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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벌 2부 2
'그러나 벌써 가택수색을 마쳤다면? 만약 그들과 집에서 마주친다면?'
그는 방 한구석으로 달려가, 벽지 밑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 물건들을 꺼낸 다음 호주머니 속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물건은 모두 하지만 그는 이미 자기 방에 와 있었다. 아무 일도 없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들여다본 사람은 없다. 나스타시야조차 손을 대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아, 어떻게 아까는 그 물건들을 그냥 벽지 속에 넣고 나갈 수 있었을까? 여덟 가지였는데, 귀고리 같은 것이 든 작은 상자 두 개 -그는 잘 보지도 않았다- 와 조그만 산양 가죽 주머니가 네 개, 신문지에 둘둘 만 시곗줄이 한 개, 그 밖에 또 뭔가 신문지에 싼 훈장 같은 것이 있었다. .......
그는 그것들을 이지저리 호주머니 속에 넣었다. 외투 호주머니와 바지 오른쪽 호주머니에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애쓰면서 집어넣었다. 지갑도 벽지 속에서 꺼냈다. 그리고 방을 나왔으나, 이번에는 방문을 열어놓은 채 내버려두었다.
그는 성큼성큼 빠른 걸음걸이로 걸었다. 온몸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기분이었으나 의식은 분명했다. 그는 추적이 두려웠다. 30분 후, 아니 15분 후에 그에 대한 미행 명령이 내려지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때까지는 증거를 인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직 약간이나마 기력과 판단력이 남아 있는 동안에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그런데 어디로 가지?
그러나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모든 것을 운하에 던져서 증거를 없애버리자, 그것으로 만사가 끝나는 것이다.' 그는 어젯밤에 열에 시달리면서도 몇 번이고 일어나 나가려고 애쓰던 그때(그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러헥 결정했다. '빨리, 조금이라도 빨리 죄다 던져버려야 한다.' 그러나 버리는 것도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예카체린스키 운하의 방죽 길을 벌써 30분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방황하면서 눈에 띌 때마다 몇 번이고 물로 내려가는 층계를 내려다봤지만, 계획을 실행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떤 곳에서는 층계 바로 옆에 떳목이 있고, 그 위에서는 여자들이 빨래를 하고 있는가 하면, 어떤 곳에서는 보트가 매어져 있는 등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게다가 운하 옆길에서나 어디서나 환히 보이기 때문에 어떤 사내가 일부러 물가로 내려가 뭔가 물속에 버리는 것을 누군가 본다면 혐의를 둘 것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가죽 주머니가 가라앉지 않고 둥둥 떠서 흘러가기 시작한다면? 보나마나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면 모든 사람의 눈에 띄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모두가 마주칠 때마다 흘금흘금 쳐다보기도 하고 돌아보기도 하지 않았는가. 마치 그에게만 무슨 볼일이라도 있다는 듯이. '왜들 그럴까? 아니, 어쩌면 그렇게 느껴지는 것뿐일지도 모른다'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차라리 네바 강 쪽으로 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거기라면 사람의 왕래가 적어서 이곳만큼 눈에 띄지 않을 테니까 아무래도 여기보다는 나을 것이다. 특히 좋은 것은 이곳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점이다.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위험한 곳을 번민과 불안에 시달리며 30분이나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니면서, 이만한 일을 왜 좀 더 빨리 생각해내지 못했을까? 그저 꿈속에서 열에 들더 있을 때 일단 그렇게 정했다는 이유만으로 30분이라는 시간을 이렇게 무모하게 허비하다니! 그는 갑자기 머리가 혼미해지며 정신이 흐려졌다. 그리고 자신도 그것을 깨달았다. 자, 이젠 빨리 서둘러야 한다!
