으나, 프록코트를 입은 신랑은 무슨 말을 할 듯하며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찌르고 윗목에서 여전히 빙빙 돌아다니다가,
“퍽들 곤하실걸요.”
하며 우뚝 서서 아랫목을 내려다본다. 미안하다는 자기의 심중을 어떻게 발표하여야 좋을지 몰라서 애를 쓰다가 겨우 말끝을 붙들었으나 그 다음을 잇대일 말을 얻지 못하여 또다시 어색한 듯이 벙벙히 섰다.
“아 참 오늘은 의외에 장하였어……. 회사의 K 전무도 오고 총독부에서는 H
과장두 왔드군.”
별안간 불쑥 무슨 생각이 났던지, 신랑이 이런 소리를 하였다.
이 사람은 올 봄에 일본에서 공과 대학을 졸업한 뒤에 돌아오는 길로 어떤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만선 건물 주식 회사(滿鮮建物株式會社)의 전속한 기사(技師)가 되는 동시에 총독부 토목과(土木課)의 촉탁을 얻어 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전무니 과장이니 하는 것은 자기가 근무하는 데의 상전네들이 왔더란 말이다.
영희는 역시 잠자코 앉았으나 회사의 전무 취체역이나 토목과장이 왔다는 것이 그리 재미없고 구석없는 말처럼 들리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P 후작은 오늘 마침 ○○회에 총회가 있어서 못 온다고 비서를 대행을
시켜 보냈더군.”
하며 또 한 번 신부의 눈치를 살피려는 듯이 영희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P 후작이란 말에 수모는 귀가 반짝 띄었던지 프록코트를 입고 비스듬히 선 신랑을 다시 한 번 치어다보았다.
신부의 동생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앉았다가 옆에 앉았는 들러리 선 동무
를 꾹 찌르며,
“얘, P 후작이 누구냐?”
하고 귀에다 대고 묻는다.
“왜 그 동상전이니 횟갓이니 하구 놀리는 유명한 P 후작이 없니? 회장을 한
다스인가 두 다스인가 가졌다는.”
“무어? 동상전? 해해해.”
두 계집애가 소곤거리며 입을 막고 새재대기는 바람에 신부도 비로소 생긋한다.
“왜 동상전은요, 그래두 조선서는 현대의 일류 명사랍니다.”
하며 신랑도 허허 ― 웃었다.
“참, 동상전이라니 오늘 저녁 엔 동상례(東床禮)가 톡톡히 있겠습니다그려?”
수모가 한 마디 새치기를 하며 색시와 신랑을 번갈아 본다. 그러나 모두들 벙벙히 대꾸가 없다. 동상전이니 동상례니 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정쩡한 눈치다. 신랑은 얼핏 말을 돌려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하여 두리라는 듯이,
“……참 전보가 한 백여 장 왔드군.”
하고 피차에 아는 친구들의 이름을 주워섬기었다.
이때의 영희 앞에 선 신랑의 태도는, 마치 전무 취체역이나 지배인 앞에서 보고를 하는 비서역 같이도 보였다. 좀더 속된 비유를 허락한다면 여왕 앞에 국궁하고 섰는 궁내 대신이라는 것이 그들의 복색으로 보아서 가장 알맞을 것도 같다.
영희는 전보가 많이 왔다는 말에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그 전보를 지금 여기 가져왔에요?”
“가져왔겠지요? 좀 보시랴우?”
하며 신랑은 하인을 불러서 사랑에 나가서 전보틀 들여오라고 분부를 하였다……. 신랑은 비단 남보자기에 꼭꼭 싼 조그만 보퉁이를 받아들고 앉더니 손수 풀어서 전보 한 뭉치를 영희 앞에 내놓았다. 계집애들은 머리를 맞대고 신부의 동생의 손으로 한 장씩 넘기는 것을 일일이 이름을 불러 가며 들여다본다. 알 사람 모를 사람 아닌게아니라 꽤 많았다. 영희는 눈을 깜짝거리고 골독히 내려다보고 앉았다가 한중턱쯤 내려가서 홍수철이라는 이름을 듣더니 귀가 반짝하는 듯이,
“응……?”
하고 그 전보를 손으로 누르고 성명과 본문을 다시 한 번 보고 고개를 들었다.
이것을 옆에서 보고 앉았던 신랑은,
“아, 참 홍군도 전보를 했드군.”
하고 좀 덜 좋은 기색이면서도 태연히 웃음을 띠우며 신부의 얼굴을 치어다본
다. 홍수철이란 영희의 일생에 잊지 못할 사람의 동생이다.
3
홍수철이의 축하 전보가 그다지 반가워서 영희가 그렇게 유심히 찾아내어 들여다보는 것은 아니다. 청첩을 띄울 때에 수철이에게도 보낸 것을 생각하고 혹시 인사치레로라도 축전을 하였는가 하는 호기심으로 찾아보았을 따름이요,
또 전보를 친 사람도 보통 하는 사교상 의미로 친 것일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나 영희는 그 전보를 보고 새삼스레 가슴이 선뜩하면서 무슨 납덩어리 같은 것이 뱃속에 가라앉는 것 같은 것을 깨달았다. 다른 사람은 ‘축 가례’라고 보통 쓰는 대로 하였고, 혹은 ‘기쁜 이 날을 비움’이라고 한 것도 있건마는 수철이의 전보는 별다르게, ‘행복의 첫걸음을 튼튼히 디디시옵기를 비옵’이라고 일본말로 기다랗게 쓴 것이 무슨 뜻이 있는 것같이도 보였다. 진실한 교인인 수철이가 실없는 수작으로거나 혹은 비웃는 뜻으로 그런 것이 아닐 것은 영희도 짐작은 하지만 어쩐지 보고 볼수록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오금을 박는 것 같다는 객쩍은 생각도 들었다.
이태 전에 언젠지 수철이더러,
“내 예술적 생명을 도와주겠다는 열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쫓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혹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결혼 생활이란 단념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남자도 없을 것이요…….”
라고 이야기할 제,
“자기를 믿는 사람처럼 또 잘 자기에게 속지 않을지요.”
하며 똑바로 쏘듯이 치어다보던 그 눈을 지금 영희는 다시 머릿속에 그려 보지 않을 수 없다.
“자기를 믿는 사람처럼 또 잘 속는다.”
고 한 수철이의 예언이 들어맞은 오늘날에, ‘행복의 첫걸음을 튼튼히 디디시옵기를 비옵’이라는 축사를 보낸 것은 자기 딴은 아무 의미 없이 한 말인지 모르지만 영희에게는 또 다른 어떠한 예상을 가지고 한 말같이 생각되었다.
‘더구나 행복의 첫걸음이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행복을 위하여 결혼한 것은 아니다. 나의 행복은 3년 전에 벌써 나를 걷어차고 달아났다. 물론 순전히 이기적 동기로 결혼을 하기는 하였지마는 결단코 행복만 바라고 한 것은 아니다.
사랑의 날개가 득힐 때에 나의 행복에는 벌써 좀이 먹었었다. 그러나 좀먹은 행복이 다른 사랑으로 회복될 수는 없다. 다만 예술의 힘에 매달릴 지경이면 어떠한 정도까지는 회복되겠지마는, 그러나 예술이 밥은 먹여 주지 않는다. 하니까 지금이라도 부모나 형제가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하루 세 끼씩 먹여 준다하면 결혼할 필요는 없어지겠지…….
저편의 사랑을 받아 주는 것은 행복은 못 되는 경우라도 유쾌한 일이요, 또 신성한 의무다. 그러나 사랑을 받아 주는 대신에 밥을 먹여 달라는 것은 이편의 권리다. 결국에 사랑을 판다는 말이나, 돌려 생각하면 결혼도 생활의 한 방편이 아니냐. 경제적 독립을 못 한 오늘의 여자로는 조금도 불명예할 것도 없고 불유쾌도 없다. 물질의 보수가 있는 사랑을 바치고서, 정신적 보수가 있는 예술을 이편에서 사랑하는 것은 이기주의라 할지 모르지만 아무 모순도 없고, 이것이 아마 제일 현명한 살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 영희에게는, 행복의 첫걸음을 튼튼히 걸으라는 둥, 결혼 생활이 행복스러우리라는 수작은 주제넘은 소리 같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술까지가 자기를 걷어차고 돌보아 주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두 가지 길밖에 없을 것이다. 자살이냐 그렇지 않으면 사랑의 대상을 이성에게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잠잠히 가라앉는 피가 다시 뒤끓어날 때의 말이다. 예술이라도 피가 잠이 들어서야 예술다운 예술을 낳을 수는 없겠지마는, 예술에도 온전한 생명을 바칠 수가 없었고, 사랑의 대상을 구하려는 기력조차 없다 하면, 산송장이 되고 말 것이다.
영희는 이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이어 나가다가 깜짝 놀라며 미안하듯이 신랑을 치어다보았다……. 신랑은 마주 치어다보며 빙긋 웃는다. 신부도 의미 없이 따라 웃었다. 그려나 신랑의 눈에는 무슨 불안을 가지고 신부의 눈치를 살펴보려는 기색이 역력히 보이었다.
그 순간에 영희의 머리에 남아 있는 수철이의 형의 방그레 웃는 모습과 머리가 기닿게 자라고 눈이 움푹 패인 해쓱한 상판이 겨끔내기로 1ᅟᅮᆯ똥같이 떠올랐다 꺼졌다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영희가 순택이를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또 자기 남편으로 섬기는 것을 조금치라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때는 도리어 감사한 생각이 불현듯이 일어날 적도 있다. 그러나 감사하다는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순택이가 불쌍하다 가엾다는 생각이 뒤를 대어서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므로 그 사랑은, 감사하다 가엾다 불쌍하다는 감정에서 나오는 사랑이요, 가슴에서 솟아나오는 뼈에서 우러나는 피의 방울방울이 끓어오르는 사랑은
아니었다. 영희의 영혼은 순택이의 영혼 속에서 살 수 있어도, 영희의 영혼 속에 순택이의 영혼이 파묻힐 수는 없다. 그러나 그 대신에 순택이의 세계에는 영희가 들어갈 수 있지만 영희의 세계에는 순택이가 한 발자국도 들여놓을 수가 없다. 영희에게 자기밖에는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자기만 혼자 알고 혼자 낙을 누릴 세계가 있다. 예술의 세계이다. 하기 때문에 영희는 결혼 생활로서 챌 수 없는 불만족을 자기 세계에서 챌 수가 있는 대신, 순택이는 영희를 독점하였다는 데에 만족을 느낄 따름이다. 순택 이에게 대한 영희는 자기의 전체다.
영희가 없고는 자기도 없고 영희가 없는 데에는 다른 세계를 또다시 생각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영희는 순택이를 가엾다고 동정하고 고맙게 생각하며 또한 이것이 순택에게 끌리는 첫째 이유다. 만일 순택이가 영희의 모든 시험에 순종하고 거진 모욕에 가까운 짓궂은 놀림을 잠자코 참을 뿐 아니라, 그러면 그럴수록 열렬한 애정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만일에 순택이의 가정이 넉넉지 못하다거나 순택 이의 사회적 지체가 보잘것 없거나 하였더라면, 영희는 어떠한 젊은 문학자나 화가나 그렇지 않으면 음악가 같은 종류의 청년을 골랐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순택 이의 열심은 영희를 마침내 정복하고야 말았다. 그야 영희의 생각대로 말하면 자기가 순택에게 정복된 것이 아니라, 순택이가 자기에게 정복된 것이니까, 영희는 순택에게 대하여는 절대의 패권을 가진 왕자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이 감격에 넘치는 생활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할 지경이면 누가 승리를 하고 누가 정복이 되었든 간에 영희는 결혼 생활에서 행복의 샘인 감격을 느낄 수 없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순택이와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설사 예술의 친구를 택하였다 하더라도 취미는 맞을지 모르나 반드시 감격에 찬 생활을 얻으리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것이 순택이의 탓도 아니요 자기의 죄도 아닌 것은 영희는 잘 안다. 만일 탓을 한다면 실연이라는 모진 서리뿐이다.
그러나 영희 자신은 자기의 청춘을 영원히 시들어 버리고 말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입으로는 ‘연애란 일생에 한 번뿐이지 두 번씩은 없는 것이다.’ 하기도 하고, ‘누가 행복을 얻으려고 결혼을 했나 !’ 하며 변명을 하면서도 순택 이와의 결혼에서 무엇이든지 얻으려는 희망이나 예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사건 뒤 ― 실연의 서리를 맞은 뒤 ― 의 영희는, 한때 예술을 위하여 결혼은 안 한다는 생각이 없지 않았고, 음악 공부 이외에는 모든 것이 심상하고 시들하였던 시절도 있었다. 그러나 자기 역시 이렇다고 꼭 집어 낸 수 없는, 말하자면 소증 난 사람처럼 무엇을 먹고 싶다는 분명한 식욕이 동하는 게 아니언만 공연히 허전허전하여 못견디겠다는 것 같은 욕망이며, 남에게 분명히 호소할 수 없고 그렇다고 시원스럽게 눈물이라도 쏟아 볼 수 없는 적막하고 애달픈 마음을, 예술의 힘만으로만은 위로할 수 없고 채울 수도 없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시집가려는 사춘기 처녀에게 보통 볼 수 있는 감정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야 영희에게 생리적 관계로 구슬픈 생각이나 지향할 수 없는 감정
이 없지도 않지만, 다만 성욕의 충동이란 단순한 이유가 시급히 결혼을 하도록
영희를 괴롭게 한 것은 아니었다.
영희에게는 예술에서도 얻을 수 없으며, 신앙에서도 얻을 수 없고, 그렇다고 단순한 성욕의 만족만으로도 얻을 수 없는 그 무엇에 주렸거나, 혹은 그 무엇이 있다가 없어진 마음 속의 빈 곳을 채우려거나, 또는 있다가 없어지기 때문에 생긴 쓰린 상처를 고칠 만한 무엇인지를 얻으려는 고통이었었다.
이것이 자기를 사랑하여 주던 운명이 인생에게 늘 높은 절정까지 받쳐 주었다가, 아무 기별도 없이 별안간에 땅 위로 뚝 떨어뜨려 놓은 것을 원망하면서도 또다시 한 번 받쳐 주기를 기다리며 애원하는 고통이다. 그러나 영희는 자기의 예술이 그렇게 하여 주리라고 믿고 바라면서도, 그 믿으며 바라는 바가 헛되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과 애절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운명과 인간에 대하여 한 번 더 인생의 상상봉까지 치받쳐 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영
희의 한층 더한 새로운 고통이 있는 것이다.
혹시는 정신을 가다듬어 밤가는 줄도 모르고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리거나, 원고지를 꺼내 놓고 붓대를 놀리고 앉았다가도,
“……당신은 참 정말 조선의 신흥 예술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시오. 조선이 가진 단 하나의 보배는 아마 당신이겠지요. 이겠지요가 아니라, 확실히 그러하리라고 나는 단언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장래에 남의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리라는 예언만큼은 확실한 일이겠지요.”
라고 격려를 하여 주기도 하고,
“……당신의 예술이 아침 햇살처럼 달아오를 때, 세계는 얼마나 놀랄까요……. 아, 나는 그날을 기다립니다. 그날의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을까요.”
라고 어린아이 수작 같은 소리를 열심으로 한 발 두 발씩 적어 보내며 칭찬을 하여 주고 조르고 하던 그―수철이의 형인 홍수삼이―의 말이 문득 생각날 제는, 살뜰히 살아서는 무얼 하겠느냐는 막다른 생각조차 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순정적이면서도 몹시 이지적이요 타산적인 영희는, 그렇게 쉽사리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릴 리는 없었다.
일생을 의탁할 만한 안온한 무풍지대를 찾으려 하였다. 수방석에는 못 앉더라도 뜨뜻하고 푹신한 자리를 고를 줄은 얄았다.
그리하여 3년 전에 영희를 땅에 내던진 운명은 이번에는 순택이를 영희에게 뽑아 주었다.
“행복의 첫걸음을 튼튼히 디디라구 ! 허허……홍군다운 소리로군.”
순택이는 홍수철이의 전보를 방바닥에 따로 내놓고, 영희가 이 부산통에도 감개가 새로운 듯이 무슨 생각에 열이 빠져 앉았는 눈치를 채고, 일부러 말을 걸며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영희는 그 말대꾸로 상끗 웃어만 보인다. 그 웃음은, 지금 자기는 홍수삼이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변명이기도 하였다.
“홍군은 같은 시내에서 왜 좀 오지를 않고 전보를 쳤을꾸.”
순택이는 죽은 홍수삼이와는 그저 안면이 있을 정도이었지마는, 그 아우 수철이하고는 나이는 틀려도 동경 있을 때 매우 자별히 지냈던 것이다.
