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善竹橋(선죽교)-조수삼(趙秀三)
波咽橋根幽草沒(파열교근유초몰)
파도에 우는 교각은 풀 속에 아득하고
先生於此乃成仁(선생어차내성인)
선생께서 이곳에서 어진 덕을 이루셨어라
乾坤弊盡丹心在(건곤폐진단심재)
하늘과 땅이 다해도 한 조각 붉은 마음 남아 있고
風雨磨來碧血新(풍우마래벽혈신)
비바람에 닳아져도 핏빛은 선명하다
縱道武王扶義士(종도무왕부의사)
비록 무왕이 의사를 도왔다 말해도
未聞文相作遺民(미문문상작유민)
문상이 유민이 되었다는 말 나는 듣지 못하였어라
無情有限荒碑濕(무정유한황비습)
무정하게도 한 서린 황폐한 비석 물 기운에 젖어있고
不待龜頭墮淚人(부대귀두타루인)
돌비석의 귀두는 눈물 흘리는 이를 기다리주지 않는구나
山中謾詠(산중만영) - 조수삼(趙秀三)
有客自東關(유객자동관) : 손님이 동관으로부터 오니
烟霞籠肺肝(연한농폐간) : 저녁노을이 온몸을 둘러싸네.
相逢試相問(상봉시상문) : 서로 만나서 물어보면
口口吐靑山(구구토청산) : 말마다 푸른 산을 토하네.
絶筆口呼(절필구호) - 조수삼(趙秀三)
붓을 꺾으며
綺語平生餘結習(기어팽생여결습) :
아름다운 글짓기가 평생 버릇되었는데
昨逢松子意猶疑(작봉송자의유의) :
어제 적송자를 만나 의아하게 여겼였네.
那知符到怱怱去(나지부도총총거) :
내 이리 총총히 갈 길별인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自覺和泥拖水時(자각화니타수시) :
흙탕물에 적셔졌음을 스스로 깨닫겠네.
고결하고 아름다운 지조를 지닌 烈女 妓生 錦城月- 조수삼(趙秀三) 珠裳寶?賣千金 주상보고매천금 塡海孤禽只苦心 전해고금지고심 寃債先於公債了 원채선어공채료 香生烈血灑鴛衾 향생렬혈쇄원금 구슬 치마 보배 비녀 서방님 사랑을 한 몸에 지녔는데 님은 가고 저 홀로 남으니 아픈 가슴 참기 어려워 제 목숨 채우지 못하고 가엾게 죽어 갔구나. 향기로운 끓는 피가 원앙 이불 적셨더라. 조수삼(趙秀三)의 추재기이(秋齋紀異)에 금성월에 대한 기록은 錦城月才色傾城, 聲價絶代, 有某人子愛蓄之數歲, 其人有罪將伏法, 금성월재색경성, 성가절대, 유모인자애축지수세, 기인유죄장복법, 錦城月歎曰郞之愛我, 誠天下無雙, 儂之報郞, 亦當以天下無雙爲期也, 금성월탄왈랑지애아, 성천하무쌍, 농지보랑, 역당이천하무쌍위기야, 遂先伏劒而死, 時人咸曰烈也. 수선복검이사, 시인함왈렬야. 금성월은 재주와 인물이 뛰어나서 사람들의 평판이 매우 좋았다. 어떤 남자가 그를 사랑하여 함께 살았다. 몇 해 후에 그의 남편이 죄를 짓고 법에 의해 죽게 되었다. 금성월이 탄식하여 이르기를, “남편이 나를 사랑한 것이 진실로 천하에 둘도 없었으니, 나도 남편에게 갚는 것이 역시 천하에 둘이 없이 하리라.”하고, 드디어 가슴에 칼을 꽂고 죽었다. 당시 사람들은 열녀라고 하였다.
◆麥嶺(맥령) 보릿고개
剝松山盡白(박송산진백) 소나무 벗겨먹어 산은 하얗고
挑草野無靑(도초야무청) 풀뿌리 캐어 들엔 푸름이 없네
莫道麥牟在(막도맥모재) 밀 보리가 있다고 말하지 마소
乾黃又蜮螟(건황우역명) 황내려 마른데다 역명이 덮쳤다오.
※蜮 물여울 역,날도랫과 곤충의 애벌레. 螟 멸구 명,배추벌레,모기.