그는 V거리를 따라 네바 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중에 문득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 때문에 네바 강으로 가지? 왜 물속에 던져야 해? 차라리 어딘가 먼 곳, 섬 같은 곳에라도 가서 어느 외딴 곳에, 숲 속이나 덤불 속에 묻어버리고는 나무로 표적을 해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는 그 순간 자기에게는 명석하고 건전한 판단력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으나, 이 생각만은 틀림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섬으로는 가지 않을 운명이었는지 전혀 다른 식으로 돼버렸다. V거리에서 나오는 길에 그는 문득 왼쪽에 살풍경한 벽으로 싸인 뒤뜰로 들어가는 출입구를 발견했다. 출입구로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4층 집의 거친 벽이 계속되고, 왼쪽으로는 그 헌 벽과 나란히 출입구부터 곧장 널빤지 울타리가 늘어서 있는데, 20보쯤 안으로 들어서야 비로소 왼쪽으로 꺾이게 되어 있었다. 그곳은 아주 텅 빈, 외계에서 격리된 빈터였는데, 무슨 건축 자재 같은 것을 놔두는 장소로 쓰고 있었다. 훨씬 안쪽에는 얼른 보기에 뭔가 공자으이 일부 같은, 낮고 그은 석조 창고 같은 건물이 널빤지 울타리 사이로 엿보였다. 그곳은 아마 마차 제작소나 철공소 같은 곳임에 틀림없었다. 출입문에서부터 온통 석탄가루로 시꺼멓게 얼룩져 있었다. '여기야말로 버리고 도망치기에는 안성맞춤의 장소다!'하는 생각이 문득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뜰 안에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그는 슬쩍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 문 옆의 널빤지 벽을 따라 홈통이 매달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그것은 직공이나 노동자나 마차꾼들이 많이 사는 이런 종류의 건물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홈통 위 널빤지 벽에는 이런 곳에서 으레 볼 수 있는 낙서가 백묵으로 쓰여 있었다. '여기 서지 말 것.(소변금지란 뜻)' 그렇다면 여기 들어가 있더라도 아무 의심도 받지 않을 테니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어디 이 근처에 통째 내버리고 도망쳐버리자!'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그는 이미 한 손을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 순간 바깥쪽 벽 바로 옆에 문화 홈통 사이 1 아르신 넓이의 공지에서 아직 손질하지 않은 큼직한 돌 하나가 눈에 띄었다. 거의 1푸드 반(약 25킬로그램)이나 될 것 같은 돌인데, 한길 쪽 돌담에 세워져 있었다. 이 담 너머는 거리의 보도여서, 이 근처에는 언제나 꽤 많은 통행인의 발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거리에서 이쪽으로 들어오지 않는 한 문밖에서는 아무도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이 들어올 수도 있는 일이므로 되도록 빨리 서둘러야 했다.
그는 돌 쪽으로 몸을 굽혀, 두 손으로 돌 위를 붙잡고 있는 힘을 다해 돌을 뒤집었다. 돌 밑에 조그만 구덩이가 있었다. 그는 얼른 호주머니에서 모든 것을 꺼내어 그 속에 집어넣었다. 지갑은 맨 위가 되었으나 그래도 구덩이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바퀴 돌려 본래의 위치대로 해놓았다. 약간 높아진 듯했지만 돌은 제자리에 딱 들어맞았다. 그는 흙을 긁어 모아 언저리를 발로 밟았다. 눈에 띌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다음 곧 그곳을 나와 광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다시금 아까 경찰서에서 경험했던 것과 같은 참을 수 없는 강한 기쁨이 일순간 그를 사로잡았다. '증거는 사라졌다! 돌 밑을 뒤지려는 생각은 어느 누구의 머리에도 떠오르지 않을 테니까. 그 돌은 짖ㅂ을 지을 때부터 거기 있던 거고, 앞으로 그만큼은 그대로 거기에 있을 거다. 만약 발견되다 하더라도 누가 나를 의심하랴! 모든 것은 끝났다! 증거가 없지 않나!'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혼자 웃기까지 했다. 그렇다, 그는 후에도 그것을 기억했는데, 그 웃음은 히스테릭한, 단속적인, 남에게는 들리지 않는 긴 웃음이었다. 그는 광장을 지나는 동안 죽 계속해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저께 소녀를 만났던 K가로수 길까지 왔을 때 그 웃음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다른 상념이 그의 머릿속에 스며든 것이다. 그때 그 소녀가 가버린 뒤에 그가 앉아서 이것저것 생각하던 벤치 옆을 지나기가 갑자기 무섭도록 싫어졌다. 그리고 그때 20코페이카를 준 수염 기른 순경하고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무섭고 괴로운 생각이 들었다. '에잇, 아무려면 어때!'
그는 악의에 찬 들뜬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면서 걸어갔다. 그의 모든 사고력은 지금 어떤 중대한 한 점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중대한 점이라는 것을, 바야흐로 지금 이 중대한 점과 일대일로 맞서고 있다는 것을, 더구나 그것은 두 달 만에 처음으로 생긴 일이라는 것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다.
