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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공군 대전략 ]
<공군 대전략>은 국내에서도 개봉되었고 그후 TV를 통해 여러 번 소개되었던 항공전투를 실감나게 그려낸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원래 제목은 <Battle of Britain>, 그러니까 <영국 전투> 혹은 풀어써서 <영국 본토항공전>이 맞을 텐데 <공군대전략>이란 제목이 조금은 생뚱맞기도 합니다.
007 시리즈를 4편이나 만들었던 프랑스 출신의 감독 가이 해밀턴이 메가폰은 잡은 이 영화는 제작과 발표 당시 영국 영화의 자랑으로 평가받았고, 영국 출신의 유명 스타들과 독일의 유명배우들이 총출동한 야심찬 프로젝트였습니다.
30년대와 40년대를 거치면서 최고의 스타였던 로렌스 올리비에와 <줄루>,<입크립스 파일>로 스타에 오른 마이클 케인, 로버트 쇼, 크리스토퍼 플러머, 스잔나 요크와 같은 영국의 기라성같은 인기배우들과 <상과 하>에서 나온 쿨트 율겐스와 같은 독일의 저명한 배우들도 대거 참여하여 작품성을 높였습니다.
영화의 구성은 1941년 7월부터 10월까지의 3개월간에 걸친 독일 공군의 영국 본토 공격을 그리고 있는데, 영화는 별도의 주인공을 두고 그들을 중심으로 이끌기 보다는 다양한 캐릭터들을 중심으로 다큐멘터리적인 느낌이 나도록 구성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화 제작방식은 60년대 당시 유명했던 영화 제작방식으로 <지상최대의 작전>, <머나먼 다리>, <도라! 도라! 도라!>와 같은 작품들도 이와 같은 다중 캐릭터를 활용한 다큐멘터리적 스토리 텔링을 중심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를 찍기 위해서 당시 촬영 팀은 영국에 실제 보존되어 있던 스피트 파이터와 허리케인기, 그리고 스페인과 포루투갈 공군에서 보관하고 있던 독일 전투기 매서슈미트(Me-109)와 폭격기 하인켈(He-111), 그리고 슈투카 폭격기(Ju-87) 등을 빌리거나 구매하여 제작하였고, 전투 장면 대부분을 실제 비행기에서 공포탄을 쏘면서 촬영하여 사실성을 높이고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에이스였던 아돌프 갈란트를 비롯한 독일, 영국 쌍방의 에이스들이 자문을 맡아 당시 영국과 독일 공군이 구사했던 전술을 재현해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1940년 6월, 유럽 최강의 육군을 보유했다는 프랑스가 패망하고, 미국은 유럽에서 터진 전쟁에 관여할 낌새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소련은 이미 나치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영국은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이게 된 겁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히틀러는 영국의 숨통을 끊고자 영국 본토 상륙작전인 <바다사자작전>을 입안합니다. 독일은 작전 개시에 앞서 영국 남부의 제공권을 확보하고자 압도적인 공군력을 동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영국은 오히려 항전 의지를 불태웁니다. 독일 공군의 간판 전투기인 매서슈미트에 맞서 스피트파이어를 배치하고 영국의 하늘을 감시하는 레이다망을 가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공중전인 영국 전투(The Battle of Britain)의 막이 오릅니다.
덩케르크 철수작전(다이나모 작전)이 시작되기 한달 전 쯤인 1940년 5월. 유럽 내 연합군이 점차 위기에 몰리자 영국공군 전투기 부대사령관 다우딩 공군 대장(로렌스 올리비에 분)은 더 이상의 공군기 파병을 중지하고 영국본토의 방위태세를 갖출 것을 처칠에게 건의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망해가는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알토란같은 자국의 비행기와 조종사들을 희생하지 말고 간수해야 된다는 지론이었습니다. 처칠도 이 의견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해 6월. 마침내 유럽은 독일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히틀러는 영국이 독일의 유럽통치권을 인정한다면 영국을 침공하지 않겠다며 휴전을 타진합니다. 그러나 처칠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영국 본토 공방전'이 시작됐음을 국민에게 알립니다.
