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3:36-45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끊임없이 간음을 했다. 오홀라는 먼 나라의 귀인들을 불러 공개적으로 간음하고 사막에서 떠도는 잡배들을 불러 끊임없이 간음을 했다.
이전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바빌로니아를 통해 오홀리바의 코와 귀를 베게 하시고 모든 것을 다 빼앗고 옷까지 벗겨 전시하게 하시자 오홀리바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노의 잔까지 씹어 먹고 자신의 유방을 잡아 찢으며 분노를 표현했다고 했다. 이제 이러한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가증한 죄를 기소하고 알게 하는 내용이다.
36절은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가증한 일을 그들에게 고하라고 하셨다. 북왕국 사마리아나 남왕국 유다나 모두가 같은 백성이고 똑 같은 죄를 범했기에 하나로 묶어서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알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된 초점은 오홀리바로 비유된 예루살렘에 있다.
37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연결이 되기에 왜 그들의 가증한 죄를 그들에게 말해야 하는가 하면 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가지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나는 간음을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을 죽여 손에 피를 묻힌 것이다. 그러나 두 죄는 모두 같은 죄이다. 37절 뒷부분에서 이 두가지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설명한다. 먼저 그들은 우상들과 간음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간음한 우상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해서 우상에게 음식으로 주었다는 것이다. 우상들에게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자신의 자식들까지 요리해서 먹게 하는 완전히 정신 나간 여자의 모습이다.
38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37절은 스스로를 더럽히고 자녀들을 희생시킨 죄이지만 이제 38절은 여호와 하나님을 더럽히는 죄를 지은 것이다. 그것은 당일에 내 성소를 더럽히며 내 안식일을 범한 것이다. 당일 이라는 말은 그렇게 우상과 간음을 하고 자식들까지 우상에게 음식으로 내어준 그 날이다. 그렇게 부정하게 된 그 날에 여호와의 성소에 들어와 성소를 더럽히고 안식일까지 범했다는 것이다.
39절은 당일에 행한 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들이 자신들의 자식들을 죽여 우상에게 희생제물로 바친 바로 그날에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와서 더럽혔다는 것이다. 이어서 원어에는 "보라!" 라는 말이 있다. 뭘 보라는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내 집 안에서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바람 난 여자가 정부와 간통을 하고 자녀들을 정부에게 요리해서 먹인 다음에 바로 자기 남편에게 와서 남편을 섬기는 모습과도 같다. 이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보란듯이 깬 것이다. 언약을 맺을 때 반으로 쪼개 놓고 지나간 그 짐승처럼 되야 하는 죄인 것이다.
40절은 그렇게 하고도 모자라서 사절을 먼 곳에 보내 사람을 불러오게 했다. 이어서 원어에는 "보라!" 라는 말이 나오고 "그들이 왔다!" 라는 말이 이어진다. 먼 곳에서 온 남자들이 밖에 와 있자 그 남자를 유혹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하는 모습이 이어진다. 이제 2인칭 단수로 바뀌었다. 이제 간음하는 주체는 오홀리바인 것이다. 너는 그들을 위해 목욕을 하고 눈썹을 그리고 장신구로 꾸몄다고 했다. 41절은 화려한 소파에 앉게 하고 그 앞에 상을 차린다. 그 상에는 하나님께 드릴 향과 기름을 펼쳐 놓았다. 하나님의 집과 안식일을 더럽힌 것으로도 모자라 하나님의 것을 외간 남자에게 주고 있는 것이다.
42절 앞부분은 그 무리와 편히 지꺼리고 즐겼다고 했다. Block은 간음하는 행위가 대중에게 공개된 것을 암시한다고 했다(Block, 761). 많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악사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는 소리가 뒤 엉켜 있는 가운데서 오홀리바는 멀리서 불러온 존귀한 자들과 공개적으로 성관계를 하는 장면으로 본 것이다. 아무리 해도 채워지지 않는 음욕을 채우기 위해 이번에는 말도 안되는 행위를 한 것이다.
