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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사랑하는 남자 홍대유
 
 
 
카페 게시글
☆―…… 차 한잔의 여유 스크랩 말이 가면을 쓰는 이유[단편소설]
비카러브 추천 0 조회 73 08.07.26 12:17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단편소설]




               말이 가면을 쓰는 이유



                                                               



  탈영병을 잡으려던 불심검문에서 뜻밖에도 살인범이 체포되었다. 피의자는 키가 몹시 작은 사내였는데, 그가 몰던 구형 소나타의 트렁크에는 여자 사체가 들어 있었다. 사체의 신원은 피의자의 아내로 밝혀졌다. 피의자는 도망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지 검거 과장에서 순순히  두 손을 내민 모양이다. 수갑을 채이면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한다. 나는 악벽(惡癖)의 말고삐를 틀어잡듯 마누라의 목을 단단히 거머쥐었을 뿐이오, 라고. 닭 모가지를 비틀 힘도 없는 겁먹은 목소리로 말이다. 또한 체포 현장에 있었던 검문소 책임자의 말에 따르면, 당시 손을 내밀던 피의자의 모습은 반쯤 얼이 빠진 상태였다고 했다.   


  #

  사내는 잔뜩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취조가 계속 되는 동안 내내 그런 모습이었다. 나의 물음에 순순히 대답을 하면서도 결코 얼굴을 똑바로 든 적이 없었다. 그러니 눈을 감고 있지 않다면 사내의 시선은 계속 자신의 발등만 내리찍고 있는 셈이었다.

  고개를 숙임으로써 드러난 사내의 덜미는 한 손아귀에 쏙 들어올 만큼 말라 있었다. 그 앙상한 뒷덜미를 낚아채서 손에 조금만 힘을 준다면 사내의 목은 그대로 뚝 떨어져 바닥으로 뒹굴 것만 같았다. 저런 녀석이 어떻게 자신의 목은 무사히 간수한 채 호랑이 같은 마누라의 목은 조를 생각을 했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수리를 약간 비켜난 사내의 오른쪽 머리에는 원형탈모증 증세가 뚜렷했다. 드러난 동전만한 두피가 내 눈보다 두어 뼘은 족히 아래에 있었다. 그만큼 사내는 키가 작은 남자였는데, 그의 전직이 기수(騎手)라나 어쨌다나. 만일 그런 사실을 몰랐다면 누군가가 사내가 앉은 의자 다리를 몰래 조금 잘라버린 게 아닌가 싶어, 그가 앉은 의자 밑을 살펴보았을지도 몰랐다.

  고개를 숙인 채 잔뜩 웅크린 사내, 보면 볼수록 그는 어린아이처럼 작고 무기력하게만 여겨져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저런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다니… 나는 일순 사내가 불면 날아갈 만큼 전혀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아 그를 번쩍 안아 올려보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뭔가 착오로 초등학생을 괜스레 예까지 잡아와 앉혀놓았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편치 않은 마음이 어느새 또 담배를 피워 물게 했다. 재떨이에는 이미 몇 개의 꽁초가 짓이겨져 있었다. 골이 난 사람처럼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빨아들인 나는 눈 아래에서 어른거리는 사내의 머리를 보자, 그 원형탈모증 부위를 타깃 삼아 연기를 세게 내뿜었다. 순간, 사내의 어깨가 갑자기 부르르 떨렸다. 꼭 내가 쏜 화기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처럼. 어이없게도 그런 반응에 나는 돌연 짜릿한 흥분과 쾌감을 느꼈다. 마치 한치의 오차도 없는 멋진 사격으로 단번에 목표물을 명중시킨 저격수처럼. 신이 난 나는 계속해서 담배연기 총을 사내의 머리를 향해 쏘아댔다. 한 발, 두 발, 세 발…

  연기를 맞을 때마다 사내는 벌써 몇 번째 똑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어깨가 떨렸으며 고통을 참는 듯이 몸을 비비꼬았다. 꽁초가 될 때까지 사내의 이런 반응은 이어졌는데, 그제야 나는 사내의 몸서리가 그 또한 담배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 때문임을 알았다.

  “이봐.”

  담배곽을 내밀자 충혈된 눈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머뭇거리던 사내는 나의 호의가 거짓이 아님을 알자 허겁지겁 팔을 뻗었다. 라이터는 내가 직접 켜주었다. 불을 받는 사내의 손이 좀전의 어깨처럼 떨리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아이처럼 사내는 쫓기듯 연기를 빨아들였다. 사내의 양 볼이 깊게 패일 때마다 담배 끝이 잉걸처럼 이글거렸다. 흩어지는 연기를 보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저 담배연기처럼 사내를 고통 없이 사라져버리게 할 방법은 없을까, 하고.

  “진범인데, 팍팍 밀고 나가지 그래.”

  오늘 당직인 김 형사였다. 그는 일어선 채로 사내의 뒤쪽에서 송수화기를 집어들고 몽둥이처럼 흔들어 대었다. 만일 모르는 사람이 그 꼴을 본다면 피해자를 몹시 두들기라는 시늉으로 여기기 십상일 것 같았다.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김 형사의 행동은, 그러나 잠깐 자리를 비울 테니 전화를 대신 좀 받아달라는 사인에 불과했다. 당직에 대비해 그는 미리 저녁을 먹고 올 모양이었다. 

  일이 없으면 동료들의 퇴근은 시간에 맞춘 썰물 같았다. 소리도 없이 삽시간에 빠져 달아났으며, 이지러진 책상만 을씨년스러운 갯벌처럼 남겨놓곤 했다. 완벽한 각개 철수작전을 연상시키는 이같은 현상은 이를테면 언제 또 생길지 모르는 범죄의 공격에 대비한 휴식 같은 것이었다. 출입기자들의 눈이 반짝반짝해질 만한 사건이라도 터질라치면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는 치들이 바로 그들이었기에 말이다.