다행히 독일이 프랑스 점령 후 즉시 영국을 공격하지 않은 덕에 전력을 많이 회복한 영국은 독일군이 갖지 못한 레이더와 650대의 전투기를 갖추고 전쟁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자신만만한 내각 각료들의 의견과는 달리 다우딩은 신의 가호가 있지 않는 한 승산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영국본토 전면공격의 제1단계 작전인 영국공군력 괴멸작전 개시일인 독수리의 날이 오고, 독일군은 영국 남부의 주요공군 기지에 엄청난 폭격을 가합니다. 그러나 촘촘한 레이다 망과 암호해독에 힘입어 소규모의 편대를 형성하여 적기를 요격하는 다우딩, 그의 전략이 의외로 성과가 있어 독일은 타격을 받습니다.
* 제3제국의 2인자, 공군원수 괴링...그는 희대의 허풍쟁이이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뉴렌베르그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독약을 먹고 자살합니다
그러나 애써 싸우고 돌아오는 전투기들이 착륙할 수 없을 정도로 대부분의 공군기지가 파괴됐고, 죽어가는 전투기 조종사를 보충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남아있었습니다. '다우딩의 병아리들'이라고 불리는 영국 전투조종사들은 불과 20세 남짓의 어린 목숨을 죽을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 영국을 구한 다우딩 대장(로렌스 올리비에 분)
다우딩은 외국용병까지 동원하며 애를 쓰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며칠을 더 버틸지 모른다는 근심에 빠집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납니다. 런던을 공격하지 말라는 히틀러의 엄명을 어기고 한 대의 독일군 폭격기가 실수로 런던에 폭탄을 투하합니다.
처칠은 즉각 베를린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히틀러는 공격력을 비행장이나 산업시설에서 런던으로 집중시킵니다.
그 덕분에 전력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된 영국 공군은 후에 '영국본토 공방전의 날'로 기념되는 1940년 9월 15일에 전 전력을 동원하여 런던을 공격하는 독일 공군에게 크나큰 타격을 입힙니다.
히틀러는 마침내 영국본토 전면 상륙작전(바다사자작전)을 무기한 연기합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고 험난했던 영국본토항공전(The Battle of Britain)이 끝나고 한시름 돌린 영국은 이제 북아프리카로 그 전장을 옮겨갑니다.
[ 영국본토 항공전(Battle of Britain) ]
* 영국 침공작전(바다사자 작전)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덩케르크의 철수가 끝나던 1940년 6월 18일, 대국민 성명을 통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유럽대륙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영국의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는 전시 내각의 지휘소로 사용되고 있던 <화이트 홀>의 지하 회의실 의자 앞에서 각료들에게 선언합니다.
"이 방에서 이제부터 내가 전쟁을 지휘 하겠소" 그리고 그 의자에 앉으며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만일 런던이 점령된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이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거요."
이렇게 영국전쟁(The Battle of Britain)의 서막이 펼쳐집니다.
* 히틀러와 그의 딸랑이 괴링
덩게르크에서 연합군이 성공적으로 철수한 다이나모 작전 이후 독일군 수뇌부에서는 연합군이 무사히 영국으로 탈출한 점을 감안하여 즉시 공격을 주장하였으나 히틀러는 영국이 자신들의 활약에 겁을 먹었으니 항복하게 할 수 있을 것 이라고 판단하여 영국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는다고 선언합니다.
물론 이 때 히틀러가 공격을 허가했어도 영국 해군이 건재한 상황이니 어림없는 이야기이였겠지요. 애초에 영국 본토 공략이 일사천리로 바로 가능했다면 연합군이 다이나모 작전을 성공시켰을 때 독일 장성들이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렸다'며 탄식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이후 독일군은 영국을 견제할 정도의 부대만을 남겨두고 프랑스 남쪽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6월 25일, 프랑스는 독일에 항복했습니다.
* 처칠
영국에 화친을 하자는 히틀러의 행보를 비꼬면서 영국인들은 전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희대의 선동가인 괴벨스는 미국에서 구입한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있는 윈스턴 처칠의 사진을 가지고서 "갱 같은 처칠이 여러분을 사지로 내몰고 있습니다.
이 살인마를 쫓아내고 제3제국과 대영 제국의 평화를 지켜냅시다. 여러분!"이라고 선전했지만 오히려 영국 사람들은 "우리도 처칠처럼 톰슨을 들고 나치들을 싹 쓸어버리고 싶어요!"라면서 열광적으로 환영했습니다.
