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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녹번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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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성지 스크랩 [믿음의 고향(故鄕)을 찾아] 인천교구 / 답동 성당
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16 12.05.17 22:2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천교구 / 답동 성당

 

항도 인천 지역 선교의 기초가 된 최초의 본당

 

인천교구 최초의 본당이자 주교좌 본당.

인천시 중구 답동 3 소재. 설립 당시의 이름은 ‘제물포(濟物浦) 본당’이었는데,

그 후 ‘인천 본당’으로 불리다가 1958년경부터 ‘답동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1889년 7월 1일 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바오로.

 

 

설립과 정착

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이전이었다.

그 후 이 지역에서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인천 · 부평 · 강화 등지에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박해 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소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답동 본당 소속이 되었다.

 답동 본당의 설립은 조선교구에서 개항지인 제물포 지역이

장차 발전할 것을 예상하고 1888년부터

 성당 대지를 물색하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이에 앞서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일찍부터 이 지역에 진출하여 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있었고,

훗날 천주교회 측에서 전교 활동을 시작하자 이를 훼방하기도 하였다.

 대지 매입을 결정한 조선교구에서는

당시 말레이 반도 페낭(Penang) 신학교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빌렘(J. Wilhelm, 洪錫九) 요셉 신부에게

새 본당 지역을 맡아 주도록 요청하였고,

 빌렘 신부는 이를 받아들여 주선에 입국하자마자 제물포에 진출하여

본당을 설립하였는데, 이때가 바로 1889년 7월 1일이었다.

 

이렇게 하여 제물포 본당의 초대 주임이 된 빌렘 신부는

우선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1889년 7월 8일 첫미사를 집전하였다.

당시 미사에 모인 신자수는 85명이었는데,

새 신자들로 인해 신자수는 곧 112명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다음해 어렵게 대지 3,212평을 매입한 빌렘 신부는

여기에 성당과 교리실을 건축하려고 계획하다가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되었다.

그 뒤를 이어 부임한 르비엘(E. Le Viel, 申三德) 에밀 신부는

이웃의 야산을 추가로 매입하고, 임시 성당 겸 경리부(經理部) 건축을 시작하여

1891년 7월에 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유럽으로부터 성당 건립 기금을 모금하는 한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 파견을 요청하고 교세 확대에 노력하였으나,

병으로 인해 홍콩 요양소로 휴양을 가면서 1893년에는

 임시로 비에모(Villemot, 禹一模) 신부가 사목을 담당하였다.

 

제물포 본당이 완전히 정착하게 된 것은

 3대 주임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요셉 신부 때였다.

1893년 4월, 본당에 부임하자마자 그는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에게 성당 설계도를 받아 기초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8월 수녀원이 완공되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수녀 2명을 파견하여 제물포 분원을 창설하고

 보육 사업과 무료 진료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해성보육원’(海星保育院)과 ‘해성병원’(海星病院)의 전신이었다.

 

한편 성당 건립 공사는

1894년의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중단되었다가 재개되어

1895년 8월 11일에는 정초식이 거행되었고,

1897년 7월 4일 마침내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 성당의 건평은 396평이었고, 형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춘 형태였는데,

1937년 확장 개축을 거쳐 1981년에는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마라발 신부는 성당 건립 외에도

1900년 9월 1일 ‘박문소학교’(博文小學校, 현 박문초등학교의 전신)를 설립하였다.

 또 1901년 영종(永宗) 공소(현 옹진군 영종도의 돌팍재)와

대골 공소(현 시흥군 소래읍 富谷里)의 신설 등으로

본당의 교세가 크게 확대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으나,

1895년 1월에 일어난 신부 구타 사건, 같은 해 7월의 콜레라 발병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수녀원의 불화에 연루되어 1904년에 성직 정지 처분을 받고

 영종도로 들어가게 되었다.

 

 

성장과 분할

4대 드뇌(E. Deneux, 全學俊) 에우제니오 신부는

 답동 본당의 역대 신부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임하면서

 일제 치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본당의 성장에 노력하였다.

우선 그는 부임하자마자 일본인들의 교회 부지

(현 신흥동) 침입으로 야기된 문제를 해결하고,

 전교에 노력하여 1910년까지 새말(현 시흥군 소래읍 大也里) ·

고잔(현 김포군 검단면 梧柳里 高盞) · 구월리(九月里) ·

부평(富平)에 공소를 신설하였으며,

같은 해에 영종도 공소 강당을 축성하였다.

아울러 1915년 2월 1일 드뇌 신부는 ‘바오로 성인’을

 본당의 주보성인으로 결정하였다.

 

1909년부터는 박문학교 교장을 겸임하여

직접 학교를 운영해 나갔고 이듬해에는 여자부를 신설하였으며,

1914년에는 교사를 신축 확대하였다.

 1917년 4월 2일에는 남 · 여부를 통합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개칭함과 동시에

 설립자 겸 교장이 되었다.