  오늘은 정말 유난히도 평온한 하루였다. 흔히 우리끼리의 말로는 기자들이 하품하기에도 지겨울 만큼 조용한 날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그러므로 퇴근 시간에 이르자 사무실은 더욱 겨울 백사장만큼이나 썰렁했던 것이다. 이 조그만 사내가 잡혀들지 않았던들 나 또한 오늘은 조서 한 장 꾸미지 않고 퇴근을 했을 터였다. 사내가 내 앞으로 배당이 된 건 그러니까 빨리 썰물을 타지 않고 괜히 사무실에서 여유를 부리며 어정거리다가 재수 없게 덜미를 잡힌 꼴이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간 김 형사는 수사과 1, 2반을 통틀어 가장 고참 형사로, 당직 때마다 속을 든든히 채워두는 버릇이 있었다. 짐작컨대 오늘도 그는 또 모퉁이 실비식당에서 머리고기를 잔뜩 썰어 넣은 순대국에다가 양념장을 벌겋게 풀어 아귀아귀 먹을 게 뻔했다. 소주 한 병을 큰 컵으로 따라 음료수 들이키듯 하며. 나는 강력계의 중고참쯤 되었다.

  김 형사가 사라진 문에서 시선을 끌어당기자 사내의 손에는 필터만 남은 꽁초가 들려 있었다. 손 떨림은 이미 눈에 띄게 가라앉은 뒤였다. 담배가 약이었을까, 발등만 찍던 고개도 한층 반듯해져 있었다. 봉사가 방금 개안을 한 것처럼 그는 눈알마저 제법 이쪽저쪽으로 굴러대었다. 뭍으로 오른 게가 주위를 흘금거리며 훔쳐보듯 한 그는 이제 이 사무실에 자신과 나 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침을 꿀꺽 삼켰다. 오랫동안 새우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었던 게 힘들었던지 팔과 어깨를 살짝 움직여보기도 했다. 그 바람에 뚝 하고 관절 꺾이는 소리가 나자 제풀에 놀란 그가 얼른 다시 몸을 찌그려뜨렸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터지려던 웃음을 가까스로 참은 나는 애써 사내를 못 본 체했다. 그러고는 짐짓 턱짓으로 담배를 가리켰다.

  “한대 더 해도 괜찮아.”

  나의 말에 사내가 움찔거리더니 겸연쩍게 웃었다. 그제야 나도 덩달아 피식거렸는데, 덜미를 사리며 웃는 사내의 꼴이 영락없이 주위의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놀라 자신의 갑옷 속으로 목을 움츠리는 자라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내가 다시 천천히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쫓기는 듯한 조금 전과는 달리 제법 차분한 모습이었다. 눈빛이 안정되어 있었으며 손도 더는 떨리지 않았다. 다만 담배를 빠는 속도만은 아직도 좀 빨랐는데, 잇달아 두 대를 피워댄 연기가 초췌한 그의 얼굴 주위를 희미하게 떠돌았다. 안개처럼 떠도는 연기 사이로 그의 운명같이 담뱃재가 불안스레 꽁초 끝에 매달려 있었다.

  김 형사의 말처럼 팍팍 밀고 나가지 않더라도 사내는 연시같이 부드러웠다. 질문에는 고분고분했으며, 대답을 꾸미는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너무 작고 힘이 없는 목소리가 귀에 거슬릴 뿐이었다. 이봐, 사람을 죽일 때는 언제고 그렇게 힘이 없나. 이렇게 퉁을 주었지만 사내의 음성은 여전히 기어들듯 했다. 지금까지의 정황만을 놓고 본다면 그의 말처럼 살인은 우발적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주검을 묻고 곧 바로 자수할 생각이었다는 그의 주장에는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었다. 나는 그 회의를 걷어내기 위해 다시 사내의 대답을 유도했다.

  “시신을 묻으려 한 짓은 명백한 범죄 은폐 기도라고밖에 볼 수 없어. 조사를 해보면 알겠지만, 아내 이름으로 보험 같은 걸 들어놓은 것은 없나?”

  사내의 입술이 맥없이 꼬였다. 희미한 웃음기가 그 입술 주위에 마른버짐처럼 피었다. 어쩔 수 없이 변명을 해야겠다는 듯 사내가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현역 기수 시절에도 저는 보험 같은 걸 들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맞아. 이 치의 전직이 기수라고 했지. 경마장의 생리를 속속들이는 몰라도 나는 기수가 얼마나 위험한 직업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가 다리를 약간 저는 것도 낙마 사고 때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사내가 하지 못한 뒷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보험 따위에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 사고의 결과로 많은 보험금을 탓을 겁니다. 어쩌면 이같은 사건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르구요. 설사 생겼더라도 좀더 먼 훗날이 되었을 겁니다, 사내는 이런 말을 하고자 한 게 아닐까 싶었다.

  자수를 할 생각이었다면 왜 굳이 시신을 유기하고자 했을까? 어차피 수사가 진행되면 다 파헤쳐지게 될 텐데 말이다. 이 점이 나로서는 도무지 석연찮은 부분이었다. 물론 사내의 생각이 거기까지는 미치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실제 그렇게 대답하기도 했다. 사내는 그것을 살인으로도 감당 못할 끓어오르는 증오심 때문이라고 힘겹게 설명했던 것이다. 사내의 말이 진실이라면 가증할 증오심이 결국 시체의 유기로까지 발전했다는 것인데, 글쎄, 모를 일이었다. 

  “아내도 아내지만 장모가 더욱 미웠으니까요. 결혼하기 전부터 장모는 저를 탐탁지 않게 여겼죠. 꼭 난쟁이 같다며. 게다가 제가 다리까지 다치게 된 뒤로는 아예 병신 폐인 취급을 하지 뭡니까. 그래서 전 아내의 시신조차 찾지 못하게 함으로써 장모와 처가쪽 식구들에게 내 가슴의 상처만큼 못을 박고자 했던 겁니다.”

