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
제1장(第一章) 김시습이 징심록을 접하다.
제1장(第一章)
[원문]
澄心錄者 雲窩朴公家世傳之書
징심록자 운와박공가세전지서
其鼻祖觀雪堂堤上公之所述也
기비조관설당제상공지소술야
後代宗嗣諸人 復寫相傳千有餘年 其珍重如何哉
후대종사제인 복사상전천유여년 기진중여하재
噫 吾家先世卜好公 曾受大恩於公而千載之下
희 오가선세복호공 증수대은어공이천재지하
又作隣於公裔之家 來往如一家 接遇如同族
우작린어공예지가 래왕여일가 접우여동족
余又受業于高門而當 此世路之末由
여우수업우고문이당 차세로지말유
與公之裔更結歲寒之盟 浪跡於千里之外 此天耶命耶
여공지예갱결세한지맹 랑적어천리지외 차천야명야
想緬古今 展懷惻惻
상면고금 전회측측
今讀此書 忽然在於千載之上
금독차서 홀연재어천재지상
如謁於公而尤不勝感慕於吾 家先世之羅代也.
여알어공이우不승감모어오 가선세지라대야.
[해설]
‘징심록(澄心錄)’은 운와(雲窩)2) 박공(朴公)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책으로, 그 비조(鼻祖)3)이신 관설당
(觀雪堂) 제상공(堤上公)4)이 지은 것이다.
후대 종가의 여러 후손들이 복사(필사)하여 전한 것이 천여년이 되었으니, 그 귀하고 소중함이 어떠한가?
슬프다! 우리 가문 선대의 복호공(卜好公)5)께서 일찍이 공의 큰 은혜를 입은 지 천년이 지난 후에, 또 공의 자손과
이웃이 되어 한집처럼 오가며 가족같이 만나보고, 나는 또 훌륭한 가문에서 수업하고, 지금 세로(世路)의 말(末)을
당한 것을 연유6)로, 공의 후예와 더불어 다시금 ‘세한지맹(歲寒之盟)7)’을 맺어, 천리 밖으로 유랑의 흔적을 같이
남기게 되니, 이것이 바로 천명이란 것인가.
기나긴 고금의 일을 생각하고 회포를 펼치니 슬프고도 슬플 뿐이다.
오늘 이 책(징심록)을 읽으니 홀연히 천년전 옛날로 돌아가 공을 뵈옵는 것 같고, 더욱 우리 가문 선대의 조상들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할 뿐이다.
[세부해설]
1) 김시습(金時習) : 조선 초기의 학자·문인(1435∼1493), 생육신의 한 사람. 본 징심록 추기를 썻다.
자세한 소개는 마지막으로 미룬다.
2) 운와(雲窩) : 박제상(朴堤上)의 후손인 운와((雲窩) 박효손(朴孝孫, 1428~1459)을 이름이다.
김시습(金時習)에게 징심록(澄心錄)을 전하고, 이를 읽은 김시습(金時習)이 징심록(澄心錄)의 유래와 내용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것이 바로 징심록추기(澄心錄追記)이다.
박효손은 조선 단종때 형조참판을 지냈다.
3) 비조(鼻祖) : 원래 시조 이전의 선계조상 중 가장 윗사람을 말함. 시조와 동일하게도 쓰임
4) 박제상(朴提上) : 신라 눌지왕때 충신(363~419).
삽량주 간으로 있을 때, 전에 보문전 태학사로 재직할 당시 열람할 수 있었던 자료와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비서
(秘書)를 정리하여 징심록을 저술하여 전하였다.
최근에는 저자가 없는 증심록(證心錄)의 존재가 소문으로 전하고 있다.
징심록의 존재를 부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진본이 나오면 순식간에 그 흔적들을 감출 것이다.
* 징심록(澄心錄)
본래 이름은 저자가 없는 증심록(證心錄)이다.
후대에 안전하게 전하기 위해 제목을 바꾼 것이다.
① 상교(上敎) 5誌
- 부도지(符都誌) : ‘마고 - 궁희 - 황궁 - 유인 - 한인 - 한웅 - 단군’으로 이어지는 천손 역사를 담고 있으며, 징심록
전체의 줄기를 요약해 서술하고 있다.
- 음신지(音信誌) : 부도지에 나오는 율려 등에 대한 설명서로 탄생 수리(數理)의 의미를 세부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역시지(曆時誌) : 하늘의 역법에 대해 세부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천웅지(天雄誌) : 하늘 세계의 계보 및 역사를 세부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성신지(星辰誌) : 하늘의 별자리를 세부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② 중교(中敎) 5誌
- 사해지(四海誌) : 지리에 관하여 세부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계불지(禊祓誌) : 수계제불(修禊除祓) 즉 수련방법에 대해 세부적으로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물명지(物名誌) : 세상만물의 이치를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가악지(歌樂誌) : 하늘의 소리를 이땅에서 표현하는 방법을 세부적으로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의약지(醫藥誌) : 인간의 몸을 하늘에 비추어 원초적 상태로 되돌리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③ 하교(下敎) 5誌
- 농상지(農桑誌) : 하늘에 천제를 지낼 수 있는 제물을 마련하기 위한, 농사짓고 양잠하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 도인지(陶人誌) : 하늘에 천제를 지낼 수 있는 제기를 제작하는 방법에 대한 세부 방법을 설명한 책으로 보여진다.
나머지 3誌는 본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제보내용이다.
- 식화지(食火誌) : 제사음식, 각종 먹거리의 가공 및 조리법, 장과 술등 발효음식 담그는 법 등을 기록한 책으로 보여
진다.
- 궁성지(宮城誌) : 터 잡는법(풍수), 각종 집 짓는법, 도성 산성 축성법, 현대 토목 및 건축기술을 망라한 책으로 보여
진다.
- 의관지(衣冠誌) : 각종 복식, 관모, 실뽑는법, 짜는법, 염색법 등을 기록한 책으로 보여진다.
5) 복호공(卜好公) : 신라 내물왕의 아들, 눌지왕의 동생, 412년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4 1 8년 박제상의 노력으로
귀국했다.
6) 세로(世路)의 말(末) : 김시습 선생이 말년에 세상을 등지고 방랑을 떠났던 시절을 말함이다.
7) 세한지맹(歲寒之盟) : 김시습과 박계손 사이에 맺은 약속
제2장(第二章) 김시습이 태고(太古)의 일을 논하다.
제2장(第二章)
[원문]
第二章
錄中記事 遠涉于太古
록중기사 원섭우태고
廣于於宇宙 其浩汗固不可言
광우어우주 기호한고불가언
而我東方創都之史 夏土變異之記 誠使人肅然也
이아동방창도지사 하토변이지기 성사인숙연야
通篇奧義 似仙道佛法而非
통편오의 사선도불법이비
當時新羅 姑無仙儒佛之浸來則 此根據於古史者明也
당시신라 고무선유불지침래칙 차근거어고사자명야
其神市來往之說 有戶氏傳敎之事
기신시내왕지설 유호씨전교지사
眞則古今天下之諸法 皆出於斯而轉訛變異者矣
진칙고금천하지제법 개출어사이전와변이자의
然則是書之不同 不能容於儒佛之世
연칙시서지불동 불능용어유불지세
又受斥於帝王之境者 固當然也
우수척어제왕지경자 고당연야
錄中有曰此書自有廣明之時云 其時何時耶.
록중유왈차서자유광명지시운 기시하시야.
[해설]
제2장
‘징심록’의 기록이 멀리는 태고(太古)의 일1)에 관계하고, 넓게는 우주(宇宙)의 일에 관여하여 그 광대함(浩汗)은
진실로 말할 수가 없으며, 우리 동방창도(東方創都)2)의 역사와 하토변이(夏土變異)3)의 기록은 사람으로 하여금
참으로 숙연하게 한다.
통칭 그윽한 의미(奧義)가 선도(仙道)와 불법(佛法)과 비슷하나 같지 아니하다.
당시 신라에는 잠시도 선(仙).유(儒).불(佛)이 침투해 오지 않았으니, 이는 고사(古史)에 근거한 것이 분명하다.4)
그 신시(神市)왕래의 설5)과 유호씨(有戶氏)6)의 전교(傳敎)의 일이 진실이니, 고금천하(古今天下)의 모든 법이
모두 여기서 나와 잘못 전해져 변해버린(轉訛變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같지 않음이 유불(濡佛)의 세계(世界)에 용납되지 아니하며, 또 제왕의 관경(管境)으로부터 배척을
당한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기록 중에서 말하기를, 이 책은 광명(廣明)의 시대(時代)7)부터 있었다고 하였으니, 그 시대는(時代)는 과연 어느
시절(時節)인가.
[세부해설]
1) 태고(太古)의 일 : ‘마고-궁희-황궁-수인-한인-한웅-단군’의 역사를 말함이다.
2) 동방창도(東方創都) : 티벳 수미산 마고대성 → 천산산맥 → 종남산 → 태산 → 하얼빈 백산으로 이어지는 부도
이동의 역사를 말함이다.
결국 그 사서는 이땅에서 보관하고 있으니 이땅의 영험함의 의미를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종교의 천국 대한민국... 왜 그러한지를...
3) 하토변이(夏土變異) : 부도에 역행한 도요와 순의 역사를 말함이다.
4) 고사(古史)에 근거 : 티벳 마고대성에서 황궁씨를 통해 전수된 수증복본(修證復本)의 수련법을 말한다.
석가는 수미산에서 수증복본의 수련법을 익혀 득도하였다.
5) 신시(神市)왕래의 설 : 배달국 즉 한웅시대의 도읍지를 신시(神市)라 하였다.
6) 유호씨(有戶氏) : 유소씨(有巢氏)의 오기로 단군왕검의 현자이자 특사, 큰아들이 유순(有舜)이고 둘째가 유상(有象)
이다.
유순이 도요의 두딸을 밀취하여 부도를 배반하자 둘째 유상을 보내 응징하였다.
7) 광명(廣明)의 시대(時代) : 배달국(한웅)이나 단군시대일 것이다.
* 부루태자, 유소, 유순, 유상, 도요, 우
임검씨의 태자 부루가 도산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산동성에 들려 태산에서 삼신께 천제를 올렸다.
도요는 잘못된 오행으로 혹세무민한 죄를 물어 단군의 특사 유소씨에 의해 감옥에 가두었는데 도중에 감옥에서 옥사
하였고,
도요를 응징하러간 유소씨의 아들 유순은 도요의 꾐에 넘어가 도요의 두딸 아황과 여영을 밀취하고 부도를 배반하자
유소씨는 둘째아들 유상을 보내어 응징하니 유순은 호남성 동정호 아래 창오에서 죽고 부도를 마지막에 배반한 우는
모산에서 항거하다 죽임을 당하였다.
이상이 잘못된 하토 역사의 대강이다.
제3장(第三章) 천웅도(天雄道)의 전수자(傳授者)
[원문]
第三章
謹案諸史 會通詳考則當時之堤上公
근안제사 회통상고칙당시지제상공
世稱之爲硏理之家 其於申自天公之言尤明也
세칭지위연리지가 기어신자천공지언우명야
赫居世王曾孫 始有兄弟 時人曰 第一不及於第二之神聖云
혁거세왕증손 시유형제 시인왈 제일불급어제이지신성운
則其第二者卽婆娑王而公之五代祖也
칙기제이자즉파사왕이공지오대조야
其所謂神聖者 非但氣品之謂而亦指其理道之如何矣
기소위신성자 비단기품지위이역지기리도지여하의
公之祖阿道公 享年百二十四歲
공지조아도공 향년백이십사세
考勿品公 享年百十七歲
고물품공 향년백십칠세
後代亦多百歲之人則公家傳統 必若有特理
후대역다백세지인칙공가전통 필약유특리
此或非昔世天雄道之傳守者也
차혹비석세천웅도지전수자야
公之澄心軒詩曰
공지징심헌시왈
煙景超超望欲流
연경초초망욕류
客心搖落却如秋
객심요락각여추
世間堅白悠悠事
세간견백유유사
坐對澄江莫說愁
좌대징강막설수
云
운
於斯 確然知公之抱道之一端也
어사 확연지공지포도지일단야
[해설]
제3장
삼가 모든 역사를 자세히 살피어 이리저리 상세히 참고하건대, 당시의 세상 사람들은 제상공(堤上公)을 천리(天理)
연구가(硏究家)라 하였으니, 그것은 신자천(申自天) 공의 말로도 더욱 분명하다.
