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며칠전, 밤늦게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제암리 두렁바위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들었다. 궁금한 것은 꼭 알아보고야 마는 성격탓에 밤늦도록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아픈 마음을 갖고 그 다음날 날이 밝자 마자 서울역으로 향했다. 32분만에 수원역에 도착, 시외버스를 타고 40분을 달려 제암리에 내렸다. 가는 길에 해병대사령본부와 남영성모성지라는 푯말을 차창으로 보내며 여러가지 생각이 마을을 스쳐갔다. 제암리에 내려 3 ˙ 1운동 기념관을 둘러보았다. 서울에서 취재차 왔다는 말을 듣고 기념관 관장님(박대진님)께서 직접 설명을 해주셨다. 문인의 세계란 바닥이 워낙 좁은 모양이다. 독립관에서 수고하시는 편집국장님과 절친한 교분이 있다고 하시며, 함께 갔던 친구와 함께 제암리에서 일어난 95년 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행락철이면 사람들은 서울에서 멀지 않은 화성에 대부도, 제부도로 바지락칼국수, 생선회를 먹으러 간다. 바람도 쐬고 갯벌도 보고 맛있는 해산물을 먹으며 기분 전환을 하고 오는 곳 화성땅. 그러나. 이곳에 1919년 4월 15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역사 유적지를 둘러보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호국시인이라는 강소이 조차도 제암리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어제 월간 [순국]편집실에 원고를 넘기고 왔다. 4월에 게제가 될 것이다. 제암리에서 일본이 저지른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37명의 조선인이 불에 타서 죽었다. 예배당에서... 일본이 조선을 기만하여 예배당에 화요일 오후에 모이게 해놓고 총격을 가하고 문에 못질을 한 후에 예배당을 방화하고 마을 전체도 불태웠던 것이다. 이것을 언더우드 선교사, 커티스 영사관이 자국에 알렸고 스코필드 캐나다 선교사가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책을 내서 세계에 알렸다. 조선총독부에 항의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덕분에 스코필드는 조선에서 추방당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다가 한국에서 사망하여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어있다고 한다. 조선을 사랑한 선교사 스코필드. 그는 제암리 사건 때 생존자(부상자)들을 며칠에 걸쳐서 치료해주고, 학살 사건으로 죽은 시신들은 도이리 공동묘지에 장례를 치뤄준 사랑의 실천가였다. 잿더미 마을 제암리 두렁바위를 그냥 지나가지 못했던 스코필드 박사. 문서로 보고서만 내고 그냥 지나갔던 언더우드와 커티스..... 만행을 저지른 일본 군인들. 맨손으로 교회당에 모인 사람들을 총으로 쏜 비열하고 비겁한 기만자 일본, 희생당한 천도교신자들과 기독교 신자들...... 농토와 염전을 빼앗기고 송산면 마산포에서 일본으로 쌀을 실어내가는 일본을 지켜봐야했던 식민 농장의 식민노예 조선인들. 그들은 울분했다. 밥그릇을 빼앗긴 사람들. 고양이 앞에 쥐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리라. 1919년 3일절 만세 운동 이후 발안장날 장터에서 독립운동을 기점으로 밤마다 산에 봉화를 올리고 마을마다 독립만세를 외쳤던 화성사람들. 만약, 일본이 조선인을 배불리 먹이고 배곯지 않게 해주었더라면 양반 중인 상민 천민의 차별이 없고 소작으로 억울해 할 것도 없이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자유롭게 신분의 차별없이 살게 해주었더라면 조선인들은 그렇게 발안장터에서처럼 일본 순사에게 돌을 던지고 일본 주재소와 우체국 등에 불을 지르는 투쟁을 했었을까? 그들은 우리나라 문화재를 파괴하고 왕릉까지 도굴하고 땅속에 지하자원뿐 아니라 조선의 식량, 조선의 여자들. 조선의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갔다. 평화롭게 순박하게 농사지으며 염전을 일구며 열심히 살아가던 화성 사람들.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이어서 간척지까지 개간하며 억척같이 살아가던 평화로운 마을에 일본의 군화가 짓밟고 들어와 우리 것을 빼앗아갔던 것이다. 살인과 방화도 서슴지 않고...... 삼일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거의 100여년 전에 이땅에서 일어났던 엄청난 일들. 우리 후손들은 그 일들에 대해 생각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눈 앞에 좋은 것들에 맘을 빼앗기고 봄나들이에 마을을 준다. 우리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는 삼일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차가운 주전자 물 속에 들어있던 개구리는 아무 염려없이 신나게 헤엄치다가 주인이 서서히 가열하는 물 온도에 결국 익어서 생명을 잃고 말았다는 프랑스의 이야기가 있다. 우리를 서서히 죽여가고 있는 것은 없는지? 우리는 우리의 것을 서서히 하나씩 내어주고 있지는 않은지? 수정과 식혜 대신 한집 건너 외국 브랜드 커피점이 거리를 꽉 메우고 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문화적인 침식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교회에서 불에 타면서도 그들이 찾고 싶어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이 지키고 싶어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우리 땅, 우리 것, 우리의 문화, 우리의 역사,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정신. 우리의 넋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밤마다 산에 봉화를 올리고 목숨을 걸고 찾으려 했던 것은 오직 한가지.
