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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와 함께 하는 인문학 산책-⑥
무더위와 장마가 지속되는 여름입니다.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여름에 대한 다양한 추억이 있겠지만, 저는 10여 년 전의 지난한 여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이 예정되어 있던 해였지요.
이를 위해 정부와의 관계부터 지자체들과의 협력, 교회 내부의 소통까지 당시 대전교구장이던 유흥식 주교는 꼬여있던 실타래를 풀듯이 숙제를 해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돕는 작은 역할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요즘처럼 무더위와 장마와 싸우며, 며칠 남지 않았을 때는 지친 나머지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즈음 주교님은 “마지막까지 우리의 사랑을 불어 넣읍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습관적으로 처리해 가던 저를 흔드는 말이었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 무슨 마음으로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다시 묻곤 합니다.
사랑과 행동 사이의 관계를 잘 요약해 주는 말이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Dilige et fac quod vis)는 라틴어 격언입니다.
중세를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 주교의 말입니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체계를 갖추어 가는데 중요한 주제인 죄, 사랑, 자유 의지 등에 관해 정리한 분입니다. 그가 쓴 ‘페르시아 사람들을 위한 요한서간 강해’(7,8-11)에서 이 말을 사용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했던 “믿음과 희망과 사랑,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라는 말에서 사랑(Agape)이라는 단어에 주목한 것이죠.
사랑의 가장 고귀한 형태인 아가페는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곧 대가를 바라지 않고 이웃의 행복과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아가페가 행동과 선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무엇에 앞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의 가르침은 하느님과 일치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담은 표현이기도 합니다. 사랑이 한 사람의 성격을 형성하고 행동을 변화시키며, 개인의 이익을 넘어 더 큰 공동체에 선을 위한 변화의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살면서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누구나 깊은 사랑을 받고 싶어 하고 사랑을 갈망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이 고통스런 이유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 사랑은 나눌수록 깊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사랑을 먼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네딕토 16세 전 교황은 “사랑의 능력이 파괴되면 지독한 단조로움이 찾아오고, 이것은 인간을 독살하고 세계를 파괴시킬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사랑이 있는 곳에서만 사람이 의미 있다고 선언합니다. 먼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고 우릴 적극적으로 초대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체득되는 것입니다. 고통은 성숙의 과정이기 때문이죠. 고통을 자신의 내면에 받아들인 성숙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깊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 사랑은 어렵게만 느껴집니다. 참 사랑을 좀 더 배워가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의 생략된 말을 조금 더 음미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것을 하라. 침묵하려면 사랑으로 침묵하라. 말을 하려면 사랑으로 말하라. 남을 잡아 주려면 사랑으로 바로 잡아주어라. 용서하려면 사랑으로 용서하라. 그대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사랑의 뿌리가 내리게 하라. 이 뿌리에서는 선한 것만이 싹틀 것이니”
모든 걸 드러내고 티내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 광고만이 아니라 거리의 현수막까지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이 넘쳐납니다. 반면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알아주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잊혀갑니다. 소중한 사랑으로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도 점점 묻혀갑니다.
그러나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가 우리에게 그리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참 사랑으로 한 일이 얼마나 있는지, 지금 사랑하며 살려하는지가 인생에서 훨씬 중요한 게 아닐까 합니다.
해미국제성지 한광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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