  이것이 체포되기 직전까지의 앞뒤 따져볼 겨를조차 없었던 자신의 심정이었노라고 사내는 거듭 어렵사리 주장했다. 그러고는 나를 보며 설핏 웃었던가. 처량한 웃음이었다. 입가에 희미하게 퍼지던 사내의 웃음은 문득 동짓달 새벽하늘 한 모퉁이로 스러져가는 그믐달을 연상시켰다. 어린 시절 나는 흔히 보곤 했었다, 겨울 미명에 오줌보를 틀어쥐고 마루를 내려서면 한이 서린 희뿌연 칼날을 처마 끝에 꽂고 있는 것 같던 차가운 그믐달의 모습을. 또한 때맞추어 들리던 동구 밖 강의 얼음 갈라지는 소리는 그런 나의 귀마저 얼어붙게 하지 않았던가. 왠지 한기를 느끼게 하는 사내의 이같은 웃음을 보며 나는 그의 범행과 진술 내용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고 있었다.

  사내는 오늘 오후, 불신검문으로 체포되었다. 그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운 나쁘게도 때마침 발생한 인근 부대의 무장 탈영병이 그의 자수를 방해한 셈이었다. 사내의 아내 사체는 그가 몰던 낡은 소나타 트렁크에서 발견되었다.

  탈영병은 소총과 권총, 수류탄 다섯 개를 훔쳐 부대를 이탈했다. 사건이 터지자 그 일대에는 비상이 걸렸으며, 소속부대에서는 재빨리 수색조를 파견하는 한편 임시 초소를 세웠다. 도로를 차단한 군경 합동 근무자들은 지나가는 차마다 트렁크까지 열게 했는데, 이런 검문검색이 사내의 검거 단초가 되었다.

  사내는 순순히 검문에 응했으며, 두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피의자는 내 앞으로 넘겨졌다.

  사체를 어떻게 유기하려 했느냐고 내가 물었을 때, 사내는 멍한 시선으로 그저 고개를 내저었다. 막연히 시신을 처리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딱히 방법은 생각해보지 않았노라고 사내는 떠듬거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불보에 싼 사체를 자신의 차 트렁크 속에 실은 채 두 시간 동안을 계속 외곽도로만 주행한 사내의 행동에 주목했다.

  현역 기수 시절 사내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동료들에 비해 말몰이 기술이 뒤떨어졌으며, 인기 기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승률도 낮았다. 그래도 웬만한 봉급 생활자 이상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동료 기수들의 도움 덕택이었다. 기수학교를 졸업한 기수들은 동료나 선후배간의 사이가 전우애처럼 남달랐는데, 엄격한 기율과 통제 속에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 기수학교가 군대와 방불한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들의 학과 교육과 실습은 생도들 같은 정신 무장을 필요로 했으며, 기숙사 생활도 훈련병의 내무반처럼 절도와 절제를 요구했다. 자칫 방심 때문에 생긴 오발이 전우의 생명을 위협하듯, 아차 하는 순간 낙마가 자신은 물론 그 여파로 곁에서 말몰이를 하던 동료에게까지 치명적인 사고를 유발시킬 수 있었던 까닭이다. 게다가 한 기(期)의 동료래야 기껏 열 명이 채 못되었으므로, 그들의 동료애는 두텁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키 작은 기수들의 소원이 뭔지 아십니까? 저는 첫눈에 집사람에게 반했죠. 얼굴도 얼굴이지만 무엇보다 그 미끈하고 긴 다리에 말입니다. 같이 걸을 때면 뿌듯함에 저절로 가슴이 쭉 펴지곤 했죠. 소망이던 늘씬한 롱다리의 애인을 얻은 성취감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난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물론 사내의 이런 이야기는 중요하지도 않았고 진술 내용에 포함시킬 수도 없었다. 법은 언제나 결과만을 따지니까. 정상 참작은 재판 과정에서나 나올 법한 문제였다. 사내는 살의를 일으키게 되기까지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았지만, 검사의 시퍼런 눈흘김을 당하지 않으려면 위와 같은 사내의 말을 나는 이렇게밖에 요약할 수가 없었다.

  …피의자는 연애 시절부터 아내를 끔찍이 사랑했던 바 결혼을 한 뒤에도 그 순애보는 변함이 없었는데, 경마장의 민주화와 더불어 수입이 줄어들자…

  위로 올릴 사건 보고서를 모니터로 훑어보며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경마장의 민주화’란 말이 거슬려서 커서를 다시 그곳으로 이동시켰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고칠 수가 없었다. 깜박거리는 커서만 바라보며 망설이는 동안 눈앞의 화면에는 점점 살의로 치닫는 취조과정에서 드러난 사내의 삶이 어느새 파노라마처럼 계속 펼쳐지고 있었다.