혁거세왕의 증손에 형제가 있었다.
그때의 사람들은 큰아들이 작은아들의 신성(神聖)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작은아들이 바로 파사왕(婆娑王)1)이요 공의 5대조다.
소위 신성(神聖)이라는 것은 비단 기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역시 그 이치(理致)와 도리(道理)가 어떠한지를 가리
키는 것이다.
공(公)의 할아버지 아도공(阿道公)2)은 124세까지 살았으며, 아버지 물품공(勿品公)3)은 117세까지 살았고, 후대에도
역시 백 세까지 산 사람이 많이 있었으니, 공(公)의 집안 전통이 반드시 특별한 이치가 있는 것 같다.
이는 혹 옛날 천웅도(天雄道)의 전수자(傳授者)이기 때문이 아닌가.
공(公)의 징심헌시(澄心軒詩)4)에 이르기를,
아지랑이 초초하게 흐르는 걸 바라보니
나그네의 마음도 가을처럼 지는구나
세간의 견백(堅白)5)도 유유한 일도
징강(澄江)6)을 대하고 앉아 근심을 잊는다
고 하였으니, 여기에서 공(公)이 품은 도(道)의 일단(一端)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세부해설]
* 박제상 생전의 영해박씨 문중은 수증복본의 수련법을 대대로 전수하여 장수한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해본다.
1) 파사왕(婆娑王) : 신라제 5대왕 재위 80~112년, 유리왕의 둘째아들
2) 아도공 : 휘(諱)는 대선(大善). 추대하여 갈문왕이 되었다. (영해 박씨 세감)
3) 물품공 : 휘(諱)는 천보(天寶). 호는 물품(勿品)이다. (영해 박씨 세감)
4) 징심헌시(澄心軒詩) : 이 시는 신라 눌지왕 2년에 박제상이 왜국에 들어갈 때 지은 것이라고 했다. (영해 박씨 세감)
5) 견백(堅白) : 중국 춘추전국시대 공손룡(公孫龍)이라는 사람이 내건 일종의 궤변.
단단하고 흰 돌은 눈으로 보면 흰 것을 알수 있으나 단단한 것은 모르며, 손으로 만지면 단단한 것만 알수 있을 뿐
흰줄은 모르므로, 단단한 것과 흰 것은 다르다는 이론.
곧 억지를 써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옮다 하며, 같은 것을 다르다고 하는 궤변.
견백석(堅白石)과 같은 말이다.
6) 징강(澄江) : 징심헌(澄心軒) 앞에 앞에 흐르는 강.
박제상 생전 당시의 신라영토는 무궁화 자생산지(근화향)와 관련이 있고 그 지역은 양자강의 중심 도시 무한 인근이다.
징강이 어디인지는 연구대상이다.
징강이 한강(漢江)이나 장강(長江)으로 바뀌면 모든게 해결된다.
그 유명한 황학루가 있지 않은가? 여담이다.
단지 한단고기는 북방으로 부도지는 남방으로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참고) 신라의 혼이 살아 숨쉬는 호북성 무한(武漢) 황학루(黃鶴樓)
------------------------------------------------------------
황학루는 호남 악양의 악양루(岳陽樓)와 강서 남창의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강남의 3대 명루(名樓), 천하절경(天下
絶景)이라 일컬어 지는 곳이다.
1,700여년을 내려 오면서 이곳은 7번 소실되고 7번 중건되었는데, 지금의 모양은 제일 마지막에 중건된 1985년의 것
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 내릴 수 있는 최신식의 누각이다.
황학루는 삼국 오나라 황무 2년에 무창 사산(蛇山)에 처음 세워졌으며, 꼭대기에 동탑이 앉은 약 28m의 3층 건축물이
었다.
여러 전란을 지나 청대의 양식으로 새로 건설한 황학루는 더욱 웅장한 모양의 것으로 총 높이가 51.4m인 5층 높이가
되었다.
이곳은 누각을 중심으로 정자와, 회랑, 비방(牌坊), 시비(詩碑), 고전상무서비스가(古典商務服務街)로 구성되어 있다.
새로 지어진 지층은 예전 것에 비해 넓이가 배로 늘어난 30m로, 아래에 펼쳐진 무한의 시내전경을 여유롭게 즐기기에
좋다.
황학루는 사산위에 있으면서 장강을 바라보고 있어서 주변의 경관이 아름답고 운치있다.
그 때문인지 이백(李白), 백거이(白居易), 육요(陸游), 양신(楊愼), 장거정(張居正) 등의 많은 문인과 시인이 이곳을 시
로 읊었는데, 기록에 남아있는 것만 300수 이상이다.
* 황학루의 유래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시대에 이 곳에서 신씨(辛氏)라고 하는 사람이 주막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노인이 찾아와서 술을 달라고 하여 한잔을 드렸더니 더 큰잔으로 달라고 하여 여러잔을 마시고는 돈도 내지
않고 떠났다.
며칠후에 또 다시 찾아와서 술을 달라고 하니 신씨는 싫은 기색이 없이 계속 술을 주기를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동안 밀린 술값을 값겠다고 하며 노란 귤껍질로 벽에다가 학을 그리니 황학도가 되었다.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면 학이 튀어 나올터이니 이것이 그동안의 술값이다"라고 떠났다.
그러자 신씨는 손뼉을 치고 노래를 하니 정말로 노란학이 튀어나와 춤을 덩실덩실 추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듣고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서 신씨는 돈을 많이 벌 게 되었다.
10년후 노인이 다시 나타나자 술을 대접하려고 하니, 술은 필요 없고 학을 데려가겠다고 하면서 피리를 부니 노란학이
나타나 구름위로 휠훨 날아가고 나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을 보고 신씨는 주막을 헐고 그 자리에 정자를 지어 노인과 학을 기리기 위해 황학루(黃鶴樓)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 노인은 비문위(費文褘)라는 선인 이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황학루는 오나라 시절에는 파수대 역할을 하기도 하면서 오늘날까지 수 많은 문인들이 찾아와 시를 남기고 갔
는데 당나라 시인 최호의 황학루가 제일 유명하다.
* 황학루(黃鶴樓)
- 최호(崔顥)
昔人已乘黃鶴去(석인기승황학거) 옛날에 신선은 이미 황학을 타고 날아가 버리고,
此地空餘黃鶴樓(차지공여황학루) 지금 이 땅에는 그저 황학루만이 남아 있다.
黃鶴一去不復返(황학일거불복반) 황학은 신선을 태우고 간 뒤 돌아올 줄 모르고,
白雲千載空悠悠(백운천재공수수) 흰 구름만 천년동안 변함없이 하늘에 떠있다.
晴川歷歷漢陽樹(청천역역한양수) 맑은 양자강 건너편에 한양거리 나무들 보이고,
芳草妻妻鸚鵡洲(방초처처앵무주) 강 가운데 앵무주에는 향긋한 풀이 무성하다.
日暮鄕關何處是(일모향관하처시) 해 지고 고향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둘러보니
煙波江上使人愁(연파강상사인수) 강 위에 저녁 안개 서리고 시름만 더해진다.
그후 시선(詩仙)이라 불리우는 이백(李白)이 황학루에 왔다가 이 시를 보고 더 이상 좋은시를 지을 수가 없어서 황학
루에 관한 시 짓는 것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훗날 황학루에서 맹호연을 보내며 라는 칠언절구의 시로서 대신했다고 한다.
* 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황학루송맹호연지광릉) 황학루에서 맹호연이 광릉으로 가는 것을 보내며
- 이백(李白)
故人西辭黃鶴樓(고인서사황학루) 옛 친구는 이 황학루에서 이별 고하고,
烟花三月下揚州(연화삼월하양주) 꽃피는 삼월에 배타고 양주로 내려갔다
孤帆遠影碧空盡(고범원영벽공진) 외로운 돛단배 먼 그림자 푸른 하늘로 사라지고,
唯見長空天際流(유견장공천제류) 뵈는 것 아득히 하늘에 닿은 장강물 뿐이어라
황학루 1층에는 전설의 노인이 노란 학등에 앉아 피리를 불려 구름위로 날아가고 황학루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며 환영을 하는 벽화가 모자이크 벽돌로 그려져 있다.
황학루 경내에는 수많은 시와 시비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학교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왕희지, 조맹부등의 명필이
돌에 새겨져 있고, 이백을 비롯한 유명한 시인들이 시가 돌에 조각이 되어 전시되어 있다.
제4장(第四章) 관설당(觀雪堂)을 칭송함
[원문]
第四章
念煙景者 塵世之風景
념연경자 진세지풍경
客心者 自我之雜念
객심자 자아지잡념
煙塵雜念 彼此流落
연진잡념 피차유락
無一點殘滓則唯存者 淸秋澄江之本原而已
무일점잔재칙유존자 청추징강지본원이이
然後 堅白石之古今證理 難通者
연후 견백석지고금증리 난통자
坐對澄江而莫說憂愁
좌대징강이막설우수
其所謂坐對澄江者 徹底通觀之意也
기소위좌대징강자 철저통관지의야
又所謂莫說憂愁者 古今世人 執着於當面之局限
우소위막설우수자 고금세인 집착어당면지국한
未得於全體之通察
미득어전체지통찰
自紊致亂之意憂愁而愁之而深故 莫說也
자문치란지의우수이수지이심고 막설야
此一首詩 可以見公立於證覺之境地 憂愁人世之深切者也
차일수시 가이견공입어증각지경지 우수인세지심절자야
此事又見於公之稱號三變之間
차사우견어공지칭호삼변지간
初曰桃源者 必始祖王誕生處仙桃山之意也
초왈도원자 필시조왕탄생처선도산지의야
次曰石堂者 卽此黙識而通觀堅白之意也
차왈석당자 즉차묵식이통관견백지의야
三曰觀雪堂者 卽消融無餘證覺之盡處也
삼왈관설당자 즉소융무여증각지진처야
況其滅生立節 炎死化雪之奇遇躬行者乎
황기멸생입절 염사화설지기우궁행자호
然則澄心錄記述之本 根於古史 出於證覺者明也
연칙징심록기술지본 근어고사 출어증각자명야
其古史者 非但家傳而公在寶文殿伊飡十年之間 必得其詳矣
기고사자 비단가전이공재보문전이손십년지간 필득기상의
[해설]
제4장
가만히 생각하면 연경(아지랑이)은 티끌 같은 세상(塵世)1)의 풍조요, 객심(客心, 나그네의 마음)은 자아(自我)의 잡념
(雜念)이다.
연기처럼 일어난 먼지(煙塵)2)와 잡념이 피차 떨어져 나가 한 점의 찌꺼기도 없으니, 오직 있는 것은 맑은 가을 징강
(澄江)의 본원(本原) 뿐이다.
그렇게 한 후에 견백석(堅白石)3)이 고금의 증리(證理)에 통하기 어려운 것을 징강(澄江)을 대하고 앉아 근심을 말
하지 않으니, 소위 징강(澄江)을 대하고 앉는다는 것은 철저하게 전체를 통하여 내려다본다(通觀)4)는 뜻이요,
또 소위 근심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고금(古今)의 세상사람들이 당면한 일에 집착(執着)하는 데 국한하고 전체를
통찰하지 못하여 스스로 문란(紊亂)에 이른다는 뜻의 근심이요, 그것을 슬퍼하는 것이 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한 수의 시(詩)는, 가히 공(公)이 깊은 깨달음(證覺)의 경지에 서 있어, 근심스러운 인간세상과 깊이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일은 또 공(公)의 칭호가 세 번 변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처음에 호를 도원(桃源)이라 한 것은 반드시 시조왕(始祖王) 탄생처(誕生處)인 선도산의 뜻이요, 다음에 석당(石堂)
이라고 한 것은 말하지 않아도 견백(堅白)을 통찰한다는 뜻이요,
세 번째로 관설당(觀雪堂)이라고 한 것은, 즉 남김없이 녹아 없어져 깊은 깨달음을 다한 곳이라는 뜻이다.