* 허풍덩어리 괴링 공군원수(오른쪽)와 케셀링 장군(나중에 원수로 승진합니다)
이 기간 동안 독일은 다양한 외교 경로를 통해 갖가지 조건을 제시하면서 영국과의 강화조약을 요구하고 있었으나, 영국은 시큰둥한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결국 열을 받을대로 받은 히틀러는 7월 4일 "영국을 공격한다"라 선언합니다. 이는 다이나모 작전 뒤 거의 1달이나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전투를 앞둔 시점에서 공군의 양이나 질에서 영국군은 독일군에 뒤쳐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두 가지 결정적인 이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선 첫 번째로 영국은 레이더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독일공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할 수 있었고, 독일공군의 예상경로에 전투기들을 미리 출격시킬 수 있었습니다.
* 독일측 공격 비행단(2,3,5번이 영국 폭격단, 5번은 중간에 탈락)
두 번째는 영국은 독일의 암호를 해독해 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독일 공군의 작전을 미리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레이더는 암호가 새나간다는 걸 가려주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습니다. 암호 해독으로 영국군이 사전에 대비해도 정작 독일군은 '암호가 뚫렸을 리는 없고, 레이더에 들켰으니 어쩔 수 없지'란 식으로 생각해버렸기 때문이죠.
영국을 응징한다고 선언한지 한달 쯤 지난 1940년 8월 1일, 히틀러는 독일 공군원수 괴링에게 '바다사자' 작전(영국 침공 작전)에 앞서 영국공군을 완전히 괴멸시킬 것을 주문합니다. 이에 따라 방공망, 비행장, 항공기 공장 등을 공격목표로 설정하였습니다.
* 영국측 레이다망 범위
그리고 추신으로 "런던은 공격하지 않는다"를 명시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제2항공함대를 지휘하던 알베르트 케셀링이 불만을 터뜨리면서 "런던에 불지옥을 보여주면 영국인들이 전의를 상실하여 결국은 항복할 것"이라면서 강력하게 런던폭격을 주장하였습니다.
심지어 히틀러 앞에서도 런던을 공격하자는 마구 떠들어댔는데 "자네같으면 베를린이 폭격 당했다고 항복하겠나?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영국 전투기나 쓸어버리게!"라는 핀잔만 들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결국은 케셀링의 주장대로 런던 폭격을 단행하게 됩니다.
* 영국을 구한 다우딩 공군대장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독일군은 8월 10일 영국 본토를 공습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당일날 날씨가 악화되어 8월 13일로 연기하였습니다. 하지만 8월 13일 아침에도 날씨가 좋지 않아서 작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오후에 공격한다는 명령을 내린 상황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요하네스 핑크 대령 휘하의 공격부대에게는 이 명령이 전달되지 못하여 이륙을 해버렸습니다.
케셀링이 다급히 귀환명령을 내렸지만 호위전투기들에게만 전달되어 폭격기 74기는 그대로 영국을 향해 날아갔습니다. 폭격기들이 무전을 수신하지 못한 이유는 보급된 무전기의 불량이 원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핑크 대령이 명령을 들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공격을 감행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 전투기를 향해 뛰어가는 영국 조종사들
하지만 영국 역시 폭격기 편대의 수를 잘못 파악하여 고작 6기의 전투기만이 요격에 나섰고 당연히 요격 실패. 4기의 폭격기를 잃은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목표였던 비행장 폭격에 성공하였으며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있던 독일군 역시 놀라운 성공에 환호하였습니다.
한 가지 흠이 있었다면 비행사들이 영국 비행장 무력화, 전투기 10기 지상격파라는 보고를 올렸고 독일 측은 그걸 곧이 곧대로 믿었다는 점입니다. 실제 비행장은 10시간 만에 복구되었고, 격파했다고 보고한 전투기는 전투기가 아니라 블렌힘 폭격기였습니다.그리고 오후가 되자 진짜 폭격이 시작되었습니다.
* 비행기 수리 중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독일 조종사들
하지만 이번엔 영국이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레이더에 나타난 정보를 바탕으로 각 지역을 담당하는 부대에 비상출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레이더를 통해 정확히 적의 위치와 수효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군은 적재적소에 적당한 수의 편대를 배치할 수 있었으며, 거의 모든 독일 편대가 요격 당했습니다.
