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진암 가는 길은 험해도 2-2
선비들이 목소리 나는 곳을 바라보았을 때 음성은 이미 사라지고 호롱불을 중심으로 영롱하고도 둥근 선이 그어져 있었다. 후광(後光)이 었다. 후광은 한참동안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 들었지요, 천주님의 현존을 보셨지요! 자 이제부터입니다.」 이벽이 확신에 차 있는 말씨로 좌중을 둘러보았다. 선비들도 가슴에 차있는 것이 뻥 뚫린 듯한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반신반의하고 깊이 재보고, 의문 나는 것을 되묻고 한 모든 것이 일시에 봇물 터진 듯이 드러나 버린 것이다. 그들은 울고 있었다. 너무나 감격적인 현상이었다. 방청인으로 참석한 윤유일도 울었다. 윤유일은 학자들의 말을 귀담아 들었으나 모두가 생소했었다. 또 너무도 엄청난 진리의 말들이 스스럼없이 오갔었기 때문에 자신의 배움 갖고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배움을 담을 만한 그릇이 그에게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학 모임이 끝난 후 한성으로 돌아와 윤유일은 수표동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북경 갔을 때의 일, 즉 영세를 받았을 때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했다. 이승훈은 윤유일의 자못 진지한 얼굴을 보고 한 번쯤 사귀어볼 만한 젊은이라고 생각했다. 나이는 다섯 살 아래였지만 우람한 체격에 말수가 적고 준수한 용모가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듣고 싶소?」 「듣고 싶습니다.」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될런지 알 수가 없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승훈은 북경에 가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을 때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이승훈, 영세명은 베드로, 그는 서울의 반석방(盤看坊)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약현 천주교회가 서 있는 중림동 일대다. 그가 태어난 곳의 이름이 반석인 것도 또한 오묘한 섭리이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뜻이 교회에 반석이라는 의미가 있듯이, 그 역시 조선 교회에 초석이 되라는 뜻으로 베드로란 세례명이 붙은 것은 반석방(態石坊)에서 태어 남과 우연이라기엔 어딘지 모르게 석연한 점이 없지 않아 있다. 그가 태어난 곳 앞은 개천이었고 개천에는 늘 덩굴이 자랐다. 그래 서 스스로의 호(號)를 만천(蔓川)이라고 했다. 그 뜻은 덩굴이 무성한 시냇물이란 뜻이다. 그의 아버지는 평창인 이동욱인데 1776년에 대과에 급제하여 의주 부사 참판 등의 벼슬을 지냈고 글씨를 잘 써서 임금에게도 신임이 두터웠다. 그의 아버지가 북경으로 보내는 겨울 사신, 즉 동지사의 서장 관(書狀官)이었다는 걸 보면 능히 글 솜씨를 가늠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의 어머니는 당대의 유명한 학자 이가환의 누이로 성호 이익의 증손녀가 된다. 이승훈의 재주가 비범했던 것은 이 같은 가계에다 자신의 총명이 합해진 것이다. 그는 마재에 살고 있는 정(丁)씨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정(丁)씨라면 당대의 석학인 약종, 약전, 약용 형제를 일컫는 다. 이승훈은 바로 그들의 처남이었다. 이승훈은 나이 열 살에 벌써 경서(經書)를 읽었고 스무 살 때는 그의 이름이 선비들 사이에 심심치 않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열심히 학문에 정진해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 에 들어가 대과 공부를 하면서 천진암 강학회의 회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승훈이 천진암 강학회의 일원이 되었을 때 이벽은 그가 동지사의 사신으로 따라가길 권했다. 아버지 이동욱이 마침 북경의 동지사 서장관으로 임명됐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선비들은 강학의 결과 천주교를 믿기로 결심했다. 교리를 배웠으나 그 교리란 것이 저희들끼리의 토의 내용에 불과한 것이어서 미진한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또 사제가 없는 실정이어서 정확한 것을 문의할래도 문의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다행스럽게 이승훈의 부친이북경의 서장관으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동지사란 말 그대로 중국황제에게 공물을 바치러 일년에 한차례 가는 것으로 동짓달에 도착한다고 해서 동지사란 명칭이 붙었던 것이다.
광암 이벽은 이승훈이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떠나기 전북경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전했다. 물론 그것도 책에서 본 내용에 불과했지만 어느 정도 정확했다. 또 그의 6대조 이경상이 소현세자와 함께 북경에 다녀온 경험이 있어 거기에 대한 구전이 대대로 전해지기도 했다. "북경에는 천주당이 있다고 들었소. 동쪽에 있는 천주당을 동당, 북쪽에 있는 천주당을 북당, 서쪽의 것을 서당, 남쪽의 것을 남당 이라고 한다오. 그대가 가서 천주당의 서양 신부를 만나서 영세하기를 청하오. 우리 조선에는 신자는 많이 생겼지만 영세한 자는 아직 한명도 없네. 서양신부는 아마도 자네를 무척 환영 할 것이네. 그렇지 않아도 동양의 조선이라는 나라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판에 웬 떡이냐고 생각할 것이 분명 하네. 영세를 청하면 그들은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물건과 놀이개감 같은 물건을 많이 줄 것이네. 결코 빈손으로 돌아와서는 안 되네. 물론 자네도 그들에게 마땅한 선물을 하는 것이 도리이겠지만...」 이승훈은 이벽의 말대로 했다. 1783년의 일이었다. 그는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북경으로 갔다. 가기 전에 이벽은 그에게 다시 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자네가 북경에 가는 것은 참된 교리를 알라고 천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아주 훌륭한 기획이시네. 참 성인들의 교리와 만물의 창조주이신 천주를 공경하는 참다운 방식은 서양인들에게 배워야할 것이네. 그들은 이미 가장 높은 지경에 이르렀네. 우리가 여기서 왈가왈부하는 것은 일종의 우물 안 개구리들의 탁상공론에 불과하네."
