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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뭘까요? 복음에 대해 물으면 대부분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맞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이죠. 하지만 이 죽음만 강조하면 복음을 정확히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어느 학생을 전도했더니 그 학생이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는 예수님의 죽음은 얼마든지 믿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은 잘 안 믿겨져요. 예수님의 죽음만 믿으면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한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께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미안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 믿고 있는 사람은 아직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로마서에 보면 ‘너희가 만일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사신 것을 너희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부활을 믿지 못하면 구원이 없고 부활을 믿어야 구원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히 죽을 죄에서 용서받게 하시려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새 생명 안에서 행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임재를 체험하며 날마다 살아갈 수 있도록 다시 살아났습니다. 생명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지금 이 순간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부활은 복음의 절대적 요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기념하며 우리의 삶에 참 구원의 역사, 부활의 능력을 허락하신 것을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진정 참 생명을 얻은 것에 감격하시는 주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사람의 장례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겨내기 힘든 가장 큰 두려움이라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속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슬픔과 가장 큰 절망은 죽음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죽음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의 죽음과 삶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본문의 장례식과 부활의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일어날 부활의 역사, 부활의 능력에 대해 제대로 깨닫고 참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보게되는 우리의 인생, 첫째는 죽음의 행렬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 12절입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음을 향해 행진합니다. 어떤 유명인은 그가 남긴 명언을 통해 “누구의 마음도 찢어지지 아니하고 지내는 날이란 단 하루도 없도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로마의 시인 버질은 그의 시에서 “만물에는 눈물이 있도다”라는 싯구를 기록하였습니다. 마음을 가장 찢어지게 하는 것,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 바로 죽음입니다. 원래 이 땅에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셨던 처음 인간 아담과 하와는 이 땅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면서 아들,딸 낳고 하나님과 소통하며 영원히 살아가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모든 것을 소유하며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가는 존재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이런 인간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했고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어 했고 결국은 하나님같이 될 수 있다는 사탄마귀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금단의 선을 넘었습니다. 선악과의 나무의 열매는 결코 먹지 마라고 했는데 그것을 먹음으로 마귀의 종이 되었고 죽음이 인간에게 찾아왔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죽음이 찾아온 이 땅의 인간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존재”라며 인간의 본질을 표현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의 대표적인 사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에 대해 ‘죽음에 이르는 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라고 했습니다. 칼 야스퍼스라는 철학자는 인간이란 ‘고통, 싸움, 죽음 등에 에워싸여 괴로워하는 존재’라 하였습니다. 또한 하이데거라는 철학자는 인간이란 ‘죽음이라고 일컬어지는 치유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서 있는 존재’라고 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이란 ‘무능력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하는 불행과 고통을 짊어진 존재’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이 죽음안에 있는 것일뿐 아니라 죽음의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이 세상은 온통 죽음의 분위기가 휩쓸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언론매체를 통해 나오는 소식들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돈을 위해서 혹은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어떤 부도덕한 일도 서슴치 않고 행합니다. 어느 세계적인 유명 제약회사에서는 고아들을 대상으로 에이즈 백신 실험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고 처참한 일입니까? 이 세상의 분위기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락했고 얼마나 영혼과 육신이 죽어 있는 상태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윤리, 도덕, 인정과 사랑, 희망이라는 것은 이미 죽은 지 오래입니다. 이런 세상의 죽음의 분위기뿐 아니라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우리의 주변에서 수많은 죽음을 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부모님의 죽음, 친구들, 동료들의 죽음, 같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죽음, 교우들의 죽음. 심지어 자녀들을 앞에 먼저 보내는 죽음도 있습니다. 그러다 언젠가는 내 차례가 되어 남의 손에 떠받치어 우리의 주검이 장례되는 상황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이 죽음의 길은 어느 누구나 경험하게 인생의 끝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도 어느 한 청년의 죽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그 죽음은 더욱 애처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청년이었고 독자였고 과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볼 때에도 이 죽음은 정말 애석한 죽음, 안타까운 죽음, 참 상황이 안되었다고 생각할 죽음입니다. 이 장례를 치르는 어머니, 아들을 먼저 보내는 그 어머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하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불쌍하게 생각되지만 어쩌면 이런 운명, 이런 장례 이 세상의 어느 누구나 언젠가 거쳐야할 죽음의 길, 운명의 길입니다. 