일부 운이 좋았던 부대만이 요격을 피해서 성공적인 폭격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조종사들은 귀환하여 영국 전투기 90기 가량을 파괴하였고, 비행장 6개를 무력화시켰다고 보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 영국은 13기의 전투기만 격추되었고, 지상에서 파괴된 항공기들은 역시 대부분 폭격기였습니다.
* 영국 비행단 위치, 남동부 11비행단과 중부 12비행단의
피해가 가장 컸습니다
그리고 무력화됐다는 비행장은 다음날 모두 복구 완료. 이 엉터리 보고를 별 여과없이 믿고 다음 공격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여담으로 이날 공습에는 8월 13일의 '신나는 오리 사냥'으로 기록된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에 대한 대량 학살이 있었습니다.
엉터리 보고에 따르면 영국 남동부를 담당하는 11비행단 전력이 반으로 줄어들어 영국은 북부와 중부에서 병력을 이동시켰을 것으로 예측하였고, 남동부에서 11 비행단을 상대하는 동안 노르웨이에서 빈둥대고 있는 있는 제5항공함대를 동원하여 취약한 북부와 중부 지역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 영국 레이다 기지
하지만 이것은 독일군의 치명적인 오판이었고, 영국 측은 독일군 암호기인 '울트라'를 통해 무선감청까지 해서 이 사실을 빠삭히 알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다가 거리의 문제로 매서슈미트는 올 수 없는 상황까지 겹쳤습니다.
그로 인해 악천후로 인해 출격이 하루 연기되어 8월 15일 제2항공함대, 제3항공함대가 1,500기 이상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남부를 공격하는 동안 노르웨이에서 발진한 제5항공함대는 북해를 가로질렀으나, 당연히 대기하고 있던 영국공군 14전투비행단에게 20%가 격추당했으며 대파된 기체는 30%가 넘었습니다.
* 피로에 쩔은 영국 조종사
결국 너무 큰 피해를 입은 제5항공함대는 영국 작전에서 아예 빠져버렸습니다.한편 남동부에서는 처절한 공방전이 계속되고 있었으며 영국은 레이더를 이용한 관제로 대부분의 폭격기 편대를 요격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에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시설들이 폭격 당했습니다. 남동부에서는 이러한 양상의 전투는 이후 계속되었고 독일군도 서서히 레이더에 대한 공포를 느끼기 시작하였습니다.
분명히 영국공군을 박살냈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일정 규모 이상의 전투기가 끊임없이 나타나서 요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영국군도 계속되는 손실로 조종사들이 죽거나 부상당해 전선을 이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종사들이 계속되는 전투에 지쳐 사기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 독일 폭격기 편대
독일군은 상황을 분석하기 시작하였는데 우선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슈투카가 제 역할을 못한다는 사실을 파악하였으며 그대로 전선에서 퇴출되었습니다. 그리고 폭격기를 보호해줄 것으로 예상했던 쌍발 전투기인 Me-110이 자기 자신을 지키는 것에 급급한 사실이었습니다.Me-110의 이런 문제점을 파악한 독일측은 폭격기 호위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대신 매서슈미트가 호위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폭격기 조종사들은 손실이 커지자 좀 더 잘 호위해줄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괴링은 매서슈미트에게 근접 호위를 명령했습니다. 이에 전투기 조종사들은 격렬하게 항의했지만 괴링은 그런 부하들을 겁쟁이라고 매도하면서 복종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 하늘을 감시 중...
