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원의 의미-견지(見地), 수증(修證), 행원(行願)]
화엄경에는 다른 경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단어가 자주 나옵니다. 바로 '행원'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행원은 크게 세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문자 그대로 '행과 원'이라는 것 외에 '원을 행하는 것', 혹은 '행을 원하는 것'으로 각각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행원은 행과 원이 따로 떨어진 개념이라기보다는 행과 원을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개념'에 더 가깝습니다. 즉 행이 원이 되고 원이 행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행과 원을 따로 분리해서 시작할지 모르지만 수행이 깊어감에 따라 행원이 함께 움직이는 것입니다. 행 하나하나에 원을 세우고 원 하나하나에 행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행원의 핵심 요소 중의 하나인데, 수행 방법 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처음엔 분리된 채로 시작되는 행과 원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개념으로 이어질 때, 즉 행원 또는 원행이 끝없이 이어질 때(무유궁진 염념상속 무유간단) 순간 순간 찰나삼매가 일어나며 선정과 통찰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남회근 선생 역시 행원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선생은 불교 수행을 견지(見地), 수증(修證), 행원의 삼대 강요(綱要)로 나누고,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과위를 증득한 사람은 적은 주요 원인은 행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옛사람들 중 과위를 증득한 사람이 많았던 것은 바로 행원에 있었다며, 행이 도달해야 견지가 비로소 원만해지며 수증 공부도 비로소 과위를 증득할 수 있으므로 세 가지 중 '행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행원에 힘쓸 것을 역설합니다.
선생은 '진정한 수행은 마지막으로 하나의 길, 즉 행원으로 통한다'고 말하며 행원이란 바로 '자신의 심리적 행위를 바르게 닦아나가는 것'이라 정의를 내립니다. 그러한 행원, 마음씀씀이(心行)를 바로 닦지 못했기에 정을 얻지 못하며 또한 공부에 진전이 없다고 선생은 힘주어 말합니다.
즉 우리 공부가 진보하지 못하는 이유는 방법이 잘못되고 스승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마음 씀씀이가 전환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고 견처가 생기더라도 마음씀씀이, 탐진치만의(貪嗔癡慢疑) 등은 조금도 전환되지 못하고 있으니 공부에 아무 소득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의 말에 따르면 견지라는 것도 '행'을 할 수 있어야 견지라 할 수 있으며, 수행을 해도 마음씀씀이 상으로 도달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행원을 하지 못하면 진정한 견지에 도달할 수 없고 수증 역시 허망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중요한 것이 행원임에도 견지, 수증, 행원의 삼대 요소 중 사람들은 행원을 가장 소홀히 한다고 선생은 탄식하십니다.
행원이 어려운 이유는 행원이 공부의 모두요 또한 모든 공부의 끝이기 때문입니다. 원만한 행원을 하기 위해서는 견지가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의 수증도 닦아야 합니다. 견지, 수증 없이 행원만 따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한 견지, 수증을 이룬다고 행원을 하는 것은 아니니, 그것은 행원 안에 견지, 수증이 모두 포함되는, 모든 공부의 최후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견지, 수증은 있어도 행원이 이렇듯 어려운 것입니다.
행원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행원에는 '나(我)'라는 것이 일체 없기 때문입니다. 견지와 수증에는 희미하지만 '나'라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내가 보는 견처요 내가 이룩한 수증인 것입니다. 그러니 견지와 수증은 어디까지나 '나'를 위한 일입니다. 그러니 별로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행원은 전적으로 이웃을 위한 공부, 우리 모두를 위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이 모두 사라지는 공부의 최후처까지 이루지 못한 분들은 본능적으로 행원이 꺼려지는 것입니다.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행원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견지, 수증은 내 공부에 도움이 되지만, 행원은 내 공부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행원은 모두 나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공부입니다. 그러니 아직 나라는 상을 버리지 못한 분들이 행원에 나설 리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행원은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소홀히 취급 받습니다.