  롱다리의 애인을 갖게 된 사내는 그녀의 마음을 묶어두기 위해 끊임없이 선물 공세를 퍼부어야만 했다. 어떤 때는 목걸이 하나를 사주기 위해서 월수입의 배가 넘는 돈을 꾸어야 할 적도 있었다. 사내의 이런 값비싼 구애작전이 동료들에게 알려지자 기수들 사이에서는 빈정거림도 없지 않았다. 연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는 것도 좋지만 그러다가는 장가도 들기 전에 지레 깡통을 차겠다고. 제일 친한 기수 하나는 그런 빈정거림을 은근히 흘리며 충고를 하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애인을 향한 사내의 순정은 바위처럼 단단했다. 난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그의 얼굴은 언제나 이런 각오였으며 바늘 끝만큼도 그 표정엔 빈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그 친구마저 두 손을 들고 말았는데, 알다가도 모를 일은 나중엔 이런 대담무쌍한 사내의 순애보에 감동을 느끼는 동료들까지 생겨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이 동료들은 때때로 사내를 위해서 비밀회의를 갖게 되기에 이르렀다. 말하자면 사내의 성공적인 사랑을 위한 ‘고삐 당기기 작전’ 모임이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기수들의 유대관계는 남달랐습니다. 전우애가 그러하듯 특히 동기들끼리는 그랬죠. 그들은 다소 기승술이 뒤떨어지는 저를 1착으로 보내기 위해서 기꺼이 말고삐를 당기기까지 했답니다. 경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포착되면 당연히 가해질 제재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벌어들인 상금은 모두 여자를 위해 소비되었다. 사내의 선물공세와 굵은 씀씀이가 이어지자 여자는 기수라는 직업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여자의 눈치에 민감하던 사내는 그럴 적마다 경마장을 풍성한 어장으로 그려 보였다. 기웃거리던 남자가 많던 여자로서는 사내의 말에 망설임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문지방을 타넘는 중에도 여자는 생각이 열 번은 더 바뀐다고 했지만, 여자의 선택은 결국 이랬다. 돈을 갈퀴질할 수 있는 어장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키 작은 남자뿐이고, 따라서 최선의 결정은 황금어장에서 일하는 남편을 택하는 거라고. 물론 이런 선택 뒤에는 실속을 원하는 처가 식구들의 부추김도 한몫을 했으리라. 특히 포주를 떠올리게 하는 장모라는 인물은.

  그러나 어장이 점점 옛날 같지 않게 되자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상 수온에 따른 적조현상과 공해문제로 한해가 다르게 고기가 줄어들듯 개인마주제가 정착되고 건전하게 오락을 즐기려는 고객이 많아짐으로써 경마장도 이미 예전의 경마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부정경마에 대한 감시감독이 갈수록 강화되어 그만큼 불신의 요소와 싹이 제거되어 가는 추세였기도 했다.

  이에 비례해 사내의 어획량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자 이미 사내의 아내가 된 롱다리의 여자는 또 생각이 많아지고 있었다. 어떤 때는 아예 보란 듯이 남편 앞에서조차 후회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는데, 그럴 적마다 사내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장의 물이 자꾸 맑아지기 때문이야. 벌이가 시원찮아지는 이유를 사내는 이렇게 설명했지만, 그의 아내는 이해하지 못했다. 오로지 그녀는 경마장을 터무니없는 화수분으로 본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생각에만 빠져 있을 뿐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밀물처럼 경마장에 자꾸 자유경쟁체제와 투명한 경영이 도입되자 두텁던 기수들 간의 우애도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했다. 실적 평가제가 확산되자 일반 기업은 물론 공무원 사회에서조차 연공서열의 위계가 차츰 무너지는 현상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능력이 없는 기수도 시간만 지나면 어느 정도의 수입은 보장이 되었건만 갈수록 이런 틈서리가 점점 작아져 갔던 것이다. 특히 부정 경마에 대한 감시나 처벌은 날로 강화되는 입장이어서 이같은 매서운 바람 앞에서는 기수들도 그저 자신의 옷깃만 여미기에 급급할 뿐이었다. 이런 결과는 기수 사회가 군대 같다고는 하지만 정말로 군대는 아닌 것처럼, 기수애가 남달리 끈끈한 정으로 뭉쳐졌을망정 전투 속에서 피로 맺어진 전우애와는 아무래도 차이가 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었다.

  -자연히 말몰이 기술이 뒤지는, 승률이 떨어지는 기수들은 설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수주 결과가 곧 능력이요 봉급으로 직결되는 외판회사에서 영업 실적이 부진한 사원은 살아남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저 같은 경우, 근근이 조교사와 고용 계약을 맺기는 하나 기승 횟수는 아주 적었죠.

  시간이 지날수록 사내의 수입은 줄어들었고, 아내의 불만은 더해갔다. 한때 사내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장모는 어느새 아내보다 더한 적의를 공공연히 드러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못 견딜 일은 아내에게 수태를 불허하는 장모의 종용이었다. 아이만 생겼더라도 사태가 지금처럼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사내는 확신했다. 아내에 대한 배신감이 아무리 컸다 해도 어미 없는 아이로 만들 만큼 극단적인 행동을 할 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요. 사내는 이렇게 말했지만, 그와는 반대의 생각을 가진 장모도 나무랄 수만은 없었다. 아직 누가 보아도 그 미끈함에 저절로 눈이 가는 딸의 다리에 족쇄를 채울 만한 건더기는 만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게 바로 장모의 속내였던 것이다.

  사내가 피임과 장모와의 관계를 이야기할 즈음 사실 나는 반면교사를 바로 코앞에서 본 듯한 묘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와 사내가 처한 반대 상황이 야릇하게 느껴지기도 했거니와, 그것이 또한 양쪽에게 모두 심각한 대결국면을 야기했다는 점이 아이러니컬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피임을 종용하는 사내의 장모를 상상하듯 문득 나는 내 아내의 수태에 대한 집념을 떠올려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아내는 자신의 주장을 여명처럼, 은은함 뒤에 강렬한 태양을 숨겨놓은 새벽노을처럼 슬쩍 내비치지 않았던가. 이따 병원에 가볼까 해요. 괜찮겠죠? 당시 아내의 물음은 뜨거운 햇볕처럼 나의 얼굴을 달구었던 터였다. 그 바람에 나는 밥을 뜨다 말고 수저를 놓아버리고 말았고, 아무 말 없이 식탁을 물러나는 나를 아내의 꼿꼿한 시선이 탐조등처럼 뒤쫓았었다.

