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는 북으로 난 길이란 뜻이다. 1905년 10월26일 스웨덴으로부터 독립된 나라로 면적은 우리 한국의 3.8배 정도이고 입헌군주국으로 인구는 약540만명이다.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쪽 부분, 얀마옌섬, 스발바르 제도, 그리고 부베섬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인구 밀도가 낮은 나라다. 나라의 대부분이 동쪽의 스웨덴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노르웨이의 북쪽 지역은 북극해 바다요, 동쪽은 핀란드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남쪽의 스카게라크 해협의 건너편에는 덴마크가 있다. 수도는 오슬로다. 북극해와 바렌츠해와 접하고 있는 해안선은 피오르로 유명하다. 노르웨이의 관광지로 로포텐제도, 스발바르제도, 피오르의 세곳을 살펴본다.
로포텐제도 : 북극의 파라다이스 로포텐(많은 새의 다리란 뜻)은 험준한 바위산과 눈과 바다풍경이 유명한 곳으로 85%가 빙하로 되어있고 어촌 마을에는 너럭바위 위에 90년 전통을 자랑하는 헤닝스베르 프로축구팀이 사용하는 축구장도 있다. 이곳은 지구상의 최국단에 위치하며 롱게에아르뷔엔은 행정중심 도시로 인구가 2800명이상 살고 있다. 집들이 깨끗하고 고급스럽고 고기 배도 우리 어선과는 달리 훨씬 고급으로 보이며 한마디로 부티가 난다.
로포텐 제도(노르웨이어: Lofoten)는 노르웨이 노를란주의 군도이다. 로포텐 제도는 험준한 산과 꼭대기, 넓은 바다와 보호된 만, 해변 및 발길이 닿지 않은 땅이 있는 섬으로 로포텐 주민 하만씨는 배를 타고 고기를 잡으러 나간다. 청초한 바다는 정막이 흐르고 잔잔하고 푸른 물빛 끝이 없는 망망대해로 나가다 낚시를 담그니 엄청 큰 물고기들이 건져 올려 잡힌다. 마치 갓 난 아기만큼 큰 고기를 안아본다. 먹을 만큼만 잡아서 요리해 먹는다.
속 ㅡ
노르웨이는 석유, 천연 가스, 석탄, 목재, 해산물 등이 풍부하며, 지형을 이용한 대량의 수력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원 매장량은 엄청나 2011년 기준으로 세계 3위의 천연 가스, 5위의 석유 수출국이기도 하며, 관련 산업이 GDP의 25%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자원에 힘입은 노르웨이 국부 펀드는 세계에서 제일 크며, 규모는 현재 한화 650조에 달한다. 세계 주식시장의 1%를 보유하고 있다.[2] 무역은 항상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고 있으며 2011년 기준으로 흑자 규모는 한국의 2배에 달한다.[3] 석유가 발견되기 전인 1970년에는 스웨덴의 총 경제 규모의 1/3밖에 되지 않았으나 결국 자원에 힘입어 2009년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가 2배에 달하는 옛 종주국 스웨덴을 총 경제력마저 추월하였다.[4]
정치적으로 노르웨이는 입헌 군주제이며, 국가 원수는 하랄 5세이다. 노르웨이는 유럽 연합의 회원국은 아니나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고, 또한 미국의 대표적 우방국 중 하나이다. 노르웨이는 유엔에 경제적으로 가장 크게 공헌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이며, 유엔군에도 참여하여, 특히 아프가니스탄, 코소보, 수단, 리비아 등에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노르웨이는 유엔, NATO, 유럽 평의회, 북유럽 이사회의 창립국 중 하나이며, 유럽 경제 지역, WTO, OECD의 멤버이자 솅겐 협정에 서명한 국가 중 하나이다.
2001년부터 2006년, 그리고 2009년부터 가장 최근의 통계까지 노르웨이는 인간 개발 지수에서 세계 정상을 기록한 대표적 선진국이다. 2010년 기준으로 연간 근로시간은 약 1,400시간으로 주당 27시간 정도이며 세계에서 가장 적게 일하는 국민 중 하나다. 최저임금은 산업마다 다르나 연간 31만 크로네(약 6,100만 원)정도며, 2010년 기준으로 대졸자 초봉 평균은 42만 크로네다.[5][6]
노르웨이의 호수.