여기에도 영희는 또 한 번 생긋 웃음으로만 대꾸를 하였다.
수철이가 오늘 같은 경사로운 자리에 안 나오고 전보를 친 그 본심을, 영희는 물론이요 순택이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다. 순택이는 문득 자기의 맏딸년이 오늘 결혼식장에 오겠다고도 하지 않고 여전히 학교에 간 것을 생각해 보고는 한편으로는 쓸쓸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홍수철이가 아니 오고 전보만 친 심사도 짐작되는 것이다.
“어서 그만 걷어치워라.”
영희는 방바닥의 전보지를 집어 주며 동생에게 넌지시 일렀다. 보려던 전보를 보았으니까, 다른 것이야 쓸데없어서도 그렇지만, 홍수삼이 생각을 잊어버리려는 것이다.
“어떻게 큰상인가 무언가 준비가 되었나?”
하고 그 김에 순택이는 마루로 나간다.
순택이 역시 자기의 전취와 의가 좋았더니만큼, 오늘 아침에도 학교에 가는 딸년의 뒷모양을 바라보며 생각이 났었지마는 지금도 첫번 장가가던 생각이 나서, 무어 그리 죽은 아내에게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로되, 불쌍하였다는 정도로는 문득문득 머리에 떠올라와서, 그것을 잊어버리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그런지 순택이는, 영희가 홍수삼이 생각을 하는 눈치를 보며는, 그리 좋을 것은 없으나 한편으로는 그럴 거라고 동정도 하고, 새 아내가 귀여운 마음에 시기라느니보다도 도리어 위로라도 해 주고 싶은 정반대의 관대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것은 순택이의 남다른 특별한 성격이랄지 나이 덕이라 할지 알 수가 없다.
신부 상을 차려 놓았다고 법석들을 하고 신부 일행을 마루로 끌어 내 가더니, 폐백은 제례하였으나 시어머니께부터 관례 절을 시킨다. 쓸데없이 되었던 수모가 이런 때 한번 씌어 먹자는 듯이 촐랑거리며 나서서,
“자 ― 신구식 섞어작으로, 면사포로 큰절 이올시다 ―”
하는 따위의 재담을 섞어 가며 신부의 겨드랑이를 부축하고 생전 해 보지 못하던 큰절을 시키고는, 잇달아 수없이 하는 절이 아마 한 시간은 걸렸다.
‘색시 노릇을 톡톡히 하는구나 !’
영희는 혼잣속으로 웃었다. 피로연에 가서 보고 온 손님들도 영희가 수모의 시키는 대로 다소곳이 참 정말 색시 행세를 하는 것을 보고, 이 색시가 큰상 받고 앉아서 수백 명 손님을 내려다보며 연설을 하던 그 색시던가? 하고 놀란 듯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들 섰다.
영희는 상 앞에 가서 앉으니, 얼찍지근한 다리가 노곤히 풀리는 것은 감칠맛
이 금시로 잠이 솔솔 올 것 같다. 피로연과 달라서 이 집에 모인 손님이란 손님, 뜰에 있는 하인까지 몰려들어 삼지위겸으로 통을 메우고 서서 음식 먹는 구경을 하게 되니, 영희도 혼인이란 대개 그런 것이거니 하는 짐작은 없던 것이 아니나, 막상 자기가 당하고 보니 부끄러울 것은 없다 해도 불쾌하기 짝이 없다. 구경감이 되며, 곁에 앉았는 동생이나 들러리 선 계집아이들이 가엾다.신랑― 남편조차 구경꾼의 한 사람으로 한 귀퉁이에 싱글싱글 웃고 우두커니 서서 구경을 하고 있을 모양일 거니 이런 일도 있나 싶었다.
‘음식 먹는 취재를 뵈다니…….’
영희는 동물원의 원숭이 울 앞에 구경꾼이 몰려서서, 던져 주는 빵을 먹는 원숭이의 형상을 머리에 그려 보고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래도 영희는 옆에서 수모가 시중을 들며 권하는 대르 후룩후룩 국수도 먹고 편육이며 전유어며 넓적넓적 먹었다. 아까 피로연에서는 좀 홍분이 되어서 그야말로 색시처럼 젓가락을 드는 체만 하였기 때문에 시장도 하거니와 부끄러울 것이 무어 있느냐고 천연히 먹을 대로 먹었다.
‘이 집이 내 집인데 ! 내가 주인인데…….’
이러한 버젓한 생각도 있어서 그렇겠지마는, 그렇다고 통을 메고 서서 구경들을 하는 것이 못마땅하여 너희들 좀 보라는 듯이 한술 더 떠서 먹고 싶지 않은 것까지 쩌덕쩌덕 먹을 영희는 아니었다.
시어미니까지 옆에 와서 사돈 아가씨들을 권하는 길에,
“이런 날은 배곯는다. 부끄러워 말고 찬찬히 많이 먹어라…….”
하고 권하니까 영희는 가만히,
“어머니두 좀 잡수세요.”
하고 서로 권하였다.
“숫기두 좋다 !”
누군지 구경꾼 속에서 이런 수리를 속삭이는. 것 이 영희 귀에도 들렸으나, 며느리로서 시어머니께 권하는 것이 무에 잘못이냐고 영희는 마음대로 놀려 보라고 생각하였다.
상에서 일어나서 안방으로 데려들인다. 순택이는 아랫목에 혼자 앉았다가 웃
으며 자리를 비킨다. 안방 구경이 처음이다.
이게 내 방이란 생각을 하며 휘 ― 돌려다보다가, 수모가 앉히는 대로 아랫목에 앉으며,
“그거 뭐예요. 우리가 함께 주인이 되고, 손님들도 쭉들 같이 상을 받게 해서 버젓이 절차 있는 잔채답게 하거나, 피로연을 했으니 두 번씩 벌이지 말고 그냥 저녁밥만 먹게 한다거나 할 일이지 마치 동물원 원숭이 새끼나 몰아다 논 것처럼 손님들은 모여들어 구경이나 하구 이런 것부터 개 량해야지…….”
하고 불평을 속삭이니까 순택이는 껄껄 웃으며, 말을 틀어막느라고 손짓을 하며 나가 버린다. 이것 저것 개량, 개량 하고 주장하여 오던 영희니만큼 자기의 혼례가 이 모양으로 아무것도 개량하자던 보람이 없어진 것이 분하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4
어젯밤에 그럭저럭 열 시가 넘은 뒤에 호텔에 와서도 두 시를 치는 것을 듣고서야 겨우 잠이 들었기 때문에 오늘 식 전에는 사지가 느른하고 곤하지 않은 게 아니지만, 영희는 해가 돋을까 말까 할 때에 벌써 일어나서 부스럭거리며 치장을 차리기 시작하였다.
순택이도 잠이 깊이는 못 드는지 얼마 아니되어 부스스 일어나 앉더니,
“지금 몇 시길래 왜 이렇게 부지런해 ?”
하며 잠이 깬 눈으로 경대 앞에 앉았는 영희를 건너다본다.
“그럼 어떡해요. 아침 차로 떠나려면 일찍이 서둘러두 될까 말까 한데 이 집
저 집 다녀가진 않나요 !”
영희는 머리를 만적거리던 손을 잠깐 멈추고 엷게 화장한 좀 보삭보삭한 얼굴을 이리로 돌리며 웃어 보인다.
“글쎄, 오늘 떠나는 건 좋겠지만, 대관절 어데로 간담? 몇 시 차루?”
“그건 내게 맡기시지 않었에요?”
“허허허, 아무리 맽겼기루 갈 데를 정하는 것만 맽겼지 누가 새끼에 맨 돌맹이처럼 끌고 다니라구 내 몸뚱어리까지 맽겼나 뵈 !”
“하하하…… 글쎄 왼 밤새도록 조르시고 그래도 부족해서 첫 새벽부터 이리슈? 세 시간만 참으면 금세루 아실 건 가지구 내 참, 참을성두 없으슈.”
영희는 어리광 비슷하게, 그러나 이렇게 달래듯이 말막음을 하고 일어나서 남편의 양복을 주심주섬 집어다가 이불 위에 차곡차곡 놓는다.
순택이는 영희의 하는 거동을 손 하나 놀리는 조그만 곡선까지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눈으로 쫓으며 앉았다. 전에 못 보던 딴 영희, 딴 사람같이 보였다.
‘이 계집애가 인제는 내 계집으로 아무 꺼릴 것 없이 잗단 시중까지 들어 주는구나 !’
하는 생각을 할 제 새삼스럽게 반갑고 기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바라고 바라던 소원이 불시에 성취되어서 마음에 든든하기도 하며 그 성공이 너무도 분명한 일이기 때문에 도리어 신기하고 의심스러운 것과 같은 심정도 섞여 있었다.
“어서 그만 일어나세요. 벌써 여섯 시가 넘었는데요 !”
영희가 머리 치장을 마치고 재촉을 하면서 남편의 곁으로 와 섰으니까, 순택이는 이때까지 느껴 보지 못한 은근한 애정이 일어나서 영희의 손을 끌어 앉히고 이마로 떨어진 머리카락을 살금살금 쓰다듬어 올려 주면서 생글생글 웃고 앉았는 영희의 얼굴을 귀여운 듯이 코가 맞닿도록 들여다보다가,
“어디루 갈꾸?”
하고 신혼여행 갈 의논을 다시 꺼냈다.
영희는 자기가 계획한 데가 있으니 잠자코 따라나서기만 하라기에 순택이는
아무래도 좋다고는 했지마는, 그래도 그렇지 않았다.
“글쎄 내게 맽기시기루 하셨지 않았에요. 염려마세요.”
“그러지 말구, 우리 동래 온천에 들렀다가 일본까지 건너가 볼까?”
벌써부터 생각은 있으면서도 돈이 너무 들 것이 무서워서 감히 발론을 못 한 것이었으나, 이렇게 마음이 흡족한 판이라 큰 마음 먹고 말을 꺼내고 말았다.
“정말? 그럼 이왕이면 우리 동경까지 갈까?”
조금만 어렸더면 손바닥을 치며 강중강중 뛸 듯이 반색을 하는 것도 남편에게는 좋았지마는 지난 봄까지 1년 넘어를 두고 사랑을 속삭이며 헤매이던, 사랑의 보금자리, 사랑의 고향을 순례해 보고 싶다는 자기의 뜻을 알아채고 반색
을 하는 양이 더 좋았다.
“허지만 돈이 너무 들지 않겠어요? 인제 살림두 해야 하구 돈이 여간 들지않을 텐데 !”
이런 실제적 타산을 하는 것도 영희다운 점이었다.
그는 살림이라는 것을 모르는 다만 예술가만이 아니었다.
“그두 그렇지만 뭐 일생에 한 번 쓰는 건데…….”
영희가 돈 걱정까지 해 주는 것이 기특하여서도 순택이는 동경행을 꼭 실행하고 싶었다. 아까울 것이 없었다.
“그럼 어쨌든 내게 맽기세요.. 프로그램을 정하고 보고만 할 거니 따라나서세요.”
“그래, 그래, 아무려나 잘 알아 해요…….”
하고 기지개를 커닿게 켜다가,
“제기랄! 우리 어렸을 때는 부창 부수(夫唱婦隨)라고 배웠더니 어째 지아비 부자(夫字)와 메누리부(婦)자를 바꾸어 놓아야 할까 보다 ! 허허허.”
하고 순택이는 커닿게 웃는다.
영희도 따라 웃다가,
“왜 깔구 앉을까 봐 무서우신 게로구려. 부창 부수(夫唱婦隨)나 부창 부수(婦唱夫隨)나 둘러치나 메치나 마찬가지구먼. 가만히 계서요. 그런 잔일이야 비서가 영등같이 해 드리는 대로 응응 그러냐고 따라오시는 것이지…….”
“동경으로 가자면 준비도 있어야 하구, 어차피 오늘은 못 떠나겠군.”
순택이는 세수를 하고 수건질을 하면서 옷을 부리나케 갈아입고 벌써 가방을 꾸리고 섰는 아내의 뒤에다 대고 말을 붙인다.
“왜요―? 지금 잠깐 두 집에 가서 인시만 여쭈고 나서면 그만 아녜요. 그리게 옷은 다 마련해 가지고 왔겟다, 이 짐들은 바루 정거장으.로 내보내 달라고 맽기면 그만이죠.”
벌써 어제 오늘 아침에는 떠날 채비를 차려 두었다가 가지고 왔던 것이다. 순택이도 그 이상 더 반대는 아니하였다,
무엇보다도 영희가 시집으로 가 있거나 친정에 가 있거나, 하루라도 색시 행
세를 하고 들어앉아서 색시 보러 움네 하고 모여드는 손님 틈바구니에 끼여 어수선하게 지내는 것이 싫다는 것이요, 그러한 아내의 기분을 짐작 못 하는 것도 아니거니와, 자기 역시 한시라도 둘이만 멀리 떨어져 가서 놀고 싶은 것이었다.
이른 아침에 자동차를 순택의 집에 들어가는 동구에 대니까, 동리 아이들은 또 구경이나 난 듯이 우우 모여든다.
정말 조선식으로 3일을 치른다면 이맘때쯤은 신랑 신부의 집에 문안 하인이며 전갈 하인이 오락가락할 때밖에 아니되었다.
불쑥 달려드는 신랑 신부를 맞은 신랑집에서는 깜짝들 놀랐다. 사랑에서는 아직도 오밤중이요., 안에서들도 아직 방도 치우지 않고 마루에는 음식상이 헤
갈이 된 채 널려 있고 끼리끼리 모여 앉아 재깔이는 빛에 젊은이들은 또 무엇을 부산히 차리는 빛에 역시 혼인집답기는 하나 정작 신랑 신부는 손님 같고 어서 빠져 달아나려고만 든다.
“이게 웬일이나. 그러지 않어도 둘째 애더러 어서 좀 가 보라고 하랴구 몇 번이나 깨야 술들이 취해서 천생 일어나야지.”
방에서 나와 맞는 시어머니는 이렇게 한 마디 하고 나서 며느리의 문안 절을 받았다.
“아침에 어델 갈 데가 있어서 좀 일찍이 동했지요.”
순택이는 영희가 절을 하는 옆에 서서 한 마디 하였다.
“어데를 간단 말이냐……. 아버니께 가랴구?”
“아 ― 뇨…….”
거기에는 그만 말이 막히었다.
“그럼 서울 안에서?”
이 마님은 신혼 여행인가를 간다는 말은 들었지마는, 아무리 호텔에 가서 잤기로 낯에는 단 하루라도 집에 붙어 있어 주었으면 혼인 잔치답게 하루를 재미있어 지내려는 작정이었다.
“어떻든 가만 있거라.”
하고 어머니는 영희를 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누님 절 받으슈.”
하며 문안 절을 시킨다. 영희는 50쯤 된 시꺼멓게 생긴 건장스런 부인 앞에 가서 절을 하였다.
“또 이 마님 뵈어라.”
한 번 더 앉았다 일어섰다.
“또 저 마님께…….”
영희는 어제 한 번씩은 다 받은 절인데 이거 뭐 이렇게까지 할 거야 있을까 싶었다.
“그 다음엔 저기 저 마님 !”
이번이 다섯 번째다. 영희는 일어서서 눈을 내리깔고, ‘또 인젠 없나?’ 하고 방 안을 살짝 돌려다보며 절을 얼마든지 하겠지마는 이러다가 차 시간 놓칠까 보아 애가 쓰였다. 그러나 시어머니는 깜짝 놀란 듯이,
“아 참 자네두 절받게.”
그럭저럭 여남은 번은 한 셈이나 그래도 두세 번째까지는 잠자코 받아 주기 때문에 손쉬웠지만 차차 갈수록 힘은 이편이 드는데,
“내야 무슨 절은 다 !”
하며 장황히 늘어놓으며 승강을 하는 게 성이 가시었다. 그러면 아주 받지를 않고 마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요, 지식이 많다는 음악가의 절을 받기가 황송하다는 것인지, 절하는 사람의 생색이나 내어 주겠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절하는 사람의 위아래를 훑어보며 앉았거나 섰거나 하고 결국 받기는 다 받고 만다.
절하기 좋아하는 처녀나 색시도 못 보았지마는, 더구나 스라소니같이 두 손길을 뻗치고 앉았다 일어섰다 하는 것은 영희와 같이 선머슴처럼 자라난 사람에게는 부모 생신이나 세배 외에는 질색이요. 좀 호된 노릇이다. 영희는 천연덕스럽게 시키는 대로 앉았다 일어섰다 같은 동작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면서도 차 시간은 바락바락 가고, 뱃속에서는 오만상이 나 찌푸리고 있다.
그러나 시어머니의 눈이 아무리 밝기로 새 며느리의 뱃속까지는 못 들여다볼 것, 더구나 새 며느리를 보고 절 시키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까딱하면 일가 친척 간의 시빗거리다.