  며칠씩 예사로 집을 비워야 하는 남편을 둔 아내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의 잦은 부재를 또 하나의 아이를 새로 가짐으로써 해소하려는 아내의 생각을 나는 별로 찬성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아내는 나의 애정보다 시어머니의 사랑과 인정을 더 받고 싶어하는지도 몰랐다. 이미 우리에게는 초등학교 5학년생인 딸이 있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기어이 애를 하나 더 가지고 싶어했던 것이다. 405호 말이에요, 그 집 아이를 볼 때마다 어머님의 눈빛이 얼마나 간절한지 아세요? 이웃집 늦둥이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아내의 가슴에는 화살로 와 박혔던 걸까.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를 틈만 나면 405호 여자는 유모차에 태워 바깥을 나돌았다. 그 집에는 이미 중학교 3학년짜리 쌍둥이 딸이 둘 있었는데, 늦게나마 아들을 얻게 되자 그 나이에 손자를 본 것처럼 405호 부부는 기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집 딸 둘은 동생이 생긴 뒤로는 왠지 바깥으로 잘 나오지도 않았고 표정 또한 예전처럼 밝지가 않은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효도하는 셈 쳐요. 아이 말이 나오고, 그래서 내가 불쾌한 표정을 드러낼 양이면 아내는 언제나 전가의 보도처럼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언급했다. 저번에는 어머님이 405호 아이의 사타구니를 헤집고 고추까지 만져보지 뭐예요. 뭔가 아킬레스건을 건드리는 것 같은 아내의 이런 언행은 은근히 나의 부아를 자극하는 바도 없지 않았다.

  그럼 당신은 괜찮은데 오로지 어머니 때문에 애 하나를 더 낳겠다는 거야. 언젠가는 이렇게 버럭 소리를 지른 적도 있었지만, 내 속내인들 편할 리가 없었다. 그 모진 산고를 기꺼이 다시 자청하는 아내에 비하면 능력을 고려치 않는 생산에 반대하는 나의 주장은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린 콧물처럼 내 속에 깃들인 이기와 비겁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럽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아내는 그것을 순전히 어머니의 희망사항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이것이 완전한 아내의 각본이 아닌 이상 여기에는 분명 어머니의 바람 또한 얼마간 포함되어 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했다.

  사실 어머니 생각만 하면 나는 부정맥 증상이 있는 사람처럼 가슴이 저릿해진다. 배 위에다 무거운 돌을 얹은 양 속이 답답하고 거북해지기도 한다. 어머니는 청상으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그 긴 신산한 세월을 어쩌자고 어머니는 나 하나만 바라보고 지내셨을까.

  하지만 문제는 지금까지도 당신께서는 뭔가를 참고 아들 앞에서는 여전히 그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는 데 있었다. 딸 하나를 생산하고 아내가 불임시술을 받으려고 했을 때에도 어머니는 오히려 며느리보다 더 현대적인 여성 티를 내셨다. 잘했어. 지금은 하나면 그만이야. 게다가 키우는 재미는 계집애가 더한 법이지. 사실 ‘하나에서 뚝’으로 결정을 내린 것은 순전히 나의 고집이었다.

  어머니는 갖은 품팔이로 나를 키우셨다. 나는 언제나 식당 주방 아줌마, 또는 파출부의 아들로서 자랐다. 만일 내가 없었다면... 글쎄, 이런 가정은 우스울 뿐이다. 어쨌든 어머니는 나의 점지를 숙명으로 여기고 다른 쪽으로는 눈을 돌리지 않으셨다. 오로지 아들 하나의 양육에 젊음을 탕진하신 어머니가 불쌍하게 보였던 나는 왠지 총각 때부터 내 자신이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에 까닭 모를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이 두려움의 결과 중 하나가 바로 ‘하나에서 뚝’이 아니었을까 싶다.

  경찰이라는 직업을 택한 것 또한 내가 자라온 환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파출부’ 혹은 ‘주방 아줌마’로 불리는 게 싫었다. 그 결과 엉뚱하게 선택한 직업이 경찰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능력의 한계를 느낀 내가 어머니의 위신을 세워줄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이 바로 경찰이라고 단정한 유치한 발상 때문이었다. 상대가 경찰이라면 왠지 모르게 사람들이 경원감을 갖듯, 아들이 형사라면 엊그제와는 달리 어머니를 호락호락하게 보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던 까닭이다. 생각 같아서는 판검사나 경찰청의 간부가 되었으면 좋으련만, 전문대학만 나온 내 실력으로는 감히 넘보지 못할 자리였던 것이다.

  별로 말이 없는 시어머니를 둔 대가인지 아내 또한 나에 대한 불평불만은 상당히 접어두는 눈치였다. 잦은 독수공방과 늦은 귀가에 따른 인내는 형사 직업의 남편을 둔 아내가 마땅히 감수해야 할 고통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아내는 적지 않은 참을성과 순종심을 가진 여자였는데, 그런 점으로 본다면 나는 확실히 마누라 복은 괜찮은 놈인지도 몰랐다. 홀어머니를 모셔야 하는, 그것도 직업이 형사인 외아들에게 성큼 시집올 여자란 이제나저제나 흔치 않겠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런 아내도 아이를 하나 더 갖고 싶다는 주장만큼은 집요했다. 물론 아내의 바람은 단순한 아이가 아니라 아들일 터였다. 또한 그 바람에는 무언의 어머니 소망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더라도 나는 마음이 내키지가 않았다. 자식이란 어쩌면 멍에에 다름 아니고, 겨우 형사 주제에 그 굴레를 하나 더 짊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은근히 두려웠던 때문이다. 게다가 이즈음에 불어닥친 경제위기는 나를 더욱 소심하게 만들었고, 근간에 들어 틈만 나면 계속 ‘하나 더’를 주장하는 아내가 나한테는 영 밉살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하나 있는 자식도 가당찮거늘 애는 또 무슨 얼어죽을 놈의 애! 그러고 당신 나이가 지금 몇인데 다시 애를 낳겠다는 게야, 이렇게 옆방의 어머니조차 의식 않고 고함까지 여러 차례 질러보았지만, 아내는 바람 앞의 버들이었다. 언제나 유연하게 내 폭언을 받아 넘겼으며, 내가 목청을 높일수록 오히려 아내의 음성은 차분해져 나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었다. 그래요. 아이를 낳기에는 힘든 나이일지도 모르죠. 게다가 막은 난관(卵管)을 다시 뚫어야 하기도 하구요. 하지만 나는 자신 있는 걸요. 아내의 이런 속삭임 같은 대꾸가 미풍처럼 귀를 간질일 때면 나는 그만 낮은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는데, 차마 악몽 이야기만은 끄집어낼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나는 이따금 가위눌림에 시달리곤 했다. 쫓던 범인이 갑자기 돌아서며 휘두른 칼에 심장을 찔려 버둥거릴 때가 있는가 하면, 모처럼 일찍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가는데 돌연 고의로 달려든 차에 깔려 신음하는 꿈을 꾸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내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나한테 체포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음흉한 웃음을 머금은 채 죽어가는 나에게 얼굴을 들이대며 이렇게 속삭였다. 이제 네 자식은 여경(女警)이 되려나.   