죽음이 사람마다 그 사정을 봐주면서 시간이나 상황을 결정해준다면 죽음이 찾아올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 인정사정없이 찾아오고 이 세상의 인간은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며 우리 인간의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 정말 오랫동안 연예계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던 원로 가수 고 현미 선생님께서 인생을 마치고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자주 죽음을 맞이한 인생에 대한 소식을 듣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주변에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이 이야기가 지금은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죽음을 경험합니다. 죽음이라는 저와 여러분도 언젠가 맞이하게 될 상황인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정말 이 땅에서 죽게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수시로 생각해보면서 정말 죽음의 날에 나는 어떻게 될 지를 고민하며 하루하루 멋지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보게되는 우리의 인생, 둘째는 어느 누구도 그 죽음의 행렬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7장 12절입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나인성 밖으로 나가는 죽음의 행렬. 그 행렬을 막아설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군대의 힘?’ ‘돈의 위력?’ ‘세상의 권력?’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이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 중에 눈물만큼 강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외아들의 죽음,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구슬피 울어대는 그 죽음만큼 가슴을 찢어놓는 절절한 눈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눈물마저 죽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이 죽음을 막아보려고 종교와 과학을 최대한 동원했던 적이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미이라제작법이나 불사약제조법등을 연구하고 시도했으면 어느 왕은 자신의 신하들을 전 세계로 보내 ‘불로초’를 찾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 죽음을 인간의 힘으로 해결해보려는 노력을 유사이래로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는 누구도 이 죽음을 행렬을 막았던 사람은 없습니다. 세상에서 수많은 사람이 추종하며 신앙이라고 주장하고 따르는 성인들을 보십시오.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도 수많은 죽음의 안타까움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극락을 가르쳤지만 결국 자신도 죽을 때에는 ‘인생앞에서 자기가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인생의 허무함만 전해주었습니다. 중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고 따랐던 유가의 대표자 공자를 보십시오. 그는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땅의 일도 다 모르겠거늘 어찌 내세의 일을 알겠느냐” 이렇듯 자신의 죽음의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고 죽은 석가모니, 마호메트, 공자 등등의 수 많은 종교창시자들을 보게 됩니다. 또한 이 땅의 수 많은 의사들을 보십시오. 죽아가는 사람들의 생명까지 살려내며 명의, 혹은 신의라고 불렸던 의사마저도 자신의 죽음앞에서는 저항하지 못하고 체념하고 죽음의 행렬에 서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무엘하 22장 5,6절입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우리의 삶속에서도 부모의 주검앞에, 혈육의 주검앞에, 일가친척과 동료들의 주검앞에 슬피 울며 그 주검을 장례치르고 있는 우리의 상황에 놓일 우리를 깨닫지 못하십니까?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의 장례를 경험하며 슬피 울고 비애에 잠겨 절망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우리가 그 행렬의 가운데 있을 것이며 내 자녀가 행렬의 앞에서 우리의 사진을 들고 앞장서는 날들이 올 것입니다. 아무도 그 행렬을 막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 죽음의 문제, 사망의 상황에 대한 고민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로마서 7장 24절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 죽음의 문제, 사망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인간이라는 몸을 입고 이 땅에 온 사람이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자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 땅의 모든 사람은 자신마저 죽음앞에 놓일 한계를 가진 존재입니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해결해야할 문제이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이 문제앞에 정말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 살펴보고 죽음앞에 겸허한 우리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보게되는 우리의 인생, 셋째는 죽음을 해결하려고 막아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누가복음 7장 13,14절입니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한 청년의 장례 행렬을 보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젊은 아들을 먼저 보내며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이 어머니는 남편도 일찍 보냈고 아들과 함께 생활하며 살아왔는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들만 바라보며 새로운 남편과 재혼하려는 생각조차 없이 아들 키우는 재미로, 아들이 자라나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며 지냈는데 그 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앞에 먹먹해지고 암담해지고 애통한 마음이 찾아온 이 어머니가 아들의 시신을 따라가다 장례행렬 앞에서 아들의 장례를 막아보려고 하지만 그렇게 해본들 죽은 아들이 살아 돌아올 수는 없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막아서기에는 죽음은 너무나 강력했습니다. 창과 칼로도 막을 수 없는 죽음을 그 어머니가 무슨 수로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어머니가 장례를 막아서며 우는 것은 그냥 자신의 원통함을 표현하는 것뿐이지 어떤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는 그 어머니에게 참된 위로를 할 수 없고 그 심정을 달래줄 수도 없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장례식장에 가서 장례를 집례하고 장례식에 참여하여 함께 위로하고 어떤 말로 격려를 해준다고 해도 우리가 죽음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달래주기에는 너무나 큰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함께 울어주는 것, 함께 이 상황에 동참해주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로마서 12장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는 그냥 그 마음을 함께 나눌 뿐입니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동조하며 슬픔을 반감시키려는 노력할 뿐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입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오늘 본문에 기록된 장례를 치르는 이 여인의 슬픔을 그 자리에 함께 한 어느 누구도 달래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여인의 앞에 나서 이 문제를 해결해주시려는 분이 등장하셨습니다. 