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 정충화
족적足跡 외
떡시루에 깔린 찹쌀가루처럼
밤새 한 켜 한 켜 쌓인 눈을 밟으며
나서는 새벽 운동길
눈길 곳곳에
앞서 다녀간 누군가의 족적이
푸른 낙관처럼 찍혀 있다
상형문자를 닮은 새 발자국
매화 꽃잎 같은 고양이 발자국
거꾸로 여덟 팔 자 고라니 발자국까지
순백의 화폭 위에 저마다의 길을 내놓았다
통행세를 치르듯
그 곁에 내 발자국을 새로 얹는다
총총히 찍히는 신발 밑창 요철이
눈길에 만연체로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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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
반년 만에 다시 꺼내 입은
봄가을 겉옷 주머니에서
돈 칠천오백 원이 묻어 나왔다
껌 종이 짧은 메모 쪽지
부러진 이쑤시개와 섞여 나온
오천 원짜리 한 장 천 원짜리 두 장
오백 원짜리 동전 한 닢이
어둠을 열고 빛 아래 출토되어
눈을 끔벅이고 있었다
지난가을 어느 만취한 귀갓길
택시 거스름으로 흘러들어
옷장 속에서 동면에 들었던 것들이
봄 냄새를 맡고 깨어나
또 어딘가로 가겠다고
빨리 날 보내달라고 채근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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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화
2008년 《작가들》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 『누군가의 배후』, 『봄 봐라, 봄』, 식물시집 『꽃이 부르는 기억』, 산문집 『삶이라는 빙판의 두께』를 펴냈다. <빈터>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