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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서적 다시 읽기]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은 인간의 삶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오래된 테마가 아닌가 싶다. 먼저 낱말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찾아본다. 원칙은 ‘많은 경우에 적용되는 근본 법칙’이고, 변칙은 ‘원칙, 규정에 벗어난 법칙’이며, 반칙은 ‘법칙이나 규정에 어그러짐’으로 풀이 하고 있다. 오늘날의 인류는 원칙을 지키는 일이 매우 가치 있는 일이고, 인간의 품위를 높이는 일로서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정도의 높은 도덕적 양심적 수준에 도달해 있다. 다른 관점에서 우리들은 원칙만을 지키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에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 또 변칙이 난무하는 곳에서는 서로 신뢰하기 어려워 불안하고 고통스럽지는 않을까? 그리고 반칙만 있는 세상에서는 살아가는 것이 힘들지 않을까?
몇 가지 예를 보자. 밭농사에서 철에 맞춰 씨앗을 뿌리고 물을 주며 자라기를 기다렸다가 수확하는 것은 원칙을 지키는 일이고, 박의 뿌리에 수박을 접붙여 키우며 돌연변이로 생겨난 뛰어난 종자를 보편화하는 것은 변칙에 속하고, 잡초를 뽑고 독한 농약을 치는 행위는 땅이나 동식물의 입장에서는 반칙을 범하는 것이 아닌가? 가축 기르기에서 소나 돼지에게 양질의 먹이를 주면서 심리적 안정을 갖도록 하여 무럭무럭 자라도록 먹이를 주고 돌보는 원칙을 지켜야 하고(처음부터 잡아먹을 목적으로 키우는 행위는 속임수가 들어가지만), 종자를 개량하는 것은 변칙을 하는 것이고 달걀이나 우유를 모아 판매하고 마침내 가축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은 반칙이다. 철따라 이동하는 물고기 떼가 오기를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은 원칙에 해당하는 것이고, 그물이나 낚시라는 함정을 이용해 그들을 잡는 것은 반칙에 해당되며 인공적으로 양식하는 것은 변칙에 해당될 것이다.스포츠에도, 예술 활동에도, 인간의 삶에도, 경제활동에도, 신앙생활에도 원칙, 변칙, 그리고 반칙이 어우러져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지 아니한가? 간음하다 잡힌 여자(요한 8,3-11) 이야기에서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하였는데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그 자리에서 떠나갔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겠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 여기서도 원칙과 변칙과 반칙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세례를 받고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도 인생에 섞여드는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신앙생활도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삶을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한다. 그저 감사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을 수행하며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바치는 기도서가 지혜를 강조한 잠언이나 지혜서 또는 집회서로 구성되지 않고 시편으로 이루어진 것은 시편이 원칙과 변칙과 반칙이 뒤섞인 인생의 진면목을 좀 더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약성경이 교훈적인 내용만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리라. 하느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 인간에 대한 사랑과 속임수, 전쟁과 평화 등 인간의 삶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영역을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전하는 예수님의 삶에 도전과 파국이 있고 드라마틱한 사랑과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살이의 자취들이 풍부히 들어있기 때문에 강력한 매력이 있다. 그분은 파격적인 말과 행동의 변칙과 반칙 안에 언제나 사람들과 하느님,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의 원칙을 고수하시지 않았는가? 우리의 삶 곳곳에 스며있고 서로 교묘히 조합되어 삶이 되게 하고 역동적이게 하는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이 하나의 과제로 남는다. - 『원칙과 변칙 그리고 반칙』, 전헌호 신부 저 / 도서출판 장락
‘신심서적 다시 읽기’ - 2년 간의 연재를 마치며
가톨릭신문에서 신심서적 읽기운동을 폈다. 이는 책 읽는 교회, 성숙한 신앙을 지향하는 공동체의 독서운동이며 자신의 삶을 성찰함을 돕고자 한 것이었다. 이 운동에 동참하려고 본당에서는 매월 선정도서를 구매하고 회원 20여 명이 월 2회 독후감 나눔 행사를 했었다. 참 좋은 시간이었다. 여러 종교가 있고 종교인도 수없이 많은데 “왜 나라가 이 모양인가?”라는 걱정을 가끔 듣기도 하지만…. 가톨릭 신자만 하더라도 약 5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이 세상은 뭐가 달라지고 있는가? 가정이나 사회에서 신앙인으로서 살고 있는가를 묻고 그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우리는 한 순간도 성찰의 삶을 놓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의무인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는가? 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하느님께 우리는 시련과 고통을 없애달라고 매달리기보다 그 삶의 무게를 견뎌내고 짊어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가? 주일미사에 몸만 참여하는 것으로만 신자의 의무를 지킨다고 생각하는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성체조배나 묵주기도를 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우리는 신앙을 위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십계명 중 넷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임은 다 잘 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에게 존중과 공경을 받을 수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용서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기억하면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는 것이라고 한다. 또 아이는 어쩌다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면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하다. 성경읽기 또한 하느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함이다. 성경을 천천히 읽고 묵상(되새김)하고, 기도하고, 관상(일치)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과연 어떻게 하고 있는가? 회원 모두는 신심서적 읽기를 통하여 참 좋은 은총의 시간을 얻었다고 회고한다.