'에잇, 모두 될 대로 되라!' 갑자기 그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의 발작에 쫓기면서 생각했다. '어차피 일은 시작된 거다. 그따위 할멈이나 새로운 생활 따위가 다 뭐냐! 아아,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냐!....나는 오늘 얼마나 거짓말을 했으며 비열한 짓을 했느냐! 조금 전만 해도 저 아니꼬운 일리야 페트로비치를 상대로 비굴하게 아첨하고 비위를 맞추려 했으니, 이런 비열한 짓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런 놈들에게는 모두 침이라도 뱉어주면 그만이야! 그리고 내가 눈치를 살피고 비위를 맞추고 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문제는 그게 아니야.....'
갑자기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전혀 뜻하지 않은 새롭고도 지극히 단순한 의문이 순식간에 그를 뒤흔들어놓고 괴로운 경악을 느끼게 했다.
'만약 실제로 그 일이 단순한 바보짓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위였다고 한다면, 어째서 너는 지금까지 지갑 속을 보지도 않고 무엇을 얻었는지 조사해보지도 않고 있느냐? 도대체 너는 무엇 때문에 온갖 고통을 한 몸에 도맡으면서 비열하고 추악하고 천박한 행위를 의식적으로 저질렀느냐? 그리고 너는 방금 그 지갑을 다른 물건들과 함께, 역시 아직 조사해보지도 않은 물건들과 함께 물속에 버리려고 하지 않았느냐.....이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그렇다, 그렇다, 모두가 그대로다. 그러나 그것은 그도 전부터 알고 있던 것으로 결코 새로운 의문이 아니다. 어젯밤 그것을 물쏙에 버리기로 결정했을 때도 아무런 동요나 반문도 없이,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이어서 그 밖의 딴 방법은 있을 수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그렇다,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제 그가 트렁크 위에 몸을 굽히고 조그만 상자를 끌어내던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그렇게 결정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아니, 사실 그랬다.......
'이것은 내가 심한 병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침울하게 단정했다. '나는 나 자신을 괴롭히고 책망하면서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어제도 그제도, 아니 그동안 죽 스스로를 괴롭혀온 것이다.....건강만 회복되면.....스스로 괴롭히진 않게 되겠지....그러나 만약 회복되지 않는다면? 아아, 이젠 모든 일이 귀찮기만 하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기분을 풀고 싶었으나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무엇을 해야 좋을지, 다만 억제할 길 없는 한 가지 새로운 감각이 시시각각으로 강하게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것은 눈에 닿는 주위의 모든 것에 대한 한없는 혐오의 감정이었다. 거의 생리적인 것이라고도 할 만큼 집요하고 심술궂은 증오에 찬 것이었다. 마주치는 사람 모두가 그에게는 추악하게 느껴졌다. 그 얼굴, 걸음걸이, 거동까지도 보기 싫었다. 만약 누군가 말을 붙이기라도 한다면 그는 다짜고짜 그에게 침을 뱉든가 물어뜯었을지도 모른다......
바실리예프스키 섬에 있는 소(小) 네바 강가의 어느 다리목에 이르렀을 때,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여기 그 친구가 살고 있지, 이 집에'하고 그는 생각했다. '아니, 이거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고보니 나는 라주미힌을 찾아왔구나! 그때와 똑같이 되었는걸.....아무튼 매우 재미있게 됐군. 내가 일부러 찾아왔을까, 아니면 그저 무턱대도 걷다가 우연히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아무려면 어떠냐. 나 자신 말하지 않았느냐 말이야.....사흘 전에....그 일이 끝나면 다음 날 그 친구를 찾겠다고 꾸물거릴 건 없어, 가보자! 지금 내가 친구한테 들르지 못할 이유가 뭐냐 말이야......'
그는 라주미힌의 방을 향해 5층으로 올라갔다.