이벽의 말은 계속 되었다. 그는 진리를 알고자하는 열정에 불타올랐다. "그 도리가 아니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그것 없이는 자기 마음과 자기 성격을 바로 잡지 못하네. 그것이 아니면 임금들과 백성들의 서로 다른 본분을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막중한 책임을 띤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소." 이승훈이 대답했다. "천주가 아니면 천지창조이며 남북극 원리며 천체의 규칙적 운행을 우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네. 그리고 천사와 악신의 구별이며 이 세상의 종말이며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며, 죄를 사하기 위한 천주 성자의 강생이며 선인은 천당에서 상을 받고 악인은 지옥에서 벌을 받는 것 등 이 모든 것을 알 수가 없네. 자네가 가서 천주의 진리를 알아 와야 하네." 이벽은 천주의 도리를 앎으로서 세상 이치를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이벽은 이승훈에게 자신이 귀하게 그러나 몰래 간직하고 있던 천주학에 대한 책들을 참고로 보여 주었다. "이것은 우리 선조가 소현세자와 함께 북경에 갔을 때 얻어온 것이네. 참고로 하게." 이벽의 천학지식은 매우 탁월했다. 그의 5대조 이경상이 소현세자의 스승으로 중국에 8년간 함께 있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아들로 병자호란의 책임을 물어 볼모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때 아담샬이란 서양 신부에게서 얻은 책들이 가보로 보관 돼 왔고 쉽게 그에게 전달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조상이 가져온 책들을 남몰래 탐독하면서 골똘히 연구하고 묵상하길 수백 차례, 더 이상 의심나는 것이 없게 되자 이세상의 일들이 하찮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홀로 산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뜻있는 사람들과 사귀기를 좋아 했고 혼자서 대자연과 함께 묵상을 거듭했다.
큰 산들과 고요한 강가를 거닐면서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천주를 그리워하고 기도했다. 그런 곳에서 도 닦는데 뜻을 두었거나 학문에 열중한 선비를 만나면 아주 시원스럽게 우주만물의 창조주와 주제자인상제(上帝)에 관하여 이야기 해주는 것을 낙으로 알았다.
여기서 잠깐 샤르르 달레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는 한국천주교회사를 집필했고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였다.
『하느님의 섭리가 조선 땅에 복음을 들여보내기 위하여 쓰신 주요한 연장은 별호를 벽이라고 하는 이덕조였다. 그는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이미 고려 때 높은 벼슬을 한 그의 조상들 가운데 학문에 이름을 날리던 인물과 높은 관직의 영광을 누리던 인물이 많았다. 2-3대 전부터 이 집안은 무과로 전향하였다. 이벽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훌륭한 자질을 타고났으므로 아버지는 나중에 그의 출세를 쉽게 할 수 있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어려서부터 시키고자했다. 그러나 소년은 그런 짓은 하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이벽은 자라면서 키가 크고 힘센 청년이 되었다 .그는 키가 8척이요, 한 손으로 1백 근을 능히 들 수가 있었다. 그의 당당한 풍채가 모든 이의 주목을 끌었으나 무엇보다도 그는 마음의 자질과 정신적 재능이 빛났으며 그의 언변은 기세좋게 흐르는 갈물에 비유 할 수 있었다. 그는 모든 문제를 대수롭게 그저 지나치지 않고 파고들었으며 그 나라의 경서를 배울 때도 문장 속에 숨은 신비스런 뜻을 탐구하려 들었다. 이벽은 무슨 책을 배우는 자체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학문 습득을 지도하고 도와줄 만한 학자들과 교제하기를 즐겨 하였다. 그는 스스럼 없는 농담을 좋아했고 조선 예법의 복잡하고 세밀한 규칙에 별로 구애 되지 않았다. 그는 비록 나라에서 학자들을 직능적으로 구별하는 어색한 점잔을 빼지는 않았지만 그 행동거지는 무엇인가 고상하고 위대한 기풍을 자연스럽게 풍겼다.』
이벽의 말에 따라 북경에 간 이승훈은 예수회 소속의 그라몽 신부에게 예정대로 영세를 했다. 영세명은 베드로였다. 베드로란 앞서 말한 대로 반석(磐石)이란 뜻이다. 단단한 주춧돌로서 기둥이 되라는 뜻이기도 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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