교회 안에서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며 복음적 생활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어떻게 키울까? 신심도서 『누가 그들의 편에 설 것인가?』 (곽은경·백창화 저)에서 읽은 예화다. 페루의 빈민촌 리마의 시장에서 올리비에 신부가 눈 깜짝할 사이 바닥에 나가 뒹굴더니 지니고 있던 카메라와 지갑을 날치기 당했다. 그 곳에서 선교를 하고 있는 미구엘 신부가 수많은 인파에다 대고 소리를 지른다. “나는 미구엘 신부다. 당신들이 공격해서 탈취해 간 소지품은 우리 집을 방문한 손님의 것이다. 그러니 꼭 돌려주기 바란다.” 아침이 되자 잃어버렸던 물건이 문 앞에 놓여 있었다. 참 기적이다. 이는 신부님께서 신앙인의 삶을 사셨고 주민들에게 헌신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신심서적 읽기는 무조건 남는 장사란 생각이 든다. 알게 모르게 자양분을 섭취하고 우리의 신심을 길러주지 않을까? 세례 때의 그 신심만으로는 어린이의 신앙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려는 신앙인으로서 ‘향기’ 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동안 글을 읽어주시고 격려와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마음과 늘 주님의 크신 은총 안에 머무르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신심서적 다시 읽기]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즉위 후 펼쳐왔던 강론 안에는 가난하고 소박한 교회를 위한 지향은 물론, 신앙을 사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당부의 말씀이 담겨있다. 또한 이 말씀은 “우리의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한 곳에 나가라는 초대”이기도 하다. “가난한 이들의 외침에 귀를 막으며 내 안에, 울타리 안에 들어앉아 있기보다는 다치고 깨질 위험을 감수하면서 세상을 향해 나갈 때만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구현할 수 있다.”고 하셨다. 세계화에 내몰려 신음하는 우리 사회에 방향타를 제공하는 강론 말씀을 15개의 항목으로 나누어 간추려 정리한다.
1. 신앙의 빛(회칙 ‘신앙의 빛’ 4항과 34항) : 신앙은 우리를 부르고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는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형성된다. 신앙의 확신은 우리가 발걸음을 떼고 모든 이에게 믿음을 증거하고 그들과 대화할 수 있게 해준다.
2.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기 : 그리스도에게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나눈다는 것이며 예수님과 친교의 나눔을 의미한다. “저는 말하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묵상하고 느끼면서 머뭅니다.”
3. 친교의 집 : 가톨릭교회는 “단 하나의 신앙과 단 하나의 성사생활과 단 하나의 사도적 계승, 그리고 단 하나의 공통희망과 단 하나의 사랑을 가진다.” - 여러분은 쓸데없는 험담과 잡담이 본당과 공동체와 교회를 해롭게 만드는 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험담과 잡담은 아주 해로운 악이며 험담은 상처를 낸다.