하물며 생명(生命)을 바쳐 절개를 세우고 불에 타서 눈으로 변하는 기우(奇遇)6)를 몸소 실천한 분임에야.
그러므로 징심록(澄心錄)을 쓴 근본(根本)이 고사에 근거하여 증각자(證覺者)에게서 나온 것이 분명하다.
그 고사는 비단 한 문중에 전해진 것만이 아니요, 공(公)이 보문전(寶文殿)7) 이찬(伊飡)8) 10년(十年) 사이에 반드시
그 상세한 것을 얻었을 것이다.
[세부해설]
1) 진세 : 티끌이 있는 세상. 곧 이세상을 가리킨다. 진속(塵俗)
2) 연진 : 연기같이 일어나는 티끌 먼지. 세상속사(俗事)
3) 견백(堅白石) : 중국 춘추전국시대 공손룡(公孫龍)이라는 사람이 내건 일종의 궤변.
단단하고 흰 돌은 눈으로 보면 흰 것을 알수 있으나 단단한 것은 모르며, 손으로 만지면 단단한 것만 알수 있을 뿐
흰줄은 모르므로, 단단한 것과 흰 것은 다르다는 이론.
곧 억지를 써서 옳은 것을 그르다 하고 그른 것을 옮다 하며, 같은 것을 다르다고 하는 궤변.
4) 통관 : 전체를 통하여 내다봄. 전체에 걸쳐서 한번 흝어봄
5) 증각 : 깊이 깨달음
6) 기우 : 이상한 인연으로 만남
7) 보문전 : 동국열전에 박제상을 보문전 태학사에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8) 이찬 : 신라 때 17관등 가운데 둘째 위계. 진골이 하던 벼슬인데, 3대 유리왕 9년 서기 32년에 설치함
제5장(第五章) 통관(通觀)
[원문]
第五章
大抵世人 但知日之從東而向西
대저세인 단지일지종동이향서
不知日之從西而向東
부지일지종서이향동
此澄心錄所謂眼明故也
차징심록소위안명고야
故 天乃廢光設夜 使人眼暗而證其日從西之理也
고 천내폐광설야 사인안암이증기일종서지리야
今有一人 在於夜半 廢目而循日之踵則 必見此日從西而向東
금유일인 재어야반 폐목이순일지종칙 필견차일종서이향동
於是 乃廢偏見 又見大地山川 浮在於斡旋之中而同軌
어시 내폐편견 우견대지산천 부재어알선지중이동궤
然則東卽是西 西則是東 終無東西之別
연칙동즉시서 서칙시동 종무동서지별
此時 乃得圓覺也
차시 내득원각야
故廢見而撫石則 但知其堅 廢撫而見石則但知其白
고폐견이무석칙 단지기견 폐무이견석칙단지기백
此重於表感而不知表裏雙感之交推故也
차중어표감이부지표리쌍감지교추고야
故見撫具感然後乃得其全
고견무구감연후내득기전
雖表感知其交推之理則亦得其全
수표감지기교추지리칙역득기전
然則堅則是白
연칙견칙시백
白則是堅 終無堅白之差
백칙시견 종무견백지차
是謂之通觀也.
시위지통관야.
[해설]
제5장
대저, 세상사람들이 다만 해가 동쪽을 따라 서쪽으로 향하는 것만 알고, 서쪽을 따라 동쪽으로 향하는 것은 모르니,
이는 소위 ‘징심록’이 말하는, 눈이 너무 밝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이 곧 빛을 없애고 밤을 만들어 사람으로 하여금 눈을 어둡게 하여, 해가 서쪽을 따르는 이치를 증명
하게 하는 것이다.
지금 한 사람이 밤중에 눈을 감고 해의 뒤를 따른다면, 반드시 이 해가 서쪽을 따라서 동쪽으로 향하는 것을 볼 것
이니, 이에 곧 편견을 버리고 또 대지와 산천이 (공중에) 떠서 함께 도는 것을 볼 것이다.
이렇게 되면 동쪽이 바로 서쪽이요, 서쪽이 바로 동쪽이 되어 마침내 동서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이 때에 곧 원만(圓滿)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을 감고 돌을 만지면 다만 그 견고(堅固)한 것만을 알고, 만지지 않고 보기만 하면 다만 그 흰 빛만을 알게
될 것이니, 이는 표면의 감각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표면과 이면 두 감각의 오고 감(交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고 만지는 감각을 모두 갖춘 후에야 곧 그 전체를 얻을 것이요, 비록 표면의 감각만이라도 그 오고가는
이치를 알면 역시 그 전체를 얻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단단한 것이 흰 것이요, 흰 것이 단단한 것이 되어 끝내는
단단한 것과 흰 것의 차이가 없어지므로, 이것을 가리켜 통관(通觀)이라 하는 것이다.
제6장(第六章) 허실견백(虛實堅白)에 대한 고금(古今)의 논급(論及)
[원문]
第六章
凡事物 皆有表裏 裏密則充實而疏則空通
범사물 개유표리 리밀칙충실이소칙공통
表密則色聚而疏則衰虛 此虛實空色之交推也
표밀칙색취이소칙쇠허 차허실공색지교추야
且實密則堅固而疏則氣冲 色密則質造而疏則還白 此氣質堅白之交推也
차실밀칙견고이소칙기충 색밀칙질조이소칙환백 차기질견백지교추야
故色質堅實者 有相而足徵 虛白氣空者 無名而可朕
고색질견실자 유상이족징 허백기공자 무명이가짐
情生於有相 金石水土飛潛動植之形 徵焉
정생어유상 금석수토비잠동식지형 징언
道生於無名 隱現生滅消長盛衰之勢朕焉 宇宙萬象乃成也
도생어무명 은현생멸소장성쇠지세짐언 우주만상내성야
道者 一軌大同 形者 千態相殊
도자 일궤대동 형자 천태상수
於是 聖人作調通空之管音 察其大同之情
어시 성인작조통공지관음 찰기대동지정
準虛實之尺度 審其相殊之勢
준허실지척도 심기상수지세
此誠證理省事之眞法 而新羅之用金尺玉笛 其緖
차성증리성사지진법 이신라지용금척옥적 기서
由於上古之世者 明也
유어상고지세자 명야
大抵疏密一體也 氣質一體也 空色一體也 堅白一體而各有兩般者
대저소밀일체야 기질일체야 공색일체야 견백일체이각유양반자
將欲支交推相資而成物成事故也
장욕지교추상자이성물성사고야
故 天下之物 必成各於虛竅而位堅
고 천하지물 필성각어허규이위견
天下之事 必示相於實叉而痕白 此太古不易之眞詮也
천하지사 필시상어실차이흔백 차태고불역지진전야
故 古今論及於虛實堅白者 皆源於上世而未得其正
고 고금논급어허실견백자 개원어상세이미득기정
此堤上公之所以愁嘆之深切者也
차제상공지소이수탄지심절자야
[해설]
제6장
무릇 사물(事物)은 모두 겉과 속이 있다.
속이 빽빽하면 충실(充實)하고, 드물면 구멍이 뚫린다.
겉이 빽빽하면 색(色)이 모이고, 드물면 없어진다.
이는 허실(虛實)1) 공색(空色)2)의 교추(交推, 오고 감)인 것이다.
또 실(實)이 빽빽하면 견고(堅固)하고, 드물면 기(氣)가 빈다.
색(色)이 빽빽하면 질(質)을 만들고, 드물면 흰색으로 돌아온다.
이는 기질견백(氣質堅白)의 교추(交推)인 것이다.
그러므로 색질견실(色質堅實)3)(한 것)은 바탕(相)이 있어서 밝히기에 족하고, 허백기공(虛白氣空)4)(한 것)은 이름은
없으나 조짐(兆朕)이 있다.
정(情)은 바탕이 있는 데서 나와, 금석수토(金石水土)5)와 비잠동식(飛潛動植)6)의 형상(形象)이 밝혀진다.
도(道)는 무명(無名)에서 나와 은현생멸(隱現生滅)과 소장성쇠(消長盛衰)의 세력(勢力)이 조짐(兆朕)을 나타내니,
우주(宇宙) 만상(萬象)이 곧 이루어진다.
도(道)는 하나의 궤도(軌道)로 크게 뭉치고 형(形)은 천(千) 가지로 서로 다르니
(도자道者는 일궤대동一軌大同하고 형자形者는 천태상수千態相殊하니),
이에 성인(聖人)이 일으키어 온 누리에 통공(通空)7)하는 관음(管音)8)을 조음(調音)9)하여 그 대동(大同)의 정(情)을
살피고, 허실(虛實)의 척도(尺度)에 따라 그 서로 다른 세력(勢力)을 조사하니, 이는 진실(眞實)로 사물(事物)을 성찰
(省察)하여 증리(證理)하는 진법(眞法)과 신라가 금척(金尺)과 옥적(玉笛)10)을 쓴 그 유서가 상고지세(上古之世)에
연유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대저 소밀(疏密)은 일체(一體)요.
기질(氣質)도 일체(一體)요.
공색(空色)도 일체(一體)요.
견백(堅白)도 일체(一體)이며,
각기 양쪽에 있는 것은 장차 교추상자(交推相資)11)하여 성물성사(成物成事)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천하(天下) 만물(萬物)이 반드시 빈 구멍(虛竅)에서 이름을 이루어 위치가 견고(堅固)하게 되고, 천하(天下)
만사(萬事)가 반드시 실(實)이 교차(交叉)하는 데서 바탕을 보여 흔적이 하얗게 되니, 이는 태고(太古) 불역(不易)의
진전(眞詮)12)이다.
그러므로 허실견백(虛實堅白)에 대한 고금(古今)의 논급(論及)은 모두 상세(上世)에서 기원(基源)하였으나 그 바른
것을 얻지 못하였으니, 이가 제상공(堤上公)의 근심과 한탄을 깊고 통절하게 한 까닭이다.
[세부해설]
1) 허실 : 음양론과 대비되는 허실론. 허실론은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나타난다.
2) 공색 : 공과 색. 비어 있으면 색이 없으므로 공과 색은 대비가 된다.
3) 색질견실 : 색이 차면 질을 만들고 실이 차면 견고하다. 색과 질, 그리고 견과 질
4) 허백기공 : 색이 비면 하얗게 되고 실이 드물면 기가 없다. 허와 백, 그리고 기와 공
5) 금석수토 : 여기서는 단순한 물상을 말할 뿐 원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6) 비잠동식 : 새와 물고기와 동물과 식물
7) 통공 : 모든 공간에 통함
8) 관음 : 피리소리
9) 조음 : 소리냄, 부도지의 제관조음
10) 옥적 : 나중에 소개한다.
11) 교추상자 : 서로 밀어서 서로 도움
12) 진전 : 진법(眞法)
제7장(第七章) 제1절 백결(百結) 선생과 가문의 전설 금척(金尺)
[원문]
第七章
第一節
澄心錄添綴之別冊金尺誌 亦堤上公之所述歟 或後人之記錄歟
징심록첨철지별책금척지 역제상공지소술여 혹후인지기록여
文義則相連於澄心錄而別冊添綴者何耶
문의칙상련어징심록이별책첨철자하야
若非堤上公之所述 必是百結先生之追補者矣
약비제상공지소술 필시백결선생지추보자의
公家傳說多有關於金尺
공가전설다유관어금척
而余夙聞五臺之老釋者 與史乘野傳 大同小異故
이여숙문오대지노석자 여사승야전 대동소이고
今記其槪要於下
금기기개요어하
[해설]
1절
‘징심록’에 덧붙인 별책도 역시 제상공(堤上公)이 쓴 것인가. 혹 뒷사람의 기록인가.
글의 뜻은 ‘징심록’과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별책으로 덧붙인 것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제상공(堤上公)1)이 지은 것이 아니면 반드시 백결(百結) 선생2)이 추가하여 보충한 것일 것이다.
공의 가문의 전설이 금척(金尺)과 많이 관계하고 있으며, 내가 일찍이 들은 오대산 노석자(老釋者)의 이야기가
‘사승야전(史乘野傳)’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지금 그 개요를 아래에 적는다.