그런데 보현행원은 일반 행원과 다른 두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 행원이 견지, 수증의 단계를 거쳐 이르는데 비해, 보현행원은 견지와 수증 없이도 원만한 행과 원이 이루어지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보현행원의 분상에서는 심리적 행위를 닦는 것이 아니라 이미 원만한 심행이 갖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현행원은 이러한 견지, 수증, 행원을 하나로 묶어 바로 최후처로 뛰어들게 합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견지와 수증의 체험을 동시에 일어나게 합니다. 즉, 보현행원에서는 견지 수증 행원이 따로 놀거나 전제 조건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三位一體)가 되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에서 행원은 말과 이론이 필요 없습니다. 견지, 수증에 앞서 무조건 행원을 하고 보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견지가 생기고 수증을 거쳐 행원에 가는 것이 남회근 선생의 견해라면, 그런 것이 없어도 일단 행원으로 우리 삶을 시작하는 것이 보현행원의 세계입니다. 견지와 수증 이전에, 그래서 견처가 아직 생기지도 못하고 수증의 경계도 익기 이전, 행과 원으로 우리에게 본래 갖춰진 무량한 세계를 열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본래 세계를 여는 행원은 견지, 수증에서 말하는 행원이 아닙니다. 견지, 수증과 함께 하는 삼대 강요로서의 행원이 아니라 보현보살이 하는 행원, 보현보살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보현의 원과 행'입니다.
화엄의 보현행원은 무조건적 공경, 찬탄, 공양, 참회를 강조합니다. 조건을 따지고 이유를 따져 공경할 만 하니까 공경하는 것은 보현의 행원이 아닙니다. 이유가 있든 없든, 이유를 알든 모르든 무조건 공경하고 찬탄하는 것이니, 공경할 만한 상황은 물론, 도저히 찬탄할 이유도 없고 공경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조차 공경, 찬탄이 행해지는 것이 보현의 행원입니다.
등 따습고 배부른 자리뿐 아니라 억울하고 분하고 밉고 섭섭한 마음이 노도처럼 밀어닥치는 그 자리에조차 고맙다, 잘했다, 미안하다, 섬기고 공양하겠다, 하고 외치는 것이 보현행원인 것입니다. 그렇게 보현의 원과 행으로 부처님 무량 공덕 바다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보현행원이 견지, 수증의 과정 없이도 무량 공덕의 세계로 진입이 가능한 이유는, 그리고 견지와 수증을 가져오는 이유는 보현행원이 불과(佛果)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의 최후처가 보현행원이요, 부처님의 삶, 부처님의 행, 부처님의 마음이 보현의 행과 원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이룩하신 모든 견지, 그리고 수증의 총 결정체가 보현행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과로 열어가는 우리 삶은 당연히 부처님 세계가 열리게 되고, 부처님이 이룩하신 견지, 수증의 세계 또한 함께 열려오는 것입니다.
또한 보현행원은 '나'라는 것이 없는 자리입니다. 보현행원은 내가 있던 자리에 부처님만 가득 차게 합니다. 그리하여 나와 남, 주객의 분리가 무너지고 오직 부처님의 자리에서 일체 행원이 일어나는 것이 보현행원입니다. 그러므로 보현행원을 할 때는 이미 '나 없는 세계'로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보현행원이 일반 행원과도 다른 점입니다.
普賢合掌
*덧글
1.모든 불교 가르침이 견지, 수증, 행원의 영역 하나로 나눠지지는 않습니다.
무슨 가르침이든 불교 가르침은 이 세 가지 요소를 덜하고 더한 차이는 있지만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어느 쪽을 더 강조하는가에 따른 차이는 있습니다.
가령 견지에 중점을 둔 대표적 불교 가르침이 선불교(선종)이라면,
수증에 중점을 둔 대표적 불교 가르침은 밀교라 할 것입니다.
또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닦는 상좌부불교는 견지, 수증을 함께 하는 가르침이라 볼 수 있습니다.
2. 이 글은 '화엄경보현행원품강의'에 실린 글입니다.
불자님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고자 순서보다 빨리 가져와 봅니다.
첫댓글 보현행원 질문답변 글번호 227번 입니다 .. _()()()_
고맙습니다. 복습하고 갑니다........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