4. 조화의 집 : ‘보편되다’는 총체성을 가리킨다. 가톨릭이 보편적인 이유는 1) 우리의 신앙 전체가 온전하게 선포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구원이 모든 이에게 제공되는 공간이기에 보편적이다. 2) 교회는 세계적이고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으며 남녀노소 모두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때문에 보편적이다. 3) 다양함 속의 일치를 통해 풍요함을 실현한 ‘조화의 집’이기에 보편적이다. 그러기에 다양성 안에서 조화의 일치를 이룬다.
5.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도록 파견된 교회 : 사도(파견된 사람, 보내진 사람)는 먼저 기도하고 복음을 선포하도록 선택받고 부르심을 받았으며 그분에 의해 파견된 사람이다.
6. 성령의 이끄심에 내맡기기 :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므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진리는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 그 자체이다.
7. 하느님 말씀 전하기 :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형제에게 한 조언. “여러분,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말로도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 여러분의 삶과 그 증거로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우리는 우상을 교묘히 숨겨두고 지낼 때가 많다. 야망, 출세주의, 성과주의, 자기중심주의, 남보다 높아지려는 성향,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는 오만함, 여러 가지 죄 등 다양한 우상을 마음 깊은 곳에 드러나지 않게 숨기고 있다.
8.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 :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 성체성사 안에서, 기도생활 안에서, 찬미하는 삶에서,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분에 대해 묵상하고 그분을 경배하면서 끌어안는 것이다.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는 것은 첫째,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둘째, 복음 선포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고 셋째, 만남의 문화를 퍼뜨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9. 희망과 기쁨 전하기 :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하는 세 가지 태도 - 우리는 희망을 간직해야 하고, (많은 우상이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서는 희망이란 이름으로 돈, 성공, 권력, 쾌락을 선물한 것처럼 본다.) 하느님이 이루신 놀라운 일을 받아들여야 하며, 기쁨을 (그리스도인은 기뻐하는 사람이다)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
10. 모두 내어주기 : 주님처럼 산다는 것은 순종과 겸손과 자기를 완전히 내어놓음을 의미한다.
11. 함께 걸어가기 : 사제들이 우리 백성과 함께 걸어가는 것, 때로는 그들 앞에서, 때로는 그들 가운데에서, 때로는 뒤에서 함께 걸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앞에서 걷는 것은 공동체를 이끌기 위함이고, 가운데서 걷는 것은 공동체에게 용기를 북돋아주고 격려하기 위함이며, 뒤에서 걷는 것은 어느 누구도 뒤처지는 일없이 모두가 하나 되기 위함이다.
12. 복음화 : 복음화는 교회의 사명이다. 복음화는 몇몇 사람만의 사명이 아니라 저의 사명이고, 여러분의 사명이며, 우리 모두의 사명이다. 복음화는 참으로 교회의 고유한 은총이고, 소명이며, 교회의 가장 깊은 본성이다. 교회는 복음화를 위하여 존재한다.
13. 목자로 산다는 것 : 넓은 아량으로 환대한다는 뜻이며 양과 함께 걸어간다는 뜻이고 양과 함께 머문다는 뜻이다.
14. 선을 선택하기 위한 자유 : 학교에 가는 이유는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데 필요한 삶의 방식을 익히고 성숙한 어른이 되는 법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는 자신이 하는 바에 대해 숙고할 줄 아는 것이고 선한 것과 악한 것, 그리고 성장에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가릴 줄 아는 것, 따라서 언제나 선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이다. 우리는 선 앞에서 언제나 자유롭다.