  “어디 연락 온 데 없어?”

  몽상에 젖어 있던 나는 김 형사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잡념의 과녁을 흐트러뜨렸다. 생각에 빠졌던 나머지 김 형사의 접근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나는 그제야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두 팔까지 길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만세를 부르듯 하는 내 앞을 김 형사가 개선장군처럼 지나쳤다. 그는 포만의 상징인 양 이쑤시개를 비스듬히 입 모퉁이로 물고 있었는데, 한 바탕 트림이라도 해대면 제격일 것 같았다.

  정면으로 지나가는 김 형사의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그의 입술에 눈길이 끌렸다. 옆에서 보면 더욱 그 두툼함이 확연하게 드러나는 입술이었다. 입 생김만을 놓고 본다면 그의 혈관 속에는 ‘만딩고’의 피가 조금은 흐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 정도였다. 어쨌든 검고 두터우며 위로 말려 올라간 김 형사의 입술 언저리에는 벌건 국물 자국이 왕성한 식욕을 대변하는 흔적처럼 남아 있었는데, 나는 이쑤시개를 문 그런 그의 입 모양을 대하자 언뜻 나무꼬챙이에 꿴 문어 산적이 연상되어 애써 웃음을 참았다. 

  “낙마 때문이라고 했는데, 단순한 사고였나?”

  문어 산적을 떠올리면서 나는 턱짓으로 사내의 다리를 가리켰다. 갑자기 날아든 물음에 사내의 고개가 흠칫 들렸다. 그 모습이 꼭 번개같은 잽을 턱에 얻어맞은 권투선수처럼 보였다. 럭비공이 튀는 것 같은 이런 질문은 우리가 이따금 쓰는 취조수법의 하나이기도 했다. 느닷없이 허를 찔러 피의자의 진심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이라고나 할까. 사실 나는 진작부터 사내의 저는 다리에 대해 궁금증이 느껴져 코를 들이대어 보고 싶기도 한 터였다.

  사내는 춥게 느껴지는 앙상한 목덜미를 곧추세우며 나를 마주보았다. 나는 눈살에 지그시 힘을 주면서도 머리 속은 다시 아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혹시 아내는 이미 난관을 도로 뚫은 게 아닐까. 오늘 병원에 간다는 말은 그 시술의 성공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절차일 뿐이고. 나는 문득, 꼭 아들을 갖겠다고 고집하는 아내에게서 기어이 임신을 회피하고자 하는 사내의 아내가 연상되어 나도 모르게 엉뚱한 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사고가 혹시 자네 아내와 무슨 연관은 없어?”

  순간 사내는 경악하며 낯빛이 달라졌다. 내 말이 졸지에 칼날로 변하여 그의 배라도 그었는지 몹시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대답도 않은 채 자신에게 뜻하지 않은 고통을 안겨준 내가 원망스럽다는 듯 그는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꼿꼿한 눈길이 송곳처럼 나의 얼굴을 찔러왔다. 취조가 시작되고 나서 그가 지금처럼 나를 맞잡이로 보기는 처음이어서 나는 일순 당황감마저 들었다. 한편으로는 당돌한 그의 이같은 태도에 배알이 틀리기도 했는데, 무시를 당한 것처럼 분노가 치미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터였다. 이놈이 이거. 주먹을 말아 쥔 나는 보란 듯이 힘껏 책상을 내리쳤다.

  “내 말, 안 들려?”

  이빨 사이로 힘껏 짜낸 소리였지만, 사내는 희미하게 웃었던가. 흩어지는 안개 같은 그의 웃음을 보자 나는 돌연 힘이 쭉 빠져버렸다. 방금 부서져라 책상을 내리친 사람답지 않게 어깨가 저절로 처졌으며 맥이 탁 풀렸다. 하지만 제풀에 빼어든 칼을 도로 꽂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생각이 엉뚱하게도 강렬한 폭력을 휘두르고픈 충동을 일으키게 했다. 이 새끼, 살인범 주제에, 라고 하며 주먹을 한 대 날린다면 그의 표정은 어떻게 바뀔까.

오기처럼 치솟는 내 마음속의 폭력을 눈치 챘는지 사내는 어느새 다시 눈을 내리깔며 풀이 죽은 모습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무저항의 자세와 고개를 숙임으로써 드러난 앙상한 그의 목덜미가 새삼 연민의 정을 자아내게 했다. 이상한 노릇은 그럴수록 나는 또 더욱 주먹을 꽉 말아 쥐곤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감정의 변화였다. 마치 아이를 하나 더 갖고 싶어하는 아내의 표정이 간절하면 할수록 더 거부감이 생기던 마음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사내한테서 조금만 늦게, 이미 비슷하게 짚으신 걸요, 하는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면 나는 기어이 주먹을 날렸을 터였고, 그의 입에서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으리라.

  비슷하게 짚었다고? 얼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내가 도끼눈을 치뜨자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부러 떨어진 겁니다.”

