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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절대로 다투지 말며, 다투게 되더라도 속히 그만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가 증오로 자라며, 티끌이 들보로 변하고, 영혼이 살인자가 될 것이다. 사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렇게 읽고 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요한 3,15). [6,1]
☕ 미움은 죽음에 이르게 한다.
누구든지 다른 이를 모욕하거나 저주하거나 혹은 어떤 잘못에 대해 면박함으로써 마음을 상하게 하였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사과하여 저지른 것을 낫게 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며, 마음이 상한 자는 따지지 말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만일 양편에 서로의 마음을 상해 주었으면, 서로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 이는 너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 때문이니, 너희가 그 기도를 자주 바치는 그만큼 건전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6,2]
비록 자주 분노를 일으키더라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깨달아 서둘러 용서를 청하는 자는 쉽게 분노하지는 않지만 용서를 청하기 어려워하는 자보다 낫다. 용서를 절대 청하지 않거나 진심으로 청하지 않는 자는, 비록 수도원에서 내쫓기지 않더라도 아무 이유 없이 수도원 안에 사는 자이다. [6,2]
☕ 용서는 사랑과 함께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소용없는 반면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이 충만하고 완전하다고 가르칠 정도로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사랑을 높이 평가하셨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고 있었다"(『가톨릭적 생활 방법』 33,73). 그러므로 수도원의 공동생활은 그리스도적 사랑을 매일 실천하는 활동의 장(場)이 되어야 한다. (152쪽)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사랑을 배우는 학교다.
“풍랑이 배의 진로를 항구로 잡아 줄 때도 가끔 있다. 그때 그곳에 암초들이 없다 하더라도 배들은 서로 충돌하여 부서지기도 한다”(『시편 주해』 99,10). 이 생생한 비유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완전하게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 이 지상에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152쪽)
수도원 안이라 하더라도 일상생활에 관련되는 많은 문제에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있는 것은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이런 일들에 대한 의견의 일치가 요청될 때 우리는 성실하고 개방적인 마음으로 의논하여 현안 문제들이 명확히 납득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그리스도적 신앙과 수도생활의 본질에 직접 연관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견해도 용납해야 한다. (153쪽)
☕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이를 인정하고 존중하게 하는 것이 사랑의 힘이다.
"누구든지 다른 이를 모욕하거나 저주하거나 혹은 어떤 잘못에 대해 면박함으로써 마음을 상하게 하였으면, 될 수 있는대로 속히 사과하여 저지른 것을 낫게 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할 것이며, 마음이 상한 자는 따지지 말고 용서해 주어야 한다. 만일 양편에서 서로의 마음을 상해 주었으면, 서로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화해를 강조할 뿐 아니라, 주저하지 말고 화해할 것을 세 번이나 강조한다. 그는, "해가 질 때까지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에페 4,26)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154쪽)
☕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나와 그를 죽이는 것과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화해를 미루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첫째, 갑자기 화를 내고 나서 뒤끝이 없는 것과는 달리, 분노가 영혼에 뿌리를 내려서 증오로 변하는 것을 그는 죄악이라고 생각한다. (153-4쪽)
☕ 화는 증오의 씨앗이다. 애초부터 증오의 씨앗을 뿌리지 말아야 한다.
그는 증오심에 내포되어 있는 깊은 악의, 즉 다른 사람에게 악을 바라는 악의를 밝혀내는데,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1요한 3,15)라고 한 요한 복음의 말씀으로 증오를 살인죄에 비유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증오로 가득 찬 영혼은 살인자의 영혼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154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속하고 진정한 화해를 위한 둘째 동기를 "너희가 바치는 주님의 기도 때문"이라고 한다. 화해하지 않는 마음으로는 기도해도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154-5쪽)
☕ 증오를 가슴에 품은 채 어떻게 하느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는 청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고 진심으로 말씀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설교』 58,6,7) 마음이 증오로 가득 차 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이 없으면 기도는 모든 가치를 잃는다. 사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병들어 있으며, 말과 행동, 외적 행위와 내적 태도 사이에 깊은 골이 가로놓여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155쪽)
☕ 사랑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위선이다.