15. 마리아의 믿음 : 마리아가 지닌 믿음의 첫째 특징은 인류에게 죄의 매듭을 풀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레네오 성인은 “하와의 불순종으로 묶인 매듭이 마리아의 순종을 통하여 풀렸다. 처녀 하와가 불신으로 묶어 놓은 것을 동정녀 마리아께서 믿음을 통하여 풀어주셨다.” 둘째 특징은 하느님의 아드님께 인간의 육신을 드린 데서 찾을 수 있다. 셋째 특징은 예수님을 따르고 우리와 동행하고 우리를 도와주려고 ‘나그넷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 교회는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보배로운 신앙의 유산을 전하면서 여러분과 함께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지향하시는 교회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는 표현은 ‘자비의 집’입니다. 교황님은 복음의 기쁨에 젖어 주님과 함께 필요한 곳으로 나가라고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권력, 돈, 부패, 출세주의, 이기주의, 무관심, 그리고 ‘세속의 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우상들을 허물어 버리지 않는 한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교황님의 초대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고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 『교황 프란치스코, 자비의 교회』 / 줄리아노 비지니 엮음 / 김정훈 옮김 / 바오로딸
[신심서적 다시 읽기]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다
먼저 이 글이 눈에 띈다. “십계명은 선한 삶과 살아 움직이는 삶의 일부가 되고, 우리를 인간 본성으로 이끄는 길이 된다.” 하느님의 계명을 찬미하는 시편 119장을 보자.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 그분의 계명은 내가 어느 길을 따라야 할지 가리켜 주고, 앞을 밝혀주며, 길잡이가 되어준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해야 할 일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 누구라도 십계명이란 말을 들으면 아주 이상적인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그리고 보통 사람은 지키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자라면 1년에 의무적으로 최소 두 번의 고해성사를 보지만 십계명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십계명은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들이 아닌가?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 간음, 도둑질을 금하고, 이웃의 아내나 재산을 탐해서는 안 되는 게 종교를 가지지 않더라도 지켜야 할 일들이 아닌가? 지금까지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 중에 넷째 계명의 지향을 음미하며 새 보물을 얻은 희열을 느낀다. 일반적으로 “훗날 편히 지내려면 늙은 부모를 공경하고 봉양하여라. 너희도 자식들에게 그리 될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계명은 노동력을 상실한 부모를 자식들이 돌봐야 한다는 사회적 계명이 되었다. 그 지향은 부모가 자식에게 존중과 공경을 받도록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요즘 신문기사를 보면서 부끄러움을 금치 못한다. 부모를 차에 태우고 낯모르는 곳에 가서 버린다는 이야기도 있고, 학대하기도 하며,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부모를 폭행하는…. 비록 극소수이지만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다.
어느 날 산책길에 걸린 현수막을 보았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찾는다.”는 아들이 내건 절절한 호소의 현수막! 그래도 아직은 세상이 살만하다는 한줄기의 희망을 보여준 것 같다. 넷째 계명은 먼저 부모에게 부여된 계명이다. 자식들에게 순종하라고 강요하는 것보다“자식들이 너희를 공경하고 존중할 수 있도록 처신하라.” 참으로 귀기울여 들어야 할 귀한 말씀이 아닌가? 부모가 자식에게 해주어야 할 과제들은 적지 않다. 부모와 자식 간 평생 변치 않을 관계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식들에게 잊히지 않을 부모의 자리를 굳히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식들에게 어떻게 하면 애정과 온정을 느끼도록 배려할까
가끔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TV 프로그램을 본다. 자기를 버린 부모를 찾으려고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글썽인다. “이제 이렇게 잘 컸으니 원망하지 않는다. 그저 보고 싶다.”고 한다. 그 절규가 가슴을 파고든다. 과거에 어떤 이유가 있었더라도, 손가락질 받을 일을 저질렀다손 치더라도 두 팔 벌리고 안아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그게 부모가 아닌가? 인간의 가치를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본연의 장은 바로 가정이 아닌가? 자식을 키우되 훗날 당신이 공경 받을 수 있게 키워야 한다. 아이들을 어디에 떠넘기지 말고 온 마음을 다해 어미 아비가 되어주며 몸과 마음의 안식처를 마련해 주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겠는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고 졸업을 해서 취직을 하고 제 생활을 꾸려 나간다면 걱정할 일이 없겠지만 어디 다 그런가? 노인들도 젊을 때와 같지 않다는 걸 깊이 느끼고 대처해야 되지 않을까? 경제적 빈곤은 물론 영적 빈곤, 정서적 빈곤이 노년을 위협한다. 노년에 치매로 가족들과 한 집에 살지 않고 요양시설에 모셔도 관심을 기울이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나눌 수 있지 않을까?