“아무개넨 공부한 며느리를 얻었다구 절두 아니 시키드군 !”
하는 뒷공론이 돌기 첩경 쉬운 일이다. 하여간 새 며느리 절 시키는 것도 어제 오늘 시어머니가 하여야 할 큰 사무의 하나는 확실히 되는 것이다.
“인젠 상우례를 시켜야지.”
하며 영희를 마루로 끌고 나와서 세수도 아직 아니한 젊은네들을 이 사람 저 사람 닥치는 대로 불러세위 놓고 어느 때까지 벙어리처럼 소리 없이 앉았다 일어섰다 하게 한다.
영희의 절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마루로 나온 남편은, 느른한 기색으로 우두커니 한 구석에 섰는 엉희에게 다가서면서,
“그럼 늦기 전에 어서 가지 !”
하며 동의를 구하였다. 영희는 눈으로 대꾸를 하였다.
“그래 어디루 간단 말야?”
어머니는 나무라듯이 아들을 똑바로 치어다본다.
어머니뿐 아니라 집안 식구가 상하를 물론하고 무슨 번괴나 난 듯이 일시에 모두 순택이의 내외에게로 시선이 몰렸다. 뜰에서 국수를 씻고 섰던 계집 하인조차 손을 멈추고 대청을 올려다본다. 순택이 입에서 무슨 말이 떨어지나 분명히 듣겠다는 눈치다. 그러나 순택 이는 무어라고 대답을 하여야 좋을지 입이 좀체 떨어지지를 않았다. 실상은 신부례(于禮) 전이니, 자기 내외가 오늘 ― 결
혼한 이튿날 아침에 이 집에서 잠깐 나갔다가 들어온다는 것이 조금도 변될 일도 아닐 것이요, 어디 갔다가 오겠다고 분명히 대답을 한들 흉될 일도 아니건만 망단하여 입이 붙어 버렸다. 어제 할 잔치를 물려 하는 이날에 이 집에서 빠져나간다는 것이 화락과 단란을 깨뜨리는 것 같아 미안도 하고 무정스러운 것 같은 생각도 없지 않기는 하였다. 여러 사람이 섭섭해하며 입에 내어 말을 못해도 붙들었으면 하는 눈치를 보자 순택이는,
“그럼 내일이구 모레구 가지요.”
하고 주저앉고 싶지 않은 게 아니지만 영희의 의향이 어떠할지, 이 자리에서 바로 대고 물어 볼 수도 없고 틈바구니에 끼어서 오도 가도 못 할 지경이었다.
“글쎄요. 연일 돌아다니느라고 몸도 몹시 고단하고, 게다가 마침 회사의 일로 부산까지 출장을 나갈 일이 있기에 아침 차로 떠날까 하는데요 ― 그만둘까 하였지만 저쪽에는 벌써 전보까지 쳐놓았으니까……, 제 처는 본가에 가서 쉬라거나 데리구 가거나 되는 대로 하겠죠만…….”
순택이의 대답은 이보다 더 교묘할 수는 없었다. 영희도 자기 남편을 다시 한 번 치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밤차로 떠나렴.”
모친은 좀 역정을 내어보였다.
“몸은 곤한데 밤찻길이란…….”
순택이는 눈살을 잠깐 찌푸려 보였다. 사실 그렇기도 하였다.
“그래 아버니께는 언제 가서 뵈인단 말이냐?”
“곧 다녀올 테니까 오는 길에 내려가 들어가두 좋고, 그때까지 어머니께서 여기 계시면 올라왔다가 다시 날을 잠아 가지구 가두 좋겠지요.”
“에그 모르겠다. ……정 그렇다면 허는 수 있니 !”
이때껏 남의 말을 억제하여 본 일이 없는 어머니는 이에서 더 붙잡을 수도 없고 더구나 몸이 괴로워서 쉬러 간다는 데야 무어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어젯밤에 영감이 그 모양으로 떠나 버리고 또 오늘 꼭두식전부터 아들이 밥 한 술도 뜨지 않고 달아나는 것을 보니 섭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섭섭한 생각은 다만 잔치의 주인을 놓치기 때문에만이 아니다. 자식을 장성하게 길러서 장가를 들였다고 이때껏 한 집에 모아 놓고 재미도 못 보고 또다시 며느리를 보았다 하여야 저희는 저희대로 딴 세상에서 떠도는 것 같은 것이 말할 수 없이 호젓하고 섭섭하다는 늙어 가는 어머니의 사랑에서 나오는 깊은 설움이다.
가방을 들고 우중우중 나서는 것을 보고 어머니는 음폭 패인 눈이 글썽글썽해지며,
“그럼 며칠이나 있다 올 테냐? 아무쪼록 몸들이나 성히…….”
“네 ! 아무쪼록 속히 오죠.”
순택이의 목소리도 좀 떨리는 것 같았다. 영희 역시 시어머니의 언짢아하는 양을 보고 어깨가 오그라드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에 거리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대문 밖으로 나와서 자동차에 올라앉은 영희는 무슨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같이 시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난 절 한 번만 하면 곧 빠져 나올 줄 알았지 ! 그 동안 한 시간이나 넘었네 ! 바루 가도 좋지만 집에 잠깐 들러서 ― 가지구 갈 게 있으니까.”
“무얼?”
얼빠진 사람처럼 멀거니 있던 순택 이는 입을 벌렸다.
“아무것도 아녜요.”
하며 영희는 얼른 말을 돌려서,
“양복을 몇 벌 가지구 가려구요¨”
하고 대꾸를 하다가 남편이 좀 서운한 듯이 풀없이 잠자코 있는 것을 눈치채자,
“……누구보.다도 어머니가 가없으셔! 퍽 섭섭해하시는걸……. 하지만 참 당신이 그렇게 말씀을 영절스럽게 잘 꾸며 대시는 건 처음 봤어. 난 얼굴이 쳐다
뵈입디다. 하지만 난 안 속지. 출장 갑네 하구 기생집에나 파묻혀 계시거나 해
봐라. 하하하…….”
하며 위로삼아 칭찬을 한다. 순택이도 허허 웃고 만다.
영희의 집은 그리 떠들썩하지는 않았다. 일갓집 식구도 눈에 띄고 아침밥을 차리느라고 부산하였으나, 실상 신랑이 3일을 치렀다면 시집보다도 엉정방정 할 터인데 되려 조용하였다. 그러나 신랑까지 같이 온 데에는 반가우면서도 놀란 모양이다.
“아, 어떻게 이렇게 자네까지 왔나 ! 어서 올러오게, 그래 편히 쉬구?”
사위의 절을 받으면서 장모는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어머니 절 좀 많이 시키세.요. 하하하. 난 지금 또 절을 스무 번을 하구 왔는지 서른 번을 하구 왔는지 대리에 알이 다 배었을걸 ! 하하하.”
영희는 인제는 기죽을 편 듯이 깔깔대며 신랑을 놀리고 자기 방으로 쓰던 아랫 방으로 내려가다가 돌쳐서며,
“어머니, 오빠 ― 어디 갔에요?”
“왜 못 만났니? 벌써 호텔루 갔는데.”
영희는 못 만난 것이 되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오라비를 만나면 붙들릴 거요, 그럭저럭 하다가 계획이 틀릴 것 같아서다.
아랫방으.로 들어간 영희는 문을 닫고 부스럭거리다가 옷을 한 보퉁이나 꺼내 가지구 마루로 올라와서 오라비 가방을 빌려 차곡차곡 넣는다. 옷보퉁이 속에는 무엇인지 조그만 나무 상자 한 개가 있었다. 영희는 그것을 남의 눈에 띌까 보아 얼른 가방 속에 넣고 쇠를 채워 버렸다.
“그건 뭘 하구 앉았니? 어델 가니?”
어머니는 사위를 건넌방으로 들여다 앉히고, 아침 대접을 하려고 부산히 분별을 하고 있다가 돌아다보고 묻는다.
“지금 곧 떠나요. 잠깐 몸을 쉬러 간다고 하니까 나두 쫓아가려구…….”
“어디루?”
“부산을 간다니까 아마 온천이겠죠.”
“그래 지금 곧 간단 말이냐? 뭐나 먹어야 하지 않니?”
“떠날 시간이 30 분밖에 안 남았는데요. 배 고프면 찻속에서 먹죠…….”
어머니는 사위를 무엇이든지 먹여 보내려고 애를 쓰고 붙들려 하나 하는 수 없었다. 여기서도 좀 미안한 생각은 들었으나, 영희 내외는 뜰로 내려섰다.
어머니도 퍽 섭섭해하였다. 그러나 영희는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장모와 길닿게 인사를 하고 섰는 순택이를 재촉하여 앞장을 세우고 나가서 자동차로 들어갔다.
‘미친 년이라구 하시겠지만…….’
영희는 속으로 생각하며 그래도 서운하였다. 자동차의 뒤창으로 집 대문을 다시 한 번 획 돌아다보다가 어머니가 여전히 서서 바라보고 섰는 것을 보니 까닭없는 눈물이 핑 돌았다.
5
경성역에 나와 보니 승객들은 거진 다 들어가고 남은 시간이라고는 겨우 10 분쯤밖에 없다.
대합실에는 오라비가 호텔 안내자와 짐을 지키고 기다리고 있다. 술이 취해 잔다던 시동생도 눈에 띈다.
영희는 표를 급히 사 들고 남편의 것까지 함께 찍어 들고 나섰다.
“아, 이렇게 급하게 도망꾼이처럼 서두를 거야 있나. 난 때껏 안 나오기에 못 떠나려니 하고 짐을 가지고 들어가려던 판인데…….”
그러나 잘 가서 놀고 오는 것이 좋다는 듯이 별로 말리지는 않았다.
순택이는 동생더러 동경 가서 전보를 치거든 돈을 보내라는 부탁을 하고 찻간으로 들어갔다.
차에 올라앉으니, 전에 둘이서 한 차에 다녀 본 일도 한두 번이 아니나, 이렇게 부부로서 나란히 앉은 것이 희한한 것 같기도 하고 마음에 느긋도 하다.
“참 그런데 표는 어디까지 샀소?”
아까 자동차 속에서 영희가 중로에서 잠깐 내려서 다녀갈 데가 있다고 한 말을 생각하고 물었다. 이번 여행은 자기에게 맡기라는 통에 처가에서 떠날 제
여비 싼 돈뭉치까지 맡겨 버렸다. 또 그것이 한 재미이기도 하다.
영희는 오페라 박스에서 표를 껴내서 순택 이에게 웃으며 주었다. 순택이도 웃으며 받아 가지고 무슨 제비나 뽑아 가지고 펴 보듯이 큰 호기심과 기대를 가지고 천천히 돌려다보더니 실망한 낯빛으로 헤 ―하고 웃어 버린다.
“아, 이게 무어야. 그래 기껏 여기까지야? 허허허. 대관절 어디를 가겠기에……?”
영희는 여전히 방글방글 웃고 앉았다가,
“글쎄 가만히만 계서요.. 내가 매니 저 노릇을 하는 다음에야 실수는 없으니까.”
“글쎄…… 이리 가서 구경할 데 있을까?”
순택이는 연해 고개를 기웃거린다.
“이왕이면 대구까지나 갔으면 경주 구경 이라두 가는 걸…….”
“하하하, 가만 계셔요. 인제 깜짝 놀라서 아무렇든 잘 왔다고 하실 데를 모시구 갈 거니. 아침이나 잡수라 가십 시다. 아 시장하다.”
영희는 실없이만 굴고 웬일인지 지향하는 고장은 말하지 않는다.
식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리도 아직 준비가 못 되었다고 한 시간 후에 들어오라는 것을 그래도 시급히 만들라고 간청을 하다시피하여 분부를 하여 놓고 두 사람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우선 마실 것을 가져오게 하였다.
눈치 빠른 보이는 좋은 손님 걸렸다고 거행이 영등같다. 학생 시대에 다니던
거와는 이런 데도 기분이 다르다.
순택이는 사이다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맥주를 좀 먹어 볼까?”
하고 주문을 하였다.
“이거 웬일이세요. 술을 다 잡수시구?”
그래도 영희 역시 기분이 좋아서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밤 같았으면 자기도
맥주 한 모금을 마셔 보았으면 하는 충동도 난다.
“왜, 나두 기분이 좋을 때는 맥주 한 병은 먹는데…….”
영희는 남편의 이 말에 어쩐지 가슴이 선뜩하였다.
자기 역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지마는 지금 가는 데를 생각하면 자기 마음부터 컴컴하고 묵은 상처를 건드리는 것처럼 쓰리다. 남편의 그 기분을 깨뜨려 놓을까 보아 ― 깨뜨려 놓을까 보아가 아니라 깨뜨려질 것이 가없고 무슨 참혹한 일이나 하는 듯싶다.
맥주가 나왔다. 영희가 보이가 따르려는 병을 받아서 따르려니까,
“당신은 포도주 한 잔 하지. 왜 얼굴빛이 좋지 못하구 풀이 없어 보여?”
하며 포도주를 명한다. 순택 이는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웃으며,
“아, 오래간만에 좋군.”
하고 아내를 곁눈으로 돌려 다본다.
“쓰지 않으세요?”
영희는 속으로는 여전히 딴 생각에 괄렸다가 나오는 대로 대꾸를 한다.
“그 쌉쌀한 맛이 좋거든. 당신두 가다가는 쌉쌀한 맛이 있기에 좋단 말야. 사이다처럼 달큼하구 콕 찌르는 맛두 좋지만…… 알았어?”
하고 순택이는 아무도 없는 바람에 마음놓고 기롱을 붙인다.
“이 양반이, 보리밭에만 가무 취하시겠네. 맥주잔만 보구두 주정을 하시는 꼴이 !”
영희도 웃고 말았다. 영희도 포도주를 반 곱푸나 마시고 나니까 빈 속이 찌르르 하며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조용한 틈을 타서 지금 그 말을 꺼내 볼까?’
또다시 아까 생각으로 끌려들어가며 이런 궁리도 해 보았다. 그러나 모처럼 좋은 기분을 깨뜨리기가 미안하였다. 아까웠다.
‘실상 말하면 내가 무슨 남 못 할 짓을 한다고야 할까. 죽은 사람 무덤이라도 함께 한 번 찾아 주고 죽은 혼을 위로해 주는 게 좋지 않은가. 그게 인정이요 인사지. 그리고 아주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 피차에 좋은 일이요, 나도 마음의 짐을 떼어 버리자는 것이지요. 다음에는 자기 전실댁의 산소도 아이 데리고 같이 가면 그만 아닌가. 그건 고사하고 전실의 제사를 지내 주지 않나, 딸을 길러 주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하면 영희는 지금 자기가 배포먹은 일이 조금도 경우에 틀리는 것은 아니나, 그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요다음 기회로 밀까? ― 이런 생각도 하여 보았으나 자기가 이렇게 되고보니 한층 더 불쌍한 생각이 나서, 이 김에 어서 가 보아 주고 싶다. 백판 모르는 객지에다가 묻어 버리고 자식이 있나, 형제가 있대야 그 먼 데를 찾아갈 리가 있나, 자기가 죽기 전에 한 번 찾아 주면 이 세상에서는 다시 돌볼 사람도 없는 무연(無緣)의 백골이 되고 말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가고 말리라는 결심이 굳어졌다.
‘신혼여행은 그 다음부터지. 말하자면 이번에 찾아가서 영혼더러 이혼하자는 선언을 하고 오는 셈도 되는 거지.’
이렇게도 생각이 든 것이다. 어쨌든 수철이의 전보가 이 길을 불현듯이 떠나게 충동인 것이었다.
“그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남편은 첫여름 아침의 씩씩한 기운이 서려오는 듯한 들판을 차창으로 내려다보다가 힐끈 돌아다보며 무슨 말을 붙이려다 말고 빙긋 웃는다. 영희도 생긋해 보였으나, 열없는 듯이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아무튼지 기분이 좋지 않어 보여. 어서 가서 침대를 잠고 누울까?”
“내가 왜 어때요 !”
영희는 또 한 번 상긋해 보였다.
“고단해 그렇겠지만 아까 호텔서부터 무슨 걱정 있는 사람처럼 가다가다 왜 그리 얼이 빠져 앉었어?”
영희는 상 위에 놓였던 오페라 박스에서 거울을 꺼내어 들여다보다가 웃으면서,
“내가 그렇게 뵐까, 정말 그래요?”
하며 입으로는 변명을 하여도 얼굴은 더 발개졌다.
“글쎄, 내가 잘못 보았나? 허허허. 그까짓 소리는 그만두고 어서 저거나 마셔요.”
하고 옆에 따라 놓은 포도주 잔을 턱으로 가리킨다.
