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마리아 요셉
르그레즈와 신부님께
요동(백가점)에서, 1842년 12월 9일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
우리가 아직 마닐라에 있을 때 신부님께 편지를 올렸으나, 그동안의 우리 여행에 대하여 보고를 드리려 신부님께 다시 편지를 올립니다.
마침내 우리는 마닐라를 떠나 순풍을 따라 항해하여 대만 섬까지 다다랐으나, 거기서부터는 작은 폭풍우와 역풍을 만났습니다.
신부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섬은 길이가 6백 리로서 초목과 산림이 울창하고 경치가 매우 좋을 뿐 아니라 토지도 매우 비옥하게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매우 높은 산도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흰 눈이 덮여 있습니다. 이 섬의 주민들은 특유한 방언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가 우리에게 생선을 팔려고 다가왔는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으나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이 섬을 떠나 며칠 지나서 주산에 닻을 내렸습니다. 이 주산은 산이 많고 메마른 많은 작은 섬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시내 구경도 하고 또 얼마 전에 부임하신 라자리스트 신부님을 만나볼 겸 해서 주산 시내에 몇 번 들어갔는데, 원주민들 외에는 신기한 것을 하나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원주민들을 '검은 악마'라고 부르고 멸시하여 왕처럼 손에 지팡이를 잡고 겁을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산에서 약 두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동안에 영국인들이 남경을 탐험하기 위하여 출발하였으므로 우리도 그들을 따라 나흘 걸려 양자강에 도착했습니다. 이 강 중간에는 숭명이라고 하는 상당히 큰 섬이 있는데, 갈대와 초목과 숲이 빽빽이 우거지고 주민도 많으며, 섬 이름과 같은 도시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작은 개울들이 사방으로 흘러서 대체로 푸르르고 쾌적하며 비옥한 평야입니다.
강 오른쪽에 두 개의 도시가 있는데, 하나는 보산이라고 하고, 또 하나는 오송구라고 합니다. 오송구는 양자강의 황해 어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도시는 영국인들의 공격으로 주민들은 모두 피난하여 텅 비었고 전투 때문에 파괴되어 있었습니다. 오송구 방면에서, 운하라는 말이 더 맞는 두 개의 강들이 양자강으로 흘러드는데, 작은 것은 온조병이라고 하고, 큰 것은 황포강이라 합니다. 황포강은 상해 시내를 통과합니다.
상해는 해안에서 40리 떨어져 있는 도시로 영국인들에게 개항된 항구 중 하나입니다. 7월 하순에 영국군이 남경을 점령하려 진격한 지 약 15일 후, 중국 제2급 도시인 진강부에 도달하여 단시일에 합락시키고 요새에 군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1백 명 이상의 영국 군인들과 3천 명의 달단 군인들이 쓰러졌다고 합니다. 그 도시에서 전쟁을 지휘하던 달단군의 장군은,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자기 집에 돌아와 집에 불을 질러 아내와 자녀들과 온 가족이 다 함께 타 죽었다고 합니다.
그동안에 우리는 출발할 날을 고대하며 오송구에서 퍽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실 함장이 남경 시내를 구경하기 원해서 중국 배 한 척을 임대하였는데, 에리곤호는 강을 거슬러 오르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하여 3명의 장교와 선원들을 데리고 출발하였는데, 저는 통역관으로 따라갔으며, 메스트르 신부님은 에리곤호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출발한 지 약 6일 만에 진강부에 도착하여, 하루 동안 도보로 시가지를 걸어 다니면서 구경하였는데, 전쟁으로 파괴되고 강도들의 습격으로도 약탈당하여 폐허가 된 시가지는 사방에서 악취가 났습니다. 시가는 두 개의 구역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하나는 달단인들의 거주지였고 하나는 중국인들의 거주지였습니다. 이것은 양자강 오른쪽에 건설되어 있고, 맞은편에는 중국인들이 '운량호'라고 부르는 제국 운하가 흐르는데, 물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한 주요한 수문이 9개나 있다고 합니다.
다시 거기서 닻을 올리고 떠나 남경에 가서 닻을 내렸습니다. 남경 시가는 파괴되지 않고 있었으며, 영국인과 중국인들이 강화 조약(즉 남경조약)을 맺던 중이었습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눈앞에 당도한 영국군의 병력과 위협에 중국인들은 대경실색하여 강화를 청하였던가 봅니다.
황제는 4명의 고관대작에게 이 강화 조약을 체결하도록 위임하여 8월 29일에 강화 회담을 마치고 조약문에 조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리라고 단정하는 중국인들이 많습니다.