후배 한 분이 치매를 앓는 아흔이 넘은 어머니를 요양시설에 모시고 있었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가셨지만….) 자식을 못 알아보셔도 일주일에 서너 번씩 찾아뵈면서 함께하는 노인들에게 간식을 준비해 가는 등 정성을 다했다. 자녀들은 타지에 살지만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쉬시게 하려고 의논도 없이 장기간 성지순례도 보내드린다. 안 계시는 동안 자녀들이 번갈아 어르신들의 간식을 준비해 가서 할머니와 어르신들을 돌보기도 한다. ‘그림동화’에 나오는 나무숟가락 생각이 떠올랐다. “엄마 아빠 늙으면 드리려고 숟가락을 만든다는….” 해법은 없는가?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리라. 부모의 의사에 반해 다른 길을 걷는 자식을 용서해야 하고 자식은 부모의 과오와 결점을 용서해야 한다.
이 책에 소개된 십계명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올바른 삶을 위한 보편적인 길잡이로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으로 압축한다. 첫째 계명: 나는 주 너의 하느님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을 그 무엇보다도 경외하고 사랑하고 신뢰해야 한다. 둘째 계명: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그분께 감사드려야 한다. 셋째 계명: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여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기꺼이 귀 기울여 들으며 배워야 한다. 넷째 계명: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부모를 공경하고 섬기며 복종하고 사랑할 뿐더러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다섯째 계명: 살인해서는 안 된다. 이웃의 몸을 해하거나 고통을 주면 안 된다. 여섯째 계명: 간음해서는 안 된다. 일곱째 계명: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이웃의 돈이나 재산을 손에 넣어서는 안 된다. 여덟째 계명: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배반하거나 중상모략해서는 안 된다. 아홉째 계명: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유산이나 집을 책략을 써서 탐내고 정당한 것처럼 가장하여 우리 것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열째 계명: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와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재산은 무엇이든지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 하인, 그의 가축을 가로채거나 유혹하고 이간질하여 빼앗아서는 안 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신뢰로 살아갈 때 십계명은 성취된 삶을 위한 계명이자 자유를 위한 계명이며 자기실현을 위한 계명이 된다. 하느님의 보호를 느끼는 사람은 슬퍼하거나 분노할 수 있고 낙담하거나 회의할 수 있다. 또한 실수를 범하거나 죄악을 저지를 수 있고 실패하거나 제자리에 안주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마음 저 깊은 곳에서는 절망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받쳐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십계명은 구약에서 하느님이 시나이산에서 발현하시어 모세를 통해 계시하신 열 가지 계명을 말한다. 십계명의 내용 중 1계부터 3계까지는 하느님께 대한 것이고, 4계부터 10계까지는 인간에 관한 것으로서 자연법의 본질적 요소를 이루는 내용들이다. 십계명은 참다운 인간생활이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이루어진다는 종교적·윤리적 원칙을 기초로 하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친교의 생활을 하라는 하느님 사랑의 계명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언젠가 정신이 들어 세상의 이치를 깨칠 때에는 사랑의 대상이 함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어떨까? 그러니, 십계명은 자유의 계명이다.
- 노트거볼프 마티아스 드로빈스키 지음, 윤선아 옮김, 분도출판사
[신심서적 다시 읽기] 다름, 또 하나의 선물
『다름, 또 하나의 선물』은 발달장애인들의 국제공동체 네트워크 ‘라르슈’를 태동시킨 장 바니에가 지은 130쪽의 소책자이다. 지금까지 무심코 스쳐지나온 것들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민족의 특성상 여러 가지 면에서 ‘같음’에 대해서는 쉽게 동화하지만 ‘다름’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경향이 많음을 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고향이 같다거나, 같은 성씨이거나, 학교가 동문이거나, 종교가 같거나 하면 쉽게 말이 오가지만 지역이나 출신, 종교, 신분이 다르면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게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다.