라주미힌은 집에 있었다. 마침 그때 좁다란 자기 방에 들어앉아서 뭔가 쓰던 중이어서 제 손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두 사람은 넉 달 동안이나 안 만났다. 라주미힌은 누더기가 다 된 가운을 걸치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수염도 깍지 않고 머리는 덥수룩한 채로 들어박혀 있었다. 그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자네 웬일인가?" 들어온 친구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러고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궁색해졌나? 보건대 우리보다 더한가 보군그래." 라스콜니코프의 넝마 옷을 보면서 그는 덧붙였다. "자, 앉게. 무척 피곤해 보이는군!" 라스콜니코프가 자기 것보다 더 낡은 유포를 씌운 터키식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을 때, 라주미힌은 문득 그가 병든 것을 알아챘다.
"이봐, 어디가 몹시 편찮은 모양이군. 자네 그걸 알고 있나?" 그는 친구의 맥을 짚어보려고 했다. 라스콜니코프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필요 없어"하고 그는 말했다. "내가 온 건...실은 가정교사 자리가 없어서...그래서 어떻게 좀....하긴 가정교사 자리 같은 건 필요도 없지만 말이야......"
"여보게, 자네 헛소릴 하고 있는가 보군!" 뚫어지게 상대방을 관찰하던 라주미힌응ㄴ 이렇게 말했다.
"아니, 헛소리가 아니야......"라스콜니코프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라주미힌의 방으로 올라오는 도중에도 방에 들어가면 자연히 얼굴을 마주 대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는 지금, 이 세상 누구와도 얼굴을 맞댈 기분이 아니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실감 나게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분통이 치밀어올랐다. 그는 라주미힌의 문지방을 넘은 것만으로도,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만으로도 거의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잘 있게!" 그는 불쑥 이렇게 말하고는 문께로 걷기 시작해ㅔㅆ다.
"이봐, 기다려, 기다리라니까. 이상한 친구 다 보겠군!"
"필요 없어......." 그는 다시 손을 뿌리치며 이렇게 되풀이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여기 왔어! 자네 돌지 않았나? 이건 ....모욕이지 뭐냐 말이야. 이대로 돌려보낼 순 없네."
"그럼 말하지. 내가 자네한테 온 건, 즉 자네 이외에 나를 도와줄 사람을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야....내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말이야....자넨 세상 누구보다도 선량하고, 사물을 판단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필요없다는 것을 알았어. 알겠나? 정말이지 아무것도 필요 없게 되었단 말이야. 누구의 도움도, 동정도 필요 없게 되었어...난 스스로....혼자의 힘으로....아니, 이제 그만! 제발 나를 내버려두게!"
"가만있어, 이 굴뚝 청소부 같은 놈아! 넌 정말 미쳤냐! 내 말부터 듣고 나서 그다음은 마음대로 하게. 사실 말이야, 가정교사 자리는 내게도 없어, 하지만 그런 건 거들떠보기도 싫어. 그런데 고물 시장에 헤루비모프라는 사내가 있는데, 이게 일종의 일자리지. 나는 지금 상인 집 가정교사 자리 같은 건 다섯을 준다고 해도 이것과 바꾸지 않겠어. 이 사내는 조그만 출판 사업을 하고 있는데, 자연과학 소책자 같은 것을 내고 있지. 그런데 그게 잘나간단 말이야! 표제만 해도 대단한 값어치가 있거든! 자네는 늘 나를 바보라고 했지만, 정말이지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한 바보가 있어! 그 친구가 요즘은 제법 경향이 어떠니 하는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단 말이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러나 나는 물론 격려해주고 있지. 그런데 여기 독일어 원문이 두 장 남짓하게 있는데 내가 보기엔 아주 엉터리 논문이야. 한마디로 여자는 인간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고찰한 다음, 끝에 가서는 물론 당당한 논법으로 여가도 인간이라고 증명하고 있네. 