오홀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42절 뒷부분에는 새로운 남자들이 등장한다. "광야에서 잡류와 술 취한 사람들을 청하여 오매" 라는 말은 먼 곳에서 공식적으로 초청해온 존귀한 남자들과는 반대가 되는 사람들이다. 먼 곳에서 공식적으로 초청해 온 존귀한 남자들로 도 음욕을 채우지 못하자 이번에는 아라비아 광야를 떠도는 최하층의 남자들을 초청해온 것이다. 광야에서 온 잡배들과 술 주정꾼들은 팔찌를 그 손목에 끼워주고 아름다운 관을 머리에 씌워주는 것은 성관계를 하기 위해 화대를 지불하는 장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43절은 오홀라를 가리켜 음행으로 쇠한 여인이라고 말한다. 원어는 음행으로 닳은 여자라는 뜻이다. 하도 많이 음행을 해서 다 닳아버린 여인이라는 것이다. 개역개정이나 새번역은 여인을 복수로 번역했지만 원어는 단수이다. NLT는 "worn-out
prostitutes" 라고 복수로 번역했지만 대부분 영어 번역들은 단수로 번역했다. 음행을 하도 많이 해서 닳아 빠진 여자가 뭐가 좋다고 그래도 그들은 계속해서 그녀와 성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성관계를 갖는다는 말은 계속해서 관계를 갖는다는 뜻이다. 광야에서 온 잡배들과 주정꾼들이 그녀 앞에 길게 줄서 있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새번역은 개역개정보다 훨씬 더 부드럽고 암시적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원어는 분명히 끊임없이 계속해서 간음하는 장면이다.
44절은 43절에서 오홀라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성관계를 갖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개역개정은 "그들이 그에게 나오기를 기생에게 나옴같이" 라고 번역했는데 새번역처럼 "창녀"라고 해야 옳다. 원어를 직역하면 "그들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들어갔다 마치 남자들이 한 창녀에게 들어가는 것처럼" 이다. 창녀가 있는 방 앞에 광야에서 온 남자들이 한 줄로 길게 서 있고 계속해서 수많은 남자들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들어갔다가 나오는 장면이다. 계속해서 그녀라고 하다가 44절 끝부분에서는 음란한 여인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들어갔다 라고 한다. 둘이 똑같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Block은 오홀라와 오홀리바는 창녀들이 성욕을 해소시켜 주는 것과 같은 성의 도구일 뿐이라고 했다. 하지만 본문의 초점은 남자들의 성욕 해소에 있지 않다. 오히려 본문의 문맥은 음욕을 채우지 못해 끊임없이 새로운 남자들을 불러들이는 오홀리바의 음욕에 있다. 청소년기 이집트에서 시작한 음욕은 끝도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0-44a에서 계속 단수로 말한 것은 오홀리바로 비유된 예루살렘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45절은 의인들이 간통한 여자들을 재판함 같이 재판한다고 했다. Cooper는 탈굼은 이 의인들이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보았다며 의인들이 오홀라와 오홀리바의 이방인 정부들일지도 모른다고 했다(Cooper,
233). Block도 그들이 재판하는 동기가 옳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했을 수도 있지만 예루살렘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롭기 때문에 의인이라고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했다(Block, 762).
그렇다면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재판하여 사형 판결을 내리는 의인은 오홀라와 오홀리바와 정을 통한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분노해서 사형판결을 내리는 것이다. 자신들을 불러서 음욕을 해소하려 한 것도 모자라 사막에서 떠도는 불량한 유목민들을 불러서 끊임없이 음욕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의인이라기 보다는 악인들이다. 이들을 의인으로 부른 것은 오홀라와 오홀리바 보다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의롭기 때문이다.
어떤 음란한 소설보다 더 음란한 장면을 성경은 묘사하고 있다. 이는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만 섬긴다 하면서도 끊임없이 우상을 섬긴 것을 고발하는 것이다. 오늘날 믿는 자들도 역시 하나님을 점쟁이가 써준 부적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세상 쾌락과 탐욕을 섬긴다면 우리 역시 오홀라요 오홀리바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 쾌락과 탐욕을 따라 산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우리보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훨씬 의로울지도 모른다. 어쩌면 오늘날 기독교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는 것도 그들보다 훨씬 더 탐욕스럽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기독교는 그러한 의인들에게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