"자주 분노를 일으키더라도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깨달아 서둘러 용서를 청하고" 자기 과오를 빨리 고치는 사람은 "쉽게 분노하지는 않지만” 화해를 미루는 자보다 낫다. 사실 옳은 말이다. 전자의 잘못은 악의에서라기보다는 흔히 성급함과 우유부단에서 나오는 것인 반면, 후자는 착한 의지가 부족
하고 냉혹한 마음을 나타낸다. (155쪽)
아우구스티누스는 평소에 온유한 분이 었지만 용서를 청하기를 아주 거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준엄하게 말한다: 그들은 “비록 수도원에서 내쫓기지 않더라도 아무 이유 없이 수도원 안에 사는 자다.” 그는 이 극단적인 말을 철회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 이유가 분명하고 합당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회는, 모두 ‘하느님 안에 한마음 한뜻”이 되도록 노력하는 공동체이다. 따라서 분노와 증오에 쉽게 빠져드는 자들은 수도생활의 주된 목표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156쪽)
☕ 용서는 사랑의 기초다. 용서가 어렵다면 아직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초가 되어있지 않다는 것이다.
진정한 형제(자매)적 사랑이 결여되어 있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설명하는 것처럼 매우 심각한 문제다: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사랑 안에서 살지 못한다. 사랑 안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안에 살지 못하니,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1요한 4,8)이다”(『삼위일체론』 8,12). (156쪽)
☕ 형제나 자매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사랑이신 하느님의 자녀라 할 수 없다.
서로 참아 주십시오! 여러분 안에는 다른 사람들이 참아 주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까? … 나는 여러분 모두에게 권고합니다. 아니 하느님의 소리가 여러분 모두에게 권고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너그럽게 대하십시오”’(『시편 주해』 99,9). "형제를 참아 주려 하지 않는 사람이 무엇을 참을 수 있겠습니까?“(『서간』 48,3). (157쪽)
☕ 가까운 형제마저 참아줄 수 없다면 그 누구를 참아줄 수 있겠는가?
사도께서는, 주님 친히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신 계명을 분명히 언급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이 계명을 중시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는 임무를 우리에게 부여합니다. …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많이 참아 주시는지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는 이 봉사를 기꺼이 그리고 열심히 수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7-8). …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계명은 우리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다른 이들의 약점을 쉽게 참아 주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해 죽
으셨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83명제 자유 토론』 71,1 -7). (157쪽)
☕ 사랑한다는 것은 참아준다는 것이다.
이 장 마지막 항(6,3)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다른 특별한 경우를 다루면서, 이 문제를 지혜와 분별력으로 풀어가고 있다. 그것은 '젊은이들’을 지도하는 문제, 더 정확히 말하면, '젊은이들을 견책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이 젊은이들은 수도원에서 양육되고 교육을 받으며 훈련을 받는 젊은이들이다. 이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편지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서간』 209,3)‘성직자 수도원’에서 살아온 안토니우스라는 형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또 한 설교에서는 이 수도원의 다른 형제에 대해 말하는데, 그는 이미 수년간 공동체에서 생활했지만 아직 "법정 연령”에 이르지 못해 법적으로는 성인이 되지 못하였다고 한다(『설교』 355,2,3). (158-9쪽)
이 젊은이들 문제에 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질문한다: 어떤 형제(대개 장상임)가 젊은이들을 "정도에 지나치게 견책”하였다면 그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그는 그와 같은 사과를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창피를 당한 형제로부터 창피를 준 형제를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하 사람들을 지도해야 할 권위가 손상되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장상들이 이러한 모양으로 자신을 비하시킨다면, "젊은이들”이 오히려 우쭐거리고 교만해진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기 때문이다.
(159쪽)
그러나 장상들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잘못을 보상할 의무가 있다. 그들은 “모든 이의 주님 되시는 분께는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규칙서에 규정되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와 유사한 상황에 대해 말하는 한 설교에서 좀 더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장상)의 면전에서 참회하고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에게 벌을 부과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동시에 그가 심하게 대한 사람에게는 '따뜻한 사랑’의 표시를 보여 주어야 한다: “친절한 인사는 일종의 용서를 비는 행위입니다"(『설교』 211,5,4). (159-160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장상의 “따뚯한 사랑”에 대해 말한 다음 이에 덧붙여 수도원 안에 있어야 할 사랑의 형태에 대해 일반적인 원칙을 제시한다: "너희 사이의 사랑은 육적인 사랑이 아니라 영적인 사랑이어야 한다." 이 마지막 권고는 장상들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여기서 말하는 “육적인 사랑”은 오로지 외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진 자기중심적이고 감상적이며 격정적인 경향을 뜻한다. 그는 그런 사랑이 수도 공동체 안으로 들어올 위험이 다분히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서로의 사랑을 점점 정화시켜서 "영적인 사랑”, 즉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로마 5,5) 부어 주시는 사랑이 되게 하기를 바란다. (160쪽)
너희는 아버지에게 하듯 원장에게 순종하며, 그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림으로써 그분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무례를 당하시지 않도록 할 것이다. 너희 모두를 돌보는 사제에게 더욱더 그렇게 해야 한다. [7,1]
이 모든 것이 준수되도록 하며, 만일 준수되지 않는 점이 있으면, 방심하여 지나쳐 버리지 말고 견책하고 바로잡아 줌으로써 고치게 하는 것이 원장의 중요한 임무이다. [7,2]
너희 중의 으뜸인 자는 자신이 권한으로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자임을 기쁘게 여길 것이다. [7,3]
원장은 모든 이에게 자신을 선행의 표본으로 보이며 문란한 이들을 꾸짖고
소심한 이들을 위로하며 약한 이들을 붙들어 주고 모든 이에게 인내할 것이다(1테살 5,14 참조). [7,3]
☕ 장상은 아래 사람에게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적 순종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는 수도자들을 '그리스도의 군인들’로, 그리고 수도생활을 ‘그리스도를 위한 군복무’로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이것은 그가 수도생활의 이상을 군인들의 엄격한 비인간적인 복종으로 보고 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는 사랑이 권위와 순종 양쪽 모두를 고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수도생활의 기초가 순종이 아니라 애덕, 즉 그리스도적 사랑이기 때문이다. (162-3쪽)
☕ 수도자의 순명은 그리스도적 사랑의 표현이다.