헤루비모프 이것을 여성 문제에 관한 책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그래 번역을 내가 맡았단 말일세. 그 친구는 두 장 반쯤밖에 안 되는 것을 여섯 장쯤으로 늘려서 반 페이지나 차지하는 커다란 표제를 붙여가지고 50코페이카에 팔아먹겠다는 거지. 이건 꽤 나갈 거야! 나는 번역료로 원문 한 장에 6루블씩 받으니까 전부 15루블을 받게 되는데, 벌써 6루블을 미리 갖다 썼네. 이것이 끝나면 고래에 관한 책을 번역하게 되어 있지. 그다음엔 <참회록> 2부 중에서 가장 따분한 대목들을 골라놓았으니까, 이것도 번역할 작정이야. 누군가 헤루비모프를 붙들고, 루소도 일종의 라디셰프[1749~1802. 18세기 말에 사형선고를 받고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한 선구적인 사상가 겸 시인, 노동 제도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 <페테르부르크에서 모스크바로의 여행>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함.]라고 말했기 때문이지. 나는 물론 반대하진 않아, 그깟 놈 내가 알 게 뭔가! 그런데 자네 '여자는 인간이냐'의 두 번째 장을 번역해보지 않겠나? 할 맘이 있거든 지금 원문을 가지고 가게. 펜도 종이도 가지고 가는 게 좋겠네, 모두 그쪽에서 대주니까. 그리고 3루블도 가져가게. 나는 첫장과 둘째 장에 대한 선금을 다 받았으니까 3루블은 당연히 자네 것이야. 그걸 끝내면 또 3루블을 받을 수 있어. 그리고 말이야, 이걸 가지고 자네에게 무슨 은혜를 베푼다거나 그렇게는 생각하지 말게. 오히려 나는 자네가 들어왔을 때 마침 나한테 두움을 줄 친구가 왔구나 생각했네. 첫째로 나는 맞춤법에 자신이 없고, 둘째로 독일어도 서투니까 창작을 하는 게 많아지거든. 하기는 그렇게 하는 편이 더 그럴듯하게 되니까 그것으로 자위하고는 있네만. 어쩌면 잘되기는커녕 아주 망쳐놓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야....그래, 자네 해보겠나?"
라스콜니코프는 잠자코 독일어 논문을 집어 들고 3루블을 받자 아무 말 없이 훌쩍 나가버렸다. 라주미힌은 어안이 벙벙해서 그 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첫 골목길에 이르자 라스콜니코프는 갑자기 발걸음을 돌려 다시 라주미힌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독일어 원문과 3루블을 탁자에 놓고 말 한마디 없이 나가버렸다.
"자네 미쳤나!" 드디어 라주미힌은 화가 치밀어 버럭 고함을 쳤다. "무엇 때문에 그따위 연극을 하는 거야! 나까지 영문을 모르겟군. 그렇담 뭣 하러 여기 왔어? 제기랄!"
"필요 없어....번역 같은 건......" 벌써 층계를 내려가면서 라스콜니코프는 중얼거렸다.
"그럼 자넨 도대체 뭐가 필요한가?" 라주미힌은 위에서 외쳤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묵묵히 층계를 내려갔다.
"이봐! 자넨 지금 어디 살고 있나?"
대답은 없었다.
"망할 자식,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이미 거리에 와 있었다. 니콜라예프스키 다리 위에서 그는 아주 불쾌한 어떤 사건 때문에 다시 한 번 분명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다름아니라 어느 포장마차의 마부가 세 번, 네 번 소리쳤는데도 그가 거의 말발굽 밑으로 기어들 뻔했기 때문에 마부가 채찍으로 그의 등을 내리쳤던 것이다. 채찍으로 얻어 맞은 것이 그를 격분케 했다. 그는 난간 쪽으로 비키며(어째서 인도가 아니라 차도인 다리 한복판을 걷고 있었늕지는 자기도 알 수가 없었다)부드득 이를 갈았다. 물론 주위에서는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졌다.
"꼴좋다!"
"뭣 하는 놈이지?"
"뻔하지 뭐야, 술 취한 체하고 일부러 마차 밑에 기어들어 생떼를 쓰는 놈이지."
"그걸로 먹고사는 놈이야, 그걸로 먹고 사는 놈이라니까......."
그러나 이때, 그는 여전히 난간 옆에 선채 등을 비비면서 점점 멀어져가는 마차 뒤를 무의미하고도 증오에 찬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는데, 문들 누군가가 손에 돈을 쥐어주는 것을 느꼈다. 돌아보니 머리에 수건을 쓰고 산양 가죽 신을 신은 나이 지긋한 상인의 아내가, 모자를 쓰고 녹색 양산을 든 계집애를 옆에 데리고 서 있었다. 딸인 듯싶었다. "받아둬요,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는 받았다. 두 사람은 그냥 옆을 지나갔다. 돈은 20코페이카짜리 은화였다. 옷차림이나 전체 모양새로 그를 거지, 거리의 진짜 동냥아치라고 생각한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20코페이카나 되는 돈을 적선한 것도 채찍으로 얻어맞은 그가 측은했기 때문이리라.