다음의 예화를 보자. 서구에서 태어난 아이는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하고, 인도에 가면 모두 손으로 밥을 먹는다.(우리는 손으로 밥을 먹는 게 옳지 않다고 말하지만 인도 사람들은 손이 있는데도 쇠붙이 조각으로 밥을 먹는 게 정신 나간 짓이라 말할지도 모른다.)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면 그곳 사람들은 조그만 나무조각으로 밥을 먹는다. 한 집에서 나이프와 포크로, 젓가락으로, 수저로, 손으로 밥을 먹는다고 가정해 보자. 모든 문화가 이렇게 다른데 쉽게 동화가 되랴. 그 문화를 보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이 메시지의 핵심은 “네 이웃을 사랑하여라. 너를 미워하는 이들에 대해 잘해 주어라. 널 욕하는 이들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주어라. 너를 짓밟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여라.”가 아닐까?
우리가 많은 돈을 써가며 왜 여행을 하는 걸까? 그 여행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를 본다. 유럽 사람에게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은 대단히 다르게 보인다. 중동에 가면 그곳은 또 얼마나 다른지를 볼 수 있고 아프리카로 가게 된다면 거기에서도 많은 다른 점을 보게 된다. 이는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이기도 하고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현상을 본다면 다른 문화의 장점을 생각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이해가 어렵지 않을까? 서양인의 눈에 비친 우리 선조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흰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고 망건 위에 갓을 쓰고….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어떻게 느꼈을까? 우리도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고만 살 수 있을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경계를 넘어 낯선 이를 만나고 낯선 이와 사귀며 낯선 이의 이야기를 들을 힘을 길러야 하지 않을까?
복음이 전하는 메시지도 가난 때문에, 장애 때문에 소외된 이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고 그들의 친구가 되라고 하지 않는가? “장애인 올림픽대회에서 우승하기를 원했던 젊은이가 100m달리기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따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렸다. 함께 달리던 선수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그러자 뒤로 돌아가 그를 일으켜 세웠고 그와 함께 달려 꼴찌로 결승선을 통과하였다.” 그는 이기기보다는 함께하기를 더 바라지 않았을까? 1등과 꼴찌는 무엇이 다를까? 우리는 자신의 눈으로만 세상을 본다. 우리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돌아보자.
평화의 근본 원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믿음이다. 설령 여러분이 말을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걸을 수 없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버림받은 적이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줄게 있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음식을 대접할 때 가족이나 친구나 부유한 이들을 초대하지 말고, 가난하고 장애가 있고 앞을 못 보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하면 복을 받을 거라고 이르신다. 성경에서 음식을 대접하는 것, 또는 식사를 같이 하는 것은 친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인간의 가슴 속에는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 정의를 추구하는 마음,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 사랑을 추구하는 마음, 자비를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는 각자 지금 처한 현실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특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매우 근원적인 문제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는 나약함을 받아들여야 하고 늙어가는 것,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가는 것 등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는 너무 연약하기 때문에 낯선 존재들, 우리와 다른 이들을 두려워한다. 고통 앞에서, 실패 앞에서, 거절 앞에서, 죽음 앞에서 우리는 연약하고 알몸이기 때문이다. 용서의 길은 멀다. 하지만 그 출발점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며 변화될 수 있다는 것, 내가 변화될 수 있고 당신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고 한다. 세상에는 굶주리는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밥이 떨어지게 하시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배가 고프다면 그건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아프다면 그건 내 문제, 여러분의 문제가 아닌가? 