순종은 무엇인가? "명령과 순종 사이의 질서있는 조화는” 각종 인간 단체 안에 평화를 도모하기 위한 필요 불가결한 요건이 된다고 그는 생각한다(『신국론』 19,13). 그러므로 순종의 의무는 남녀 수도자들이 그들 공동체에 대해 지니고 있는 의무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163쪽)
"너희는 아버지에게 하듯 원장에게 순종하며."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순종 개념 전체의 열쇠이며, 회수도자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 전통적인 순종의 이상(理想)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발전을 나타낸다. 비록 회수도자들이 초기부터 그들의 장상을 “아버지/어머니”(압바[abba],아빠스[abbas]/아빠티싸[abbatissa])라고는 하였지만, 아버지/어머니에게 하는 그런 순종의 개념과는 약간 달랐다. 바실리우스 성인도 그의 소수 규칙서에서 수도적 순종을 예증(例證)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이미지가 아니라 주인과 종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동방 수도원들에 전해 내려오는 엄격한 명령 순종의 모델을 온전히 상호 신뢰와 그리스도적 사랑에 기초를 둔 더 인간적이며 인격적 장상과 수하 사람의 관계로 바꾸어 놓은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공이다. (164쪽)
☕ 그리스도가 말하는 순종은 상호신뢰와 그리스도적 사랑에 기초를 둔 순종이다.
그의 규칙서가 매우 짧다는 점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는 규율과 법을 많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항상 순종의 의무가 하나의 무거운 멍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164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 장상들의 직무를, 그들이 언젠가는 하느님께 셈바쳐야 하는 일종의 신적 위임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장상들은 수하 수도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하느님은 그들을, 말하자면 자신들에게 맡겨진 형제자매들에게 봉사하도록 세운 것이다. 이 사실에서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들의 명령과 지시 이면에는 하느님의 권위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그는 그의 형제자매들이 장상들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림으로써 그분 안에 계시는 하느님께서 무례를 당하시지 않도록 하라”고 명한다. 수하 형제들은 나쁜 장상들의 입을 통해서도 하느님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니, 빛이 "불결한 것을 통과하더라도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이다"(『요한 복음 주석』 5,15). “장상들이 하느님의 법을 거역하는 일을 명령할 때"(『시편 주해』 70,1,2)에만 순명을 거부할 수 있다. (165쪽)
베네딕도는 아우구스티누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주교직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설교』 중 한 구절을 인용한다: 장상으로서 “우리는 여러분을 지배하기보다는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어 주기를 더 좋아합니다”(『설교』340,1; 참조: 『베네딕도 규칙서』 64,8). (166쪽)
☕ 장상은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다. 유익을 주기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다.
