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포 이야기 II] 철 지난 꽃과 철 맞춰 피어난 꽃들의 겨울 노래
[2010. 12. 20]
숲에서 흐르는 시간은 예나 이제나 다름없는데, 사람살이는 언제나 번거롭기만 합니다. ‘이것도 지나가리라’ 하는 이야기처럼 사람살이도 그냥저냥 흐르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의 성마른 마음은 언제나 이런저런 호들갑으로 야단법석을 떨곤 합니다. 우리 식의 잔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해마다 이 즈음이면, 성탄절이라는 축제 분위기로 즐겁곤 했는데, 올해는 몇 가지 불안한 뉴스들 탓에 그리 즐겁기만 하지 않네요.
사람살이의 번거로움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숲에서도 때를 모르고 피어난 꽃이 있었습니다. 천리포 숲을 산책하다가 길섶의 낮은키나무들 사이에서 홀로 하얗게 꽃을 피운 까마중(Solanum nigrum var. nigrum)을 만났습니다. 제대로라면 늦봄부터 한여름, 혹은 초가을까지 피어나는 꽃이건만 어쩌자고 이 추운 한 겨울에 피어났는지,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딱 한 그루의 까마중이 어떤 연유로 지금 꽃을 피웠는지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철 모르고 꽃을 피우는 식물은 적잖이 있습니다. 특히 까마중과 같은 한해살이풀의 경우는 더 그렇다고 합니다. 뒤늦게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운 한해살이풀은 아무리 제 철이 지났다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거해야 하는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늦게 싹을 틔우는 바람에 같은 종류의 다른 동무들이 꽃 피우고 열매 맺었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존재의 의의를 버리지 못하는 거지요. 싹을 틔웠으면 어쨌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게 식물의 운명인 겁니다.
잘 자라면 90센티미터까지 자란다는 까마중이지만, 뒤늦게 돋아난 까마중이어서인지, 고작해야 20센티미터도 못 자랐습니다. 작은 몸이지만, 꽃은 크게 자란 여느 까마중과 다를 바 없이 예쁩니다. 뜻밖에 만난 꽃이어서 더 살갑게 느껴진 건지도 모르지요. 또 옛날부터 우리네 마을 길가에서 흔히 보던 꽃이어서 더 그랬을 수도 있고요. 옛날에는 까마중의 어린 잎을 나물로 삶아먹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약재로 많이 쓰였던 식물입니다.
철 지나 피어난 까마중이 애처롭게 보였다면, 한창 꽃을 피우는 계절인 팔손이(Fatsia japonica)의 꽃은 그야말로 탐스럽고 화려했습니다. 대개는 10~11월에 피어나는 팔손이 꽃이 12월에 피었으니 조금 늦었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수목원의 기후가 비교적 따뜻한 편인 걸 감안하면, 한창 제철이라고 봐야 맞을 겁니다. 우리 수목원에는 우리 토종의 팔손이에서부터 새로 선발해낸 여러 품종의 팔손이도 곳곳에서 잘 자라고 있습니다.
워낙 생명력이 강해서, 아무데서나 잘 자라는 나무가 팔손이입니다. 잎사귀가 넓고 싱그러운데다 겨울에도 잎을 떨어뜨리지 않는 상록성의 나무여서, 저도 매우 좋아하는 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다가 과장된 화려함이 아닌 질박한 멋을 지녔다는 것 역시 제가 좋아하는 팔손이의 미덕입니다. 잎사귀 한 장의 길이가 무려 50센티미터 정도까지 자라는 나무가 화려하지 않고 질박하다는 것은 아마 우리네 나무만의 특징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생명력이 강하다는 건 다른 관점에서 보면, 기르기 쉽다는 이야기가 될 겁니다. 수도권에 위치한 저희 집 베란다에서도 한 그루의 팔손이가 아주 잘 자라고 있지요. 해마다 꽃도 잘 피어난답니다. 팔손이는 시골 흙담 곁에 많이 심곤 하는데, 특별히 돌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잘 자랍니다. 심지어는 담장 아래로 뿌리가 제 영역을 넓혀간 뒤에 담장 넘어 이웃 집에서 또 한 그루의 팔손이를 키워내기까지 할 정도이죠.
키우기 쉽고 잘 생긴 나무이지만, 사실 중부 지방에서는 그리 흔히 볼 수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대개는 우리나라의 남부 지방에서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키우는 나무이지요. 남부 지방의 고택이나 절집의 흙담 곁에서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팔손이를 만나는 건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지요.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의뭉스럽게 자라는 팔손이가 우리네 옛 집 풍경과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요.
지난 겨울에는 팔손이의 품종 Fatsia japonica 'Variegata'를 ‘나무 편지’를 통해 인사시켜드렸습니다. 토종 팔손이와 그리 다를 것은 없지만, 그 넓은 잎사귀에 무늬가 들어있는 품종이지요. 지난 겨울 뿐 아니라, 겨울에 쓰는 ‘나무 편지’에는 아마도 해마다 팔손이 이야기를 거르지 않았을 겁니다.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팔손이의 사진만큼은 그랬지 싶습니다. 또 앞으로도 지금처럼 겨울이면 어김없이 팔손이를 보여드릴지 모릅니다.