그는 20코페이카짜리 은전을 움켜쥐고 열 걸음쯤 걸어가서, 궁전이 보이는 네바강으로 얼굴을 돌렸다.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고 물은 하늘빛처럼 맑았다. 네바 강으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사원의 둥근 지붕이 이 다리 위에서 바라볼 때만큼, 즉 예배당에서 20보쯤 떨어진 이 다리 위에서 바라볼 때만큼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적은 없었다. 그것이 지금 찬란한 빛을 발하면서 맑은 공기를 통하여 그 장식 하나하나까지 똑똑히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채찍의 아픔도 사라져, 라스콜니코프는 얻어맞은 일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불안스러우면서도 아직 분명치 않은 상념 하나가 지금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오랫동안 먼 곳을 응시했다. 이곳은 그에게 특히 낯익은 장소였다. 그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주로 돌아올 때였지만, 그는 아마 백 번도 넘게 이 자리에 서서 이 아름다운 정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어떤 막연하면서도 수수께끼 같은 인상에 스스로 경악을 느끼곤 했다. 이 호화로운 정경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냉기를 풍겼다. 그에게는 이 화려한 화면이 소리도 없고 반응도 없는 이상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그때마다 그는 이 침울한 쑤수께끼 같은 인상에 적이 놀랐으며,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어서 그 해결을 먼 장래로 미루곤 했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이러한 옛 의문과 의혹이 똑똑히 되살아났고, 지금 그것을 상기한 것이 우연한 일 같지 않았다. 마치 이전과 똑같이 사색할 수도 있고 얼마 전까지 흥미를 느꼈던 것과 똑같은 제목이나 광경에 흥미를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라도 한 양, 자기가 전과 똑같은 이 장소에 걸음을 멈추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기이하고 놀라웠다. 그는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으나, 동시에 아프도록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다. 어딘가 저 밑 깊은 물속에, 간신히 보이는 그 발밑 어딘가에 지난날의 모든 과거가....이전의 상상도, 이전의 의문도, 이전의 테마도, 이전의 인상도, 이 파노라마 전체도, 그 자신도, 그리고 온갖 것도 다 숨겨져 있는 듯이 생각되었다........그는 자기가 어딘지 높은 곳으로 날아가는 것같이,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져가는 것같이 느껴졌다.......그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조금 움직이다가 문득 손바닥에 쥐고 있던 20코페이카가 생각났다. 그는 손바닥을 펴고 물끄러미 은전을 들여다보다가 크게 손을 휘둘러 물속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이 순간 그는 가위 같은 것으로 모든 사람과 일체의 사물에서 자기 자신을 툭 끊어버린 듯한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이미 저녁녘이었다. 그러고 보니 만 여섯 시간이나 돌아다닌 셈이었다. 어디를 어떻게 걸어서 돌아왔는지, 그런 것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옷을 벗자 사정없이 혹사당한 말처럼 온몸을 후들후들 떨면서 소파에 쓰러져 외투를 뒤집어쓰고는 인사불성에 빠지고 말았다.