이 무렵 독일군은 제대로 잘못된 정보를 근거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영국 전투기가 200기 전후만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영국은 750기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코 낙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는데 계속되는 피해로 쓸모있는 조종사 요원이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또한 연일 계속되는 폭격으로 다수의 비행장들이 피해를 입으면서 지상요원들도 많은 손실을 입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 영국 관제실
8월 24일, 독일군은 전술을 변경하였습니다. 일부러 영국 해협상공에서 오락가락하면서 레이더를 통해 예상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영국군이 독일군을 요격하는 구도가 아닌 요격하러 나온 영국 전투기를 독일의 호위전투기가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안전해진 폭격기는 안심하고 목표물에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호위에서 제외된 Me-110에도 폭탄을 달아서 목표지점에 폭탄만 떨어뜨리고 잽싸게 돌아오는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동안 야간에는 폭격이 없었는데 독일군은 밤에도 계속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야간 전투 경험이 없던 영국군은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였고 스코틀랜드 인근지역까지 진출하여 폭격을 가하고 있었습니다.이러한 형태의 공격은 9월 4일까지 지속되었고 남동부를 커버하고 있던 11항공단 세력은 궤멸위기에 몰렸습니다. 이 기간 동안 470여기의 전투기가 상실되었는데, 더구나 독일의 효과적인 전술로 인해 항공기 공장도 파괴되어 손실을 보충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수많은 조종사 요원이 상실되어 훈련병이나 다른 기종을 조종하던 조종사들을 동원하여 겨우 보충하는 형편이었고, 더 나아가 당시 언어 소통문제로 동원하지 않았던 외국인 조종사들까지 끌어다 써야할 정도로 절박한 실정이었습니다. 그나마 이들로도 손실을 보충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 불타는 런던, 멀리 세인트 폴 성당이 보입니다
급기야는 교육받고 있는 조종사 훈련병들의 교육 시간을 줄여서 제대로 조종 기술을 연마하기도 전에 전선에 투입하기까지 했습니다. 실력이 부족한 햇병아리 조종사들을 무턱대고 띄웠다간 학살당할 게 불 보듯 뻔했지만, 이 당시의 영국 공군은 그런 고려조차 사치에 가까울 정도로 절망적이었습니다.
< 런던 폭격 >이런 상황에서 결정적으로 유리한 국면이 조성됩니다. 8월 24일 야간폭격이 이루어지던 어느 날, 독일군 폭격기 두 대가 길을 잃어 영국 상공에서 헤매다가 대공포화를 받게 되자 이런 상황에 처하면 언제나 그래왔듯이 급히 폭탄을 버리고 기지로 복귀했습니다. 문제는 이 눈먼 폭탄이 떨어진 곳이 런던 시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양측 수뇌부 모두 이는 야간 작전 중에 벌어진 사고 정도로 생각했고 실제로 8월 24일 이후로 런던에 대한 폭격은 없었습니다. 윈스턴 처칠 역시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벼르고 있던 차에"더러운 훈족 놈들이 민간인을 공격했다!"라고 주장하면서 베를린 폭격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동안 별다른 임무가 없었던 존 옥슬리 장군이 지휘하는 폭격기 사령부는 8월 25일 밤 베를린에 휘틀리 폭격기로 야간 폭격을 시작하였습니다.
* 소방대원들
괴링은 두 번 다시 베를린이 폭격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하였으나 다음날 또다시 폭격을 당했습니다. 괴링은 평상시에 베를린의 방공망이 완벽하다고 호언장담하며 "베를린 상공에 적 항공기가 1대라도 나타난다면 나를 개새끼라고 불러도 좋다" 라고 큰 소리를 펑펑 해대었습니다.
물론 영국군 폭격기가 등장함으로써 괴링의 체면은 형편없이 구겨졌고 히틀러에게 불려가서 욕설까지 들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폭격이 9월 4일까지 2주간 계속되자 마침내 히틀러가 폭발했습니다.
* 독일 폭격대, 도버 해협을 가로질러...
바로 런던공격 명령을 하달했던 것입니다. “어젯밤, 영국 놈들은 베를린에 폭탄을 떨어뜨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겁한 영국 놈들이 감히 대낮의 독일 상공에 기어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입니다. 그들이 폭탄을 떨어뜨린다면, 우리는 그 열 배, 백 배, 천 배의 폭탄을 떨어뜨릴 것입니다. 그들의 도시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히틀러는 게거품을 물며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사실 영국 공군 수뇌부도 '차라리 독일 놈들이 런던을 빨리 공격하면 우리에게 유리할텐데......'라고 예측은 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계속 피해가 쌓이면 결국에는 영국 전체의 방공망이 무너지고 비행장과 공장들이 파괴되면 결국은 게임은 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프랑스 땅에 불시착한 매서슈미트
차라리 런던이 직접 공격받으면 독일 폭격기들을 깊이 끌어들여 요격하면서 그 틈에 영국 공군은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독일군의 의중에 달려 있는 것이라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는데 마침 이런 사태가 터진 것입니다.