※牟 보리 모,소울음 모,어두울 무.
◆麥灘(맥탄) 보리여울
春臼趁虛市(춘구진허시) 찧은 보리는 저자에 내다 팔고
殺靑充夜餐(살청충야찬) 풋보리 잡아 저녁 끼니 때우네
麥嶺斯難過(맥령사난과) 보릿고개도 넘기 어려운데
如何又麥灘(여하우맥탄) 어찌하여 또 보리여울인가?
※趁 쫒을 진,쫒을 년. 趁虛는 시장으로 나아감.
◆豊田驛(풍전역)
大麥黃而萎(대맥황이위) 보리는 황내려 시들었고
小麥靑且乾(소맥청차건) 밀은 퍼런채로 말랐구나
飢荒愁溢目(기황수일목) 굶주린 시름 눈에 넘치나니
何處是豊田(하처시풍전) 어디가 이 풍년밭 인가?
禍不單行(화불단행)이라더니 災殃은 겹쳐서 오는가? 雪上加霜이 되었구나.
먹고사는 일이 가장 큰 일 이건만 보릿 고개에 보리 여울까지 만나는 百姓의
고달픔은 주린 배를 붙잡고 소나무 껍질을 벗겨 먹는데 豊田은 이름 뿐 이구나.
朝鮮 百姓의 배고픔이 “진지 잡수셨습니까?”라는 인사말이 되어 오는날에도
식사하셨습니까? 라는 인사말이 되었다.
보리가 익어 가기전의 시기가 가장 고통스런 때라서 春窮期라 했으나 오늘날
밀,보리는 대부분은 수입에 의존하는 시대이다.
茶飯事(다반사)라는 말이 차 마시고 밥 먹듯이 늘상 있는 일인데 오늘날 에도
굶주리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이 심심찮이 들린다.
가난은 나라 임금도 救濟(구제) 할수 없다는 말이 오늘에도 통하는가 보다.
밥이 곧 하늘이란 말이 있고 <明心寶鑑>에
飽暖思淫慾(포난사음욕)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음욕이 일어나고
飢寒發道心(기한발도심) 춥고 배고파 봐야 도덕심이 일어난다.고 했으나
지나치면 飢寒發盜心(기한발도심:춥고 배고프니 도둑질할 마음이 생긴다)
할수 있으니 道心과 盜心은 개인의 품성에 따라 다르리라.
山內(산내) - 조수삼(趙秀三)
산속
入山皆福地, 산속에 들어오면 모두가 복지여서
世世作農家. 대대로농사 지으며 살기로 했네.
石蜜輸王稅, 석청은 임금께 세금으로 바치고
銀魚上洑沙. 은어를 잡으면 물값으로 바치네.
燒雲耕菽粟, 풀밭은 태워 콩과 조를 심고
刳木浸茄苽. 나무에 홈을 파서 가지와 오이에 물을 대네.
我欲尋源去, 무릉도원을 찾아가려 했더니
靑溪泛落花. 푸른 시냇물에 복사꽃잎이 떠내려 오네.
騎牛翁(기우옹) - 조수삼(趙秀三)
소 탄 늙은이
田翁騎母牛. 늙은 농부가 어미 소를 타고
遲遲到溪口. 느릿느릿 시내 어구까지 왔네.
但叱牛回頭, 머리 돌린다고 소를 꾸짖으면서도
不知犢在後. 송아지가 뒤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하네.
入左寨(입좌채) - 조수삼(趙秀三)
성채에 들어서며
少負請纓志, 젊어서는 청운의 뜻을 등에 지고
老無橫草勳. 늙어서는 작은 공훈도 없네.
羽書徵戌卒, 급한 공문이 술졸을 부르니
馹騎赴河濆. 역마를 타고 강가에 다다르네.
腰下冲霄劒, 허리에는 하늘을 꿰뚫을 검
腦中勒石文. 머리속에는 돌에 새길 만한 문장이 있네
寥寥千載後, 아득히 먼 천년 뒤에
誰識趙參軍. 누가 조참군을 알아주리오.
讓金洪李(양금홍이) - 趙秀三(조수삼)
돈을 양보하는 홍 씨와 이 씨
洪家何管李金傳(홍가하관이금전)
: 홍 씨네 집이 어찌 이 씨네 돈을 가지랴.