이밖에도 그는 1925년에 박문학교 남학교 교사를 2층으로 신축하였으며,

1937년 3월 1일에는 성당 구내에 ‘박문유치원’을 설립 개원하였고,

1935년에 성당의 외벽을 새로 쌓는 개축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6월 30일 제7대 서울교구장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1935년 드뇌 신부는

 연로하여 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임종국(林鍾國) 바오로 신부를 보좌 신부로 맞이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드뇌 신부가 서울 주교관으로 휴양을 감에 따라

 임 신부가 최초의 한국인 주임 신부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1959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본당에 재임하면서

 해방과 6 · 25 동란 등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로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우선 평신도들의 단체 설립에 노력하여

 1938년에 부녀 회원으로 구성된 ‘소화 데레사회’를 조직하였고,

회장단과 복사단을 정식으로 구성하였으며,

1937년에 발족된 성모회의 활동을 활성화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시외 각처의 신자 공동체를 위해 1938년에 소사(素沙) 공소를,

1941년에 부평 공소를 신설하였고,

 1942년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가 제대 서울교구장에 오름으로써

 방인 교구로 설정되자, 교구 안에서는 가장 먼저 재정적 자립을 선언하고

 모든 신자들이 이를 위해 협력하였다.

 

 

이 무렵 본당의 신자수는 약 3천 명 정도에 달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이르러 탄압이 심해지면서 성당 종을 탈취당해야 했고,

1945년 4월 1일에는 일제의 소개령(疏開令)에 의해

박문학교 남학교 교사가 헐리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본당 신자들은 가장 먼저 탈취된 종을 찾아왔고,

 새로 복사단과 사목회를 구성하였으며,

가톨릭 청년회와 성모회, 학생회인 용심회(勇心會) 등을 중심으로

 갖가지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동시에 임 신부는 1945년 ‘소화(昭和)고등여학교’를 인수하여

 ‘박문여자중학교’로 개편하였는데,

이 학교는 전쟁 후인 1951년에 ‘박문여자고등학교’를 병설하여

중학교 6학급, 고등학교 6학급으로 운영하다가 1954년 12월에

 송림동에 새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한편 소사 공소의 신자들은 해방 직후부터

 본당 승격 운동을 전개하여 1946년 4월 5일에는

마침내 ‘소사 본당’으로 분리 독립하게 되었고,

1946년 11월에는 행주(幸州) 본당 관하에 있던 걸포리(傑浦里) 공소가

 ‘김포(金浦)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인천의 북쪽 지역이

 새 본당 관할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어 1952년 3월에는 부평 공소가 ‘부평(현 부평2동)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1955년 9월에는 송림동에 건립한 새 성당이 축성됨과 동시에

 ‘송림동(松林洞) 본당’이 설립되었으며, 1959년 5월 9일에는

 ‘백령도(白翎島) 본당’이 분리되었다.

 

 

인천교구의 설정과 본당의 변모

답동 본당에 큰 변화가 있게 된 것은 1958년 10월,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인천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고,

그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였다.

 이에 따라 1959년 11월 16일자로 버크(J. Burke, 장) 요한 신부가

 6대 본당 주임 겸 박문유치원 원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임종국 신부는 서울교구로 이임하였다.

 

버크 신부는 본당 부임 후 우

선 도서 지역의 전교 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1959년에 영흥(靈興) 공소(옹진군 영흥면), 선재(仙才) 공소(옹진군 영흥면),

 운서리(雲西里) 공소(옹진군 영종면)를 설립하고,

 이웃의 송림동 본당과 협의하여 1960년 7월 17일에 ‘도화동(道禾洞) 본당’을,

 1962년 9월 18일에 ‘화수동(花水洞) 본당’을 분리 신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낡은 성당을 수리하였고,

1961년 3월에는 박문국민학교의 운영권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로부터 인계받아

 제6대 교장을 겸직하였으며, 1962년 3월 25일에는 신용협동조합을 창설하였다.

그러는 동안 1961년 6월 6일, 인천 감목 대리구가

 ‘인천 대목구’로 승격되고 맥노튼(W. J. McNaughton, 羅吉模)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본당이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이후 답동 본당은 각 본당의 분리 설립으로 인해

 관할 구역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지만, 전교 활동의 결과 총 신자수는

 언제나 5천 명 이상을 유지하였다.

즉 7대 본당 주임 설리반(H. Sullivan, 薜立安) 헨리코 신부 재임기에만 해도

 1964년에 5,374명을 기록하였고, 1965년에는 5,689명을, 1966년에는 5,413명을 기록하였다.

그러다가 1971년 3,900여 명의 신자수를 기록한 이래 다시 신자가 증가하여

 현재는 4천여 명선을 유지하게 되었다.

 

또 1968년 4월 8대 주임으로 강의선(姜義善) 힐라리오 신부가 부임한 뒤부터는

 한국인 신부가 지금까지 주임을 맡아 왔는데,

 강 신부는 본당 부임 후 구역 · 반을 재편성하고 단체 활동을 활성화시켜 나갔으며,

 한편으로는 본당 주보의 창간, 박문학교의 교사 증축 등에 노력하였다.