꼬챙이 같은 굽이 높다란 큰 유리 곱푸에 철철 넘는 빨간 포도주를 영희는 날씬한 하얀 손가락으로 모시듯이 살그머니 들어다가 볼그레한 입술에 대고 호르륵 마시고 나서는, 남편을 치어다보고 생긋 웃는다.
금시로 집어삼킬 듯이 눈을 똑바로 뜨고 치어다보며 앉았던 순택이는 터질
듯한 웃음을 참으며,
“어디 또 한 번 마셔 보아!”
영희는 하라는 대로 또 한 번 마시고 곱푸를 상 위에 놓았다.
“고만 하죠 ! 둘이 다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다간 장관일걸요……. 청도파(靑
蹈派)의 여자들이 오색주를 먹고 욕더미가 되듯이 조선에 청도파가 생겼다구 소문 나게 ! 하하하…….”
“뭐? 청도파?”
“아니, 일본에 청도파라구 있었죠? 신여성끼리 모인 회가요. 그런데 오색주를 먹었드랍니다.”
영희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하여도 그런 방면에 어두운 순택 이에게는 별로 흥미가 없을 줄 알고 말을 끊어 버린다.
“응, 나두 들은 법 한데 그래 어쨌드람.”
인제야 요리가 나왔다. 영희는 시중을 들면서 이야기를 한다.
“남자들하고 요릿집으로 떼를 지어 다니며 페퍼민트(서양 술 이름)를 먹느니 오색주를 먹느니 하기 때문에 한참 일본 사회에서 들썩했드랍니다.”
“미친년들이로군, 대개 어떤 것들이 모였었길래?”
“왜 미치긴요…… 술을 먹은 것은 한때 장난이니까 잘했든지 못했든지 말할
것 없지만, 일본 여자로는 자유 사상계의 선진자들이랍니다.”
“술 먹고 남자들하고 요릿집 다니는 게 선진이래서야 ! 허허허…….”
영희 역시 그 점만은 잘 했다고 생각지 않지만, 남편이 덮어놓고 비꼬는 것은 마땅치 않았다˛ 전에 홍수삼이 같았으면 같은 말이라도 무슨 재치 있는 들을 말이 나왔으련마는 하는 생각이 떠올라왔다.
두 사람은 잠깐 말이 끊기었다. 주기가 돌아가니까 나른해지기도 한 모양이다. 얼른 다른 이야깃거리가 생각나지도 않았다.
영희는 배가 고프다면서도 수프는 한두 술 뜨고 나서 바꾸어 들여온 음식 접시를 잠깐 들여다보더니 고명으로 놓은 파란 풀잎을 집어서 조그만 줄기를 뜯어 질겅질겅 씹으면서,
“난, 이 ‘파슬리’가 언제든지 좋드라 !”
하며 또 한 줄기를 뜯어 씹는다.
“어디, 난 늘 봐두 입에 대지두 않았지만.”
하며, 순택이도 집어서 두세 잎 씹어 보더니,
“글쎄, 이상한 향기는 있지만…….”
하고 억지로 삼켜 버린다. 사랑하는 아내의 뜻을 맞추려던 것이나, 비위에 맞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길래 좋단 말이지요.”
영희는 방굿 웃으며 고기를 낀 삼지창(포크)을 입에 넣었다.
“자동차의 가솔린 냄새가 구수하단 사람두 있드군마는…….”
“구수하진 않지만 그건 나두 싫지 않은데요.”
“허허허, 여기 X군의 친구 하나가 또 생겼군…….”
순택이는 영희와 이태나 사귀어 오던 동안에 발견하지 못한 일면을 인제야 발견한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어째서 그런 괴벽한 것을 좋다하누? 하는 의심이 들면서 영희의 얼굴을 치어다보았다……. 두 사람은 참 시장하였던지 잠자코 한참 떼그럭거리며 먹고 있다.
영희는 한 접시를 다 먹고 입을 씻으며,
“나 청요리는 암만 먹으려도 한두 점만 먹으면 느끼해. 양요리는 뭐든지 먹겠두구먼마는……. 조선서 학교에 있을 때 요리 제법을 좀 배우긴 했지만 지금은 다 잊어버려서 소박데기나 안 될지 지금부터 애가 쓰여요.”
“찬집 두지. 누가 애초에 ¡찬집으로 데려왔을 세야 소박을 하지. 허허허.”
아내가 음식 솜씨 없을까 보아 걱정하는 것을 보니, 순택이는 인제는 오래간
만에 ‘가정’을 가졌다는 안심과 기쁨을 깊게 느끼었다.
“하지만 제 손으로 만들어 먹는 건 아무리 잘 되었어두 맛이 없어…….”
“그럴 리야 있나. 웬만큼 되기만 한대두 그것처럼 재미있는 것은 없을걸…….”
“그야 내가 만들어 당신이 잡수면 좋을지 모르지만, 내가 맨든 것을 내가 먹
어 봐요?”
영희는 남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맛이 있다는 듯이 또 새로 가져온 접시를 벌써 비어 놓고 한 마디 대거리를 한다.
“말이 되는 말인가. 그래 화초 하나라도 자기가 만든 게 공력이 돈 거니만치 고와 보일 것이요, 그림 한 장을 그려도 그럴 터이요, 당신 같은 음악가두!”
“허지만 예술가는 자기 도취의 지경은 없에요. 자기 것, 자기가 만든 것에 만족하기는 좀처럼 어렵지요……. 제 뱃속으로 낳은 자식도 귀염 기는 하면서도 마음엔 아니 드는 수도 있고, 귀엽고 마음에 들면서도 남의 자식 잘난 것을 보면 부럽지 않어요?”
“아주 아이를 나 본 경험이나 있는 듯이 ! 허허허…… 하지만 저기 저애 같으면 이쁘기도 하고 마음에도 들겠지?”
순택이는 빙글빙글 웃으며 듣고 있다가 실없이 저편 좌석에 젊은 부부가 데
리고 들어와 앉았는 아이를 턱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영희는 가리키는 쪽을 힐끈 돌아보았다.
“참 이쁜걸. 몇 살이나 되었을꾸? 네 살? 다섯 살은 되었겠군 !”
“탐나지? 하나 갖구 싶지 않어?”
하며 순택 이는 눈웃음을 치며 영희를 들여다본다.
“별소리두…… 난 남의 아이는 귀여워도 가지구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지금 저런 게 생겼다간 큰일나게!”
“그야말로 내 손으로 맨든 음식은 맛이 없다는 수작이로군 ! 그러나 큰일날 거야 무어 있소 ! 안 생기는 게 큰일이지, 하하하.”
“참 그야말로 자식이 안 생겼다가 큰일날 게 뭐 있누. 절손이 될까 봐서요?
에렌 케이는 ‘모성애 ’나 ‘모성애의 회복’ 이니“ 하지만 참 정말 예술에 일생을 바치려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큰 걱정거리지,요. 그야 일본의 T 여사 같은 가인(歌人)은 원래 타고나기를 정력가로 생겼으니까 예외이겠지만…….”
“그러다가 아들이 없어 내가 첩이나 얻으면 어쩌려구? 허허…….”
순택이는 어디까지 실없이 대꾸를 한다.
영희도 따라 웃으며,
“제발 ! 작히나 좋을까, 몸이 가뜬하여지구……. 하지만 팔자란 게 있으니까
누가 알아요.”
하고 영희는 웃어 버린다. 남편에게는 그 말이 귀여웠다.
“손 보려고 첩을 몇씩 갈아 대는 놈은 있지만…….”
차를 마시며 순택이는 말을 다시 꺼내려니까, 영 희가 가로채어서,
“그야 언턱거리지, 구실이죠.”
하고 항변을 하려 든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마는, 생물의 본능, 결혼의 원리랄까 목적 이랄까 하는 점을 생각하면…….”
“모르겠어요.”
영희는 남편의 말을 막다가,
“대관절 나하구 결혼을 하신 동기가 뭐예요? 아들을 바란다면 하필 나 아니기루 세상에 동으루 여자가 있구, 미색을 탐한다면 기생 권번에서 점고를 하는
게 첩경일 텐데…….”
하고 영희는 깔깔 웃는다.
“어려운 문제로군. ”
하고 잠깐 답변에 궁한 모양이더니,
“눈의 안경이란 말이 있겟다 !”
하고 웃어 버린다.
영희도 마주 웃는다. 얼마쯤 만족한 웃음이다. 눈에는 새삼스러이 애정이 어리었다.
“이렇게 말하면 아무리 부부간이라도 좀 주제넘은 말이라고 생각할지는 모르지만, 영희의 그 재분을 살리겠다는 것, 그 다음에는, 아니 그리하자면, 그 실연이랄까 실연은 아니지만, 아무튼지 그 커다란 타격, 커다란 상처를 내 손으로 구할 수 있다면 구해 볼까, 그 마음의 상처를 낫게 해 볼 수 있을까 하는 동정 ― 말하자면 그런 것이 우리를 끌어다 댄 동기라 하겠지. 그러나 내가 구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요 애욕이 내게 더 강하고 컸던 것은 두말할 것 없지 !”
순택이는 점잖게 여기까지 이야기를 하고는 금시로 실없이 일본말로,
“이 승리를 얻은 득의 양양한 여왕아! ”
하고 삿대질을 살짝 한다.
영희의 눈에는 불이 확 켜진 듯이 이때까지 보지 못하던 부드러운 영채가 퍼져 나왔다. 정말 행복한 순간을 맛본 것같이 만족하였다.
언젠가 차차 혼담이 나오기 시작했을 때, 그런 의미의 편지를 받은 기억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지마는, 지금 남편이 된 오늘에 또 이렇게 성의껏 하는 말
을 들으니 고맙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자기가 그러한 계획을 가지고 이 길을 떠났으니만큼, 한층더 미안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희는 가만히 몸을 남편에게 실리며 상 아래로 남편의 손을 찾아서 따뜻이 가만가만 힘을 주어 쥐었다.
그러나 이 기회를 타서 그 말을 꺼낼 용기는 아니 났다. 그러기에는 아까운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자기의 계획을 버릴 수도 없다. 버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대전역에 내려서 순택이는 좀 얼떨하였으나, 그래도 호인이요 낙관적인 그는
덮어놓고 끌려 내린 자기 자신이 우습다는 듯이 한 번 껄껄 웃고 나서,
“홍 매니저 자 ― 인제는 어디로 간다?”
하고 아내의 처분만 바란다.
“황송합니다.”
영희는 실없이 대꾸를 하며, 우선 정거장 앞에 있는 일본 여관으로 남편을 모셔들여 갔다. 순택 이는 술에 못이겨 찻속에서 잠깐 자고 났으나, 그래도 잠이 덜 깨인 것 같아서 영희가 하녀하고 이야기하는 동안에 세수를 하고 왔다.
“그래 인제는 어떡하누? 예서 하루 묵을까?”
“목포까지 표를 사 오라구 하였지요. 여러 사람이 들끓는 온천이든지 되지 않는 명소란 데는 싫어요. 호젓하고 종용한 데를 찾아서 가는 게 좋지 않어요? 배두 타 볼 수 있구…….”
“글쎄, 아무려나. 매니저의 명령 대로 하지. 딴은 그렇기두 해.”
“그럼 어서 나가시지요.”
매사가 당하기까지가 어려운 것이지, 딱 당하고 보면 어떡하든지 길이 나서는 것 이다. 그렇게 궁리하고 애절하였어야 때가 되니까 옳든 그르든 비로소 결말이 나고 말았다.
순택이도 무슨 재미있는 계교가 나올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목포까지 간다’ 하니 우선 마음을 턱 놓고 나설 수가 있다.
영희 내외는 여관에서 나와서 차에 올라 한 구석에 채를 잡고 앉았다. 지방의 지선이 되어 그런지 2등 찻간에는 승객이 그리 붐비지 않았다. 피로가 걷힌 두 사람은 생기가 다시 나서 마음놓고 속살거리기도 하고, 특탁 치며 농도 할 수 있었다. 가끔가끔 하하하 하며 야단스럽게 웃는 소리가 왈가닥 뚜르르 하는 차 소리에 어느 때까지 높았다 꺼졌다 한다.
“어떤 여관에 가서 묵을까? 제일 좋은 데로 가지. 하지만 너무 떠드는 데는
재미 없어.”
순택이는 드러누워서 곁에 앉은 영희를 치어다보며 의논하였다. 그는, 아니,
영희 역시 재미있는 나그네의 첫날밤을 즐겁게 기다리지 않을 수 없다.
조그만 항구 ― 창망한 바다― 바다를 앞에 두고 높직이 선 한적하고 정결한 여관 ― 경치를 맘대로 바라볼 수 있는 종용한 방 ― 젊은 남녀의 굳센 포옹 ― 불길 같은 키스 ― 만단 정화의 속살거림 ― 넓은 바다에 뜬 기선 ― 그 속에서는 서로 의지하고 아끼지 않고는 사고 무친한 외로운 신혼 부부……, 영희를 마음대로 사랑하고 만족하도록 향락하겠다는 이 화락한 모든 꿈은, 목포로 가기 때문에 순택이의 머리에 맺어진 것이 아니라, ‘호젓하고 종용한 데를 찾아가는 게 좋지 않아요? ’라고 한 영희의 암시가 순택이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6
해가 넘어간 뒤에도 한 시간 이상이나 기다려서 목포에 도착하였다. 아침 열 시부터 이때까지 거진 10여 시간을 차 속에서 지냈건만 영희 내외에게는 결코 지루한 여행은 아니었다. 정거장 앞에 나와 인력거를 타고 영희의 지휘대로 세관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향하였다. 이 여관이라는 것은 이 지방에서 제일류라
고는 못 하겠지만 그리 더럽거나 불편한 데는 아니다. 영희는 3년 전에 우연히 이 여관 2 층에서 ‘사키창’ 이라는 하녀와 하룻밤을 새운 것을 생각하면 이 지방에 와서 이 집을 아니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문에 들어갈 때에 마침 주인 여편네가 사무실에 앉았는 것을 보고 영희는 속으로 반가웠으나 그 주부는 영희를 말끄러미 내다보면서도 자세 몰라보는 모양이다.
‘사키창’은 그저 있나? 하는 생각을 하며 하녀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서 제
일 좋다는 맨 구석 뒷방을 차지하였다.
“이왕이면 더 나은 데루 갈 걸!”
순택이는 여러 날 있을 듯이 매우 불평이 있는 모양이다. 영희는 얼빠진 사
람처럼 가만히 앉았다가,
“왜 으때요? 정 싫으시면 내일이라두 옮기지.”
하고 달래며 가방에서 자리옷으로 가져온 ‘유가다’를 꺼내어 주고 남편이 벗는 양복을 받아서 걸었다.
“……목욕은 어떡하실까요. 지금 마침 더워 오는데요.”
차를 가져온 하녀가 벗어 놓은 속옷을 개며 권하니까 순택이는 목욕탕으로 내려갔다. 영희도 목욕갈 채비를 차리느라고 옷을 벗고 역시 동경서 입던 자리
옷으로 갈아 입었다.
“여기 ‘사키창’이란 하녀가 있었지?”
자기가 벗은 옷을 개키며 하녀를 돌아다본다.
“사키창 말씀요? 그 아인 벌써 작년 봄에 그만두었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아세요?”
하녀는 상글상글 웃으며 호기심을 가지고 묻는다. 나이는 지긋한 모양이나, 상냥한 그리 상스럽지 않은 위인이다.
“응? 그만두었어? 그래 지금은 어디 가서 있누?”
영희는 무슨 까닭인지 얼마쯤 실망한 눈치다.
“부산에 나가 있지요. 그런데 어떻게 아세요?”
“한 3년 되지. 여기 와서 저 건넌방에서 같이 자기까지 하였는데……. 그래 지금은 무얼 하누? 시집갔나?”
“그렇답니다.”
하며 하녀는 샐쭉 웃는다.
“아 정말이야?”
영희는 따라 웃으며 캐어물었다.
“아네요, 좋지 않은 데루 갔답니다.”
하고 하녀는 또 의미 있는 듯이 웃는다.
“좋지 않은 데라니……. 그럼 유곽으로 들어간 게로군?”
영희는 좀 놀란 듯이 물으며 혀를 찬다. 하녀는 다만 웃을 뿐이다.
“그래 누가 그런 짓을 했드람?”
“말하자면 이 집 사람들두 고약하다구 하겠지만 당자도 당자지요. 벌써 열 다섯 열 여섯 적부터 바람이 삐었는데요. 계집애가 그리구서야 언제든지 그런 데로 가구 말지 않아요?”