▼ 기념관 관장님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 제암리 교회가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불탄 자리에 이렇게 삼일운동 기념탑을 세워놓았습니다. 탑 둘레에 사각으로 세워진 돌들은 선열들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제암교회는 영원히 불타지 않는 굳건한 우리 민족 정신의 초석으로 서 있을 것입니다.
▼ 스코필드 박사가 도이리 공동묘지에 평토장으로 장례를 치뤄주었던 순국선열들을 국가에서 1982년에 이곳에 합동묘로 모셨다고 합니다.
▼ 제암리 교회 안에서 총 맞고 불에 타서 순국한 선열들의 숫자만큼 이렇게 조형물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 오늘날의 제암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곳은 삼일운동의 정신이 더욱 살아있는 느낌입니다.
우리 민족의 수난에 교회의 수난이 함께 했었네요. 이곳 화성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인간이 아무리 불태워도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다시 세우실테니까요. 우리 민족의 굳건한 민족 정신도 마친가지일 것입니다. 무엇으로 우리 민족을 소멸시킬 수 있겠습니까? 민족을 위한 기도를 드리러 달려가고 싶군요.
|
|
첫댓글 가슴 아픈 역사의 현장에 다녀오셨군요.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후손들이 이 나라의 평화와 독립을 영원히 유지시켜야 할 것입니다.
강시인님의 발걸음에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철모와 꽃양산] 시집도 감명 깊에 잘 읽었습니다.
강시인님의 걸음 걸음에 다시 한번 더 축복의 박수를 보냅니다.
감사합니다. 제암리사건을 이제야 알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인터넷에서 검색해보고
그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수원역으로 달려갔었습니다. 수원에서 시외버스로 화성까지 갔었어요.
잿빛 겨울 하늘. 차가운 공기... 초록의 봄을 기다리는 화성 제암리 들판에 우뜩 서있는 3.1운동기념탑...
그리고 그곳에서 95년전에 일어난 사건들을 듣고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제암리 마을.
그 사건을 몰랐으면 모르는데 제가 알게 된 이상
제가 가서 보고 글을 써야하거든요. 그래야 제 맘이 편하니까요....
제 발걸음에 축복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애국,호국정신이 투철한국어 교육학자이며 시인이고
여행작가인 강미경 님....
좋은 글 가슴에 넣어봅니다.
우리 선열들의 얼을 이어받아
우리의 것을 우리가 지켜 나가야
살아 남을것이지 그 누구 어느나라도
대신 해 주지 않는 지금의 세계정세...
자국의 이익만을 챙기는 시대...
삼일정신과 더불어 좋은 귀감이 되겠습니다.
꽃샘추위에 감기 조심 하세요..
대산님의 응원에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내일은 지평전투전적비를 취재하러 양평에 갈 계획입니다.
아무 연고도 없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 와서 이 땅에 묻힌 파란눈의 청년들을 만나러...
그들에게도 고국에 부모가 있었을 것이고, 어떤 이는 어여쁜 여자 친구도 있었겠지요?
사랑하는 여인들을 두고 이역만리 땅에 와서 우리를 위해 싸워준 고마운 청년들....
17세 어린 소년도 있었다고 하니..... 우리나라 고1학생들의 나이가 아닙니까?
이 땅에 우리 청소년들을 생각해 봅니다. 부모가 주는 용돈으로 귀에 이어폰 꽂고 핸폰으로
친구들에게 카톡과 카카오스토리를 즐기며 브랜드커피를 손에 들고... 역사의 청사진에 찍힌
발자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