  사내는 말끝에 거미줄 같은 한숨을 달았지만, 나는 귀가 번쩍 틔었다. 경기 도중 달리는 말에서 스스로 떨어지다니, 나는 잔뜩 긴장하여 사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자초한 일이라서 저러할까, 사내는 마치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비 인기기수였던 사내... 그의 불행한 결혼... 돈이 필요했던 그에게 어느 날 뻗쳐온 유혹의 손길... 거미가 실을 뽑아 집을 짓듯 사내의 목소리와 사연은 차츰 그물을 엮어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그물은 점점 정교하고 튼튼해져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말았는데, 정말이지 사내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어느새 그의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나방 꼴이 되어갔다.

  “사고는 우승마의 진로를 방해하려 했을 때 생긴 일이었습니다. 말 중에는 뒷심은 없어도 스타트가 무척 빠른, 이른바 도주마가 있는데, 그 도주마를 탔을 때 뒤따라오는 말을 요리하는 겁니다. 양옆으로 사행을 하여 유력한 우승마의 앞을 가로막는 식으로 말입니다. 말몰이 기술이 시원찮은 기수에게 딱 어울리는 역할이죠. 그런 짓거리를 해도 원래 저놈이야 말을 못 타니까, 하고 여길 수 있거든요.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자 감시의 눈길이 심해지는 데다가 양심의 가책도 나날이 커졌으니까요. 게다가 그런 모험을 해봤자 큰돈을 만져볼 수 없다는 실망감도 한몫 했습니다. 기수에게 접근한 검은손들, 다 약은 놈들입니다. 처음에야 뭉칫돈을 안길 것처럼 호들갑을 피워도 일단 손을 잡게 되면 태도가 달라집니다. 어렵사리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여줘도 푼돈밖에 넘어오지 않아요. 말하자면 너는 이제 코가 꿰였다 그거죠. 하지만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일은 아내의 차가운 눈빛이었습니다. 그런 수입으로라도 아내의 비위를 맞출 수가 있었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텐데, 그렇지가 못했던 겁니다. 나는 사랑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꽃 대신 돈이 든 봉투를 내밀며,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이게 그래도 부정 경마의 위험까지 감수한 대가라고 털어놓았지만, 아내는 오히려 경멸의 시선을 던졌습니다. 그래, 당신의 능력이 바로 그것뿐 아니겠어, 하는 눈빛으로 말입니다. 제가 낙마를 한 건 아내에게 그 사실을 털어놓은 다음날이었습니다. 죽기를 바랐는데 병신만 되어버렸죠...”

  사실 부상을 당하기 전부터 사내는 아내와 장모라는 과도한 부담중량으로 능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을 터였다. 부정경마의 유혹에 넘어간 것도 그런 부담중량에서 벗어나려던 처절한 몸부림임에 틀림없었다. 

  “아내는 저의 고뇌나 노력 따위에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다리마저 절게 되자 갈수록 싸늘해져 가는 시선이 최소한의 남편 권위조차 묵살해버리는 듯했죠…”

  점점 차가워지는 아내에게서 파탄의 공포를 느낀 사내는 어느 날 그녀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애원했다. 내가 조교사 시험을 보겠다, 기수로서는 한계를 느껴도 조교사로서는 얼마든지 성공이 가능하다, 이미 기수로서 활약한 경력으로 일정한 자격을 갖춘 만큼 소정의 시험만 통과하면 된다, 기수보다 훨씬 수입이 많은 게 조교사이니 그때까지만 참아달라, 그리고 제발 아이부터 하나 갖도록 하자, 우리의 아이가 나에게는 큰 용기를 줄 것이다, 라고. 하지만 먼저 콧방귀를 뀌고 나온 사람은 장모였다. 말을 잘 타지도 못하는 놈이 말 훈련은 잘도 시키겠다. 이런 말로 아내 대신 나선 장모는 돈 버는 능력 하나만큼은 믿었던 자신의 판단에 구멍이 뚫리자 부실 신탁회사에 맡긴 투자금을 회수하듯 어서 딸을 빼내가지 못해 안달을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이를 보겠다는 생각에는 아예 펄쩍 뛰었다. 난쟁이 새끼가 나오면 어쩌나 두려워할 줄은 모르고 꼴에 사내라고 아비 될 생각은 하네. 이런 낯빛을 보인 장모는 애가 딸리지 않은 딸을 그나마 원금에 가깝게 생각한 나머지 한시바삐 갈라서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파경이라면 모를까 살인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 아내는 이미 화장을 끝내고 가방 하나를 챙겨두고 있었죠. 저는 속이 뜨끔했습니다…”

  미처 놀랄 사이도 없이 아내의 목소리가 송곳처럼 사내의 귀를 찔렀다. 집에 좀 다녀오겠어요. 아내의 친정이라고 해야 전철로 십 분 남짓한 거리였으므로, 사내는 아내의 태도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엎어지면 이마가 닿을 거리에 굳이 가방까지 챙겨든 건 당분간 집을 나가 있겠다는 의사 표시가 아니겠는가. 혹은 지금 당장 꺼내지만 않았을 뿐 헤어지겠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간밤의 살섞음은 또 무슨 뜻이었을까. 지난 밤 아내는 오랜만에 순순히 몸을 열어주지 않았던가. 이별에 앞서 마지막으로 베푼 향연 같은 것이었을까. 모처럼 격정적이 된 아내를 안으며 사내는 당시 달뜬 목소리로 아내의 귀를 이렇게 간지럽혔다. 걱정 마. 내 어떡하든 조교사가 되어 돈 많이 벌게.