하녀는 웬 까닭인지 꼬집는 소리를 한다. 그러나 영희는 가엾게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와 만나 본 우연한 연분으로든지 자기의 애인을 사랑하던 사람
이라는 점으로 보든지 오늘 이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사람이건마는 그 사람이 유곽의 갈보로 팔려 갔단 말을 듣고서야 섭섭하고 가엾게 생긱·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기의 정랑이 사라졌었기로서니 유곽으로 팔려 갈 ‘사키창‘이 아니 가게 되었으리라고는 말 못 하겠지마는 적지 않은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 지옥 같은 유곽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생각할수록 가엾은 일이다.
‘하나는 시집가구, 하나는 갈보가 되구…….’
이런 생각을 할 제 가엾은 것은 이 세상을 떠난 그 사람뿐이다.
영희의 자존심은 자기와 ‘사키창’을 대등하게 생각하는 것을 불명예한 일로 생각하지만, 이 세상을 떠난 그 사람을 생각할 제는 아무렇지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사키창’이 귀엽고 불쌍하였다.
“그런데 왜 사키창을 데리구 주무셨에요?”
하녀는 영희가 얼빠진 사람처럼 무슨 생각에 팔려 앉았는 것을 보고 웃으며
묻는다.
“옆방에 사내가 있기에 무서워서 그랬지. 그때만 해도 퍽 숫저웠어서.”
“호호호…… 목욕 안 가세요?”
하며 하녀는 일어섰다.
목욕을 하고 올라와서 이쪽 저쪽 창문을 열어제쳐 놓고, 내외가 밥상을 받을 때의 유쾌한 기분은 언젠지 동래 온천에 도착하였던 날 저녁을 생각해 하였다.
순택이는 먹을 줄도 모르는 맥주를 또 가져오라고 하여 영희에게까지 강권을 하였다.
“여행의 재미는 이런 때에 있는 거야.”
순택이는 천천히 맥주를 마시며 일본말로 이런 소리를 하였다. 영희도 하녀가 따라 주는 맥주를 반 잔쯤 받아서 놓으며,
“서투른 지방에 가서 여관에 드는 첫날같이 유쾌한 때는 없을 거야.”
하고 역시 일본말로 남편의 말을 받았다. 하녀와 섞여서 수작을 하자니 일본말
을 자연 쓰게 된다.
“그렇구말구요. 약주 잡숫는 양반은 아주 살이 찌실 것 같다구들 하시는데요.”
이번에는 하녀가 동의를 하였다.
“옳은 말일세. 자네도 살이 좀 쪄 보게.”
하고 순택이는 자기 잔을 하녀에게 주고 병을 들었다.
하녀는 싫다면서도 연해 고개를 꼬박거리며 철철 넘게 받아서 반 잔이나 한 숨에 마시고 나서,
“그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세요?”
하고 영희를 치어다본다.
“그저 여기까지 왔지.”
순택이가 웃으면서 대답을 하였다.
“이 근처에 일가댓이 계세요?”
하녀는 여전히 의아한 눈치로 영희를 보고 묻는다.
“아니 !”
이번에는 영희가 대답을 하였다.
“그럼 그때에는 왜 오셨었에요?”
“누가?”
순택이는 귀가 번쩍 뜨이는 듯이 하녀와 영희를 반씩 타서 바라본다.
영희는 대답하기가 난처하여 잠자코 방싯이 웃고만 앉았다.
“아니, 이 아씨께서 3년 전에 여기 오셨다가 이 집에 묵으셨드라는데요. 나리께선 모르세요?”
“응, 여기 언제 와 봤군 ! 흥! 그래 어쩐지 이 집으로 대짜고짜 들어오는 것
이 다르드라…… 하하하.”
순택이는 껄껄 웃고 말았으나 속으로는 의심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엔 무엇하러 왔었드람?”
순택이는 영희의 눈치를 살피려는 듯이 물끄러미 치어다보았다.
“왜 난 여기 못 올 덴가…… 하하하.”
하며 영희는 밥 보시기를 들었다.
“아 참 주인마님더러 물어 보니까 낯이 퍽 익은데 그때는 일복을 입으셨기 때문에 일본 분인 줄 알았던지 아까 올러오실 젠 몰라뵈었다구요. 그때 다녀가
신 뒤에 며칠 있다가 또 들러 가신 일이 있대죠?”
하녀는 웃으면서도 영희가 어떤 종류의 여자인지 그 본색을 캐어보고 싶은 듯이 말뚱말뚱 치어다본다.
영희도 여전히 뱅글뱅글 웃기만 하다가, 손에 든 젓가락을 쉬고,
“이거 큰일났군. 모두 근지가 들쳐나구, 비밀이 탄로가 되구…… 주인이 정신두 좋군.”
하고, 남편을 살짝 건너다본다.
“인제 이따가 주인이 인사 여쭈러 올러올걸요.”
“그럼 지금 좀 올러오라지. 이야기두 하게…….”
순택이는 주인의 입에서 좀더 듣고 싶은 것이 있는 말눈치다.
“그래 좀 불러 와.”
영희도 곧 찬성하였다.
하녀는 남았던 술을 한숨에 마시고 잔을 씻어서 순텍이에게 따라 주고 나서,
주인을 부르러 나갔다. 하녀가 나간 뒤에 순택이,
“여기는 어째 왔었어?”
하며 예사로이 물었으나 인제야 차차 여기까지 끌려온 까닭수가 짐작나는 것 같다.
“이따가 자세히 이야기해요.”
영희는 속으로 도리어 그 이야기를 꺼내기가 편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럼 동경에 있을 때 여기에를 왔던 게로군?”
“그래요. 어떻든 이따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다 할게요.”
영희는 달래는 수작으로 남편의 기색만 엿본다.
“아냐, 암만 해두 내가 한 수 넘어가는 판인 게다. 어디 두고 보자, 사람을
이런 데까지 끌구 다니다니 !”
순택이는 벼르는 소리를 실없이 하면서 선웃음을 친다.
“한 수구 두 수구 모른 척하구 좀 넘어가 보시구려. 그래야 손될 건 없으니!”
하고 영희도 웃었다. 주부가 올라왔다. 우둥퉁한 부숭부숭한 중늙은이다.
인사가 끝난 뒤에 영희에게로 향하여,
“그때 오셨드라는데, 눈이 무더서 실례하였습니다. 그후에 ‘사키창’이 늘 말씀을 하고 한 번 뵈었으면 뵈었으면 하며 몇 번 주신 편지 꼭꼭 싸 두군 하였지요.”
하며 매우 반가운 기색이다,
“그fj지 않어도 나두 ‘사키창’을 한 번 꼭 만나 보랴구 벼르구 왔는데 참 섭섭하우. 그러나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드란 말이오?”
“말하자면 퍽 장황합니다만 어떻든 사정이 딱하게 되었에요. 어서 잡숴 가며
들으시지요. 나리 약주 드세요˚ ”
주부는 병을 들어 순택이에게 권하면서, 맥주와 안주를 더 가져오라고 하녀를 내려보낸 뒤에,
“마음씨야 터 말할 것 없지요. 하지만 임자를 잘못 만나서 그 지경이 됐에요……. 게다가 제 에미 애비가 진 망나니들이기 때문에…….”
“그래 지금 어디 있는지 아슈? 알 건 번지를 좀 가르쳐 주시구려.”
부산을 지나는 길에 찾아보고 싶었다. 영희는 밥을 먹다 말고 가방에서 수첩
을 껴내서 주부가 일러 주는 대로 주소를 적어 넣었다.
영희가 ‘사키창’이라는기 하는 계집애의 일을 이처럼 열심으로 묻는 것이 순
택 이에게뿐 아니라 하녀가 보기에도 매우 이상 하였다. 그러나 주인 마누라만은 짐작할 수 있고 또 영희에게 아무쪼록 ‘사키창’을 기엾게 생각하도록 말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익될 것은 없어도 혹시나 ‘사키창’에게 좋은 일이 될까 하여 자세히 일러 주었다。
“아씨를 뵈니까 말이지, 홍 선생만 사셨대두 그렇게까지는 아니됐을 거예 요. 우연한 인연으로 퍽 귀해 주셨지요.”
“응, 홍수삼군이 여기 와 있었던가? 어느 틈에 여기를 와서, 그런 로맨스가 있었드람?”
순택이는 차차 취해 가는 중에도 복잠하고 미묘한 자기의 감정은 덮어 두고
천연히 이런 소리를 하고 술잔을 내어 주부에게 준다.
영희는 무어라고 대답하기가 난처하였다. 둘이만이면 할 말도 많으나, 어찌 하는 수 없이 웃어만 보이며 용서해 달라는 기색으로 남편의 기색만 또다시 살퍼본다. 그러면서도 남펀의 그 관대한 태도에 무진 감시하고 며리가 저절로 숙는 것을 깨 달았다.
주부는 옆에서 하녀기 따리 주는 술을 받으며,
“참, 이 아씨 오라버님이야 이쁘게두 생기셨었지만, 얌전하시구 재미있구. 그런 양반이 그렇게 돋야가실 줄 누가 알았겠에요. 오실 적 가실 적 마다 꼭 우리 집에 들러 묵으시구, ‘시키창’이 제일 따랐지요. 돌아가셨다는 아씨 편지를 받아 뵙구 그애가 얼마나 울었기에요.”
‘이 아씨 오라버니’란 말에도 순택이는 전후 사정이 짐작 들었다。
홍수삼이가 어찌 해서 목포를 자주 다녔었는지는 모르지마는, 영희가 수삼 이를 찾아왔을 제 오빠라고 하였던 모양이다.
“그래 그 ‘사키창’이란 어떻게 생긴 애인지 우리 마누라같이 생겼습디까? 우
리 마누라만큼 이쁩디까?”
순택이는 얼근한 김에 이런 실없는 소리를 주부에게 하고, 영희를 건너다보며 다시 조선말로,
“이왕 맡는 김에 ‘사키창’까지 물려 맡을까?”
하고 비꼬아 본다.
“아무려나!”
영희도 실없이 받고 생긋 웃는다.
“어디 댁 아씨같이 점잖으신 양반께 비하겠습니까마는…….”
주부는 내외간의 수작을 알아듣는 듯이 뒤따라서 한 마디 하고,
“……아이는 참 얌전하고 얼굴두 그만하면 남의 모에 빠지지는 않지요. 게다가 가무(歌舞)의 재조도 있기에 막 기생으로 박으라던 차에 그 모양이 되었답니다.”
고 열심으로 설명이다.
“흥, 그래 ! 어디 부산 가건 놀라 가 볼까? 허허허.”
순택이는 여기까지 속절없이 끌려와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앉았는 자기가 우습다는 뜻인지 게딱지같이 시뻘건 넓죽한 상을 흔들며 연해 호걸풍의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이번에는 산소에라두 가 보시랴구……? 그 양반 본댁은 여기 아니라 죠?”
주부는 말이 잠깐 끊이니까 인사삼아 다시 꺼낸다.
“에에…….”
영희는 어물어물 해 두려니까, 순택이가 뒤를 받아서 또 한 번 비꼬아 본다.
“우리, 보기에 어떻소? 내가 너무 늙어서 신혼 부부 같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실상 우리는 어제 결혼식을 하고, 지금 홍군에게 봉고제를 지내러 가는 길인데…….”
하고 무슨 딴 소리가 나올 뻔하다가, 취중에도 아내가 창피해할까 보아서 말을 얼른 돌려서,
“어디, ‘사키창’인 가 불러 올 수 없소? 그렇게 극진했다니 이 자리에 빠져서는 섭섭한데 !”
영희는 남편이 짐작 다하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이 도리어 시원하였고, 취담이거나 농담이거나 그렇게 가시가 들어 있지 않은 것만도 다행하였다. 그리니 영희는 정색으로 탄하였다.
“봉고제라고 그렇게 비꼬실 게 아니라, 어차피 가는 길에 좀 길을 돌기는 하
였지만 들러 가는 계 좋지 않아.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을 혼이 있어 내려다본다면 덜 좋아하고 시기를 할지 모르지마는, 미안하나마 용서해 달라고 꼭 한 번 우리 둘이 함께 기· 보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온 거지 별게 아녜요. 이렇게 말하면 미신 같지만 당신의 신상에도 좋을 거예요.”
“암 그렇구말구요.”
주부는 영문이나 알고 하는지 모르고 하는지 이렇게 장단을 맞춘다.
“그리게 누가 뭐랬어?”
순택이는 폭 취해 가는지 표정 없는 눈이 금시로 개개 폴려서 멀거니 바라본다.
“자아 그럼 실례했습니다. 천천히 맛없는 거나마 많이 잡숫고 편히 쉬세요.”
이야기가 뜸하고 홍이 빠진 기미를 보고 주부는 얼른 일어서며,
“나리께 진지 어서 떠 드려라.”
고, 하녀에 게 분부를 하며 나간다.
7
아직 동이 틀랑은 먼 모양이나 부두에서 선잠을 깬 듯한 중탁한 기적 소리가 가끔가끔 뚜우뚜우하며 새벽의 맑은 공기를 헤치고 떠올랐다가는 부르르 떨면서 스러진 뒤에는, 쑤아― 철렁철적 후르륵 쉬…… 종을 잡을 수 없는 멀고 가까운 파도 소리가 귀 밑에서 나듯이 들리다가는 살금살금 기어나가듯이 비릿한 해풍에 쓸려 멀어간다. 짐 싣는 인부들은 벌써부터 깨었는지 와글와끌, 쿵쾅 하는 소리가 앞뜰 한 구석에 모여서 앵앵거리는 모기 소리만큼 들리는 듯 마는 듯하다가는 쨍그렁 쩽하는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는 바늘 끝 같은 모진 소리에 이 저것이 다 스러저 버리고 귀에는 옆에 누운 남편의 숨소리조차 아니 들린다. 영희는 여전히 드러누워서 끝없는 이 생각 저 생각을 꿈 속같이 이어 나간다. ……어느덧 잠이 들어가는지 점 점 머릿속이 아리숭아리숭하여 가는 판에 별안간 ‘여보!’ 하며 부르는 소리가 들린 듯 만 듯하다. 영희는 깜짝 놀라 머리를 쳐들었다.
“저기 냉수 있건 좀 주구려.”
순택이는 눈을 비비면서 부스스 일어나는 모양이다.
영희는 암말도 아니하고 일어 나와서 전등의 고동을 틀고 화로 위예 놓인 주전자의 식은 물을 한 잔 따라서 순택 이의 머리맡에 갖다 놓았다.
“인젠 다 깨셨소?”
“응, 인제 시원한데. 아무튼지 먹을 줄 모르는 맥주를 두 병 턱이나 먹었으니까.”
순택이는 한숨에 한 잔을 켜고 나서 연거푸 두세 종지를 마시더니 다시 드러누웠다.
잠자코 앉았던 영희는 새벽녘의 기분을 깨뜨리고 싶지 않아서 전등불을 탁 꺼버렸다. 또다시 지암이 되었다. 창살이 아직도 훤해지지를 않는다. 영희는 어둔 데에 눈이 익기를 기다려서 미닫이를 열고 툇마루 끝의 덧문 한 짝을 살그머니 밀어젖뜨리고 하늘을 치어다보았다. 아직 캄캄한 하늘에는 별이 드문드문히 반짝거린다. 영희는 찬 바람이 활짝 끼치는 바람에 어깨를 음츠러뜨리며 방으로 들어와서 자기 자리 위에 오뚝 앉았다.
쓰아 출렁철썩, 후르륵 쉬 ― 쿵 쾅 쩽그렁 쩽 삐 ―뚜―……여전히 번갈아 가며 높았다 낮았다 가까웠다 멀어졌다 하다가 개미 숨소리도 들릴 만큼 괴괴하여지며 이번에는 또다시 새 판을 차리고 겨끔내기로 되풀이를 한다.
“……여보 자우?”
컴컴한 속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난다.
“네? 아뇨.”
― 앉았는 영 희는 곱게 웃으면서,
“그래 내가 뵈지 않어요.”
“안 보여. 졸립지 않소?”
“뭘요, 조금만 있으면 곧 밝을 걸.”
영희는 좀 다가앉으며,
“이만하면 뵈시겠죠.”
“응, 그런데 어젯밤에는 어떻게 된 일이오? 물어 본다면서 그대루 자 버렸지만 그 사람이 예서 작고하였던가? 어덴지 시굴이란 말은 그때 들은 법하건만.”
“네? 그 사람이라니 누구 말씀요?”
영희가 이 기회를 타서 먼저 토설을 하려는 것을 남편이 먼저 말을 붙이는 것이 다행도 하고 고맙기도 하였으나, 선뜻 말이 아니 나와서 실없이 딴전을 붙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모든 것을 용서해 달라는 듯한 애원하는 아양스
런 어기(語氣)가 충분히 풍기어 있다.