노르웨이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서쪽 지방이다. 남북으로는 약 1,700 km로 길게 뻗쳐 있으나 동서는 가늘며, 가장 좁은 곳이 몇 km 밖에 안 되는 특이한 모양이다. 국토의 72%는 빙하의 침식을 받은 평탄한 꼭대기를 지닌 산지이다. 삼림이 24%를 차지하며 경지는 매우 적다. 해발 2,000 m 이상에는 만년설이나 빙하가 지금도 남아 있다. 스칸디나비아산맥은 북부·중부에서는 스웨덴과의 국경으로 되어 있으나, 남부는 노르웨이 안에 펼쳐져 있으며, 이곳이 가장 높고 요텐헤임(2,452 m) 폭도 가장 넓다. 곧 요텐헤임(2,452 m), 요스테달스브렌(2,083 m) 및 도브레페르(2,286 m) 등의 산이 있고 빙모(氷帽)와 빙하가 있다. 서해안은 거대한 피오르 지형이 나타나는데 인근에 5만 개 이상의 섬이 있고 2,500 km 이상이 이에 해당한다.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2,542 km의 국경을 접하며 동쪽으로는 핀란드와 러시아가 있다. 남서쪽으로는 노르웨이해, 북해가 있다. 남쪽 덴마크와의 사이는 스카게라크 해협이라고 부른다. 북쪽에는 로포텐 제도, 베스텔롤렌 제도 등이 있어서 좋은 어장으로 되어 있다.[7] 노르웨이는 대부분이 상당히 높은 지대여서 자연 경관이 수려하고 선사 시대 이후의 빙하 지형이 남아 있기도 하다. 베르겐의 북쪽에 있는 송네 피오르는 안쪽까지의 길이가 200 km나 되며, 100 km까지도 나비가 몇 킬로미터나 된다. 이 피오르는 양쪽 육지가 가파른 절벽이며, 물 깊이는 깊을 뿐 만 아니라 경치가 좋다.[8]
기후는 한대성 기후이다. 한대성 기후이기 때문에 12월에는 오후 3시만 되어도 일몰하고 기온은 영하 15℃ 이하이다. 하지만 내륙으로 들어가면 겨울 기온이 떨어지고 강우량이 적다. 눈이 자주 오는 편이며, 북극처럼 백야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난류인 멕시코 만류(灣流)가 서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흐르므로, 높은 위도에 비하면 온도가 낮지 않고 강우량이 많다. 예를 들면 남부 서해안의 베르겐은 겨울의 월평균 기온이 1.3∼1.5℃ 이며, 여름에는 약 15℃ , 위도에 비하여 비가 많이 오는 편이다. 1년 강우량은 1,900 mm에 이른다. 북쪽일수록 강우량은 적어져 북부에서는 연강우량이 400 mm 이하이다.[9]
노르웨이의 역사 편집 선사 시대 편집 현재의 노르웨이 땅에 사람이 거주한 흔적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내륙 빙하가 녹기 시작한 선사 시대이다. 1만 년 전 오늘날 노르웨이인들의 조상은 순록을 비롯한 동물들을 사냥하며 북쪽으로 전진했다. 인류 활동의 가장 오래된 증거는 외스트폴주의 남동쪽에 위치한 언덕에서 발견되었다.
바이킹 시대 편집 9세기에서 11세기까지 노르웨이의 바이킹은 대대적인 해상 원정을 벌였다. 노르웨이인의 후손이 아이슬란드에 뿌리를 내렸고 한때는 지금의 캐나다의 일부까지 이르렀다. 1000년 무렵 바이킹은 그린란드와 미국을 발견하였고, 기독교가 노르웨이에 들어갔다. 노르웨이 농민의 작은 집단이 차차 큰 정치적, 군사적 지역으로 모였다. 1164년 최초의 국왕을 맞이했고, 10세기 초 하랄 1세가 등장하여 국가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1015년 올라프 2세 성왕이 노르웨이 전체를 완전히 통일하고 기독교로 개종시켰다.
