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페 데 루카,Giuseppe De Luca,Baritone
이탈리아의 바리톤 가수.
레코딩 기술은 진정으로 훌륭했던 이태리 벨칸토 바리톤들의
성악예술을 보존하는데에 시간에 맞게 탄생했다.
그들 중에는 파스콸레 아마토(1878-1942),안토니오 스코티(1866-1936),
티타 루포(1877-1953),마리오 사마르코(1868-1930),마티아 바티스티니(1856-1928),
주세페 데 루카(1876-1950) 등이 있었다.
바티스티니의 명성이 레코드 수집가들의 마음 속에 '바리톤의 왕'으로 남아 있다면,
그 당시의 오페라 애호가들에게 더 존경받고 다재다능했던 바리톤은 주세페 데 루카였다.
주세페 데 루카는 아마도 19세기 후반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위대한 바리톤들 중에서
가장 비범하고 세련된 바리톤일 것이다.
그의 레코딩 기록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길었는데,
첫 레코딩은 1895년 로마에서였으며(문서로 남아있는 공식적인 기록은 1903년임),
마지막 레코딩은 1948년 밀라노에서였다.
데 루카의 위치는 그가 활동하던 시절에서 결코 논쟁의 여지가 없었다.
Grove는 그의 목소리가 줄곧 표준 이상이었으며,그의 해석은 드라마틱한 관점에서,
비극,코믹에 이르기까지 항상 찬미받았다고 지적했다.
메트로폴리탄 백과사전에는 또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그의 목소리는 예외적으로 훌륭했고 확고했다.
그의 레코딩은 교양있는 그의 노래 스타일을 알려준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는 않았지만,그를 훌륭한 성악가로 만든 것은 노래 부르는 방식이었다.
주세페 데 루카(Giuseppe De Luca,1876-1950)는 1876년 12월 25일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8살때에 음악학교에 들어가 합창단에서 보이 소프라노(Boy soprano)로서 두각을 나타내 보였다.
일찍이 성악가로서의 자질을 보였으며,1892년에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에 입학하여
5년간 유명한 벤첼슬라오 페르시키니(Venceslao Persichini)선생에게 지도 받았다.
그리고 1897년 11월 6일,그의 나이 21세에 <파우스트>의 발렌틴 역으로
피아센짜에서 오페라 무대에 데뷔했다.
그 후로 5년간 이태리의 다른 오페라 극장에서 성악가로서의 전문적인 경험을 쌓았다.
제노바에서는 <르 시드>와 레온까발로의 <라 보엠>을 불렀으며(레온까발로도 푸치니와
동일한 제목으로 작곡했음),Trieste에서 <라 트라비아타>,<청교도>를 불렀고 그 후로 나폴리로 갔다.
1902년에는 밀라노에 있는 리리코 극장에서 활동했는데,거기에서 칠레아의 <아드리아나 르쿠브뢰르>의
바리톤 역의 '초연자'로 명성을 얻었다.
그 때의 테너 역은 엔리코 카루소였다.
또한 그 해 11월 25일, 마스네의 <Griselidis>의 이태리 초연에도 바리톤 역을 맡았다.
유명한 바리톤이 되어 다음 해에는 라 스칼라 극장에 데뷔했는데,
그 곳에서 유명한 바리톤인 스코티, 사마르코,루포 같은 사람들과 무서운 경쟁을 해야 했다.
그러나 마침내는 데 루카가 그들을 능가했다.
데 루카는 라 스칼라 극장에서 8년간 활동하며 몇 오페라의 초연자로 등장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역은 1904년 2월 17일,푸치니의 <나비 부인>의 초연에서 샤플레스 역을 맡았던 것이었다.
데 루카는 곧 이어 뉴욕의 메트로톨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초청을 받았고,
1915년 11월 25일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피가로 역으로 데뷔했다.
그로부터 1946년까지 무려 30년이 넘게 메트로의 바리톤 주역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특히 그는 몇편의 오페라 초연에서 바리톤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하여 음악사에 이름을 남겼다.
마스네의 ‘그리셀리디스’(Grisélidis),칠레아의 ‘아드리아나 르쿠브로’,죠르다노의 ‘시베리아’,
그리고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 샤플레스를 맡은 것이었다.
그의 상대역으로는 엔리코 카루소,로사 폰셀레,클라우디아 무치오,조반니 마르티넬리,
존 맥코맥,아다모 디두르(Adamo Didur),호세 마르도네스(José Mardones) 등이었고 마스네의
‘돈키호테’ 세계초연에서는 베이스 샬리아핀과 함께 산초 판자를 맡아했다.
또한 리골레토,토니오,루나,제르몽,유진 오네긴 역도 불렀다.
1918년 12월 14일에는 푸치니의 <잔니 스키키>의 미국 초연에서 바리톤 역을 맡았다.
돈 문제로 인한 불화로 그는 다시 이태리로 돌아왔다.
그 이후에는 1940년에 게스트로 메트로폴리탄에 몇 번 출연했을 뿐이었다.
세계대전 기간동안 이태리에서 지내며,공식적으로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가
1946년에 마침내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리사이틀 활동을 했고,줄리어드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다.
메트로에서의 마지막 공연은 1945-46년 시즌이었고 거의 50년에 걸친 음악활동을
마감하는 고별연주회는 1947년에 가졌다.
당시 그는 71세였다.
1950년 8월 26일 뉴욕에서 눈을 감았다.
첫댓글
우아한 목소리로 유명한 데 루카는 그의 가장 초기 레코딩마저도
현대에 와서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련미와 수준 높은
테크닉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데뷔 후 50년이 지난 74세의 나이에도
아름다운 음색과 더욱 풍부한 음영이 깃들인 목소리를
유지하였고 죽기 몇 년전까지 계속 무대에 섰던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의 레코딩의 대부분은 1916-1930년 미국의 빅터 터킹 머신 컴퍼니
레이블로 녹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