“나두 그만하면 대강 짐작은 하였지만 왜 그리 딴전을 붙여!…… 홍수철군의
형 말이야 ― 홍수삼군 말이야!”
컴컴한 속에서 수군수군하는 남편의 말소리는 부드럽다. 음성에서는 조금도 악의를 찾아 낼 수가 없었다. 안심도 되고 무진 감사하였다. 동시에 남편이 부르는 ‘홍수삼’ 이라는 석 자의 발음이 얼마나 신기하고 반가운지 몰랐다. 3년 전까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불러 보고 써 보던 이름이요. 금자이다. 그것이 지금 이 사람 ― 이태 동안을 두고 사귀어 오면서도 피차에 한 번이라도 불러 보기를 싫어하던 이 석 자가 기어이 이 사람의 혀끝에서 굴러 나왔다. 그 사람
이라거나 수철이의 형이라거나 홍수삼이라거나 똑같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건마는 다른 사람이 홍수삼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 거기에는 무슨 향기가 풍기는 것 같고 미모한 음악의 여운이 도는 것 같기도 하다. 영희는 전신의 피가 별안간 확 퍼졌다가 잔잔히 가라앉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에게 대한 고마운 생각을 하면 자기의 이러한 심정이나 기분이 죄민스럽고 부끄럽지 않을 수 없으나 인력으로 어찌하는 수도 없었다.
순택이는 영희의 대답을 기다리다 못하여 또다시 입을 벌렸다.
“……홍군의 집 이 원래 여기였던가?……그런데 ‘사키창’ 인가 하는 계집애
하구두 무슨 관계가 있었던 모양인게지?”
영희는 여전히 입을 닫치고 오른편 무릎을 세운 위로 두 손길을 맞잡고 응송그린 채 가만히 앉았다. 미안하고 어색해서 차마 입 이 얼른 떨어지지를 않았다.
“그 왜 속시원하게 말을 못 해. 무어든지 소원대로 하구 싶은 대로 해 주마는게 떠나기 전부터 약조 아니야. 여기까지 온 것은 단지 조용한 데를 찾어오라구만 해서 온 것은 아니겠지?”
여기까지 와서 순택이는 일종의 분노를 느낀 듯이 약간 독기를 품은 듯한 목소리를 속으로 굵어 잡아당기며 말끝을 흐려 버렸다.
영희는 컴컴한 속에서 동그란 두 눈을 반짝반짝하며 반듯이 드러누운 순택 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을 내려다보다가 순택이의 가슴 위에 사뿟이 실리며,
“왜 노하셨에요?”
하며 기쁜 듯이 사과하는 듯이 속삭이었다.
“노하긴 누가 노해 ! 무슨 생각이 있어 왔을 지경이면 얼른얼른 해 버리구 가던지…… 내 그 심경을 짐작 못 하는 게 아니어던 !”
순택 이는 자기 가슴 위에 얹은 아내의 목을 오른팔로 얼싸안고 손바닥으로는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
“……그래 정말 아무거든지 해 주실 테예요?”
영희는 어리광 비슷 아양 비슷한 소리로 다시 한 번 다져 본다.
“그래 그런단밖에 ! 무어든지 원하는 대로 해 주어.”
이때에 순택이의 목소리는 자식 사랑에 눈이 어두운 늙은 부모가 자식의 모든 잘못을 꿀꺽 참고 보채는 대로 무슨 청이라도 들어 주마는 듯한 유순하고 온정에 가득한 소리였다.
“그럼 나허구 가 주세요¨”
영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진 입을 맞대고 감격에 떠는 소리로 속삭였다.
남편의 깊은 사랑과 관대한 처사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서 새로운 애정이 가슴 속에 흥건히 고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순간에 영희는 지금 매달려 있는 이 사람이 순택인지 수삼인지 의식이 분명하지 않았다. 어떻게 생각하면 순택이 같고 어떤 순간에는 수삼이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럼, 같이 가지. 못 갈 거 무어 있나.”
가슴에 그렇게도 맺힌 것이 있다면 혼자 보내서 시원하도록 울거나 아무러거나 흡족하게 해 주고도 싶었다. 또 어제 말처럼 둘의 결혼을 용서하라는 의미이면 함께 가서 고인의 무덤을 어루만져 주고 명복을 함께 빌어 주는 것도 조금도 싫을 것이 없다고 순택이는 생각하는 것이다.
“대관절 어디야?”
“H 군예요. ……무어랬으면 좋을지? ……미안해요― !”
어렴풋한 환상에서 반짝 깨어난 영희는, 남편의 가슴에서 고개를 들고 남편
의 얼굴을 어숙한 속에서 더듬어 보며 띄엄띄엄 한 마디씩 힘 있게 하였다.
“미안할 거 뭐 있나. 영군(전부터 영희를 이렇게 불렀다.)은 망령에게나마 이
연장(離緣狀)을 내놓으러 가는 거요. 나는 잘 맡았으니 염려 말라고 안위시키러가는 셈쯤 되었으니 잘 되었어. 다시 이러니저러니 말할 것 없지.”
순택이는 어디까지 선선하였다.
“그런데…….”
영희는 말을 냅뜨기가 거북한 눈치로 뒤를 잇는다.
“그런데 이번 가는 길에 비를 하나 세우고 싶은데……?”
“좋지.”
“글쎄, 저렇게 떨어져 있지만 않으면 동생이라두 세워 주겠지만, 누가 가 보아 주는 사람이나 있을 거예요. 하여간 내게는 애인이었다느니보다도 여러 가지로 은인이었으니까 갚아야죠.”
“그래, 좋아요. 우리가 다녀간 기념으로라도 씁쓸히 돌쳐설 수야 있나.”
순택이는 묘비를 세워 준다는 것을 마치 유람객이 석벽이나 방명록에 제명(題名)이나 하는 것같이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슨 비꼬아서 하는 말은 아니 다.
“표적이 나거나 말거나, 대관절 얼마나 들꾸?…… 여기 한 50원쯤은 그 몫으로 가지고 왔지만.”
어느덧 의논성스럽게 이야기가 되었다.
“그까짓 것 얼마 들라구! 비용이야 염려할 것 없어. 꼭 그 돈으로만 세워야 마음이 편하겠다면 하는 수 없지만 내 돈두 보태 쓰구려. 하지만 날짜가 퍽 걸릴걸.”
“그러기에 이번에 올 적에 ‘사키창’을 믿구 왔는데. ‘사키창’에게 맡기구 그라구.”
“참 그런데 ‘사키창’이란 어떻게 만난 애야?”
순택이는 부쩍 호기심이 생겨서 고개를 쳐들며 영희를 바라보다가 아까 열어 놓은 덧문 쪽이 훤하게 비치는 것을 보고,
“인제 밝었군 !”
하며 일어앉는다.
방 안이 차츰차츰 훤하여 갈수록, 부두의 와글와글하는 소리는 점점 커지고 삐 ― 뚜 ― 하는 기적 소리도 잦아간다.
“아마 홍군이 ‘사키창’인가 하구두 그렇지 않은 새이었던 모양이지 ? 어제 노파 말을 들으면.”
순택이는 웃으면서 영희의 얼굴에서 무슨 눈치를 살퍼보려는 듯이 똑바로 치어다본다. 그것은 영희도 거기에 무슨 관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하구 만나기 전에는 모르지만, 그렇진 않은가 봐요. 어쨌든 홍씨 아버지가 여러 해 동안 H군이며 이 근방에서 군수 노릇을 하였으니까, 이 집에를 단골로 다니는 동안에 알게 된 모양인데 아마 ‘사키창’ 편이 한때는 무척 반하였던가 보드군.”
“참 그런데 홍군이 죽은 뒤에 왔었소?”
“아니, 죽기 한 달 전쯤 해서 잠깐 왔었죠. 그때 고생한 생각을 하면 소설을 써도 장편 하나는 넉넉히 될 거야.”
“그때 영군은 동경에 있었겠지?”
“그럼요. 그때 마지막 조선으로 돌아갈 적에 다시 만날 때까지든지, 죽을 때 까지든지, 매일 피차에 일기를 적어서 바꾸어 보기로 약조를 하고 떠나던 날부터 통신이 있었는데, 날이 갈수록 차차 써 보내는 분량두 적어지구 이틀 사흘 씩 몰아서 한꺼번에 오기두 하고 어떤 때는 일기를 쓰지 못한 변명삼아서 아주 절망적으로 비관을 한 소리두 해 오고 하더니 나중에는 아주 끊어져 버린 뒤에, 수철군이 대필을 헤서 오라구두 하구, 수철군의 누이까지 내게 편지를 하고, 아버지도 남의 자식 하나 살리는 셈치고 잠깐만 다녀가라 하신다고 법석들이기 때문에 덮어놓고 나섰지요. 하지만 오빠는 야단을 치니까…….”
“무어? 오빠가 왜 야단을 쳐? 자기가 처음부터 찬성을 하였다면서 죽게 된 시람을 찾아가 본다는데 야단을 하다니?”
순택이는 이렇게 한 마디 새치기를 한다.
“글쎄 오빠가 알면 야단 안 해요? 학교를 빠지고 험한 길에 혼자 간다는 걸 가만두겠에요? 그래서 하는 수 없시 몰래 빠져 나와서 오빠한테는 나중에 편지로 기별을 하였지만 그때 고생 이라니…….”
“무슨 고생이람?”
“동경서 여기까지는 아무 일 없이 왔지만 수철군 편지에 여기까지 와서 하루를 묵게 될 터이니 여관은 이 여관으로 정하고 형님 이야기를 하면 친절하게 해 주리라고 하였기에 이 집으로 와서 보니까 텅 빈 것이 쓸쓸하구 손님이라군 바로 내 옆방에 한 사람이 있구 저리 떨어져서 몇 사람이 있을 뿐이요, 어쩐지 무서운 증이 나기에 ‘니시무라 미네코(酊寸嶺子)’라 하구 일본 사람 행세를 하지 않았겠에요? 내 참 그때처럼 혼이 난 때는 없어. 내가 방을 막 잡구 나니까 옆의 방에서 젊은 남자 하나가 톡 튀어 나와서 공연히 내 방 앞으로 왔다갔다하더니 저녁밥을 먹고 방문 앞에 나섰으랴니까 숫기 좋게 말을 붙여 가지구 따라 들어와서 판을 차리구 앉겠지요? 제 방이 내 방하구 장지 한 겹만 격하였으니 아주 두 방을 통하여 놓고 과자를 가져오네 바이올린을 가져오네 하며 지랄을 하다 못해서 내 얼굴빛이 이상스럽다구 청진기까지 가지구 와서 부덕부덕 진찰을 하겠다구 못살게 구는군요.”
“별안간 청진기는 웬거드람?”
순택이는 눈이 뚱그래서 영희의 낯빛을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의원보다도 더 빠르게 들여다보며 물었다.
“어떤 ‘자혜 의원’의 의사라든가 하는데 젊은 애가 아무튼지 못하는 게 없어요. 말을 납신납신해 가며 나중에는 소설책을 가지고 와서, 노서아 소설은 로스케가 육초를 먹는 형상이나 심리 작용과 똑같다느니, 남국 작품은 야회에서 늦게 돌아와서 자고 난 이튿날 아침의 귀부인 같다느니 하며, 어데서 얻어들었는지 밤가는 줄을 모르구 떠들어 대겠죠…….”
“재미있군 ! 그래서 그 후림수에 넘어갔드란 말이지.”
순택이는 이렇게 놀린다.
“무얼 어떻게요. 겨울 밤이 이슥해지니까 지는 제 방으로 가구 나는 불도 못 끄고 누웠는데 암만 해두 마음을 놓고 잘 수가 있어야죠. 아래로 뛰어내려가서
하녀를 하나 빌리라 했더니 자청을 해서 따라온 애가 ‘사키창’이드란 말예요. 한 이불 속에서 끼구 잤지요. 그때 벌써 열 아흡이든가 하는데 가냘프게 생긴 것이 이쁜 어린애 같았에요. 그래 같이 왼 밤새도록 이야기를 하면서도 홍하고
친한 줄은 꿈에도 몰랐었지. 나중에 홍을 만나서 ‘사키창’하고 같이 자고 왔다니까 웃으면서, ‘재미있는 계집애지 ? 그것도 무슨 인연이로군. ’ 하며 갈 때에 들러서 소식을 전해 달라 하기에 또 하룻밤 같이 자면서 ‘사키창’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지요.”
“그래 그 옆방에서 잔 의원인가 하는 자하군 그뿐야? 좀더 무에 있어야 소설이 되지.”
순택이에게 무엇보다도 흥미 있는 것은 이 문제이다. 영희는 뱅긋뱅긋 웃으
며,
“그개 똑 마치 활동사진 격이지,요. 사람이 요절을 할…… 하하하…….”
웃기만 하고 말을 시원스럽게 못 한다.
“어떻게 됐길래?”
“아무튼 지 여부 없는 활동 사진이에요. ― 그 이튿날 아침에 배에 올라서 2등실에 들어가 앉으라니까 궐자두 무심쿠 들어오다가 피차에 깜짝 놀라면서 끌끌 웃고 말았구먼……, 그래서 1 주야 반을 단둘이서 한 방에서 지냈지요…….”
“단둘이서 ? 그럼 하루 밤하고 이틀 나절을?”
순택이는 놀란 듯이 이렇게 묻고도 자기의 말이 너무 우스운 것을 자기도 알았던지 혼자 빙그레 하고 나서,
“우리의 신혼 여행보담두 재미가 있었을걸 !”
하며 비양댄다.
“뭘 그렇게 놀라슈? 흐흐홍…… 사람이란 그렇게 딱 마주치니까 도리어 용기가 나고 마음이 퍽 순결해지나 봅디다. 그렇게 침을 질질 흘리던 사람이 별안간 매우 정중해지고 진정으로 친절하게 하여 주는 모양인데 그래두 가다가다 기롱처럼 같이 살자는 둥 애인이 있느냐는 둥하며 사람을 괴롭게 굴지 않어요. 그래두 피하구 싶은 생각은 없어졌어 !”
“그리다가 남자가 야심이 있으면 어쩌누?”
“대항하다가 아니되면야 하는 수 있나? 하지만 가만히 볼수록 내 눈엔 그렇게는 아니 보이니까 안심하고 같이 있었지. 마음이 약하게 생긴 남자라 내가 깔끔하게 구는 바람에 좀처럼 ˙그런 소리는 입 밖에 내지 못하거든요.”
“그래 어디까지 같이 갔드람?”
순택이는 여전히 반신 반의로 다른 생각을 머리에 그려 나가다가 이렇게 묻는다.
“글쎄, 그게 우습단 말예요. 겨우 상륙을 해서 저기다가 대고 전보를 놀까 하다가 궐자가 알면 쫓아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두 들기에 그대로 자동차를 잡아타고 나섰지요.”
“그래서?”
“애를 써서 피해 가느라구 이틀 동안이나 사람이 나와서 기대리고 있는 것도 만나지 못하고 혼자 겨우 찾어들어가니까…….”
“그래 들어가서 보니까 어때?”
순택은 여전히 머릿속으로 일종의 불쾌한 연상을 하며 억지로 그런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앓아 누운 홍수삼이의 얼굴을 그려 보며 묻는다.
“말 아네요. 눈이 음폭 파이고 먼지가 켜켜 앉은 수염이며 머리는 자랄 대루 자라구……. 참 깜짝 놀라서 단 두 달 동안에 이렇게두 변할 수가 있나 하였지만…… 그건 그렇다 하구, 글쎄 이거 보세요. 그 이튿날이 되었는데, 아침 밥을 먹구 나니까 순회 의사(巡廻醫師)가 읍내로 들어와서 군청에 채를 잡고 앉었는데 곧 들어와서 본다지요……. 난 가슴이 털썩 내려앉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지 않아도 뱃속에서 그 남자더러 어데로 가느냐고 물어 보니까 여수까지 가서 앞서 간 사람을 만나 보아야 알겠다고 하였는데 그 일행이 온 것은 분명한 일이지요.”
“그 일행이기로 가슴이 털썩 내려앉도록 놀랄 거야 무어 있나?”
순택이는 코웃음을 치며 묻는다.
“그래두 눈에 뜨이면 꼴사납지 않어요? 그래서 나는 부리나케 물을 데워다 놓고 수족이며 얼굴을 말갛게 씻기구 앉었으려니까 영감님이 앞장을 서서 우중우중 들어오지 !…… 아니나다를까 ! 중년쯤 된 주임 의사 같은 사람의 뒤에
하얀 소독옷을 입고 간호부를 데리구 들어오는 사람이 분명히 어제 배에서 나란히 앉았던 그 사람입니다그려. 그 사람은 나보다도 한층더 깜짝 놀라며 딱 서 버리겠지요. 다른 사람들은 눈치를 채었더라도 병인을 보고 그러는 줄 알았
겠지만 창피하기두 하고 부끄럽기두 하구…….”