누군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어떤 시설에 갇혀있다면 그건 내 문제요, 여러분의 문제, 우리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다.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깨진 상태라는 걸 아신다. 얼마나 나약한지도 아시고 우리 안에 있는 두려움과 폭력성도 아신다. 하지만 그분께서는 더 깊은 곳으로 가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는 용서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그것이 온전해지고 거룩해지는 성장의 길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기뻐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소명을 주셨다. 예수님의 가장 근원적인 초대 가운데 하나는 종교, 문화, 능력에 상관없이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이들에게 잘해주어라.”는 가르침이다. 함께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우정을 나누라는, 곧 장벽을 허물라는 소명도 주셨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이시고 일치를 원하신다. 우리 마음을 건드려 우리가 자신이 속한 무리, 자신이 속한 문화를 넘어 새로운 차원에 이르게 하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벽이 무너져 우리가 형제자매가 되고 그래서 모두 함께 모일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질서가 생겨나게 하시고 낯선 이들에게 마음을 열라고 초대하신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에게 소중하다는 걸 완전히 확신하지 않는 한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책을 덮으며. 우리는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수용하며 함께하여야 하리라. 그리고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평화를 바라고 평화를 사랑하는 세상에 살고 싶어한다.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건 우리가 장벽을 넘어, 이해받거나 존중받을 수 없는 곳으로 나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타인을 받아들이고 서로 다름을 극복하여 평등과 평화와 치유의 삶이 되게 하자. 다름, 이건 또 하나의 선물이 아닌가? - 『다름, 또 하나의 선물』 / 장 바니에 저 / 윤성희 역 / 바오로딸 펴냄
[신심서적 다시 읽기]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
- 이 책은 820여 페이지로 14장으로 편집되었다. 이냐시오 데 로욜라 성인과 그의 형제 예수회원들에 의해 보급된 영신수련에 대한 안내서이다.
제1ㆍ2ㆍ3장 : 이냐시오의 길, 하느님을 향해 가는 길, 성스러운 갈망에 대하여
1. 이냐시오 데 로욜라는 16세기,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 창설자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수많은 사람들이 기쁨, 평화, 자유를 발견하며 삶의 체험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그 초점은 하느님과 일치하고자 하는 열망, 사랑과 자비의 강조, 그리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영신수련은 기도의 방법과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방법이다. 예수회의 회헌은 예수회원들이 공동체나 여러 가지 사도직에서 서로 어떤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이끌어주며 자신과 하느님, 그리고 형제 회원들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2. 종교적인 길은 여러 가지의 문제가 있음에도 종교가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영적인 길은 불필요한 교의에서 벗어나 스스로 신 앞에 설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견해이다. 이 둘은 어느 한쪽 없이는 온전히 실현되기가 불가능하다. 3. 욕망은 창조력을 지닌 에너지이자 생명력 그 자체이다. 우리 마음의 깊은 욕망은 우리의 성스러운 갈망이다. 이냐시오 영성에서 욕망이 핵심부분을 이루는 이유는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기본적인 통로이고 가장 내밀하며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제4ㆍ5ㆍ6장 : 하느님을 찾는 방법, 기도의 시작, 하느님과의 우정에 대하여
4. 하느님을 찾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양심성찰과 실천하기, 흔적을 찾는 성찰, 매일 실감나는 현존(깨달음의 기도)이다. 그 단계는 자신과 주변 환경을 의식적으로 살펴보고 자신이 감사하게 생각하는 일을 기억해 내고 하루를 점검하고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상대와 화해하고 내일이 더 나은 하루가 되도록 스스로 준비한다. 그러다보면 하느님의 사랑과 현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배려와 연결시키기 시작하게 된다. 5. 기도란 하느님께 마음과 정신을 들어 올림이며, 하느님께 좋은 것들을 구하는 간청이다. 또한 “기도는 은총으로 부여되고 자유로이 받아들이는 하느님과 나의 통교다.”(카를 라너 신부) 6. 하느님과의 우정을 나누기 위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 알아 가며 “하느님께 다가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가난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찾을 수 있다.”(헬렌 수녀) 그리고 성경은 모든 방식을 통해 우리가 하느님을 보다 더 알도록 도와준다.