"너희 중의 으뜸인 자는 자신이 권한으로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하는 자임을 기쁘게 여길 것이다.” 장상들은 남을 지배하는 자세가 아니라 사랑어린 관심을 보여야 한다. 그들은 자기 직분을 하나의 ‘봉사’로 여겨야 하니, 왜냐하면 다른 모든 이처럼 헌신적인 봉사 안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와 수도원 안의 각종 직무가 일종의 봉사라는 개념을 매우 중시하였으며,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3,11)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이 개념을 개진할 수 있었다. 권력 추구와 권력 지향적인 사고방식은 비그리스도적인 것으로 그는 생각했다. (166쪽)
한 강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교회 안에서 다스리는 직책을 맡았을 때, 자신의 특권을 찾으며 자신의 이익만을 돌보는 자들은 맡겨진 양 떼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을 살찌우는 자들이다"(『설교』 46,1,2).(167쪽)
‘나는 내 형제들의 좋은 점만 생각하고 그들을 항상 신뢰한다”(『설교』355,2,2).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수도 형제들의 직무 수행에 대폭 독립 재량권을 주고 자신은 감독 역할만 맡았다(『전기』 24,1). (167쪽)
☕ 윗사람은 아래 사람의 장점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장상들의 첫째 의무는 "이 모든 것이 준수”되는지 살펴보는 것이라고 규칙서는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자신이 이 규칙서를 완전히 준수함으로써 좋은 모범이 되는 것이다: "원장은 모든 이에게 자신을 선행의 표본으로 보이며", 스스로 “규율을 기꺼이 유지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스스로 제일 먼저 순종하는 데 숙달된 자만이 다른 이들에게 순종을 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은 더 높은 장상에게 순종하기를 거부하면서 다른 이들에게는 자기에게 순종하도록 명령하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겠는가?’(『수도자들의 노동』 31,39). (167쪽)
☕ 윗사람은 스스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순종하는 자만이 순종을 명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견책하고 벌주는 것이 이 임무들 중에 가장 어려운 일이지만, 수도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더 나아가 장상들이 “수하 사람을 교정하고 확실하게 개선시키기 위해 벌을 줄 때, 그 당사자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에게 자비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엔키리디온』 19,72). 만일 수하 사람들이 장상들의 말을 마지못해 듣는 척할 때에도, 장상은 꾸짖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점에 대해 사도의 권고로 호소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시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꾸준히 전하시오” (『설교』 46,7,14; 참조: 2티모 4,2). (168쪽)
장상들이 훈계하고 벌주는 일만 해서는 안 된다. 수하 사람들 역시 위안과 도움을 기대한다. 따라서 장상들은 수하 사람들의 내 · 외적 약점을 알아야 하며 인내와 사랑으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168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장상들에게 강한 책임 의식은 물론이고 지대한 인내심을 갖도록 권한다. 규칙서 이 장에서 그는 장상들의 책임에 대해 거듭 언급한다: 장상들은 너희에 대해 하느님께 셈바치게 될 것을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는 자신이 일생 동안 수도 장상과 주교로 있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부담인지를 깨달았고, 그래서 장상이 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다(『설교』 46,1,2 참조). 그러므로 그는 장상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장상들의 직위는 수하 사람들보다 외적으로 높은 자리에 있지만 그럴수록 하느님 앞에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더 겸손해져야 한다. (169쪽)
☕ 자리가 높아지면 질수록 책임도 커지는 법이다.
우리는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하듯 장상에게 순명해야 하며, “법의 종으로서가 아니라 은총의 지배 아래 자유인”(규칙 8,1)이 되어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 이러한 순명은 우리 편에서 장상들을 위한 일종의 사랑의 표시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 마음속에 지고 있는 짐을 깨달아야 하며, 하느님 앞에서의 책임을 쉽게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너희 가운데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그만큼 더 큰 위험이 그들에게 따르기 때문이다”. (169-70쪽)
☕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떨어질 위험은 더 커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한 설교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을 모두 반박하고 나서는 반항적인 수도자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실감나게 묘사한다: “성경은 ‘어리석은 자의 감성은 수레바퀴와 같고’(집회 33,5)라는 말씀으로 불평분자들을 아주 적절히 묘사합니다. 그것은 밀짚과 마른 풀만 운반해도 언제나 덜커덕거립니다. 왜냐하면 수레바퀴는 덜겅거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형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몸으로만 공동체 안에 함께 살고 있을 따름입니다”(『시편 주해』 132,12). 이 고집 세고 뻣뻣한 자들은 수도 공동체에 참으로 큰 짐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들에 대해 적절하게 묘사한다: “그들은 멍에를 쓰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발굽으로 마구(馬具)를 망쳐 버리는,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짐승과 같다”(『시편 주해』 132,12). 그들은 옹고집 때문에 평화를 뒤흔들고 산산이 부순다. (170쪽)
☕ 매사에 불평만 하는 이는 덜렁거리는 수레와 같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수도적 순종에 대해 터득하고 있는 마지막 특징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삶 전체를 하느님에 대한 신속하고 헌신적인 봉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자신과 수도 형제들을 하느님의 ‘종’ 또는 ‘노예’로 즐겨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71쪽)
☕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하느님에 대한 봉사다.
첫댓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나와 그를 죽이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