[세부해설]
1) 제상공 : 박제상(朴提上) 신라 눌지왕때 충신(363~419).
삽량주 간으로 있을 때, 전에 보문전 태학사로 재직할 당시 열람할 수 있었던 자료와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던 비서
(秘書)를 정리하여 징심록을 저술하여 전하였다.
최근에는 저자가 없는 증심록(證心錄)의 존재가 소문으로 전하고 있다.
징심록의 존재를 부정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진본이 나오면 순식간에 그 흔적들을 감출 것이다.
* 영해박씨 문중에서 제공한 박제상 영정
2) 백결선생(百結先生) : 박제상의 아들 (414 ~ ?)
영해 박씨(寧海朴氏) 족보에 이름은 박문량(朴文良)이며, 414년(실성왕 13)에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눌지왕 때 아버지 박제상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순절(殉節)하자 그의 어머니 김씨와 누나인 아기(阿奇)와 아경
(阿慶)은 비보를 듣고 이내 자결하였고, 가운데 누나인 아영(阿榮)만이 남아서 백결을 양육하였다고 한다.
그 뒤 아영이 궁중으로 출가하자 그도 함께 입궐하였으며, 장성해서는 각간(角干) 이수현(李壽玄)의 딸과 혼인하여
관직에도 있었다.
478년(자비왕 21)에는 모든 관직을 떠나 향리로 돌아갔는데, 이 때 그는 '낙천악(樂天樂)'이라는 귀향곡을 지어 불렀
다고 한다.
더없이 청렴하고 결백했던 그는 궁중으로부터의 모든 후원을 거절하고 스스로 궁색한 생활을 즐기다가 말년에는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가세가 빈곤하여 늘 누더기옷을 입고 다녔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백결(百結 :
백 번을 기웠다는 뜻)선생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영해박씨 문중에서 제공한 박제상의 子 백결 선생 영정
제7장(第七章) 제2절 제상공이 눌지왕을 세우다.
[원문]
第二節
新羅奈勿王時朴堤上公 以祗摩王之高孫 經寶文殿大夫
신라내물왕시박제상공 이지마왕지고손 경보문전대부
爲鄕里歃良州(梁山)干 築澄心軒 辨證細理 述始原傳來之史曰澄心錄
위향리삽량주(양산)간 축징심헌 변증세리 술시원전래지사왈징심록
時 奈勿王薨 三王子年少
시 내물왕훙 삼왕자연소
次家弟實聖王 脅威自立
차가제실성왕 협위자립
奈勿王長子訥祗 豫察來變 佯爲訥言作痴 放浪市肆
내물왕장자눌지 예찰래변 양위눌언작치 방랑시사
實聖王 置之度外 其二弟卜好 質放高句麗 末斯欣 質於倭國而除之藺後慮
실성왕 치지도외 기이제복호 질방고구려 말사흔 질어왜국이제지이두후려
至是 堤上公 以先世傳統 乃立言而擧實聖之不當
지시 제상공 이선세전통 내입언이거실성지부당
於是 世論 潝然 申自天裵仲良等六臣 辭去
어시 세론 흡연 신자천배중량등육신 사거
實聖王 遂讓位於訥祗王
실성왕 수양위어눌지왕
此前後十餘年之策謀而乃順成反正
차전후십여년지책모이내순성반정
申自天公曰堤上勇而精略 能辯細理云者 亦由於斯矣
신자천공왈제상용이정략 능변세리운자 역유어사의
[해설]
제2절
신라 내물왕(奈勿王)1)때 박 제상공(朴 堤上公)이 지마왕(祗摩王)2)의 고손(高孫)으로 보문전(寶文殿) 대부(大夫)를
지내고, 향리(鄕里)인 삽량주(歃良州)3)의 간(干)이 되어 징심헌(澄心軒)4)을 짓고 상세하게 이치(理致)를 변증하여
시원전래(始原傳來)의 역사를 저술한 것을 ‘징심록’이라 하였다.
때에 내물왕이 죽으니, 세 왕자는 나이가 어렸다.
차가(次家)의 동생 실성왕(實聖王)5)이 위협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내물왕의 장자 눌지(訥祗)6)는 변란이 올 것을 미리 살피고, 거짓으로 말을 더듬으며 미친 짓을 하고 거리를 방랑하였다.
실성왕(實聖王)이 도외(度外)로 치고, 그 둘째 동생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인질로 추방하고, 말사흔(末斯欣)8)은 인질
로 왜국(倭國)에 보내 그들을 없애고 뒷날의 염려를 끊어버렸다.
이에 이르러 제상공(堤上公)이 선세(先世)의 전통으로써 곧 실성왕(實聖王)의 부당한 처사를 거론하니, 이에 세론(世論)
이 쏟아져 나와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 등 육신(六臣)이 사퇴하였다.
실성왕(實聖王)이 마침내 눌지왕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것은 전후 십여 년간의 책모였으며 순조롭게 반정이 성공하니, 신자천공(申自天公)이 제상(堤上)은 용감하고 지략이
깊고 말 잘하고 이치(理致)에 밝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역시 이에서 연유한 것이다.
[세부해설]
1) 내물왕 : 신라 제17대 왕. 재위356-402년. 미추왕의 조카이며 사위
2) 지마왕 : 신라 제6대왕. 재위 112-134년
3) 삽량주 : 지금의 양산.
남제서에 나오는 백제 동성왕과 북위의 전쟁기록 등을 고려해 보면 신라는 무한 인근 양자강 유역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4) 징심헌 : 양산 징강 언덕에 있음.
대륙 신라를 추측해 보면 무한 적벽이 있는 황학루 앞강을 추측해 본다.
5) 실성왕 : 신라 제18대 왕. 재위402-417년. 미추왕의 동생인 각간 대서지의 아들.
6) 눌지 : 신라 제19대 왕. 재위 417~458년. 내물왕의 아들
7) 말사흔 : 삼국사기에는 미사흔(未斯欣), 삼국유사에는 미해(미해)으로 되어있다.
제7장(第七章) 제3절 제상공이 고구려와 왜국 왕에게 부도의 일을 거론하다.
[원문]
第三節
訥祗王 登位 常以二弟之事傷心不能勵政
눌지왕 등위 상이이제지사상심불능려정
於是 堤上公慨然請行 出於高句麗 言王以符都之事曰
어시 제상공개연청행 출어고구려 언왕이부도지사왈
一根之裔 何有是事 一言而還卜好及歸
일근지예 하유시사 일언이환복호급귀
不入其門而直出於倭國 夫人金氏聞而追至
불입기문이직출어왜국 부인김씨문이추지
公 已乘船搖手作別 夫人亦勵之
공 이승선요수작별 부인역려지
公 已入倭國 知其言之不容 假稱反者歸化
공 이입왜국 지기언지불용 가칭반자귀화
留連歲餘好行船遊 一日 囑未斯欣潛歸
유연세여호행선유 일일 촉미사흔잠귀
斯欣言與公同歸
사흔언여공동귀
公曰公子歸則事成 何期雙全而危其成事乎
공왈공자귀칙사성 하기쌍전이위기성사호
遂泣別 優遊船中 使倭人勿疑 俟斯欣遠去 乃獨歸舘舍 倭主始知見欺而怒
수읍별 우유선중 사왜인물의 사사흔원거 내독귀관사 왜주시지견기이노
公 乃言符都之事 勸修舊誼
공 내언부도지사 권수구의
倭主頑强 自言東海之主 迫公稱臣
왜주완강 자언동해지주 박공칭신
公 笑曰吾非歸化者 卽鷄林之臣 倭主尤怒 乃設淫刑而脅迫
공 소왈오비귀화자 즉계림지신 왜주우노 내설음형이협박
公 終不屈 言必曰鷄林之臣 倭主遂燒殺於木島
공 종불굴 언필왈계림지신 왜주수소살어목도
公 視死如融雪 灰身化正氣 立節義於千秋
공 시사여융설 회신화정기 입절의어천추
[해설]
제3절
눌지왕이 임금이 되어서는 언제나 두 동생의 일로 상심(傷心)하여 정사(政事)에 힘쓰기가 어려웠다.
이에 제상공(堤上公)이 개연(慨然)히 청하여 고구려에 가서 부도(符都)의 일로써 왕에게 말하기를,
"한 뿌리의 후예로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습니까?" 하였다.
이 한 마디 말로 복호(卜好)를 돌아오게 하였다.
귀국하여서는 그의 집 문 안에 들어가지도 아니하고 곧바로 왜국(倭國)으로 출국하였다.
부인 김씨가 듣고 쫓아가니 공이 이미 배를 타고 손을 흔들어 작별하므로 부인이 또한 그것을 권하고 장려하였다.
공(公)이 이미 왜국(倭國)에 입국하여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으로 임금을 배반하고 귀화하였다고
하였다.
계속하여 2년 남짓 머물러 있으면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하루는 미사흔에게 몰래 귀국할 것을 권하였다.
미사흔이 공과 함께 돌아가자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공자께서 귀국하시면 일은 성공한 것입니다.
어찌 두 사람이 모두 온전하기를 바라다가 일을 위태롭게 만들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울면서 작별하고 뱃놀이를 계속하여 왜인들이 의심하지 아니하게 하고, 미사흔이 멀리 갔을 때를 맞춰 혼자서
관사로 돌아가니, 왜의 임금이 비로소 속은 것을 알고 노하였다.
공이 곧 부도(符都)의 일을 말하고 옛날의 정의를 수호할 것을 권하니, 왜의 임금이 완강하여 스스로 동해(東海)의 주인
이라 말하고, 공을 협박하여 신하라 칭하라고 하였다.
공이 웃으면서
"나는 귀화자가 아니요, 계림(鷄林)의 신하(臣下)"라 하니, 왜의 임금이 더욱 노하여 곧 음형(淫刑)을 설하고 협박하였다.
공이 끝내 굽히지 아니하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계림(鷄林)의 신하(臣下)'라고 하니, 왜의 임금이 마침내 목도(木島)에서
태워 죽였다.
공이 죽음을 보기를 마치 눈이 녹는 것과 같이 하고, 재가 되어버린 몸이 정기(正氣)로 변하여 천추(千秋)에 절의(節義)를
세웠다.
제7장(第七章) 제4절 백결(百結) 선생(先生)
[원문]
第四節
訥祗王兄弟 聞公之死 悲痛至極 封公寧海君
눌지왕형제 문공지사 비통지극 봉공녕해군
公之夫人金氏聞公死 率三娘 登鵄述嶺
공지부인김씨문공사 솔삼낭 등치술령
自製鵄述歌 望哭東海自盡而死
자제치술가 망곡동해자진이사
長女阿奇三女阿慶 亦殉父母而死
장녀아기삼녀아경 역순부모이사
母女之身化爲三體神母石像
모녀지신화위삼체신모석상
次女阿榮 爲家事强生 養育五歲男弟
차녀아영 위가사강생 양육오세남제
是爲百結先生文良公也
시위백결선생문량공야
訥祗王聞而甚悲 使未斯欣 娶阿榮而慰之
눌지왕문이심비 사미사흔 취아영이위지
百結先生 長而大成 暫立於慈悲王朝 仍卽辭歸 不事世業
백결선생 장이대성 잠립어자비왕조 잉즉사귀 불사세업
彈琴修證 自行先世之道 遂晦跡不現云
탄금수증 자행선세지도 수회적불현운
[해설]
제4절
눌지왕 형제가 공(公)의 죽음을 듣고 슬픔이 지극(至極)하여 공(公)을 영해군(寧海君)1)에 봉(封)하였다.
공(公)의 부인 김씨는 공(公)의 죽음을 듣고 세 딸을 거느리고 치술령에 올라, 스스로 치술령가를 짓고 동해(東海)를
바라보며 울다가 자진하였다.
장녀(長女) 아기와 삼녀(三女) 아경 역시 부모(父母)를 따라 죽으니, 모녀(母女)의 몸이 변하여 삼체신모석상(三體身
母石像)이 되었다.
차녀(次女) 아영은 가문의 일을 위하여 굳세게 살면서 다섯 살 된 남동생을 기르니, 이가 백결(百結) 선생(先生) 문량공
(文良公)이다.