그 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일단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가까이 가셔서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에 어찌 울지 않을 사람이 있습니까? 이런 위로가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면서 왜 울지도 못하게 합니까? 우리도 종종 장례식장에 가서 좋은데 갔으니 “울지 마라”라고 유족을 위로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말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는 위로입니다. 정말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그들의 심정을 모르기에 내뱉는 정말 오히려 화가 치밀어오르게 만드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장례식장에 가서 어떤 일이 있어도 “울지 마세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게 울 일이지 웃을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울지 마라”고 위로하셨을까요? 그 분은 정말 이런 위로를 할 수 있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 우리 예수님은 그냥 말로 위로하거나 함께 그 자리에 함께 있어 주시는 위로로 끝내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물리쳐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를 치르고 있는 죽은 청년의 시신앞에서 장례를 막으시며 그 시신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우리 예수니멩게 있어 그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마치 아이의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우듯이 “일어나라”라는 말을 하면서 간단히 이 청년을 깨우십니다. 죽은 영혼도 살리시는 예수님, 죽은 생명에게 산 생명을 허락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생이 해결하지 못할 궁긍적인 숙제, 영원한 과제를 우리 예수님은 단 번에 해결하신다는 것을 이 땅의 공생애를 통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이로 인해 이 청년은 되살아났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원통함과 비애와 통곡과 안타까움이 있었던 그 죽음의 행렬이 이제는 부활의 행렬이 되어 감격하며 기뻐 눈물 흘리며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들은 돌아서고 있습니다. 죽음의 행렬이 산 자의 행렬로 되돌아서는 대 장관이 펼쳐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영광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부활절을 기념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도 있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보여주시는 참 믿음의 사람의 부활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6절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예수님의 부활을 허위로 선전했다면 기독교가 2천년 후인 오늘까지 존재할 수 없고 점점 더 크게 발전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만일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의논해서 예수의 부활을 거짓으로 만들어 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중 한 사람이라도 본심에 돌아갔더라면 예수의 부활이란 전부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순교를 하면서까지 제자들의 진실성을 보며 예수 부활을 증거하였다. 만약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벌써 그런 사람과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에 죽음을 거슬린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부활이 사실을 믿고 우리 또한 생명부활, 천구부활될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2장 9,10절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정말 구원받으셨음을 믿으십니까? 구원받은 영혼은 부활을 경험할 자격을 얻은 영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에 구원받았고 그 구원을 우리가 받았기에 이 땅에서도 부활의 영혼으로 살아가고 죽어서도 저 천국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참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부활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죽음가운데 여전히 죽음의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는 세상사람과는 다른 부활의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되지만, 결코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성경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는 말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참을성’과 ‘이성’ 그리고 ‘소망’이라고 합니다. 어떤 어려운 경우라도 참을성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성결한 삶을 함께 살아가던 쿰란 공동체에 들어갈 수 있는 주요한 조건이 ‘참을성’입니다. ‘참을성’은 공동체 안에서 조화롭게 사는 필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클레이는 ‘하나님이 주신 이성을 잘 간직해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오늘날과 같은 혼돈스러운 세상에서는 명료한 이성이 큰 자산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소망’입니다. 참을성과 이성도 잃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것들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4, 25절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L.A의 스포츠방송국에서 재미있는 조사를 했습니다. 스포츠 시청자들은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녹화경기를 어느 정도 시청하느냐 하는 조사였습니다. UCLA 대학을 응원하는 농구 팬이 많아서 이긴 경기를 이틀 후에 재방영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청률은 생방송과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물론 진 경기를 이틀 후에 방영하면 볼 사람이 없었겠지요. 그러나 자기편이 이긴 경기이기에 조마조마한 긴장이나 불안없이 마음 푹 높고 볼 수 있어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은 너머에 부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죽음 앞에서도 장래의 부활과 영광을 알기에 이 세상에서 잠시잠간 이별을 슬퍼하지만 세상의 불신자들처럼 영영한 이별의 절망감을 가지는 이별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별을 경험하며 지나치게 슬퍼하지 않습니다. 방금 읽은 로마서 8장 24,25절에서 사도 바울이 당부하는 것도 바라 그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인생에서 죽은 자들의 행렬에 속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산 자의 행렬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어느 쪽의 행렬을 따르고 있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부활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 믿음속에서 부활의 행렬, 살아난 자들의 행렬에 함께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