신부님도 아마 아시겠지만, 남경시에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탑이 있는데, 장교들이 그것을 구경하러 가기에 저도 그들을 따라가서 탑과 시가 전체를 구경하였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남경은 인구가 1백만 명이라고 하는데, 아주 평탄하며 두 개의 운하로 구분되어 있고, 도시는 크고 넓지만 아름답지는 못합니다. 도시 북쪽에(즉 종산)이 있는데, 그곳에 영국군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보은사라고 하는 절 가운데 높이가 200척이나 되는 탑이 세워져 있는데, 여러 가지 색깔의 돌들과 도금한 돌들로 되어 있고, 그 돌들 위에는 여러 신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탑의 외부는 여러 가지 색깔의 기와로 입혀져 있는데, 그 모양은 팔각형이고, 150개의 작은 종들과 2개의 구슬이 있고, 그 밖에도 눈에 띄는 등이 12개나 달려 있는데, 이 등들 덕분에 위로는 33천(하늘)을 비추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비추어, 사람들의 선행과 악행을 분간한다고 중국인들은 미신같이 믿고 있습니다. 탑의 맨 꼭대기에는 무게가 900근이나 되는 질그릇 단지 두 개와, 천반 즉 하늘의 접시라고 하는 450근의 접시가 있습니다. 탑이 광채로 온 세상을 비춘다고 믿고들 있습니다. 탑의 기단에는 여러 겹의 둥근 원이 있는데, 그 무게가 3,600근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탑을 다섯 가지 보석으로 꾸몄는데, 그것들은 각각 밤을 비추는 야명주, 비를 쫓는 비수주, 화재를 쫓는 비화주, 폭풍우를 피하는 비풍주, 먼지로부터 탑을 보호해 주는 비진주 등으로 불립니다. 또 그 밖에 중국인들의 경전 3권이 보관되어 있는데, 비교의 책인 '장경', 기도서인 '아미타불경', 부처님 경배 권유서인 '접인불경'이라는 것들입니다.
이 절과 탑의 기초는 대략 2천년 전에 세워졌답니다. 처음에는 탑의 이름을 고이왕탑이라고 불렀다가 체우라는 황제가 즉위 제3년에 퇴락한 절을 보수하여 건초사, 즉 첫째 절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카오라는 사람이 절을 쇠붙이로 파괴한 것을 진 왕조의 키엔운 황제가 재건하여 장간사라고 불렀다 합니다.
그러나 스무 번째 왕조인 원에 이르러서 화재로 전소된 채로 있다가, 스물한 번째 왕조인 명의 영락 황제가 예전의 상태로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중국에는 현재 정권을 잡고 있는 청까지 스물두 개의 왕조가 있었습니다. 그 절을 재건하는 데 19년이 걸렸는데,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탑에만 거의 400만원의 비용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캬친 황제 때에 다시 탑의 3분의 1이 벼락으로 파괴되었고 그것을 근래에 수리하였다고 합니다.
관광을 끝마치고 오송구로 둘아오는 도중에, 우리가 고대하던 파보리트호를 만났습니다. 그 배로부터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그의 동행인 토마스(최양업)와 범 요한이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과 괴로움을 한꺼번에 느꼈습니다. 우리가 모두 모였으니까 즐겁기는 하나 우리의 사정이 더욱 곤란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에 또한 서글펐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가 에리곤호에 도착해 보니, 신부님들이 범 요한에게 브뤼니에르 신부님을 안내도 하로 베롤 주교님께로 가는 짐도 처리하도록 상해의 신자들에게 심부름을 보냈었는데, 그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던 중에 세실 함장이 조금 있다가 출범할 것이라고 똑똑히 말하였지만, 범 요한은 온종일 기다려도 허사였고, 속히 돌아올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부님들은 부득이 브뤼니에르 신부님과 토마스에게 여행 보따리를 맡기고 육지에 내려서 범 요한의 귀환을 기다리게 하자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는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비하신 안배로 다행히 우리와 오래전부터 친밀히 교제하였던 황세흥이라는 해변에 거주하는 외교인이 에리곤호 출항 전날 저녁때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그리하여 브위니에르 신부님과 토마스는 그의 동의를 얻어 여행 보따리를 가지고 그의 집으로 갔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과 저는 예정한 대로 에리곤호로 우리의 포교지인 조선에 들어가기를 희망하였으나, 세실 함장은 함선 안에 환자가 많고, 자기의 여행 예정 기간이 짧다는 이유로, 조선으로 갈 항해에 대해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메스트르 신부님이 질문하니까 그는 자기가 조선을 향해 항해하기는 하겠으나, 만일 항해 중에 어디서든지 역풍을 만나면 곧바로 마닐라로 뱃머리를 돌릴 것이라고 조건부로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딱한 형편에 처해 있었으므로 메스트르 신부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우리가 마닐라로 다시 돌아가게 될까 봐 근심이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