황혼이 완전히 짙을 무렵, 그는 무서운 외침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아니, 저 외침 소리는 무엇일까! 저런 부자연스런 소음이나 울부짖음, 비명, 이 가는 소리, 울음, 구타, 욕지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보거나 목격한 일도 없었다. 저 짐승과도 같은 잔인한 행위, 저 지독한 분노의 발작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공포에 질려 몸을 일으키고, 매 순간 놀라기도 하고 가슴을 죄기도 하면서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맞붙어 싸우는 소리와 비명과 욕지거리는 점점 더 심해져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여주인의 목소리를 알아채고 그만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는 울부짖고 악을 쓰며 열심히 변명하고 있었으나, 다급한 나머지 말을 빼먹어가며 애원하듯 지껄여서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층계에서 사정없이 얻어맞고 있어 그만 때리라고 애걸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때리고 있는 사내의 목소리는 증오와 분노 때문에 듣기에도 무서울 지경이어서 다만 목쉰 소리밖엔 들리지 않았으나, 그래도 연방 씨근덕거리며 빠른 소리로 뭐라고 떠들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갑자기 나뭇잎처럼 떨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이다. 일리야 페트로비치의 목소리였다.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이곳에 와서 안주인을 때리고 있다! 그 여자를 발로 걷어차고, 머리를 층계에 쥐어박고 있다. 확실하다. 소음이나 비명이나 때리는 소리로 알 수 있다! 대체 무슨 일일까, 세상이 뒤집히기라도 했단 말인가? 층층마다 층계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소리가 들린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와 외침 소리가 들려온다. 층계를 오르는 소리, 문을 두드리는 소리, 문을 여닫는 소리, 달려오는 구두 소리,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이미 자기는 완전히 미쳐버린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이렇게 되풀이했다. 그러나 아니다, 아주 똑똑히 들려오지 않는가!.....그러고 보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곧 이리 올라올 것이다. '이것은....필시 그 일 때문에....어제의 그일 때문이다.....아아!' 그는 문을 잠그려 했으나 팔이 올라가질 않았다. 하긴 그런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얼음과도 같은 공포가 그의 마음을 둘러싸고 괴롭히며 그를 화석처럼 얼어붙게 했다. 그러나 마침내 꼬박 10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소동도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안주인은 한숨을 내쉬며 신음을 하고, 일리야 페트로비치는 여전히 공갈과 욕설을 퍼붓고 있었으나 마침내 그도 조용해졌다. 아아, 이제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ㅇ낳는다. '정말 가버린 걸까? 다행이구나!' 그렇다, 지금 안주인은 여전히 신음하고 울면서 돌아가고 있다. 드디어 방문이 탕 하고 닫혔다. 구경꾼들도 각기 제 방으로 흩어져 갔다. 한숨을 내쉬고, 다투고, 서로 부르고 하는 소리가 고함 소리처럼 높아지는가 하면, 이내 속삭이듯 낮아지기도 한다. 꽤 많이들 모였던 모양이다. 이 건물 안 사람들이 거의 다 나왔었나 보다. '그러나 정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자는 무엇 때문에, 대체 무엇 때문에 여기 온 것일까?'
라스콜리코프는 힘없이 소파 위에 쓰러졌으나 이젠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무서운 고통과 참을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인 채 그대로 30분쯤 누워 있었다. 갑자기 눈부신 광선이 그의 방을 환하게 비추었다. 나스타시야가 촛불과 수프 접시를 들고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주의 깊게 그를 살펴보고 그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자, 촛불을 탁자 위에 놓고 가지고 온 빵과 소금과 접시와 스푼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죠? 온종일 돌아다니기만 하고. 게다가 열병에 온 몸을 떨면서."
"나스타시야....왜 아주머니가 맞았지?"
"누가 아주머니를 때렸어요?"
그녀는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방금 30분 전에, 일리야 페트로비치가, 서장 보좌관이 층계 위에서 말이야.....무엇 때문에 그 녀석이 아주머니를 그렇게 때렸어? 그리고....그 녀석은 무엇 때문에 왔었지?"
나스타시야는 미간을 찌푸린 채 말없이 그를 훑어보고 오랫동안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이 오랜 응시가 몹시 불쾌했다. 뿐만 아니라 무섭기까지 했다.
"나스타시야, 왜 가만있는 거야?"
이윽고 그는 겁먹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건 피 때문이에요." 한참 만에 그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피! ....무슨 피?" 그는 새파랗게 질려 벽 쪽으로 물러서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스타시야는 여전히 말없이 그를 바라만 보았다.
"아무도 아주머니를 때리지 않았어요."
그녀는 또다시 야무지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그는 간신히 숨을 몰아쉬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이 귀로 들었어....난 자지 않았어....앉아 있었어." 그는 전보다 더 겁에 질린 어조로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귀 기울이고 있었어...서장 보좌관이 와서....모두 뛰어나와 층계로 모여들지 않았느냐 말야. 이 방 저 방에서........"
"아무도 온 사람은 없어요. 그건 당신 몸 속에서 피가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에요. 피가 빠져나갈 곳이 없어서 배 속에서 뭉치면 여러 가지 것이 보이기도 하고 들리기도 한대요....어때요, 드시겠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스타시야는 베갯머리에 선 채 뚫어지게 그의 얼굴을 보면서 나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실 것을 좀 줘...나스타슈쉬카(나스타시야의 애칭)"
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2분쯤지나 손잡이 달린 컵에 물을 떠가지고 돌아왔다. 그러나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냉수를 한 모금 마시고 가슴에 물을 엎지른 일만이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