예전부터 런던을 공격하자고 주장했던 케셀링은 이 결정에 열렬히 환영하였으나 제3항공함대 사령관 휴고 슈페를 장군은 잔존 영국기가 900기는 될 것이고 폭격기를 엄호해야 하는 매서슈미트의 항속거리가 짧아서 위험하다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하지만 런던을 폭격하면 자연스레 영국 전투기가 런던으로 몰려들 것이고 오히려 독일 전투기들이 영국 전투기를 일소할 수 있는 기회이고, 9월 21일로 예정된 바다사자 작전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의견에 따라 9월 7일 런던 폭격이 결정되었습니다.첫 런던 폭격은 매우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동안 독일공군이 런던을 공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남동부로 오는 줄 알고 있었기에 영국공군이 전혀 예상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독일 폭격기 편대는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런던으로 갈 수 있었으며, 당시 방공시설들이 남동부에 주로 배치되어 있었기에 대공포의 위협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 결과 런던 곳곳이 불바다로 변하였습니다.
* 런던 상공의 독일 폭격기
뒤늦게 도착한 영국 전투기들이 47기 정도의 독일기를 격추시킨 정도였습니다. 이를 영국군의 방공능력이 사실상 상실되었다고 판단한 괴링과 독일공군은 크게 만족하였습니다. 9월 8일에도 역시 별다른 피해없이 런던을 폭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11비행단이 너무 탈탈 털려버려서 전력과 비행장, 전투기를 복구하느라 12비행단만이 상대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9월 9일, 마침내 전력을 일정수준 회복한 11비행단이 출격하여 해협상공에서 런던 직전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피해를 입은 폭격기들은 폭탄을 아무 곳에나 투하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간신히 11비행단을 돌파한 폭격기들은 기다리고 있던 12비행단의 대편대와 맞딱 뜨려야 했습니다.
* 영화에서...영국 조종사들은 낙하산으로 탈출하면 다시 한번 전투에 나설 수 있었지만...
독일 조종사들은 그대로 포로가 되어버립니다
무엇보다 런던까지 날아오는 데는 남동부로 오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대편대를 이룰 시간이 충분하였고, 폭격기들이 도착할 시간에는 이미 대편대를 형성하고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양상에서 가장 큰 부담은 독일의 매서슈미트 전투기 조종사들이었습니다. 런던까지 가는 동안 11비행단의 전투기를 상대해야 했고, 런던에서는 12비행단의 전투기를 상대해야했습니다. 게다가 항속거리 문제로 인해 런던 상공에서의 체공시간은 겨우 5~10분에 불과했습니다. 그 사이에 영국 전투기를 제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고 연료문제로 눈물을 머금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 불타는 런던
만약 조금이라도 지체를 했다가는 해협이나 프랑스 해협에 불시착해야만 했습니다. 이로 인해 폭격기의 피해는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났고, 결국 독일공군 사령부는 매서슈미트 전투기에게 근접호위를 지시하였습니다.근접호위를 하게 되면 폭격기가 상대적으로 안전해질 수 있었지만, 대신 영국 전투기에게 수동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영국공군이 방어하기에 쉬운 상황을 만들어주고 말았습니다.
결국 폭격기 부대의 손실이 증가하자 독일공군은 9월 11일 주간폭격 중지를 선언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폭격기의 손실을 줄일 수는 있었지만 역으로 영국 전투기의 씨를 말린다는 계획 자체가 틀어져버렸습니다. 이후 런던에 대한 야간 공습은 70일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 영화에서...
한편 히틀러는 괴링에게 9월 21일 바다사자 작전 수행을 앞두고 9월 17일까지 영국 공군을 완전히 괴멸시킬 것을 재촉하였습니다. 특히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는 전황에 다급해진 괴링은 9월 14일 다시 주간폭격 재개를 선언하고, 9월 15일 다시 1,100 여대의 항공기를 동원하여 런던 공습을 감행하였습니다.
영국은 레이더를 통해 폭격기의 접근을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 370여기의 전투기를 날려 보내 응전하였습니다.먼저 요격에 나선 것은 11항공단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 내내 영국의 기본적인 전술이었던 스피트파이어가 매서슈미트를 상대하고 그 사이 상대적으로 비행성능이 떨어지는 허리케인들이 폭격기들을 탈탈 털어먹는 전술을 구사하였습니다. 그 결과 상당수의 폭격기가 피해를 입고 격추당하거나 폭탄을 버리고 귀환했습니다.