이 중에서 교사 증축 작업은 9대 주임 박성규(朴成圭) 베네딕토 신부 부임 후인

 1970년 4월에 완료되었다.

박 신부는 이와 함께 성당 내부 수리 공사와 성당 앞 층계 공사를 하였고,

 1974년에는 “답동 본당 85년사”를 간행하였다.

이어 10대 주임 김병상(金秉相) 필립보 신부 때부터는

 평신도 활동의 학대, 시국 기도회와 민주화 운동, 이웃돕기 활동 등을 통해

 본당의 활성화와 사회와의 일체감 마련에 노력해 오고 있다.

 아울러 11대 주임 김상용(金相勇) 힐라리오 신부는 1982년에 교육관을 완공하였고,

13대 주임 강용운(康龍雲) 시몬 신부는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답동 대성당 100년사”를 간행하였으며,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그리고 1992년 10월 ‘대부도(大阜島) 본당’을 분리 신설함과 동시에

영흥 공소와 선재 공소를 새 본당으로 이관하였다.

[차기진, 한국가톨릭대사전 제3권, 1996년]

 

 

2000년 9월 1일 개교 100주년을 맞은 박문 초등학교는

 100년의 답동 시대를 마감하고 2001년 9월 8일 인천시 연수구 동춘동에

 새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 축복미사를 봉헌하였다.

이어서 성당 옆에 위치한 옛 교사를 교구청사로 리모델링하여

 2002년 1월 3일 새 청사 축복식을 가졌다.

인천교구는 그전까지 28년간 가톨릭회관을 교구청사로 사용했었다.

 

1981년 9월 25일 사적 제287호로 지정된 답동 성당은

 1897년에 완공된 옛 성당을 그대로 둔 채

1933년부터 4년간 시잘레 신부의 설계에 따라

 외곽을 확장 개축한 310평 규모의 건물로,

초창기 교회 건축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아름다운 성당이다.

 정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고전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인 답동 성당은

 같은 건축 양식으로 세워진 전주교구 전동 성당과 겉모양이 매우 흡사하다.

 답동 성당은 주로 순수 자연석을 사용한 이전의 서양식 성당과 달리

 돌과 벽돌을 섞어 지은 것으로, 내부 기둥과 2층 바닥을 콘크리트로 하는

등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을 혼합했다.

적벽돌을 주재료로 썼지만 건축미를 살리기 위해

 중요한 곳에는 화강석을 사용하기도 했다.

 

답동 성당 건축미의 절정은 정면을 장식하는 3개의 종탑이다.

경사진 지붕을 날개로 단 듯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8각형의 중앙 종탑은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안정적인 형태미를 더한다.

양끝에는 작은 8각탑 2개를 두어 20세기 초

 한국 교회의 보편적인 건축 양식을 그대로 반영했다.

중앙 종탑과 좌우의 작은 종탑 꼭대기에 얹혀있는 북 모양의 작은 탑은

 처마 밑 돌림띠의 석재 양식과 함께 정면 외관을 정중하고 화려하게 수놓았다.

성당 정면에서 눈에 띄는 장식은

 한 가운데 형식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장미 문양의 장미창뿐이다.

또 성당을 빙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 아치 형태의 창문들은

종래의 성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교한 장식 대신

 화강석으로 단순하게 처리됐다.

 

성당의 내벽은 모르타르 위에 수성 페인트를 칠한 것이다.

 제대부 벽면은 진한 청색으로 나머지는 미색으로 칠했다.

바닥은 원래 목조 마루였으나 1973년 성당 내부를 수리할 때

콘크리트 슬라브 위에 인조석을 얹었다.

성당 내부의 기둥은 모두 원형 아치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벽면 기둥에 부착된 십자가의 길 14처와 함께

화려한 색채의 창문 유리화가 신자들을 압도한다.

본당 설정 9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79년 6월 제작에 들어가

 6개월 만에 완성된 이 유리화는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추상적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제대 뒤쪽의 유리화 15점(60cm x 400cm)에는 장미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좌우 창문 유리화 16점(150cm x 600cm)에는 성경의 주제가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유리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사화와 함께 십자가에서 숨진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를 그린 피에타 그리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등을 강렬한 톤으로 형상화했다.

다소 어지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강하면서도 현란한 선의 움직임과

 색체가 그런 이미지를 살짝 가리고 있을 뿐이다.

 

한편 답동 성당은 2009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앞두고

 성당 성역화 작업을 전개하여 1단계로 성당 마당을 공원화하여

 지역 주민 누구나 와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2월부터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아 성당 종탑과 종에 대한 보존 작업 및

 출입문과 지붕 등 일부 시설에 대한 보수 공사도 진행하였다.

2010년 8월에는 인천시 중구와 함께 답동 성당 일대에 대한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통해 성지를 보존하고

 지역주민들과 역사 ·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협력하기로 하였다.

[관련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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