  “말에 재갈을 물리는 까닭은 말을 제어하기 위해섭니다. 하지만 저는 아내에게 물릴 재갈이 없었습니다. 하다 못해 아이라도 하나 있어야 하는 건데… 결국 저는 아내의 목을 거머쥐고 말았던 겁니다. 날뛰는 말의 고삐를 단단히 움켜지듯, 그 방법만이 아내를 영원히 내 곁에 붙잡아둘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모니터 화면에는 아까부터 잠을 자는 사내의 그림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곤 했다. 침대 위에서 코를 고는 사내의 모습은 왜 이렇게 전기와 시간을 낭비하느냐고 나무라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아직 종료키를 두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모습을 나의 아내가 보았다면 필경 왼쪽 뺨에만 살짝 보조개를 띠는 낯익은 미소를 지을 게 뻔했다. 아무래도 당신은 너무 세심한 것 같아요, 라는 말과 함께.

  “가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내가 나를 지그시 올려다보며 경마장에 가보았느냐고 묻고 있었다. 나는 사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눈앞에는 아내의 웃는 모습을 손에 잡힐 듯 그려냈다. 생각건대 아내가 가장 매력적으로 보일 때는 바로 그렇게 웃는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결혼한 이후로 아내의 매력에 대해 별로 관심을 기울인 적은 없었는데 하필이면 이런 때 그런 생각을 하다니… 불현듯 나는 샅이 뻐근해짐을 느꼈다. 사설경마꾼들 때문에 두어 번 가본 적이 있지.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보조개로 연상된 성욕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내 대답과 상관없이 사내가 말을 이었다.

  “경마장에는 가면을 쓰고 출장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왜 말에게 가면을 씌우는지 그 이유를 아십니까?”

  왜 한쪽 뺨에만 볼우물이 패이지? 언젠가 이렇게 물었더니 연신 비대칭의 뺨을 만들던 아내는 이런 대답을 했다. ‘나만의 특수한 화장술’이라고. 말의 경우도 그럴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말의 얼굴에 가면을 씌우는 이유가 단순히 말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여자의 화장 같은 거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던 때문이다. 아무리 화장발이 잘 받아도 얼굴의 바탕은 변하지 않듯 말에게 가면을 씌운다고 해서 말의 경주 능력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내의 견해는 달랐다. 말이 가면을 쓰게 되면 모습이 달라보이는 것은 물론 튀어 오르는 모래를 막아주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되는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상한 일이죠. 단순한 헝겊조각 하나가 그런 효과를 나타나게 하니. 발주기 진입을 거부하는 말도 가면을 씌우면 의외로 차분해져 순순히 유도에 따르거든요. 또한 눈가리개가 달린 가면은 주위의 다른 말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게 하는 효과가 있구요. 왜 이런 얘기를 하냐 하면… 부부에게 있어 자식이란 것도 바로 이런 가면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섭니다. 특히 여자에게는. 물론 가면이 전혀 효과가 없는 말들도 있긴 하죠. 하지만 저한테는 그런 가면을 씌워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내의 말끝은 어느새 물기에 젖어 있었다. 처져 내린 어깨와 등허리가 차츰 새우를 닮아갔다. 꼭 맨 처음 취조실로 끌려와 내 앞에 앉던 때와 흡사하게. 사내의 몸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공기가 빠져나가는 풍선인형 모습 같기도 했다. 사내의 입에서 더 이야기가 흘러나온다면 조만간 몸이 완전히 짜부라져 버릴 것만 같아, 나는 서둘러 마지막 키보드를 두들겼다.

  …담당 수사관의 견해로는 일시적인 분노 폭발에 의한 우발적인 살인이라고 사료됨. 마침표와 함께 종료키를 눌리자, 노래자랑의 합격 신호음을 닮은 소리가 낮게 울렸다.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김 형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대국집, 배달도 되지?”

  커피포트에서 물을 따르던 김 형사가 나를 쳐다보았다. 김이 오르는 종이컵 속의 커피를 티스푼으로 젓는 그의 손이 왠지 위태위태해 보였다.

  “왜, 자네도 저녁 먹으려구?”

  “때가 되면 누구든 먹어야지. 끝났어. 장시간 시달렸을 테니 아마 배가 고플거야.”

  나는 턱으로 사내를 가리켜 보였다.

  “고기 듬뿍 썰어넣은 특 국밥으루다 한 그릇 시켜줘. 난 집에 가서 먹겠어.”

  나의 기척에 얼굴을 조금 들던 사내가 내 눈과 마주치자 황급히 도로 고개를 숙여 버렸다. 그 바람에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책상 가장자리로 떨어졌다.

  바깥으로 나오자 사내의 눈물방울이 하늘에서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목덜미를 스치는 비바람은 얼음 가루가 섞인 듯 차가웠다. 문득 아내의 넉넉한 품이 따끈하게 데운 정종 대포처럼 생각났다. 

  젠장, 웬 날궂이야. 정말 그냥 갈 거야? 한잔하고 가. 앞쪽에서 회사 동료인 듯한 두 사내가 서로 팔을 잡고 잡힌 채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은 바로 들어갈래. 팔을 뿌리친 사내가 동료를 포장마차 곁에 혼자 새워두고는 손을 흔들었다.

  빗방울은 갈수록 굵어지고 있었다. 주위는 점점 우산들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재빨리 우산 아래로 피신한 사람들의 모습은 위험을 감지하자마자 어미의 육아낭 속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 캥거루 새끼를 연상시켰다. 크고 작은 캥거루 무리들 사이로 걸음을 재게 놀리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누가 그랬더라, 비오는 날 수태를 하면 아들을 낳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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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8.07.26 14:08

    첫댓글 대장님 ! 맘에 안드시면 삭제하겠습니다....

  • 08.07.28 08:48

    비카러브님 맘에 들어요.. 작가신가봐요? 글 잘 읽었습니다..愛 *.* 룰루

  • 08.07.27 17:43

    비카러브님은 작가세요..마심님은 만화가이신것 같고.. 작품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 08.07.28 10:19

    ㅎㅎ ~ 아닙니다 위에다 (펌)이라고 써야하는데 글을 읽어보니 괜찮은것같아서리~~~~~~ㅎㅎ 죄송합니다 ..지은이는 작가 윤용호님입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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