눌지왕이 듣고 심히 슬퍼하여 미사흔에게 아영을 아내로 삼게 하여 위로하였다.
백결(百結) 선생(先生)이 장성하여 잠시 자비왕(慈悲王)2) 조(朝)에 벼슬하다가 곧 사직하고 돌아가 세상일을 버리고,
거문고를 타서 수증(修證)하며 스스로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다가 종적을 감추고 나타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세부해설]
1) 영해 : 중국 고지도 주경도를 보면 임해현에 신라산이 있고 동북에 영해라는 지명이 있다.
2) 자비왕 : 신라 제 20대왕. 재위 458-478년. 눌지왕의 장남
* 중국고지도 "주경도" 상 "신라산"
중국고지도인 "주경도(州境圖)"상의 절강성 임해현의 "신라산"이다
임해현 주위에
- 천태현
- 영해현
- 황암현
- 선거현
등이 표시되어 있다
제7장(第七章) 제5절 견우성의 화신 제상공
[원문]
第五節
堤上公幼時 一道人見公曰
제상공유시 일도인견공왈
此人牽牛星之化身 必有濟渡之功 因名之曰堤上
차인견우성지화신 필유제도지공 인명지왈제상
及長 道人又告曰東村金公家 有十七娘
급장 도인우고왈동촌김공가 유십칠낭
卽織女星之化身 與公好緣 因之以成婚已矣
즉직녀성지화신 여공호연 인지이성혼이의
道人嘆曰 此兩人星精之天緣故 光不滅於久遠
도인탄왈 차양인성정지천연고 광불멸어구원
雖隔江相望何恨之有云 此眞奇異之事也
수격강상망하한지유운 차진기이지사야
[해설]
제5절
제상공(堤上公)이 어렸을 때, 한 도인(道人)이 공(公)을 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견우성(牽牛星)의 화신(化身)이니
반드시 제도(濟渡)하는 공(功)이 있으리라."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름을 '제상(堤上)'이라고 하였다.
자라자 도인이 또 알리기를, "동촌(東村) 김공(金公)의 집에 17살 난 처녀가 있으니 곧 직녀성(織女星)의 화신(化身)이
므로 공(公)과 더불어 좋은 인연이라" 하였다.
그로 인하여 혼인이 이루어졌다.
도인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이 두 사람은 별의 정기로 이루어진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
그러므로 빛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아니할 것이니, 비록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나 어찌 한이 있으리오."
라고 말하였다 하니, 이는 참으로 기이(奇異)한 일이다.
* 그림 : 고구려 국소대형 진의 무덤 천정에 그려진 '견우직녀도'
제7장(第七章) 제6절 백결 선생이 자비왕에게 천도(天道)를 논하다.
[원문]
第六節
百結先生 曾爲慈悲王 陳息災․治源․與人․知人․養人說等苦干
백결선생 증위자비왕 진식재․치원․여인․지인․양인설등고간
平生所懷 必宣於琴而嗚之於太虛
평생소회 필선어금이오지어태허
世人莫知其意 其中樂天樂 碓樂傳於世而已
세인막지기의 기중락천락 대락전어세이이
家貧衣弊 補綴無數 世人 通稱曰百結先生故
가빈의폐 보철무수 세인 통칭왈백결선생고
先生因之而自號曰百潔又改名曰婁琅
선생인지이자호왈백결우개명왈루랑
先生已退去鄕里 累徵不就 王除一切法禁於其鄕 卽忠孝谷而世稱勿禁里也
선생이퇴거향리 누징불취 왕제일체법금어기향 즉충효곡이세칭물금리야
麗末文貞公申雲月齋先生 文憲公崔冲先生等 收其稿而顯揚於世
려말문정공신운월재선생 문헌공최충선생등 수기고이현양어세
曰大哉 百結先生之道 當爲人君萬世之師法 其出處 正明無碍 可謂至人云
왈대재 백결선생지도 당위인군만세지사법 기출처 정명무애 가위지인운
[해설]
제6절
백결(百結) 선생(先生)이 일찍이 자비왕(慈悲王)을 위하여 식재(息災), 치원(治源), 여인(與人), 지인(知人), 양인(養人)
등의 설(說)1) 약간을 진술하였다.
평생의 품은 회포를 반드시 거문고를 펴서 태허(太虛)에 울리니, 세상(世上)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하였다.
그 중 악천악(樂天樂)과 악(樂)이 전해졌다.
집이 가난하므로 옷이 해어져 수없이 꿰매 입으니, 세상사람들이 백결(百結) 선생(先生)이라고 불렀다.
선생이 그로 인하여 스스로 호를 백결(百結)이라 하고, 또 개명하여 '루랑(婁琅)'이라 하였다.
선생이 이미 시골마을로 물러나 여러 번 불러도 나기지 아니하므로, 왕이 그 마을에는 모든 법과 규제가 없애니,
곧 충효곡(忠孝谷)2)이요, 세칭 물금리(勿禁里)다.
고려말에 신운월재(申雲月齋)3) 선생과 문헌공 최충(崔冲)4) 선생 등이 그 원고를 수집하여 세상에 드러내고,
"크도다! 백결(百結) 선생(先生)의 도(道)는 마땅히 해야 할 인군(人君) 만세의 사법(師法)이요, 그 출처가 정명무애
(正明無碍)하니 가히 지인(至人)이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세부해설]
1) 영해박씨 세감 및 화해사전에 나오는 글
죽송오(竹松烏) 서견(徐甄)이 말하기를 “신라의 인물로서 속세를 피해 숨는 사람이 적지 않았지만 그 중에서 곤궁한
처지에서도 참된 즐거움을 가졌던 사람은 누구일까?"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이 말하기를, “눌지왕때 왜국에 들어가 사절(使節)했던 삽량주 사람 박제상의 아들 문량이
자비왕을 섬기면서 천재(天災)로 인하여 상소하였는데,
그의 말에, '천도(天道)란 말이없는 가운데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 마치 스승이 착한 일을 열어주고, 허물을 막기 위
하여 회초리와 꾸짖음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임금이 만일 하늘의 재앙에 경각심을 가져 정도를 찾는다면 그것은 다행히 천재를 봄으로써 복된 길로 개혁하는 것입
니다.
그러므로 임금이 자기 도리를 자기가 잃어버리면 천재마저도 나타나지 않게되는데, 그것은 천재중에서도 제일 큰
천재로서 재앙이 없는 것이 재앙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반드시 재앙을 보이는 것이지 재앙을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 하늘 마음대로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임금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하였고,
그 후로도 계속 진언하여 태평성대를 만드는 것을 자기 책임으로 알았다.
그가 말하기를....
(중략) 너무 길어 여기서 줄인다.
2) 충효곡 : 효충동은 경남 양산에 있다.
3) 신운월재 : 1298~1377, 고려때의 학자
4) 최충 : 948~1068, 고려의 문신
제7장(第七章) 제7절 부도통일지론(符都統一之論)
[원문]
第七節
新羅武烈王微時 與金庾信等 就業於仙桃山下 百結先生之曾孫麻靈干先生
신라무열왕미시 여김유신등 취업어선도산하 백결선생지증손마령간선생
先生常以百結先生之道 授之 恒說符都統一之論 極斥外來之法
선생상이백결선생지도 수지 항설부도통일지론 극척외래지법
後 武烈王 登位 與庾信及先生之子龍文等
후 무열왕 등위 여유신급선생지자용문등
謀而成三國統一之業云
모이성삼국통일지업운
後世崔致遠郭輿諸賢出於是家云
후세최치원곽여제현출어시가운
[해설]
제7절
신라 무열왕(武烈王)1)이 미천하였을 때, 김유신2) 등과 함께 선도산(仙桃山)3) 아래 백결(百結) 선생(先生)의 증손
마령간(麻靈干)4) 선생에게 취업하니, 선생이 언제나 백결 선생의 도로 그들을 가르치고, 항상 부도통일론(符都統一之論)
을 설하며 외래의 법을 극력 배척하였다.
후에 무열왕이 등위하여 유신 및 선생의 아들 용문5) 등과 함께 모의하여 삼국통일(三國統一)의 일을 이룩하였다고
하였다.
후세에 최치원6), 곽여7) 등 여러 현인이 이 집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세부해설]
1) 무열왕 : 신라 제 29대왕 김춘추. 제위 604-661년
2) 김유신 : 595~673. 신라 명장
3) 선도산(仙桃山) : 중국에는 仙都山이 있다.
4) 마령간 : 백결 선생의 증손.
이름은 담. 일명 담새. 자는 여랑. 호는 마령간. 신라 소지왕 기묘년에 출생했다.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이차돈과 불교를 행하고 신라에 전도하자 왕이 이를 쫒는지라, 마령간이 아뢰어 이차돈의 목을
베고 불교도의 무리를 해산시켰다.
* 영해박씨 세감 상 162쪽 기록 :
흥무왕 김유신의 실기에 신라 무열왕이 공자(公子)로 있을 때 선도산으로 백결 선생을 찾아가 적을 쳐부술 계책을 물
었더니
선생이 대답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고 내가 듣기에는 기계 사람 김유신이 관중 숙하에 못지 않다고 하는데, 그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하여 그를 천거해 씀으로써 대업을 성공시켰다고 하였다.
5) 용문 : 백결 선생의 6세손(584~670). 시호는 무열.
6) 최치원 : 857~ 신라의 학자. 경주최씨의 시조.
중국 양주에는 최치원 박물관이 있다.
7) 곽여 : 1058~1130. 고려의 문인
제7장(第七章) 제8절 신라 입국(立國)의 근본(根本)은 부도(符都) 복건(復建)이라!
[원문]
第八節
新羅末傾 國事多難 堤上公家宗嗣文鉉先生
신라말경 국사다난 제상공가종사문현선생
繼承先生立言之傳統 累徵不就
계승선생입언지전통 루징불취
在野剛直 痛論時事 國人畏之
재야강직 통론시사 국인외지
時有孝恭王繼位之爭 先生以百歲高齡 發言於國中 喚起世論曰
시유효공왕계위지쟁 선생이백세고령 발언어국중 환기세론왈
新羅立國之本 在於符都之復建故 爲上者必勵於斯 不敢私謀榮華
신라입국지본 재어부도지복건고 위상자필여어사 불감사모영화
此 立國當時之約而雖隔千年 如在昨日 何忍忘其本義乎
차 입국당시지약이수격천년 여재작일 하인망기본의호
昔世朝鮮卽四海之公都 非一域之封國
석세조선즉사해지공도 비일역지봉국
檀氏之遺裔卽諸族之公僕 非一君之私民
단씨지유예즉제족지공복 비일군지사민
不幸避居東海 設防稱國者 出於不得已 決非本意故
불행피거동해 설방칭국자 출어불득이 결비본의고
國本與他國 懸殊 吾等 當覺醒於斯
국본여타국 현수 오등 당각성어사
一切紛爭 付於火消 回心反省可也云
일체분쟁 부어화소 회심반성가야운
於是 國論大正 朝廷肅然
어시 국론대정 조정숙연
王位返還於新羅始祖赫居世王 第一曾孫之後裔 是爲神德王
왕위반환어신라시조혁거세왕 제일증손지후예 시위신덕왕
三世景哀王 遂忘本肆逸
삼세경애왕 수망본사일
身亡國敗 復傳於金氏而新羅遂亡 是爲敬順王
신망국패 복전어김씨이신라수망 시위경순왕
[해설]
제8절
신라말경에 국사가 다난하므로 제상공(堤上公) 집안의 증손(曾孫) 문현(文鉉)1) 선생이 선세립언(先世立言)2)의 전통을
계승하여 여러 차례 불러도 나아가지 아니하고, 야인으로 있으면서 강직하여 시사(時事)를 통론(痛論)하므로 나라 사람
들이 두려워하였다.
때에 효공왕(孝恭王)3) 왕위 계승의 분쟁이 있으므로, 선생이 백 세의 고령으로 국중(國中)에 발연하여 세론(世論)을
환기하여 말하기를,
“신라 입국(立國)의 근본(根本)은 부도(符都)를 복건(復建)하는 데 있다.