근세 편집 2세기에 걸친 바이킹의 습격은, 994년 왕이었던 올라프 1세가 기독교를 승인한 이후로 점차 줄어들었다. 13세기, 내전이 끝나고, 노르웨이의 영향력은 브리튼 제도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까지 뻗어져 나갔다. 12세기에 접어들자 왕위를 둘러싼 내부항쟁이 벌어졌다. 1217∼1263년에는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를 지배하여 노르웨이의 국력은 그 절정에 이르렀다. 문화적으로도 개화를 한 시대였다. 그 뒤 스웨덴과 동맹, 한자(Hansa) 상인(商人)의 활약에 의한 노르웨이의 경제의 쇠퇴, 덴마크와의 400년 이상에 걸친 동맹 등의 시대가 있었다. 더구나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전란의 시대를 걸쳐서 새로운 시대에 들어갔다. 1217년 호콘 4세가 즉위하여 내란을 점차 평정하고 절대 왕정의 기반을 닦았다. 1397년, 노르웨이는 덴마크-노르웨이에 흡수되었고, 이는 4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1397년 포메른의 에리크 3세가 노르웨이 왕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덴마크와 스웨덴의 왕도 겸하였다. 그는 1442년 폐위되었으나 이후로도 오래도록 덴마크 왕의 지배가 계속되었고, 종교 개혁 운동으로 1539년 크리스티안 3세는 노르웨이를 루터교로 개종시켰는데, 현재도 노르웨이 기독교인들의 거의 대부분이 루터교 신자들이다.
이민 시대 편집 킬 조약에 의해 노르웨이가 덴마크에게 독립한 후인 1814년, 노르웨이인들은 노르웨이가 스웨덴에 할양되는 것에 반대했고, 노르웨이 왕국 (1814년)을 수립하고 새로운 헌법인 노르웨이 헌법을 채택했다. 이러한 노르웨이에 대항하여 스웨덴은 노르웨이와 전쟁을 했고, 결국 노르웨이가 스웨덴-노르웨이 연합에 들어와 스웨덴의 왕이었던 카를 14세를 섬기는 대신, 노르웨이의 독자적인 헌법을 유지시켜 주기로 합의했다. 19세기 내내 일어난 노르웨이의 독립에 대한 움직임은, 결국 1905년 노르웨이의 독립을 일구어 내고, 스웨덴-노르웨이연합의 종결을 이끌어냈다. 1866년에서 1873년에 이르기까지는 제1기의 대규모 이민 시대로서 미국에 약 10만 명, 그리고 1900년∼1910년 제2기의 대규모 이민 시대로서 20만 명이 바다를 건너갔다. 비록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노르웨이는 중립국으로 남았지만, 전쟁 중에 많은 선박들이 파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노르웨이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의해 5년동안 점령당했다. 이때 독일에 협조했던 나치인 비드쿤 크비슬링은 전후에 반역죄로 총살당했다.[15] 인류학자 헤이에르달은 노르웨이가 나치독일의 지배를 받을 때에 저항운동을 했다. 기행문 《콘티키》(학원출판공사에서 한국어 책을 펴냄)에 따르면 헤이에르달은 자신을 잡으러 온 나치 독일군과 권총으로 총격을 벌이면서 몸을 피했다고 한다.
1949년, 노르웨이는 중립을 끝내고 NATO의 창립멤버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인근 바다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발견된 뒤로, 노르웨이의 경제 발전이 가속화되었다. 1972년과 1994년, 유럽 연합 가입 총선거가 치러졌지만, 두 번 모두 가입이 무산되었다.
2011년에는 극우 인종주의자에 의한 2011년 노르웨이 테러가 일어났다. 이 일은 노르웨이 역사상 최악의 사건이라고 한다.
속 ㅡ
스웨덴은 스칸디나비아반도 3국중 동북부 중간지대로 한국의 4.5배의 면적을 가진 나라로 수도는 스톡홀름이며 인구는 약 1030만명이다.
핀란드는 스웨덴의 동쪽으로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한국 면적의 3.4배에 인구는 약550만명으로 수도는 헬싱키다. 헬싱키는 1952년내가 초등학교 2학년일때 하계올림픽을 개최하였으니 우리보다 엄청 선진국이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점유하고 있는 세나라는 국토는 넓고 인구밀도는 낮으며 북쪽으로 동토의 땅을 가진 나라들이다. 호수와 숲이 많고 눈이 쌓여 있는 기간이 길어 경치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