辭者賢如讓者賢(사자현여양자현)
: 가져가라는 자도 어질지만 사양하는 자도 어지네.
聖世旌褒敦薄俗(성세정포돈박속)
: 임금께서 상을 내려 옅은 풍속을 두텁게 하니
鄰邦幾處息爭田(인방기처식쟁전)
: 이웃 여러 곳에서도 밭 다투기를 그쳤다네.
작시 배경 :
서울 오천의 이 씨는 대대로 부자였는데, 증손 현손에 이르러 가산을 탕진하고 홍 씨에게 집을 팔았다.
대청 기둥 하나가 기울어져 무너지게 되지 홍 씨가 수리하였는데, 일하던 중에 은자 삼천 냥이 나왔다.
이 씨의 조상이 간직하였던 돈이었다. 홍 씨가 이 씨를 불러서 주려고 하자, 이 씨가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이 은자를 우리 조상이 간직하기는 했었지만, 그렇다고 증명할 만한 문서도 없고, 이 집은 이미 당신에게 팔았소.
그러니 이 은도 역시 당신 것이오.”두 사람이 서로 사양하기를 마지않았다. 이 소문이 관가에 들리자,
관가에서는 조정에 아뢰었다. 그러자 임금이 교서를 내렸다.
‘우리나라 백성 가운데 이처럼 어진 자가 있으니, 누가 지금 사람이 옛사람보다 못하다고 하겠는가.’
그리고는 그 돈을 반씩 나눠 가지게 한 뒤, 두 사람 모두 벼슬을 내렸다.
조수삼:(1762~1849)
(燕行을6次例나하고 83歲에 進士試에 合格한 武官末職의 詩人)
【姓 名】 趙秀三(조수삼)/趙景璃(조경유)
【生歿年】英祖(영조)38年(1762)∼憲宗(헌종)15年(1849)
【本 貫】 漢陽(한양)
【字·號】 芝園(지원),子翼(자익),秋齋(추재),經源(경원)
【著書·作品】《秋齋集(추재집)》,〈秋齋記異(추재기이)〉
英祖(영조)38年(1762)∼憲宗(헌종)15年(1849).本貫(본관)은 漢陽(한양),
初名(초명)은 趙景璃(조경유),字(자)는 芝園(지원)·子翼(자익),
號(호)는 秋齋(추재)·經源(경원)이며
嘉善大夫(가선대부) 漢城府左尹(한성부좌윤)兼五衛都摠府副摠管(오위도총부부총관)에
追贈(추증)된趙元文(조원문)의 아들로서,
朝鮮(조선)後期(후기)의閭巷詩人(여항사인)이다.
《風謠三選(풍요삼선)》에作品(작품)이 收錄(수록)되기도 한 趙景濂(조경렴)의
同生(동생)이고,(조선후기)의 畵員(화원)趙重默(조중묵)은 그의 孫子(손자)이다.
그의 身分(신분)은 胥吏(서리)라고도 하나, 大槪(대개)는 譯科中人(역과중인)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4世(세)에 글을 배우기 始作(시작)하여 6∼7歲(세)에는 歷史(역사)와
經書(경서)를 읽었고, 8歲(세)에는 詩賦(시부)를 지었으며,
12歲(세)에는 白日場(백일장)에 나가 筆鋒(필봉)을 휘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身分(신분)의 除限(제한)으로 憲宗(헌종)10年(1844)83歲(세)의
나이로進士試(진사시)에合格(합격)하였다.
千壽慶(천수경)·張混(장혼)·車佐一(차좌일)·金洛瑞(김낙서)·王太(왕태)·
朴允默(박윤묵)等과仁旺山(인왕산)玉流川(옥류천)近處(근처)에詩同人(시동인)을 모아
‘松石園詩社(송석원시사)'를 結成(결성)하였는데,이는 中人層(중인층)詩壇(시단)들의
母胎(모태)가 된다.그는 金正喜(김정희)·金命喜(김명희)·趙寅永(조인영)·
趙萬永(조만영)·韓致元(한치원)·南尙敎(남상교)·李晩用(이만용)等(등)當時(당시)의
有名(유명)한 士大夫(사대부)들과도 交遊(교유)했다.以中(이중)趙寅永(조인영)·
趙萬永(조만영)은豊壤趙氏(풍양조씨)世道政治(세도정치)의
中樞的(중추적)인人物(인물)로 그의後援者(후원자)役割(역할)을 하였다.