* 영국기 편대
간신히 런던상공으로 접어든 공격부대는 100기 이상의 전투기로 구성된 12항공단의 대편대와 맞딱뜨려야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수의 폭격기들이 격추당했으며, 독일군은 별다른 성과없이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날 독일 공군은 폭격기 56대, 전투기 12대가 격추당하는 피해를 입은 반면 영국 공군의 피해는 전투기 15대가 격추되는 피해만을 입었습니다. 9월 15일은 '배틀 오브 브리튼 데이'라 하여 영국 공군에겐 가장 자랑스러운 전투로 꼽힙니다.
이날의 전투가 얼마나 격심했는지는 당시 처칠과 제11비행단장 키스 파크와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1항공단 사령부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처칠이 키스 파크에게 출격하지 않은 예비 전력이 얼마나 있는지 물어 보자 키스 파크는 "단 한 대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모든 전투기를 이륙시켰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괴링은 이와 같은 참담한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고, 9월 17일까지 계속되는 공격에서 더 큰 피해를 주어 만회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9월 16일과 17일 날씨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항공작전이 불가능해졌고 그 사이 영국공군은 꿀맛같은 휴식을 취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하였습니다. 결국 히틀러는 공군의 실패로 인해 9월 21일 바다사자 작전을 펼칠 수 없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고, 마침내 작전의 연기를 선언하였습니다.
* 추락한 독일 폭격기
전면적인 공격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였지만 그래도 영국에 대한 공습을 계속하도록 주문하였습니다. 이를 기점으로 독일군에게 구체적인 작전지침 따위 없이 런던을 폭격하라는 명령만이 계속 반복될 뿐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9월 27일까지 주간폭격은 계속되었으나 피해가 계속되자 다시 야간폭격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틀러는 10월 13일 영국침공은 1941년 봄에나 하게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영국침공이 연기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공인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독일 공군의 야간폭격은 계속되었지만 10월 31일을 기점으로 공식적인 폭격이 중지된 것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 최고의 전투기, 매서슈미트...그러나 도버해협을 왔다갔다 하느라 영국에서 체공 시간은
불과 몇분이었으니...
그러나 독일은 산발적인 야간공습을 계속했습니다. 이런 식의 독일공군의 산발적인 야간폭격은 1941년 3월까지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가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프랑스 북서부 해안에 있는 공군을 서서히 동부전선으로 옮겨야 했으므로 공습의 빈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군이 물량에서 앞서 있었음에도 영국군의 효과적인 작전으로 영국을 끝내 점령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처럼 서부, 동부 양쪽 전선에서 싸우다가 패배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히틀러의 계획을 완전히 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 지하철 속으로 대피하고 있는 런던 시민들
게다가 연말이 되면서 더 희망적인 뉴스가 대서양을 건너오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전시 연합국 무기대여법'이 의회를 통과하여 총 30억 달러에 이르는 미국제 무기가 곧 영국에 제공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것은 영국 국민들이 받은 최고의 1941년 선물이 되었습니다.
대영제국의 가장 길고, 외롭고, 힘들었던 한 해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영국 측 조종사들의 활약을 두고 윈스턴 처칠은 다음과 같은 칭송을 남겼습니다.
"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have so many owed so much to so few)"
참고로 이 전투에서 영국은 1,963대, 독일은 2,550대의 항공기를 투입했습니다. 영국은 544명의 승무원과 1,547대의 항공기를 잃었고, 독일은 2,698명의 승무원과 1,887대의 항공기를 잃었습니다.
* 팁
물리학자이며 작가였던 C.P. 스노우는 평범한 런던 시민 한사람, 한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놀라운 용기와 영웅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폭격 기간 중 내가 가장 절감했던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겁쟁이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매일 밤이 찾아오는 것이 정말 두려웠다. 그에 반해 내 하숙집 할머니는 평소에는 좀 칠칠치 못한 듯 했지만 공습기간 내내 사자처럼 용감하고 활기에 넘쳐 있었다.
공습경보가 울리고 써치라이트 빛줄기가 밤하늘을 밝히기 시작하면 할머니는 창문을 활짝 열고 쾌활하게 외쳐댔다. "어머나! 괴링 아저씨가 또 오시는 모양이구랴!"