“그래 어떻게 했어?”
“뭘 어떡해요? 고만 안으로 피하여 들어와 버렸지요.”
하며 영희는 웃어 버린다.
“그걸루 막이 내리다니 어디 싱겁지 않은가. 또 한 번 만나서 발전을 한다든지 해야지.”
“만나긴 어데서 만나요. 나오다가, 이 집에 와서 ‘사키창’ 더러 물어 보니까 이 집 단골이라구 하드구먼…….”
영희는 3년 전 일을 묵은 기억에서 들추어내서 생각하여 보느라고 얼없이 앉았으나, 순택이는 순택이대로 3 년 전의 영희를 머리에 그려 보며 누웠다.
아침 해는 훨씬 퍼졌으나 이 방에는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바다 위의 반사광이 앞창에 비칠 뿐이요, 역시 우중충하여 잠자기에 똑 알맞다.
이야기가 끊기니까, 순택이는 이불을 끌어올리며 돌아눕는다. 영희도 남편 뒤에 가만히 누우면서 지금 이야기를 남편에게 안 할 것을 했다고 잠깐 후회하였다. 그러나 남편이 그런 데 머리를 쓰는 것은 의외요 불쾌도 하였다.
아래층에서 떠들썩하는 소리에 다시 잠이 올 것 같지도 않다.
“주무세요?”
남편이 돌아누운 것이 싫기도 하고 왜 그러나 싶어서 나직 이 말을 붙이니까 순택이는 바로 누우며 싱긋 웃어 보인다. 그것은 자기 마음을 제풀에 푸는 듯한 그런 표정이다.
8
H군에 도착한 것은 목포의 여관에서 떠난 이튿날 저녁때이었다.
자동차 상회 앞에서 다른 손들은 떨어뜨리고 영희 내외만 여관 문까지 태워다 주었다. 일본 여관이라고는 이 읍에 이 집 하나밖에 없는 거나마 여관이란 말뿐이요 조선집을 뜯어 고친 얼치기의 시골 객줏집 이다. 영희 내외는 우선 방을 잡아 놓고 행색을 매만진 후에 여관 하인을 앞장세우고 군청을 찾아 나왔다. 수삼이가 죽은 지 1년이 못 되어서 수삼이의 부친도 돌아가고 그의 친족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 땅에 수삼이의 묘를 알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군청에 들어가서 조사하여 달라면 알기가 쉬우리라 하여 파하기 전에 시급히 그리로 찾아들어간 것 이다.
다행히 아직들 파하지 않았다. 군수도 나가지 않고 있다 한다. 순택이는 자기
의 명함을 들여보내어 군수에게 면회를 청하였다.
군수는 방문 밑까지 나와서 맞아들여 갔다. 어쩌니어쩌니 하여도 총독부의 토목과 촉탁이라는 순택이의 직함이 매우 유력한 모양. 영희는 관리인 남편을 가진 덕을 우선 여기서 보게 되었다.
머리를 빤지르르하게 갈라 붙이고 까만 수염을 코 밑에 답수룩하게 기른 젊은 군수 영감은 도회 냄새에 주렸다가 영희 같은 신여성을 맞으니 생기가 나는 눈치요, 같은 서울 사람을 의외로 만난 것이 더욱이 반가운 모양이다.
“네, 홍 군수의 자제 말씀이지요. 글쎄 아마 이 부근일 테지요……. 고참 서기에게 물어 보면 알겠지요.”
하며 금테 안경 위로 영희를 잠깐 흘겨보며, 책상 위에 놓인 초인종을 땅땅 쳐서 사환을 부르더니 민적계의 김 서기를 불러들이라고 명한다.
김 서기가 들어와서 영희 내외를 신기한 듯이 바라보며 군수의 책상 가까이 섰다.
“……그 저 홍 군수 영감의 자제가 예서 돌아갔다지?”
“네…….”
하고 김 서기는 또 한 번 영희를 돌려다본다.
“그 묘가 어덴지 아나?”
“알죠. 그때 제가 호상을 해서 지냈으니까 알다뿐이에요.”
영희는 반색을 하며,
“그래 어디쯤예요?”
“예서 얼마 안 되죠. 2, 30분이나 걸릴까요. 가 보시면랴 이따 파사 후에 안
내해 드립죠.”
하며 김 서기는 심심하던 차에 좋은 일거리나 생겼다는 듯이 선선히 나선다.
“그럼 그렇게 해 드리구려. 마침 잘 되었군.”
하고 군수는 순택이 부처에게 김 서기를 인사를 시킨다.
“불시에 와서 폐가 많소이다.”
순택이가 공학사(工學士) 얼러 세 가지의 직함이 적힌 명함을 내주며 인사를
하니까, 김 서기는 황감한 태도로,
“천만의 말씀입니다. ……헌데 돌아가신 홍 선생과는 어찌 되십니까?”
하고 영희를 바라보며 묻는다.
“에, 내 사촌 처남이 되죠.”
영희가 대답을 잘못할까 보아서, 순택이가 앞장을 서 대꾸를 한다.
“아, 그러세요? 저도 홍 선생과는 매우 자별히 지냈습니다마는, 참 아까운 양반 잃어버렸지요. ……한데 그 매씨가 한 분 계셨지요?”
김 서기는 이런 소리를 하며 영희를 또 한 번 말똥히 바라본다. 수삼이에게 누이가 없는 것은 김 서기도 모르는 게 아니라, 영희를 처음 볼 제부터, 연전에 왔을 때 원광으로만 한 번 보았지마는 필시 그 여학생인가 본데 하는 짐작이 있는지라 슬쩍 빗대 놓고 말을 붙여 보는 것이다.
“네 그 매씨는 벌써 출가하셨지요. 그 계씨는 서울 있지요만.”
순택이가 또 이렇게 대답을 가로맡아 하는 것을 듣고, 서기는 잠깐 고개를 갸웃하며 웃는 듯한 표정으로 영희를 또 한 번 치어다보았다 ― 인제야 짐작이 나선다는 모양이다.
“그럼 길이 바쁘실 텐데, 어서 모시고 가서 안내를 해 드리지…….”
잠자코 두 사람의 수작에 귀를 기울이고 앉았던 군수는 서기를 재촉하였다.
김 서기가 사무 보던 것을 치우고 두루마기를 떼어 입고 나오기를 기다려서 영희 부부는 군수와 작별을 하고 군청 문을 나섰다.
인력거를 타려고 하였으나 마침 세채가 없기도 하고 2, 3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에 세 사람은 석양판에 천천히 걷기로 하였다.
“홍 군수 영감도 역시 그런 병으로 돌아가셨지요¨ 노경에는 그렇게 전염이 아니된다는데 ― 아마 그 집 안에 내력 이 있던지 여기서부터 각혈을 하시어서 서울로 올러가신 뒤에 즉시 돌아가셨지요. 그것도 자제를 잃은 뒤에 너무 심통을 하셔서 그렇게 급히 돌아가신 게지요.”
김 서기가 앞을 서서 가며 천천히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글쎄 그러신가 보드군요. 그때 우리는 일본에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건 모르지만.”
순택이는 몽롱한 대답으로 말을 받았다.
“홍 선생도 역시 마음 편히 조섭만 잘 하였더면 그렇게 쉽게는 아니 돌아갔을 걸……. 약혼한 처녀가 있었드라는데 일본서 이리 나올 때부터 그랬지만 그
처녀가 잠깐 다녀간 뒤로는 아주 더쳐 버려서 시시 각각으로 달라졌었지요. ……아무튼 그런 병은 심로를 하면 더한 거예요.”
서기는 이런 소리를 하며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걷는 영희의 얼굴을 잠깐 돌려다보았다. 영희가 그 여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없지 않지만 기연가미연가하여 이런 말을 끄집어 낸 것도 같다.
영희는 서기의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하였다.
좀더 살 수가 있었던 것을 자기 때문에 수가 줄었다는 생각은 벌써부터 영희에게도 없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보도 듣도 못 하던 이 사람에게 수삼이는 그 사랑하던 사람 때문에, 그 아버니는 수삼이 때문에 제 수를 다 마치지 못하였다는 말을 들을 제 그 장본인이 자기인 것을 알고 하는 말인지 모르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어떻든 가슴의 상처를 겨냥을 하고 콕 찌르는 것 같지 않을 수 없다.
“그래 그 여자가 수삼씨가 돌아간 뒤에 여기 왔었에요?”
세 사람은 잠자코 가다가, 영희가 시치미를 떼고 무어라나 들어 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몰라요. 아마 아니 왔지요.”
김 서기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 나서 영희를 또 한 번 치어다보며,
“홍 선생 생전에 와 보셨에요?”
하며 묻는다.
“아뇨. 초행인데…….”
순택이가 말을 가로막고 얼른 대답을 하였다.
세 사람은 또 잠자코 걸었다. 시가에서 빠져 나와 촌가가 드문드문한 논두렁
을 빙빙 돌아가 산비탈까지 오더니, 서기는 우뚝 서며,
“바루 저 위올시다. 이리 돌아가면 그리 힘들 것도 없지요…….”
이렇게 한 마디 하고 또다시 앞장을 서서 꼬불꼬불한 산길을 휘돌아 들어갔다. 영희 부부는 암말 아니하고 따라섰다.
넘어가려는 석양이 저편 산모퉁이에 걸리어, 엷은 햇발이 꾸부리고 올라가는
세 사람의 뒤를 비추어서 희미한 그림자를 앞으로 길닿게 던진다.
올몽졸몽한 무덤이 여기저기 옹기응기 흐트러져 있는 틈을 휘돌아서 서기는 산길 끝까지 다 올라가서 우뚝 서더니 휙 돌아서며 허덕허덕하고 뒤떨어져 올
라오는 영희 내외를 돌아다보고,
“그까짓 걸 걸으시고……. 여기예요. 이것입니다.”
하고 자기 곁에 벌겋게 벗겨진 큼직 한 무덤을 가리켰다.
영희는 발이 재게 기어올라와서 한숨을 휘 쉬며 분상 앞에 한참 섰다가 사방을 휘둘러보았다.
“아무 표두 없구먼요?”
영희는 눈으로 무엇을 찾으며 이런 소리를 하였다.
“왜 그러세요? 내가 잘못 찾었을까 보아 그리세요? 허…… 거기 찾어보면
조그만 말뚝이 있을걸요.”
하며 서기는 꾸부리고 이리저리 다니며 찾더니,
“응! 여기 있군 ! 에구, 물에 쓸려서 빠져 버렸구먼요.”
하고 한편 토성이 문드러져 나온 데에서 뿌옇게 썩은 네모진 나무때기를 집어들고 영희 앞으로 왔다. 영희는 주는 대로 잠자코 받아서 들여다보았다.
‘홍수삼지묘’라 한 다섯 자 중에 ‘삼’자 하나만 겨우 보이나 위아래의 두 자씩은 거진 형적을 알 수가 없다.
영희는 한숨을 휘 쉬며 비에 썩은 검은 나무때기를 꽉 쥐며 눈을 감고 섰다.
영희에게는 이 광경이 슬픈지 어쩐지 자기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속에 크 사람이 누워 있다는 것은 암만 해도 이상한 일 같다. 이 얼굴을 쏘듯이 들여다보고 웃던 그 눈, 이 입에 불 같은 키스를 퍼붓던 그 입, 이 가슴이 부서지라고 끼어안던 그 팔이 지금 이 속에서 썩는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죽음이란 무엇인지 새삼스럽게 연구하여 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 몸도 이 살도 썩을 날이 있으렷다 !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를 제 금시로 허공을 밟고 낭떠러지로 날아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건너 산머리에서, 오늘 하룻동안 만들어 놓은 모든 열매, 오늘 하룻동안 내려다보던 대지 위에 붙은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숨어 버리는 것이 애처롭고 섭섭하다는 듯이 한참 동안이나 오르락내리락하며 날름거리던 저녁 해는 기어이 쑥 빠져 버리고야 말았다. ―나무라고는 별로 없는 뻘건 산 위에도 벌써 황혼이, 솔솔 불어오는 봄바람에 싸여 한 겹 두 겹씩 내려앉기 시작한다.
순택이는 김이 빠진 맥주를 마신 사람처럼 쓴지 단지 아무 생각도 없이 멀거니 섰다가,
“그만 가지 !”
하며 옆에 앉았던 영희를 들여다보았다. 영희는 잠자코 일어나서 분상을 다시 한 번 돌아다보고 앞장을 선 서기의 뒤를 따라섰다.
순택이는 영희를 앞세우고 따라가다가 무심히 이 경우에 자기의 처지를 생 시하여 보았다.
사랑하는 영희의 원을 풀어 준다는 뜻으로, 또는 자기에게도 역시 친구가 비니까 같이 온 것이라고 속으로 변명하면서도, 이렇게 쫓아다닌다는 것이 옳은 일이라 할지 혹은 흘게빠진 짓이라 할지 자기의 일이건마는 분명히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홍수삼이의 모를 보고 영희가 금시로 풀이 죽어진 것을 보면 벌써부터 짐작은 한 일이지만, 별안간 질투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홍수삼
이라는 이름이 쓰인 말뚝을 보고 반기면서 손에 꼭 쥐고 섰던 양을 머리에 그려 볼 제, 허청대고 공연히 불쾌하다. 올 때까지 마음에 먹었던 관대한 생각은
간 곳 없이 스러져 버렸다.
‘사랑은 이론이 아니다. 나두 위선자이던가…….’
이런 생각을 하며 걷다가 순택 이는 급작스레 머릿속이 명하고 모든 생각이 흐트러져 버렸다. 기운이 쑥 빠지어 심한 피로가 전신에 펴지며 다리가 휘청휘
청하는 것 같았다. 마치 목을 매어 끌려가듯이 영희가 가는 발자국대로 따라 걸으면서 질질 따라 내려왔다.
산비탈을 다 내려와서 세 사람이 한데 모여서 걷게 되었을 제 영희는 서기를 건너다보며,
“여기서 비를 세우랴면 곧 될까요?”
하고 물어 보았다.
“글쎄요. 하루이틀에 곧 될지는 마치 몰라도 되기야 하겠지요. 마침 닦어 놓은 돌이 있으면 한 이틀만 하면 되겠지요.”
김 서기는 이렇게 대답하고 나서,
“이번에 비를 세우시게요? 그것도 좋지만 급한 것 이 사초이겠드군요.”
하며, 서기는 좀 늦은 듯하지만 곧 사초를 하도록 하여야 올 여름을 지낼 것이라고 설명을 하고 자기에게 맡기면 몇 푼 아니 들이고도 잘 할 수 있다는 말까지 한다.
“그럼 지금이라도 석공을 불러 볼 수가 있을까요?”
“불러 오지 않드라도, 제가 오늘 저녁에 가서 물어 보지요.”
“그럼 어려우세두 그렇게 해 주세요.”
김 서기는 비석장이에게 알아보고 저녁에 여관으로 오마 하고 헤져 갔다. 그는 홍수삼이를 알아서 그러는지 모든 것을 의외에 손쉽게 자진해 맡아서 해 주마고 하였다.
저녁이 끝난 뒤에 아홉 시나 되어서 김 서기는 영희 내외를 찾아왔다.
“가서 물어 보니까 마침 닦아 놓은 돌이 두 개가 있는데 좀 좋은 것은 지경까지 닻고 세우는 데 50원 가량 먹고 그보다 못한 거면 10원 하나가 틀린다드군요. 내일부터 시작하면 모레 저녁때는 끝이 날 모양이나 회로 터를 다져서 왼만큼 말려야 한다니까 내일 아침 썩 일찍 이 시작해야 한다는데요.”
하며 여러 가지 자세한 설명을 더 보태 말하였다.
영희는 당장에 자기가 가지고 온 50원을 내어 주고 좋다는 것으로 우선 착수를 하여 잘 하여 놓으면 부족되는 것은 일이 끝난 뒤에 치르마고 부탁하였다. 무론 사초까지 하고 일을 시작할 때에 지내는 산신제는, 김 서기 집에서 조금 차려다가 지내기로 모든 절차가 손쉽게 결정되었다.
“그럼 비문에는 무어라고 쓸까요? 글씨도 저의더러 쓰라고 맡겨 버리시지요.”
하며 김 서기는 호주머니에서 연필과 수첩을 끄내었다.
“홍수삼지묘라구 앞에 쓰고, 뒤에는 우리 이름하고 년월일만 쓰면 고만이겠
지?”
하며 영희는 남편의 얼굴을 치어다본다.
“그렇지 ! 하지만 이름을 아니 쓰면 상관 있나.”
순택이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
“쓴다면 영군의 성명만 써도 좋지 !”
“그거야 아니되지요. 그래두 두 분 함자를 다 쓰셔야죠.”