제7ㆍ8ㆍ9장 : 귀 기울이는 법, 단순한 생활,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에 대하여
7. 이냐시오 기도는 자신이 가장 좋다고 느끼는 방법이 가장 좋은 기도이다. 이냐시오 관상은 상상력을 통해 하느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시도록 만드는 방법이다. 그리고 거룩한 독서(렉시오 디비나)는 관상처럼 성경을 이용하여 하느님과 보다 깊은 관계가 되도록 이끌어 준다. 8. 그리스도를 본받는 신앙의 핵심은 청빈, 정결, 순명이다. 청빈은 자신의 것을 하나도 소유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함께 소유하므로 공동체 생활을 보다 검소하게 만들고 일치를 촉진한다. 그리고 정결은 결혼하지 않는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어 사목하는 이들에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을 수 있다. 순명은 자신의 일을 책임진다는 뜻으로 공동체 생활에 각자의 역할과 권한이 명확해짐을 의미한다. 단순한 생활방법으로는 자신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은 모두 처분하고, 바라는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해 잘 알기 위해 힘쓴다. 9. 정결 서원은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여 천사적 순결을 본받도록 노력함으로써 정결을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정결한 사랑법은 인정을 가지고 경청하고 함께 하는 것, 실질적인 행동과 자유로이 사랑하는 것, 마지막으로 용서를 베푸는 것이다.
제10ㆍ11ㆍ12장 : 예수회와 우정, 미래에 내맡김, 결정을 내리는 방법에 대하여
10. 예수회도 사람이 사는 곳이다. 이냐시오 성인은 예수회원들을 ‘주님 안에서의 친구들’로 불렀다. 이냐시오 성인의 행동양식은 서로를 소유하려 하지 않았고 이기적이지 않았고, 상대방의 이익을 추구하는 타인 지향적인 우정을 갖고 있었다. 일종의 청빈이다. 그리고 우정이 꽃을 피우려면 친구도 소유의 대상이 아니고 자유를 주는 것이다. 11. 순명이라는 단어는 귀담아 듣기, 즉 경청을 의미한다. 우리는 청빈을 추구함으로써 소박한 삶을 살 수 있고 재물의 소유에 따른 근심 걱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 또 정결로 사람들을 자유롭게 사랑하고, 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친구를 대한다. 우리는 순명을 통해 사리사욕을 챙기거나 출세만을 생각하거나 오만에 빠지지 않게 된다. 12. 현명한 선택을 한다는 것은 최선의 결정조차도 결점이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좋은 결정이란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 따르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를 충실히 받아들이겠다는 “예”를 의미한다.
제13ㆍ14장 : 자신을 찾는 방법, 행동하는 관상가에 대하여
13. 이냐시오 영성에서는 무엇이든 다 하느님을 발견하는 길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라는 말을 기억하자.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느님이 한 사람으로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우리의 갈망과 재능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며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헐뜯거나 얕보려는 유혹을 피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바라시는 모습으로 우리가 나아가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모습에 많은 시간이 걸릴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14. 행동하는 관상가는 세상을 강생의 영상으로 바라봄으로써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며 그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유와 초연함을 향한 갈망을 깨닫게 되는데 이것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도와준다. 여정의 진정한 목적지는 하느님이시다. 이냐시오 영성은 하느님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글을 맺으며
* 가난한 이들이 준 값진 선물! 아루페 신부는 미사가 끝나고 오두막으로 초대를 받아 낡은 의자에 앉았다. “보세요, 신부님. 석양이 아름답지요? 저는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지만 이 석양을 보고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았다. “이렇게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만난 게 언제였던가?”
* 왜 고통을 당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고통에 대한 해답은 “어디에도 없다.”
* 바다로 간 소금인형 - 드 멜로 신부의 시
“소금인형이 바다에 말을 걸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바다는 미소 지으며 ‘들어와서 확인해 보렴.’ 소금인형은 바닷물을 헤쳐 걸어가기 시작했다. 점점 녹아내려 작은 알갱이 하나만 남게 되었다. 소금인형은 경이감 속에서 외쳤다.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어!’”
이냐시오 성인의 봉헌기도(Suscipe)로 맺는다.
“받아주소서, 주님. 저의 모든 자유와 저의 기억과 지성… 주님, 이 모두를 돌려 드립니다. 모두가 당신 것이오니 당신 뜻대로 처리하소서. 제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소서. 이것으로 저는 족하옵니다.”(영신수련 234)
- 제임스 마틴 지음 / 성찬성 옮김 / 류해욱, 김용수 감수 / 가톨릭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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