위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이 일에 힘쓸 것이요, 감히 사사로이 영화를 도모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는 입국 당시의 약속이기 때문에 천 년이 지났다고 하더라도 어제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어찌 그 본의를 잊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옛날의 조선은 곧 사해(四海)의 공도(公都)요 한 지역의 봉국(封國)이 아니며, 단씨(檀氏)의 후예(後裔)는 즉 모든 종족
들의 심부름꾼이요, 한 임금의 사사로운 백성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동해로 피난 와서 방비를 설하고 나라를 세운 것은 어쩔 수 없는 데서 나온 것이요, 결코 본의가 아닌 것
이다.
그러므로 나라의 근본이 다른 나라와는 현저하게 다른 것이다.
우리들은 마땅히 이에 각성하여 일체의 분쟁을 불태워버리고 마음을 돌이켜 반성하는 것이 옳다.“ 고 하였다.
이 때에 국론이 크게 바로잡히고 조정(朝廷)이 숙연(肅然)하여, 왕위(王位)를 신라 시조 혁거세왕(赫居世王)의 제 1
증손의 후예에게 반환하니, 이가 신덕왕(神德王)4)이었다.
3세 경애왕(景哀王)5)이 마침내 근본을 잃고 방자하게 놀다가 몸은 망하고 나라는 패하여 다시 김씨에게 전하고
신라가 마침내 망하니 이가 경순왕(敬順王)6)이었다.
[세부해설]
1) 문현 : 박제상 선생의 14세손. 신라 제52대 효공왕때 사람이다.
2) 입언 : 의견을 세움
3) 효공왕 : 신라 제52대왕. 재위897-912년. 현강왕의 서자로 진성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 받았다.
궁예와 견훤이 세력을 펴 각축전을 벌이던 때로, 907년 견훤에게 일서군 이남의 10여성을 빼앗겼으나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4. 신덕왕 : 신라 제 53대왕. 재위912-917년 대아찬 예겸의 아들이며, 아달나왕의 원손이자 헌강왕의 사위이다.
5. 경애왕 : 신라 제 55대왕. 재위924-927년 경명왕의 동생이며, 아버지는 신덕왕이다.
영토를 견훤에게 거의 다 빼앗기고, 포석정에서 놀이하다 견훤에게 붙잡혀 현장에서 견훤의 강요로 자살했다.
6. 경순왕 : 신라 제 56대왕. 재위927-935년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의 아들이다.
견훤의 힘으로 왕이 되었으나 고려 왕건에게 항복했다.
제7장(第七章) 제9절 고려 태조 왕건이 부도(符都)을 일을 상세히 묻다.
[원문]
第九節
時 王子弓裔 始聞立國之本 慷慨懷復疆之志 率軍直向朔北
시 왕자궁예 시문입국지본 강개회복강지지 솔군직향삭북
至於鐵圓而屯 使副將王建 說高句麗遺民 彼等 願再建故國 故 弓裔許之 乃稱後高句麗
지어철원이둔 사부장왕건 세고구려유민 피등 원재건고국 고 궁예허지 내칭후고구려
十年之間 弓裔遂驕 改稱泰封國 忘失本志
십년지간 궁예수교 개칭태봉국 망실본지
人心 歸於王建故 王建遂爲王 稱高麗移都於松嶽 宣布復疆之業
인심 귀어왕건고 왕건수위왕 칭고려이도어송악 선포복강지업
於是 新羅已衰 又不能拒復疆之大義 敬順王遂讓國
어시 신라이쇠 우불능거복강지대의 경순왕수양국
王建太祖遣使於堤上公宗嗣之家 詳審符都之事
왕건태조견사어제상공종사지가 상심부도지사
徵其次家之裔睡軒先生父子 皆辭而不就云
징기차가지예수헌선생부자 개사이불취운
[해설]
제9절
때에 왕자 궁예1)가 처음으로 입국의 근본을 듣고 원통해 하고 슬퍼하였다.
강토회복의 뜻을 품고 군사를 이끌고 삭북(朔北)2)으로 곧장 향하다가 철원에 이르러 주둔하고, 부장 왕건으로 하여금
고구려 유민들을 설득하게 하니, 저들이 고국의 재건을 원하므로 궁예가 그를 허락하고 곧 후고구려(後高句麗)라 칭하
였다.
10년 사이에 궁예가 마침내 교만하여져서 태봉국이라 개칭하고 본뜻을 잃었다.
인심이 왕건에게 돌아가므로, 왕건이 마침내 왕이 되어 고려라 칭하고, 송악으로 도읍지를 옮겨 강토를 회복하는 일을
선포하였다.(開封)
이 때에 신라는 이미 쇠하고 또 강토 회복의 대의를 막을 수가 없으므로, 경순왕(敬順王)이 마침내 나라를 내놓았다.
왕건 태조가 제상공(堤上公) 종가(宗家)에 사신을 파견하여 부도(符都)의 일을 상세하게 묻고 그 차가(次家)의 후예
수헌3) 선생 부자를 불렀으나 다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고 하였다.
1) 궁예 : ?~918. 태봉궁의 임금. 승려로서 이름은 선종(善宗) 신라 제47대 헌안왕 또는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궁예의 선조는 평양사람(石門)으로 본래 보덕왕 안승의 먼 후예이며, 그의 아버지는 강직하게 술가
(術家)의 말을 따랐는데 어머니의 성을 따서 궁씨라고 했다고 한다.
2) 삭북 : 북방
3) 수헌 : 904~?. 이름은 빈(濱)이며 좌복사술홍의 아들이다.
제7장(第七章) 제10절 강감찬 장군이 영해(寧海)를 방문, 조언을 구하다.
[원문]
第十節
麗朝顯宗時契丹之禍繼作
려조현종시계단지화계작
王使姜邯瓚 累訪寧海求言甚勤 周恤一門
왕사강감찬 누방녕해구언심근 주휼일문
徵次家裔淸虛先生 恩顧甚重
징차가예청허선생 은고심중
又修赫居世王陵 建塔供養 其搭文曰
우수혁거세왕릉 건탑공양 기탑문왈
奉爲邦家永泰 遐邇常安 敬造此塔 永充供養 云
봉위방가영태 하이상안 경조차탑 영충공양 운
姜邯瓚公 以其女欲奉宗嗣之巾櫛 妻之於次家之裔云
강감찬공 이기녀욕봉종사지건즐 처지어차가지예운
[해설]
제10절
고려 현종(顯宗)1)때에 거란의 화가 계속하여 일어나니, 왕이 강감찬2)에게 여러 차례 영해(寧海)를 방문하게 하여
매우 부지런히 조언을 구하고 문중을 두루 구제하며,
차가(次家)의 후예(後裔) 청허(淸虛)3) 선생을 불러 은혜로 돌보아주기(恩顧)를 심중하게 하였다.
또 혁거세(赫居世) 왕릉(王陵)을 다시 고치고 탑을 세워 공양하니, 그 탑문(搭文)에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영원한 태평과 온 국민의 평안을 위하여 받들어 이 탑을 건조하고 영원토록 고양할 것입니다.“
운운하였다.
강감찬공이 자신의 딸에게 종사의 수건과 빗(巾櫛)을 받들게 하여 차가 후예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고 하였다.
[세부해설]
1) 현종 : 991~1031. 고려 제8대왕.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안종 욱의 아들이다.
강조의 옹립에 의하여 즉위하자 목종의 살역(殺逆)을 구실로 거란 성왕이 쳐들어 왔다.
2) 강감찬 : 948~1031. 고려의 명장.
1048년 거란의 소배압의 군사를 귀주에서 크게 이겨, 살아돌아간 적군이 불과 수천이었다.
3) 영해 : 한반도 경북 영덕을 말하는가? 중국 고지도에 나오는 임해현 영해를 말하는가?
진실은 곧 밝혀질 것이다.
구삼국사가 등장할때가 멀지 않았으니...
4. 청허 : 고려 광종 3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광염이다.
5. 건즐 : 수건과 빗. 머리를 빗고 낯을 씻는 일.
제7장(第七章) 제11절 거무역리(居無役里)
[원문]
第十一節
麗朝靖宗時 王爲公家復興 以此家裔 命天公再封寧海君
려조정종시 왕위공가복흥 이차가예 명천공재봉녕해군
徵其裔孫 數代之間連次封君以勵之
징기예손 수대지간연차봉군이려지
忠烈王時 有蒙古之亂 王 遣使寧海 詳審理勢
충열왕시 유몽고지란 왕 견사녕해 상심리세
周恤公家一門而且免役其鄕 謂之居無役里
주휼공가일문이차면역기향 위지거무역리
徵次家裔孫世通公祖孫三代
징차가예손세통공조손삼대
繼任侍中而謀邦家之安泰云
계임시중이모방가지안태운
[해설]
제11절
고려 정종(靖宗)1)때, 왕이 공(公)의 가문의 부흥을 위하여 후예(後裔) 명천공(命天公)2)을 다시 영해군(寧海君)에
봉(封)하고, 그 후손을 불러 수대 사이에 군(君)을 봉(封)하여 격려하였다.
충렬왕(忠烈王)3)때에 몽고의 난이 일어나니, 왕이 영해로 사신을 보내 자연의 이치를 상세하게 묻고, 공의 문중을
두루 구제하며 또 그 마을의 부역을 면하여 주니, 거무역리(居無役里)라 하였다.
차가(次家)의 후손 세통공(世通公)4)의 조손(祖孫) 3대(代)를 불러 계속 시중(侍中)에 임명하여 나라의 편안(便安)하고
태평(太平)함을 도모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세부해설]
1) 정종 : 1018~1046. 고려 제10대왕.
1037년 거란의 침입을 받고 이후 북방 경비에 전력을 기울여 1044년 천리장성을 완성하였다.
10416년 장자상속법과 직서의 구별을 정했다.
2) 명천공 : 박제상의 25대손.
고려조에 전법관서 삼중대광벽상공신으로 예원군에 봉해졌다.
3) 충렬왕 : 1236~1308. 고려 25대왕. 일명 일수왕.
비는 원나라의 세조 흘필열의 딸 장목왕후다.
1274년 여원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 정벌을 위한 동로군을 파견했으나 태풍으로 패퇴했다.
4) 세통공 : 박제상의 후손.
충렬왕 3년 1277년에 문하시중평장사가 되었으며, 거주하던 마을에 부역을 없애 주었다.
제7장(第七章) 제12절 선류(仙流) 무학대사
[원문]
第十二節
麗末 儒佛武三派爭權 國勢將危 殆忘立國之本
려말 유불무삼파쟁권 국세장위 태망입국지본
世人目寧海爲卜筮仙述之家
세인목녕해위복서선술지가
時 李太祖奉命 犯潦已發大軍 儒者金生甚憂乃求言於寧海
시 이태조봉명 범료이발대군 유자김생심우내구언어녕해
金生得言直走太祖陣中 密禀回軍之事
김생득언직주태조진중 밀품회군지사
太祖前夜夢得金尺云 一說則有僧自東海走來
태조전야몽득김척운 일설칙유승자동해주래
稟回軍事云 此僧或非無學之徒耶
품회군사운 차승혹비무학지도야
自東海走來則如有關於寧海 而無學者本非佛徒卽仙流 而常伴一人云
자동해주래칙여유관어녕해 이무학자본비불도즉선류 이상반일인운
金生之事則見於史錄之上 太祖回軍事 有二人之稟達歟
김생지사칙견어사록지상 태조회군사 유이인지품달여
[해설]
12절
고려말에 유(儒), 불(佛), 무(武) 세파가 권력을 쟁탈하므로 국세가 장차 위험하게 되었으나 거의 입국(立國)의 근본
(根本)을 잊어버렸다.
세상 사람들이 영해(寧海)를 보니 복서선술(卜筮仙術)1)의 집이었다.
때에 이태조(李太祖)2)가 명을 받들어 장마를 무릅쓰고 이미 대군을 동원하였으므로 선비 김생3)이 심히 걱정하고 곧
영해(寧海)에 조언을 구하였다.
김생이 조언을 얻어 태조의 진중으로 곧바로 달려가서 회군할 것을 몰래 의논하니, 태조(太祖)가 전날 밤 꿈에 금척
(金尺)을 얻었다4)는 등의 말을 하였다.