김 서기는 붓대를 놀리면서 이러한 의견을 제출하고,
“영감 직함은 그지 공학사라고만 하지요.”
하며 묻는다. 이것은 김 서기가 아까 받은 명함에서 본 것을 생각하고 알아차리고 하는 말이다.
“아무러나 하구려.”
하며 순택이는 의미 없이 웃었다.
“부인 함자는 무어라고 쓸까요?”
“최영희라고 하세요.”
“네? 최영희씨세요? 최씨세요?”
김 서기는 눈이 뚱그래지며 다시 묻는다.
“네 그렇게 쓰세요.”
하며 영희는 생긋 웃었다.
순택이도 웃었다. 김 서기만은 붓끝을 놀리면서도 어정쩡한 낯빛이다.
“이럭하면 좋겠지요?”
하며 김 서기가 수첩에 쓴 것을 두 사람 앞에 내민다. 순택이는 적은 것을 읽어보더니,
“영군의 이름을 먼저 쓰지? 영군이 역시 더 가까우니까.”
하며, 수첩을 영희에게 전하였다.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어요.”
영희는 반대를 하다가 결국은 만족한 듯이 찬성하고 나서, 그 대신에 간역자(看役者)로 김 서기의 이름까지 쓰자고 발론을 한다. 김 서기는 사양을 하다가, 이의 없이 영희의 의견대로 결정하였다.
영희는 지저분하게 된 것을 다시 정하게 쓰려고 김 서기의 연필을 달라고 하여 수첩을 한 장 넘기어서 다시 쓴다――
‘……최영희(崔榮喜) 공학사 리순택건지(工學士李淳澤建之) 감역 김 × × 4 월 일’ 이라고 써놓고 영희는 한참 들여다보다가 혼자 방긋 웃는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내가 세우는 비를 공학사 선생이 설계를 하고 김 선생이 간역을 해 주신 것 같군! 돌아간 이는 참 명예로군!”
하며 유쾌한 듯이 또 한 번 깔깔 웃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까, 내가 세우는 비를 공학사 선생이 설계를 하고 김 선생이 간역을 해 주신 석 같군! 돌아간 이는 참 명예로군!”
하며 유쾌한 듯이 또 한 번 깔깔 웃었다.
이튿날 아침에 영희 내외가 겨우 세수를 하고 앉아서 서울서 온 신문을 보며 있으려니까 김 서기가 달겨들었다. 벌써 인부들을 끌고 상상에 올라가서 일을 시작해 놓고 내려오는 길이라 한다.
영희는 그만큼 열심으로 일을 보아 주는 김 서기의 후의가 반감고 고마웠다.
김 서기는 군청으로 들어가면서 낯에는 틈이 없기 때문에 믿을 만한 사람에게 부탁은 하고 왔지마는 나중에 좀 올라가 보라는 말까지 이르고 갔다.
김 서기가 간 뒤에 순택이 내외는 밥상을 받았으나 별로 이야기도 없이 잠자코 먹었다. 목포서 떠난 뒤로는 신혼여행 같은 기분이 피차에 없어지고 무슨
볼일이나 보러 가는 사람처럼 재미라는 것보다는 의무적 관념이 앞장을 섰다. 하기 때문에 대개는 서로 덤덤히 앉았을 때가 많다.
순택이에게는 영희가 하는 일이 그다지 불유쾌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껄껄대이며 흥에 겨워할 형편도 못 되었다. 또 영희로 말하면 미안한 생각에, 될 수 있는 대로는 온화한 낯으로 일부러 이야기도 끌어내지만, 역시 제각기 자기
혼자대로의 기분 속에서 노는 수밖에 없다.
지금도 아침밥을 먹고 났으나 순택이는 별로 갈 데도 없어서 매우 무료한 듯 이 집 안을 빙빙 돌아다니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벌떡 나가자빠져 버렸다.
이 거동을 보고 앉았던 영희는 딱하기도 하고 또 산에 올라가기 전에 해야할 일도 있어서 겸두겸두하여,
“심심하시건 어데던지 산보나 하시구 오시구려. 그 동안에 나는 머리두 빗구 옷두 갈아 입을 테니 !”
하며 남편을 나가도록 충동였다.
“나가면 같이 가지. 차리는 동안 기다릴게…….”
순택이는 이렇게 대답을 하고 여전히 드러누웠다가, 머리는 빗을 생각도 아니하고 멀거니 자기만 바라보고 앉았는 영희를 보고 여자에게 보통 있는 일로 혹시 혼자 할 일이 있어 그러지나 않는가 하는 생각이 나자,
“좀 나갔다가 들어올까.”
하며 벌떡 일어나서 양복을 주섬주섬 입 었다. 영희는 어쩐지 남편을 내쫓은 것 같아서 미안하면서도 옷 입는 것을 거들어 주었다.
순택이가 암말 없이 나가는 쓸쓸한 뒷모양을 방문 밖에 나와서 바라보며 섰던 영희는 좀 마음이 덜 좋기도 하였다.
영희는 자기 방으로 들어와서 가방이 놓인 앞에 펼찍 주저앉더니, 핸드백에서 열쇠를 찾아내서 가방 뚜껑을 열고 옷 한 별을 꺼내 놓고 나서 다시 쑤석쑤석하여 하얀 나무 괴짝을 꺼내어 열어 본다. 그 속에는 수지 뭉텅이 한 봇짐하고 자기의 사진 한 장이 들어 있다. ― 이것은 서울서 떠나오던 날 자기 방에서 가지고 나와 마루에서 가방에 넣던 것이다.
영희는 우선 사진을 꺼내서 한참 들여다보다가 가방 속에 툭 던지고 나서 그 수지 뭉치도 꺼내어 허리에 비끄러매인 노끈을 끄르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서 펴 본다. 여기저기 눈에 뜨이는 대로 주워 읽어 본다. 끓는 사랑을 하소연한 아름다운 글귀를 볼 적마다,
“나도 이런 말을 쓴 때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고 혼자 웃고 앉았다가 날짜를 찾아보고,
“오, 이건 그때 쓴 거로군 !”
하고 먼 날의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보며 멀거니 앉았다.
이 수지 뭉치는 영희와 수삼이가 몇 해를 두고 주고받은 사랑의 기록이다. 수삼이와 만난 뒤에 서로 타는 가슴 끓는 열정을 역력히 그린 기념탑이 이것이요, 수삼이에게 향한 한 조각 붉은 마음의 향기로운 흔적이 스며 있는 것도 오늘에 와서는 이 묵은 휴지 속에 쓰인 글자밖에 또다시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고 보아 주던 그 사람 ― 이것을 기념삼아 일생의 보배로 잘 간직하여 줄 그 사람 ― 이 넓은 세상 가운데 꼭 한 사람이던 그 사람이 없어진 오늘에 그 글을 쓴 일자는 있어도 그 글을 볼 임자는 없는 오늘에 그 글이 그대로 흩어져 이 사람 저 사람의 손으로 옮아다니게 내버려 두는 것은 영희의 일생의 고통이다. 그리하여 수삼이가 죽은 뒤에 그 관 속에 넣지 않은 것을 섭섭히 생각하며 수삼이의 아우의 손을 거쳐서 찾아다가 수삼이에게 받은 편지와 함께 둔 것이었다.
그러나 임자를 잃은 이 사랑의 폐허(廢墟)를 영희 자신이 자기의 가슴에 품고 다니는 것은 한층더 비참한 일이요 가슴이 저린 일이었다.
……영희는 드디어 이 휴지 뭉치의 임자를 찾아왔다. 이 사랑의 폐허를 인간의 폐허에 묻으려고 ― 영원히 가신 님의 가슴에 품어 두려고 영희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 속에는 수삼이와 동경에서 마지막으로 이별한 후에 매일 서로 교환하던 일기도 함께 섞여 있었다. 또 그 중에는 수삼이의 훌륭한 사랑의 시도 있었다.
영희는 또다시 한 번 모조리 읽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으나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없애 버려야 하겠다 하고 종이 뭉치를 두 손으로 휩싸서 들고 벌떡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어디서 태울까 하고 이리저리 호젓한 곳을 찾아다니다가 하녀를 데리고 온돌방 아궁이를 찾아갔다.
영희는 아궁이 앞에 종이를 수북이 풀어 놓고 성냥을 확 그어 대인 뒤에 하녀더러 자기 방에 가서 흰 종이를 가져오라고 일렀다.
불은 댕기기가 무섭게 보기 좋게 훨훨 타기 시작한다. 세차게 치받쳐오르는 씨원스런 불길을 똑바로 들여다보고 앉았는 영희의 얼굴은 점점 상기가 되고 눈이 화끈화끈하여졌다.
한참 타오르던 불길은 별안간 확 꺼져 버리고 까맣게 탄 재가 차곡차곡 종이 조각을 접은 태로 가랑잎처럼 뻗친 속에는 불기가 아직 남아서 반짝거리며 뭉긋뭉긋 속으로 타들어간다. 영희는 좀먹어 가듯이 불빛이 번져 가는 것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까만 재 위에 아직도 잉크로 쓴 글자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들어서 읽어 본 뒤에 그대로 사뿟이 놓는다. 어쩐지 태운 것이 아깝고 서운하나, 이것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남편에 대한 성의의 표시라고도 생각하는 것이다.
영희는 하녀가 가져온 반지 몇 장을 펴놓고 타고 남은 재를 둘이서 그러모아 봉지 봉지 쌌다.
“이걸 무얼 하세요?”
하녀는 이상한 듯이 묻는다.
“약에 쓸 거야.”
“무슨 병에요?”
“글쎄? 무슨 병에 쓸구? ……상사병에 쓴달까 !”
“하하하…….”
하녀는 깔깔깔 웃으며 종이 봉지를 들고 영희를 쫓아 나왔다.
자기 방에 와서 영희는 돈 몇 푼을 하녀에게 주고 조선 백지를 석 장만 얼른 사 오라고 이르고 나서 자기는 가방에 던져 둔 4년 전의 자기 사진과 만년필을 꺼내 들고 머무적머무적하다가 사진 뒷장에 이렇게 썼다.
‘가신 님의 넋이라도 반겨하실까 하여 님의 모든 것이었었어요. 나의 모든 것인 이 몸을 대신하여 바치나이다. 임술년 4월 일 최영희’
라고 꼭꼭 박아 써 가지고 또다시 들여다보다가 하녀가 사 가지고 온 백지를 받아서 우선 사진을 네모 반듯하게 싸놓고 또 한 장에는 재를 모아서 쌌다.
“그건 그렇게 싸서 무얼 하세요?”
뒤에 섰던 하녀는 기웃이 들여다보며 또 묻는다. 영희는 무심코 앉았다가 깜짝 놀라며,
“무얼 하든지 어서 나가!”
실없는 말처럼 웃으며 이렇게 소리를 질러서 내쫓았다.
하녀가 나간 뒤에 영희는 재를 싼 봉지를 궤짝 속에 넣고 그 위에 싸서 놓았던 자기 사진을 집어넣으려다가 그래도 미진한 것이 있던지 그 사진을 다시 헤치고 물끄러히 들여다보고 앉았다. ……영희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하여졌다. 지금 영희는 자기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먼 데 가는 친구와 작별이나 하는 심사이다.
……얼이 빠져 앉았던 영희는 이러고 앉았을 때가 아니라고 정신을 차리고 펴 보던 사진을 얼른 싸서 궤 속에 넣고 뚜껑을 딱 닫았다. 관뚜껑을 닫는 것 같았다. 영희는 지금 난 궤 뚜껑 소리가 사라져 가는 것을 쫓듯이 귀를 기울이고 또 한참 멀거니 앉았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 위를 백지로 또 한 번 싸서 보자기에 다시 쌌다. 영희가 할 일을 마치고 머리를 막 빗으려니까 순택 이는 재미없었다는 듯이 머쓱해서 돌아왔다.
“어때요? 무어 볼 게 있에요?”
영희는 웃으며 남편을 치어다보았다.
“무어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머리는 왜 이때까지 못 빗었드람?”
“고 동안이 얼마나 되기에……. 옷 벗지 마세요. 곧 나설 테니.”
영희는 경대 앞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손을 싸게 놀린다.
순택이는 잠자코 바라보며 서 있다가,
“내일 낯에는 떠나게 될까? 순천까지라도 갔으면 좀 낫겠군.”
하며 갈 생각만 한다.
“하로만 더 참으면 될 텐데, 나두 있구 싶어 있는 줄 아슈? 죄송합니다.”
영희는 이렇게 핀잔 같은 위로를 하고 경대 앞에서 일어나서 손을 씻고 들어와 옷을 갈아 입었다.
“군수가 초대를 한다지 ? 가 볼 테면 얼른 다녀와야지.”
“글쎄, 김 서기더러는 폐가 되니 그만두라고 하였지만 어떻든 얼른 다녀오십시다.”
두 사람은 방에서 나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영희 옆구리에는 나뭇갑을 싼 보자가 끼어 있다.
“그건 무어야?”
순택이는 앞장을 서서 나가다가 돌아서며 묻는다.
“먹을 것 ! 하하하…….”
“먹을 거라니 점심을 가지고 간단 말야?”
순택이는 유심 히 그 보따리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영희도 생글생글 웃기만 하면서 대답은 아니한다.
영희 내외는 어제 다녀온 길을 몇 번씩이나 물어 가며 겨우 찾아 올라갔다. 산역꾼들은 아닌게아니라 꽤 분주히들 왔다갔다하며 떠들썩하다. 영희 내외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여러 일꾼들은 손을 멈추고 구경거리나 난 듯이 돌려다들 본다. 토성 위에 앉아 감역하던 깍정이는 이 일행을 보더니 뛰어내려와 맞으면서,
“영감님이 이 일을 시키시오?…… 저 김 주사가 친히 보질 못한대서 제가 대신합니다. 오늘 해전으로는 사초두 끝날 테요, 비석도 아마 다 되겠지요. 저기 저렇게 파놓기까지 하였으니 곧 됩니다.”
하며 묻기도 전에 설명을 한다. 순택 이는 응응하며 듣고만 있다가 아무 흥미도 없는 듯이 이리저리 거닐며 서성거리었다. 그러나 영희는 엉정벙정 일을 하는 구경만 보아도 기뻤다.
영희는 신기가 좋은 듯이 남편 앞으로 가서 서며,
“우리가 결혼을 하고 여기 찾아온 것을 고인의 영혼이 알았다면, 노할까? 자랑이나 하랴 온 줄 알고― 너희들은 내 머리 위에서 춤을 추랴 왔느냐 하지
는 않을지?”
하며 무두 무미하게 이렇게 한 마디를 하고 순택이의 얼굴을 치어다본다.
“뭘 그렇게야 알까. 그리게 이렇게 우리 둘이 비라두 세우랴고 애를 쓰지 않나!”
“그래요. 참 그리기에 될 수 있는 대로는 잘 해 주어야 할 거예요. ……내일
비를 세우건 차례라도 한 번 지내구 싶건만…….”
영희는 남편의 의향을 떠 보았다.
“아무려나. 그거 좋겠지.”
순택이는 곧 찬성하여 주었다. 그러나 선뜻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부친이 폐백도 아니 드리고 차례도 지내려 내려가지 않고 떠난 것을 얼마나 꾸중하실까 하는 걱정이었다. 동경도 그만두고 도로 서울로 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아씨 ! 이리와 보시죠. 지금 묻습니다.”
아래편에서 감역한다는 아까 만난 깍정이가 올려다보면서 소리를 친다. 영희
는 달음질을 쳐서 내려갔다.
인부들은 네모 번듯하게 파놓은 구덩이에 백회며 새벽이며 조약돌을 섞어서 반죽을 한 흙을 부삽으로 퍼부어 가며 달구질을 한다. 영희는 한참 들여다보다가 반쯤 긁어 넣은 것을 보고 잠깐 기다리라 하더니 보자기에 싼 것을 꺼내서 달구질하던 인부들에게 주며 꼭 한가운데에 파묻고 그 위로 흙을 부으라고 일렀다.
― 이와 같이 하여 영희의 사랑의 전량(全量)과 반생의 청춘을 성냥 한 개비로 살라 버리고 난 검은 재와 사랑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기념이던 영희의 사진은 영희의 정성으로 세우는 한 조각 돌멩이의 비석 밑에 천변 지이가 있을 그때까지 고요히 감추어지게 되었다. 홍수삼의 살과 뼈가 시신도 없이 삭아 버리고 최영희의 몸이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는 날에도 이 땅 위에 아직 남아 있을 것은 백지에 싼 이 궤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인들 천 년을 가랴, 만 년을 가랴마는 다만 수삼이에게 보낼 것은 다 보냈으니, 영희의 마음이 인제는 거뜬할 따름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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