늦가을부터 겨울 사이의 편지에 팔손이 이야기를 빼놓지 못하는 건,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나무여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팔손이가 이 즈음에 가장 돋보이는 나무 가운데 하나인 때문일 겁니다. 팔손이는 어찌 보면 우리 토종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와 자리잡은 나무처럼 이국적인 분위기를 가진 나무이기도 합니다. 그건 그의 넓은 잎사귀와 겨울에도 싱그러운 상록성 나무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하릴없이 겨울에 가장 돋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하얀 꽃을 피웠지만, 팔손이는 꽃이 없어도 좋습니다. 넓은 잎사귀가 좋기 때문이지요.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초록 잎은 언제 보아도 싱그럽습니다. 팔손이라는 이름도 이 나무에서 잎사귀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는 특징 때문에 붙은 것이지요. 그 잎사귀가 여덟 개로 갈라졌기 때문에 팔손이라는 이름이 생긴 겁니다. 하지만, 팔손이 잎사귀는 이름과 달리 일곱이나 아홉 개로 갈라진 게 훨씬 더 많습니다. 잎의 모양과 관련한 전설도 전해옵니다.
오래 전에 한 공주가 돌아가신 예쁜 쌍가락지를 갖고 있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주의 시녀가 그 가락지를 자기 손가락 이곳저곳에 끼어봤어요. 그런데, 아뿔싸! 엄지손가락에 끼웠던 가락지가 빠져나오지 않았어요. 할 수 없이 손을 숨기고 다녔는데, 마침내 임금이 가락지를 찾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자, 시녀는 엄지 손가락을 가리고, 여덟 손가락만 내놓았다고 합니다. 시녀는 임금을 속인 죄로, 벼락을 맞고 죽었는데, 그 자리에서 나무가 솟아나왔지요. 그 나무에서 돋아난 이파리는 시녀의 넋을 상징하듯 여덟 개의 손가락 모양으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예쁜 꽃은 중동해국(Ajania pacifica)이라는 국화과의 식물입니다. 지금 이 상태로도 예쁘긴 하지만, 이 꽃은 사실 한창 때를 지나 이제 시들어가는 중입니다. 이 꽃이 활짝 피었을 때에는 사진의 노란 꽃 가장자리로 하얀 색의 꽃잎을 가진 꽃송이가 더 예쁘게 피어나지요. 그러니까 가운데에는 사진에서처럼 노란 꽃이 알알이 피어나고, 바깥쪽으로는 하얀 꽃잎을 단 꽃송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피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꽃송이의 크기는 국화과의 소국보다 작지만 대개의 국화과 식물이 피우는 꽃과 같은 모양이지요. 가운데에 피어난 꽃을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작은 꽃송이 바깥쪽으로 조금 크게 나는 꽃잎을 매단 꽃송이가 피어나는 것입니다. 게다가 노란 색과 어울려 더 돋보이게 하려는 심산에 중동해국의 바깥 쪽 꽃잎은 흰색으로 피어납니다. 그렇게 돋보이는 매무새로 주변의 수분곤충들 눈에 들려는 생존 전략인 겁니다.
식물을 통해 세상살이를 바라보려고 애쓰는 제 생각 탓일까요? 나무를, 혹은 작은 식물의 꽃을 보면, 누군가가 떠오르곤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무의 생김새가 가까이 지내는 동무의 생김새를 닮아서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그 나무가 사는 곳이 고향인 벗이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또 제게 그 식물의 정체를 물어보신 분이 생각나는 경우도 있고, 거꾸로 제게 그 식물에 대해 꼼꼼히 알려주신 분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중동해국을 볼 때에도 떠오르는 분이 두 분이 있습니다. 제게 이 식물의 정체를 처음 물어오신 분이 그 한 분이고, 꽃 피어나기 전의 이 식물을 저도 정확히 알지 못해 물어보았던 분이 다른 한 분입니다. 중동해국은 그래서 알게 된 식물입니다. 꽃을 보고 사람을 떠올리는 건 어쩌면 적잖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기에 가까이 지내는 동무들도 자주 만나지 못하는 탓일 수 있습니다. 그저 마음 속에 새겨둔 분들에 대한 그리움이 나무를 볼 때, 혹은 식물이 돋보이는 자태로 다가올 때에 떠오르는 것일테죠.
눈 내리고 며칠 들입다 춥더니, 또 며칠 동안은 포근할 기세입니다. 제발 이러지 말고, 서서히 추웠다가 서서히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식물들이 푸근한 겨울잠에 평안히 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야 다시 또 우리에게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보여줄 수 있을테니까요. 옛날에도 사흘 추우면 나흘 따뜻한 삼한사온 현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이렇게 그 들쭉날쭉한 폭이 크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이 사진은 지난 가을, 우리 수목원의 무화과나무(Ficus carica)가 맺은 열매입니다. 꽃도 피어나지 않고 열매를 맺는 나무라 해서, 무화과나무라고 불리는 나무입니다. 그러나 무화과나무도 꽃을 피웁니다. 꽃이 피지 않은 채 열매를 맺는 식물은 없습니다. 눈에 잘 뜨이지 않을 뿐이지요. 이 무화과나무 꽃의 비밀은 지난 주의 신문 칼럼으로 썼습니다. 여유 되실 때 살펴 보시고 궁금증 풀어보시기 바랍니다.
신문 칼럼 다시 보기
이번 주말이 성탄절입니다. 모두 즐겁고 행복한 성탄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고규홍(gohkh@solsup.com) 올림.
첫댓글 정지기님~~, 고규홍님..., 그리고 바람재 회원님들...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 올려요~~ ^^
고맙습니다. 배거니님도 메리 크리스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