일설에는 중이 동해에서 달려와서 회군할 것을 아뢰었다고도 하니, 이 중이 혹 무학(無學)의 무리가 아닐까.
동해에서 달려왔다면 영해(寧海)와 관련이 있는 것 같기도 하여 무학(無學)5)이 본래 불도(佛道)가 아니요, 즉 선류
(仙流)며 언제나 한 사람을 데리고 다녔다고도 하였다.
김생(金生)의 일은 사록(史錄)6)에 보이니 태조(太祖) 회군의 일은 두 사람이 여쭌 것인가?
[세부해설]
1) 복서선술 : 선술로 점을 침. 또는 복서와 선술.
복서는 점을 치는 일이고 선술은 신선이 되는 술법을 일컫는다.
2) 이태조 : 1335~1408. 재위 1392~1398
공민왕 5년 1356년에 아버지 자춘과 함께 고려에 와서 복종한 뒤, 이듬해 유인우가 쌍성총관부(원이 고려 화주에 두었던
관청)를 공격할 때 비밀히 적과 내통했다.
우왕 14년 1388년 5월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최영 장군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다.
후에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원주로 추방한 후 7월에 왕이 되었다.
3) 김생 : 누군지 확실치 않다.
4) 금척을 얻었다 : 이성계가 꿈에 신인한테서 금척을 받아 왕이 되고 (용비어천가 13장, 83장 참조),
뒤에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몽금척을 만들어 거기에다 “천사금척수명지상(天賜金尺受命之祥)”이라 새겼다.
5) 무학 : 1327~1405. 속성은 박. 이름은 자초. 호는 무학이다.
묘향산 금강굴에서 수도했다.
6) 사록 : 어떤 책인지 확실하지 않다.
* 무학대사
고려말 행촌 이암 선생도 1335년 양주 천보산 태소암에서 소전도인(素佺道人)에게 비결을 얻어 단군세기와 태백
진훈을 전하였고 무학대사도 양주 천보산 자락 회암사에 기거하였다.
제7장(第七章) 제13절 세종대왕이 영해 가문을 가까이 두다.
[원문]
第十三節
本朝世宗大王登位 甚慇懃於寧海 周恤公家一門
본조세종대왕등위 심은근어녕해 주휼공가일문
又建赫居世王陵廟 乃命公之宗次二家 移居於京師泮宮之隣
우건혁거세왕릉묘 내명공지종차이가 이거어경사반궁지린
命長老入侍便殿恩顧甚重
명장로입시편전은고심중
徵次家裔昌齡公父子而登用
징차가예창령공부자이등용
時余在隣受業于宗嗣之門
시여재린수업우종사지문
[해설]
제13절
본조(本朝, 조선조), 세종대왕이 왕이 되어서는 은근히 영해(寧海)를 생각하여 공(公)의 문중(門中)을 두루 구제하였다.
또 혁거세왕(赫居世王) 능묘를 세우고, 곧 공(公)의 종가(宗家)와 차가(次家) 두 집에 명하여 서울 성균관 옆으로 옮겨
살게 하고, 장로로 편전에 들어 왕에게 알현하도록 명하여 은혜로 보살펴 주기를 심중(甚重)하게 하였다.
차가(次家)의 후예(後裔) 창령공(昌齡公)1) 부자를 불러 등용(登用)하였다.
때에 나는 이웃에 있어 종가(宗家)의 후손의 가문에서 수업하였다.
[세부해설]
1) 창령공 : 1377~1449. 벼슬이 평양서윤(平壤庶尹) 이었다.
* 세종 : 조선왕조 제4대 왕(재위 1418~1450).
제7장(第七章) 제14절 “징심록”을 가지고 금화(金化)로 들어가 숨어버리다.
[원문]
第十四節
當魯山朝乙亥遜位之日 朴氏大小家遂離京四散
당노산조을해손위지일 박씨대소가수이경사산
次家諸人入於金化
차가제인입어김화
是時 雲窩孝孫公 受澄心錄於宗家
시시 운와효손공 수징심록어종가
倉皇之中奉持入隱於金化 時余同蹤故始得奉讀
창황지중봉지입은어금화 시여동종고시득봉독
後再傳於次家逋臣公家
후재전어차가포신공가
公之子薰氏奉持入隱於文川雲林山中
공지자훈씨봉지입은어문천운림산중
[해설]
제14절
노산조(魯山朝, 단종端宗)1) 을해(乙亥, 1455년), 손위(遜位)2)의 날(6월)을 당하여 박씨 대소가(大小家)가 마침내
서울을 떠나 사방으로 흩어지니, 차가(次家)의 사람들이 금화(金化)2)로 들어갔다.
이 때에 운와(雲窩) 효손공(孝遜公)이 종가(宗家)가 어찌할 겨를 없이 매우 급한 중에“징심록”을 받아 가지고 금화
(金化)3)로 들어가 숨어버리니, 때에 나도 같이 따라갔기에 비로소 읽어보게 되었다.
뒤에 다시 차가(次家) 포신공(逋臣公)4)의 집에 전해지니, 공(公)의 아들 훈씨(薰氏)가 가지고 문천(文川) 운림산
(雲林山)으로 숨어버렸다.
[세부해설]
1) 노산조(단종) : 1441-1457. 조선조 6대 왕.
재위 1452-1`455년. 12세에 문종이 돌아가자 왕위에 올랐다.
1445년 숙부 수양대군이 정인지, 한명회, 권람 등과 결탁하여 왕위를 빼앗았다.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당하여 영월에 추방되었다가 가을에 서인이 되고, 12월 24일 영월에서 죽임을 당했다.
2) 손위 : 왕위를 사양함
3) 김화 : 강화도 북부에 위치. 원래의 김화군과 금성군이 합쳐진 것이다.
김화에는 구은사와 박씨 선대의 묘소 및 신도비가 있다.
4) 포신공 : 1419~1485.
단종 때 병조판서를 지냈으며 고종 때 정절의 시호가 내렸다.
관직에 있을 때의 휘는 계손. 입산했을 때는 숙손이었다.
기상과 절개가 결연하여 바르지 못한 것을 싫어했다.
1455년에 자취를 감추었다가 김화에서 아버지와 형을 모시고 다시 함경남도 문천 운림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호를
제8장(第八章) 금척(金尺) 수리(數理)의 근본(根本)은 곧 천부(天符)의 법(法)이라.
[원문]
第八章
上記諸事 可以推知澄心錄之由來也
상기제사 가이추지징심록지유래야
其所謂立言求言者必在於金尺之數理
기소위입언구언자필재어금척지수리
而今則公家宗嗣已逝 諸家離散不講久矣 故今無知者惜哉
이금칙공가종사이서 제가이산불강구의 고금무지자석재
余嘗讀金尺誌其數辭甚難不可了解
여상독금척지기수사심난불가요해
大抵其本卽天符之法
대저기본즉천부지법
而製之以金者爲其不變也 作之以尺者爲其無誤也
이제지이금자위기불변야 작지이척자위기무오야
不變而無誤則天地之理盡矣
불변이무오칙천지지리진의
誌中所謂日月星辰金土氣水之本 一存於不變之道
지중소위일월성신금토기수지본 일존어불변지도
飛潛動植生滅盛衰之理 全系於無誤之法者 是也
비잠동식생멸성쇠지리 전계어무오지법자 시야
[해설]
제8장
위에 기록한 모든 일은 가히“징심록”의 유래가 추측하여 알 수 있게 한다.
소위 입언(立言)1)이나 구언(求言)2)이란 것은 반드시 금척(金尺)의 수리(數理)에 있으나,
지금 공의 집 종가의 후손이 이미 세상을 달리하였고 집안사람들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풀어볼 수 없게 된 지가 오래
되었다.
그러므로 지금 아는 사람이 없으니 애석할 따름이다.
내가 일찍이 “금척지(金尺誌)”를 읽으니 그 수사(數辭)가 매우 어려워서 알 수가 없었다.
대저 그 근본(根本)은 곧 천부(天符)의 법(法)이다.
그것을 금(金)으로 만든 것은 변(變)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요, 자로 제작(製作)한 것은 다 같이 오류(誤謬)가 없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變)하지 않고 오류(誤謬)가 없으면 천지(天地)의 이치(理致)가 다하는 것이다.
“금척지(金尺誌)” 중의 소위 일월성신(日月星辰)과 금토기수(金土氣水)의 근본(根本)이 한 가지로, 불변(不變)의 도(道)
에 있다.
나는 새와 헤엄치는 물고기와 동물과 식물의 낳고 죽고 성(盛)하고 쇠衰(하)는 이치(理致)가 다 오류(誤謬)가 없는 법
(法)에 매달려 있는 것이 이것이다.
(계속)
[세부해설]
1) 입언 : 후세에 모범이 될 만한 의견을 세움.
2) 구언 : 임금의 신하늬 조언을 구함.
제9장(第九章) 금척(金尺)의 형상은 삼태성(三台星)
[원문]
第九章
是故 金尺之由來 其源甚遠其理深邃
시고 금척지유래 기원심원기리심수
而其形象則如三台之例
이기형상칙여삼태지례
頭含火珠 四節而五寸
두함화주 사절이오촌
其虛實之數九而成十 此則天符之數也
기허실지수구이성십 차칙천부지수야
以故 能度天地造化之根 能知理勢消長之本
이고 능도천지조화지근 능지리세소장지본
至於人間萬事無不測察
지어인간만사무불측찰
而規矩於氣門 心窺 命根 則能起死回生云
이규구어기문 심규 명근 칙능기사회생운
眞可謂神秘之物也
진가위신비지물야
[해설]
제9장
그러므로 금척(金尺)의 유래(由來)가 그 근원(根源)이 매우 멀고 그 이치(理致)가 매우 깊어, 그 형상(形象)은 삼태성
(三台星)1)이 늘어 선 것 같으니 머리에는 불 구슬을 물고 네 마디로 된 다섯 치(五寸)2)이다.
그 허실(虛實)의 수(數)가 9가 되어 10을 이루니, 이는 천부(天符)의 수(數)다.
그러므로 능(能)히 천지조화(天地造化)의 근본(根本)을 재고, 능(能)히 이세소장(理勢消長)3)의 근본(根本)을 알고,
인간만세(人間萬事)에 이르기까지 재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숨구멍, 마음, 목숨을 재면 기사회생(起死回生)한다고
하니, 진실(眞實)로 신비(神秘)한 물건(物件)이라고 할 것이다.
[세부해설]
1) 삼태성
2) 다섯치 : 한치는 약 3.3센치이므로 16.5센치
3) 이세소장(理勢消長) : 세력(勢力)이 소멸(消滅)되는 것과 성장(成長)하는 것의 이치(理致)
제10장(第十章) 칠보산(七寶山) 금척(金尺)
[원문]
第十章
據史錄則神人 授金尺赫居世王微時日持此金尺
거사록칙신인 수금척혁거세왕미시일지차금척
以正金甌云 一設則金尺玉笛 出於七寶山 傳於赫居世王云
이정금구운 일설칙금척옥적 출어칠보산 전어혁거세왕운
七寶山 寧海之名山
칠보산 영해지명산
白頭山下明天府 又有七寶山 未知何山
백두산하명천부 우유칠보산 미지하산
若後者則此必昔世之事
약후자칙차필석세지사
新羅創始之本 已在於符都則金尺之法 亦在於檀世者可知也
신라창시지본 이재어부도칙금척지법 역재어단세자가지야
赫居世王 出於仙桃山壇廟之聖母婆娑蘇
혁거세왕 출어선도산단묘지성모파사소
以十三之年少 能爲衆人之所推則基
이십삼지년소 능위중인지소추칙기
血系 必有由緖而金尺之爲傳來之古物 亦可以推知也
혈계 필유유서이금척지위전래지고물 역가이추지야
然而此法 不傳於世而 獨傳於提上公者 此必婆娑王家傳故也
연이차법 부전어세이 독전어제상공자 차필파사왕가전고야
又公家之後裔 嚴秘而諱之故也
우공가지후예 엄비이휘지고야
況其本文澄心錄 不可開示於今世者乎
황기본문징심록 불가개시어금세자호
[해설]
제 10장
역사 기록에 의하면, 혁거세왕이 미천할 때에 신인(神人)이 금척을 주면서 이 금척을 가지고 금사발(금구 金甌)1)을
바로잡으라고 말했다 하고, 일설에는 금척과 옥피리가 칠보산에서 나와 혁거세왕에게 전해졌다고도 한다.