그는平生(평생)武官末職(무관말직)으로있었으나,正祖(정조)13年(1789)
李相源(이상원)을 따라 中國(중국)에 다녀온 以來(이래)여섯次例(차례)나
燕行(연행)하였으며,國內(국내)各地(각지)를 빠짐없이 旅行(여행)하면서
많은 詩作品(시작품)을 남기고있다.中國(중국)에 가서는
當代(당대)의一流 文士(일류문사)인 吳崇梁(오숭량)·劉喜海(유희해)·
江漣(강련)·朱文翰(주문한)等(등)과도사귀면서 筆名(필명)을 날렸다.
諧謔(해학)을 좋아하였고 俚俗(이속)의 일에 對(대)하여 많이
이야기하였으며,돌아오면서 뒷전으로 가벼이 여기지 않고 헤아렸다고 한다.
巷間(항간)에서 보고들은 이야기를 中心(중심)으로 서울 市井(시정)周邊(주변)의
庶民出身(서민출신)藝能人(예능인)71人의行跡(행적)을 詩(시)로적은
秋齋記異(추재기이)가 남아있다.그의詩(시)는大體(대체)로生活周邊(생활주변)이나
自然(자연)을 素材(소재)로하여 對象(대상)과의 調和(조화)를 追求(추구)한
初期(초기)의 作品(작품)들과 社會現實(사회현실)을 事實的(사실적)으로
描寫(묘사)한 長篇詩(장편시)들인 後期詩(후기시)로나누어진다.
著書(저서)로는《秋齋集(추재집)》8卷(권)4冊(책)이남아傳(전)한다.
조선 후기의 여항시인(閭巷詩人).
본관은 한양(漢陽). 초명은 경유(景濰).
자는 지원(芝園)·자익(子翼), 호는 추재(秋齋)·경원(經畹).
가선대부 한성부좌윤 겸 오위도총부부총관(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管)에
추증된 원문(元文)의 아들이며, 여항시인 경렴(景濂)의 동생이고,
조선 말기의 화원(畵員)인 중묵(重默)은 그의 손자이다.
서리(胥吏)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고,
대개 역과중인(譯科中人)출신으로 알려지고 있다.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의 핵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으며,
정이조(丁彛祚)·이단전(李亶佃)·강진(姜溍)·조희룡(趙熙龍)·
김낙서(金洛瑞)·장혼(張混)·박윤묵(朴允默) 등 여항시인과 사귀었으며,
김정희(金正喜)·김명희(金命喜)·조인영(趙寅永)·조만영(趙萬永)·한치원(韓致元)·
남상교(南尙敎)·이만용(李晩用) 등 당시의 쟁쟁한 사대부들과도 친밀히 지냈다.
특히, 조인영·조만영은 풍양조씨 세도정치의 중추인물이었는데,
조수삼의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1789년(정조 13) 이상원(李相源)을 따라 처음으로 중국에 간 이래 여섯 차례나
연행(燕行)하여, 당대 중국의 일류문사인 오숭량(吳崇梁)·유희해(劉喜海)·강련(江漣)·
주문한(朱文翰) 등과 사귀었다.
많은 시들을 남겼다.
그의 시는 대개 전기·후기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전기에서는 생활주변이나
자연을 소재로 하여 대상과의 조화를 추구한 작품들이 대부분이나,
후기로 올수록 사회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 많아지며,
장편시들도 눈에 뜨이게 양산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김정희는 두보(杜甫)의 시풍과 근접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관북지방을 여행하면서 당시 민중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파한
〈북행백절 北行百絶〉 등이 이러한 시풍을 대변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밖에도 〈석고가 石鼓歌〉·〈억석행 憶昔行〉·〈병치행 病齒行〉 등도
장편거작으로 인구에 회자되었던 작품이다. 그리고 주로 당시의 도시하층민들의
생기발랄한 모습을 산문으로 쓰고 칠언절구의 시를 덧붙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추재기이 秋齋紀異〉,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에 대한 짧은 산문과 시의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는 〈외이죽지사 外夷竹枝詞〉 등은 한문학사상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