"옥스퍼드가의 선술집에 모여든 평범한 시민들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영웅이었다. 그들은 공습경보가 해제되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소방대원들의 구조작업을 도왔고, 그들의 이런 분투는 결코 용감한 공군 조종사들과 소방대원들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 양측의 주력기 ]
< 영국 >
* 스피트파이어
‘가장 아름다운 전투기’라는 명성을 낳을 만큼 우아한 곡선의 날개를 가진 신형전투기였습니다. 수직 상승속도에서는 매서슈미트(Me-109)에 미치지 못했으나 수평비행에서는 충분히 그것을 능가하는 시속 590km의 고속을 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기체가 개전 전에 유럽 각국에서한동안 유행했던 속도 경주용 수상기의 디자인을 발전시킨 것이라는 탄생배경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특히 동일한 속도를 가진 그 어떤 기체보다 작은 선회반경과 뛰어난 운동성으로 공중전에서 Me-109를 충분히 압도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뛰어난 에이스 아돌프 갈란트 조차 “우리의 승리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스피트파이어”라고 말했을 만큼 영국을 수호해낸 당대 최고의 걸작 전투기로 평해집니다.
* 허리케인
동체의 대부분을 목제골조 위에 천을 쒸어만든 구식이었지만 이 전투기야말로 대전 발발 이래 영국공군의 대들보이자 마당쇠였습니다. 기체 골격이 튼튼하고 비행 신뢰성이 높을 뿐 아니라 12정의 기관총을 장착한 이 기체는 1940년 9월까지 총 61개의 영국공군 비행대에서 약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매서슈미트보다는 50km 이상 느리지만 시속 520km의 비교적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데다 동시대의 어느 전투기보다 긴 960km라는 장거리 항속능력을 자랑했습니다. 물론 약점도 있었습니다.
고공 상승한도가 매서슈미트보다 300m 정도 낮았고 운동성이 약간 떨어졌기 때문에 스피트파이어가 주로 매서슈미트와 공중전을 치르는데 사용된데 비해 허리케인은 주로 독일군의 폭격기를 맡게 되었습니다. 특히 급강하 폭격기 Ju-87 슈투카는 허리케인의 가장 만만한 먹이감이었습니다.
< 독일 >
* 매서슈미트(Me-109)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던 무렵 독일의 전투기는 사실상 매서슈미트 Me-109 한 가지 뿐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시속 570km의 속도를 낼 수 있는 데다 가볍고 작은 기체에서 오는 민첩한 운동성은 실로 세계 최고의 전투기로 평가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순간 상승속도, 최고 상승속도 등 여러 면에서 영국전투기들을 압도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이 기체는 숫자가 충분치 못했습니다.
개전 초기에는 독일공군의 작전개념은 지상 목표물을 분쇄하는 소규모 정밀폭격에 우선 순위를 두고 있었고, 전투기는 단순히 폭격기를 호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란 생각 때문에 전투기 생산에 큰 비중이 두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1939년의 개전 이래 유럽대륙에는 이 Me-109에 맞설 만큼 우수한 성능을 가진 전투기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것도 독일공군이 전투기의 개발과 확충을 서둘지 않았던 또 한가지 원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영국본토 항공전에서 Me-109는 대부분 폭격기의 호위기로 사용되어 그 뛰어난 공중전 성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었습니다.
* Ju-87 슈투카 급강하 폭격기
개전 전 독일공군 기술총감이었던 에른스트 우데트 장군이 미국의 커티스 헬 다이버 급강하 함상 공격기를 보고 힌트를 얻어 개발을 서둔 기체였습니다. 이 기체는 유럽 대륙에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대의 주역이었지만, 영국본토 항공전에서는 그 한계를 여지없이 드러내었습니다.
높은 폭격 명중률을 자랑하는 이 기체는 지상의 적포대나 전차에게는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고속으로 기동하는 민첩한 영국 전투기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동체 밑에 매단 대형 폭탄에 걸리는 공기저항으로 인해 강하속도가 240km정도로 늦었기 때문에 영국 전투기들이 요격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조종석 뒤쪽에 돌출한 7.92mm의 기총 2정이 방어화기의 전부였던 이 기체는 영국 전투기를 요격할 효과적인 방어수단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이 기관총은 사격범위가 후방으로 제한되어 있는 탓에 강하 중에 측면으로부터 기총을 퍼부으며 달려드는 스피트파이어나 허리케인에 대해서는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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