칠보산2)은 영해의 명산이요, 백두산 아래 명천부(明天府)에 또 칠보산이 있으니, 어느 산인지 알 수가 없다.
만약 후자라면 이는 반드시 옛날의 일이리라.
신라 창시의 근본이 이미 부도에 있었으니, 금척의 법이 또한 단군의 세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혁거세왕이 선도산(仙桃山) 단묘(壇廟)의 성모(聖母) 파사소(婆娑蘇)에게서 출생하여 13세의 어린 나이로 능히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은 것은, 그 혈통의 계열이 반드시 유서가 깊었기 때문이며, 금척이 오래된 전래물 임을 또한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이 세상에 전해지지 않고 제상공의 집에만 홀로 전한 것은, 이것이 반드시 파사왕가에 전하였기 때문이요,
또 공의 문중의 후예가 엄중하게 비밀에 부쳐 그것을 감춰 두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본문 “징심록”을 세상에 보이지 않았음에랴.
[세부해설]
1) 금구 : 금구무결(金甌無缺)이란 말이 있다.
국세가 금단지같이 견고하여 다른나라의 모욕이나 침략을 받지 않음을 뜻한다.
금구는 나라를 비유한 것이다.
2) 칠보산 : 칠색보옥(七色寶玉)의 산의 약칭인 듯하다.
방장방호(方丈方壺)의 굴에서 칠보의 옥을 캐서 천부를 새겨 그것을 방장해인(方丈海印)이라 했다고한다.(부도지)
함경남도 남부 동해안에 위치한 명천에 있는 산.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에 있는 산.
산동성 청도에는 칠보산촌이 있다.
* 발해(渤海) 삼신산(三神山)
渤海中有蓬萊方丈瀛洲三神山
발해중유봉래방장영주삼신산
바로 배달국 14세 치우한웅의 청구국이 있었던 곳이며 공자가 가서 살고싶어 했던 구이 즉 동이의 땅 '군자불사지국'
있던 땅입니다.
제11장(第十一章) 당 소정방이 금척을 탐내다.
[원문]
第十一章
金尺之所在 誌中無擧
금척지소재 지중무거
據於史錄則赫居世王 埋於地中 作三十餘八丘而秘之云
거어사록칙혁거세왕 매어지중 작삼십여팔구이비지운
新羅武烈王時 唐將蘇定方 以平濟之功
신라무열왕시 당장소정방 이평제지공
憑唐帝之命 索求是物 掘起金尺院地域
빙당제지명 색구시물 굴기금척원지역
時 有崔氏者 泌持渡海 埋於地中
시 유최씨자 비지도해 매어지중
數年後 持歸返於其師
수년후 지귀반어기사
其師仍以深藏於金剛岩堀中云
기사잉이심장어금강암굴중운
一說則崔氏者 鬼圍之頭目而遂賊魔於高山海島
일설칙최씨자 귀위지두목이수적마어고산해도
泌持入於金剛而深藏云 此亦奇說也
비지입어금강이심장운 차역기설야
玉笛則已出於地中 金尺亦有再現之時耶
옥적칙이출어지중 금척역유재현지시야
[해설]
제 11장
금척의 소재는 “금척지”에서 밝히지 않았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혁거세왕이 땅 속에 묻고 30개의 언덕을 만들어 그것을 감춰버렸다고 하였다.
신라 무열왕 대에 당나라의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공으로 당나라 황제의 명령을 빙자하여 이 물건을 찾아내기
위하여 금척원(金尺院)지역을 파내므로,
때에 최씨라는 사람이 몰래 감추어서 바다를 건너가 땅 속에 묻었다가 몇 년 뒤에 다시 가지고 돌아와서 그 스승에게
반환하므로, 그 스승이 금강산 바위굴 속에 깊이 감추어버렸다고 하였다.
일설에 최씨라는 사람은 귀단(鬼團)1)의 두목으로, 도둑과 마귀를 높은 산과 바다 가운데 있는 섬으로 몰아내고,
(금척을) 금강산으로 몰래 가지고 들어가서 깊이 감추어버렸다고도 하였으니,
이 또한 기설(奇說)인 것이다.
옥피리는 이미 땅 속에서 나왔으니 금척도 역시 다시 나타날 때가 있을 것인가.
[세부해설]
1) 귀단 : 삼국유사 제 1권 ‘도화녀(桃花女)와 비형랑(鼻荊郞)’ 참조
제12장(第十二章) 금척이 당의 공격으로 부터 신라를 지키다.
[원문]
第十二章
新羅平濟之後 唐帝欲犯新羅
신라평제지후 당제욕범신라
出兵海到境海則不戰而自敗
출병해도경해칙불전이자패
此天候乖常 軍卒病而勢自弱故也
차천후괴상 군졸병이세자약고야
唐帝怪之 遺使審異物之在於新羅
당제괴지 유사심이물지재어신라
使來驗之 有異氣 常浮於羅都山川故
사래험지 유이기 상부어라도산천고
遂返師云 此非金尺所聞之說也
수반사운 차비금척소문지설야
其他羅代之許多異說
기타라대지허다이설
有聞於天符金尺者多而僧輩
유문어천부금척자다이승배
附會於自家 供於說敎之具而淆之 可惜未遑辯之
부회어자가 공어설교지구이효지 가석미황변지
[해설]
제 12장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후에 당나라 황제가 신라를 침범하고자 출병하였으나, 국경의 해역(海域)에 당도할 때마다 싸워
보지도 못하고 번번이 스스로 패하었으니, 이는 기후가 괴상하여 군졸들이 병이 들어 군사력이 스스로 약해졌기 때문
이었다.
당나라 황제가 이 일을 괴상하게 여기고 사신을 보내 신라에 이상한 물건이 있는지 살펴보게 하였다.
사신이 와서 그 일을 시험하니 이상한 기운이 항상 신라 서울의 산천에 떠 있으므로 마침내 군사를 돌렸다고 하니,
이것은 금척에 관계된 설이 아닌가.
기타 신라 때의 허다한 이설이 천부금척에 관계된 것이 많으나 승려의 무리가 자가(自家)에 억지로 끌어다 붙여 설교의
도구로 제공하고 흐리게 하였으니(뒤섞었으니), 그것을 가려낼 여유가 없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
제13장(第十三章)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28자를 징심록에서 취본하다.
[원문]
第十三章
金尺之所在 尺度之測法 今雖未知 誌在者幸也
금척지소재 척도지측법 금수미지 지재자행야
如有後人 究而通之者則尺豈無復製之道
여유후인 구이통지자칙척기무복제지도
如不得復製 知基法理則足矣
여불득복제 지기법리칙족의
故 是法之於歷代邦家
고 시법지어역대방가
可謂有功而殊於本朝太祖回軍之事則基功 著矣
가위유공이수어본조태조회군지사칙기공 저의
太祖之夢得金尺 豈基偶然者哉
태조지몽득금척 기기우연자재
然則英廟之慇懃於公家之裔
연칙영묘지은근어공가지예
有所當然而況訓民正音二十八字 取本於澄心錄者乎
유소당연이황훈민정음이십팔자 취본어징심록자호
[해설]
제 13장
금척의 소재와 척도의 측법을 지금 비록 알 수 없으나, “금척지”만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만약에 후인이 있어 연구하여 그것을 아는 자가 있게 된다면, 어찌 금척을 복제할 길이 없을 것인가.
만약 복제하지 못하더라도 그 법리를 알면 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법이 역대 우리나라에 공이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특히 본조(조선조) 태조의 회군에는 그 공이 현저하
였다.
태조가 꿈에 금척을 얻은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그러므로 영묘(英廟, 세종대왕)가 공가의 후예에게 은근히 대한 것은 당연한 바가 있으니, 하물며 훈민정음(訓民正音)
제14장(第十四章) 영해박씨 문중의 전수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원문]
第十四章
噫 眞理不易之詮
희 진리불역지전
靄靄然胚存於人世風派之中而潛然有徵
애애연배존어인세풍파지중이잠연유징
生民始原之史
생민시원지사
縷縷然密傳於世代連綿之間而寂然無聞
루루연밀전어세대연면지간이적연무문
處於大塊之載 提上公裔之一家
처어대괴지재 제상공예지일가
眞是千古世外之族而世世多出晦跡之人 固非偶然也
진시천고세외지족이세세다출회적지인 고비우연야
於斯
어사
可以見白結先生之道風家法而亦足以窺上古有道之世之一端樣子則婁氏入山不出
가이견백결선생지도풍가법이역족이규상고유도지세지일단양자칙루씨입산불출
絶命於濁世者 亦將有所以然也
절명어탁세자 역장유소이연야
淸寒 記
청한 기
[해설]
제 14장
슬프다! 바꿀 수 없는 진리의 법이 안개에 싸여 인간세상 풍파 중에 배태되어 있으면서 숨어버린 듯 징조가 있고,
백성이 태어난 시원의 역사가, 누누이 세대가 잇달아 끊이지 않는 사이에 비밀스럽게 전해져서 쓸쓸하게도 들을 수
없으니,
허구한 세월 속에서 제상공 후예 일가는 진실로 천고 세외(世外)1)의 족(族)이며, 세세로 숨어 흔적을 감춘(晦迹)2)
사람을 많이 낸 것은 참으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것으로 가히 백결 선생의 도풍가법(道風家法)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상고(上古)에 있었던 도가 이어 내려온 세상
일부분의 모습(樣子)을 엿보기에 족하니, 읍루씨3)가 산에 들어 나오지 않으며 혼탁한 세상에 이름을 끊어버린 것이
역시 까닭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청한(淸寒)3) 씀
[세부해설]
1) 속외 : 속세의 밖
2) 회적 : 피하거나 도망쳐서 흔적을 감춤
3) 읍루 : 3세 단군을 말한다. 한단고기에는 가륵 단군으로 나온다.
4) 청한 : 김시습의 호. 청한자(淸寒子)라고도 함.
* 부도지 제26장 (第二十六章)
壬儉氏 聞有戶氏之行 壯其途
임검씨 문유호씨지행 장기도
使有戶氏之族 就於敎部而居之
사유호씨지족 취어교부이거지
是時 壬儉氏 甚憂夏土之形勢
시시 임검씨 심우하토지형세
遂入山專修解惑復本之道
수입산전수해혹복본지도
壬儉氏之子夫婁氏繼受天符三印
임검씨지자부루씨계수천부삼인
證天地之爲一理 人生之爲一族
증천지지위일리 인생지위일족
大興父祖之道 普行天雄之法
대흥부조지도 보행천웅지법
專念人世證理之事
전념인세증리지사
尙緊密雲海之族
상긴밀운해지족
欲試夏土之歸一
욕시하토지귀일
異道漸盛未得遂意
이도점성미득수의
夫婁氏傳符於子浥婁氏 入山
부루씨전부어자읍루씨 입산
浥婁氏生而有大悲之願
읍루씨생이유대비지원
繼受天符三印
계수천부삼인
哀憫夏族之陷於塗炭之中
애민하족지함어도탄지중
悲痛眞理墜於詐端之城
비통진리추어사단지성
遂封鎖天符於明地之壇
수봉쇄천부어명지지단
乃入山專修複本之大願
내입산전수복본지대원
百年不出
백년불출
遺衆 大哭
유중 대곡
壬儉氏 生於後天末世之初
임검씨 생어후천말세지초
豫察四海之將來
예찰사해지장래
示範符都之建設
시범부도지건설
千年之間 其功業 大矣至矣
천년지간 기공업 대의지의
至是符傳 廢絶
지시부전 폐절
麻姑分居以來 黃·因·桓·雄·儉·夫·婁七世傳七千年
마고분거이래 황·인·환·웅·검·부·루칠세전칠천년
임검씨가 유호씨의 행적(行狀)을 듣고 그 길(途)을 장하게 여겨
유호씨의 족(族)에게 교부(敎部)에 취업하게 하여 살도록 하였다.
교부(敎部)를 취하여 살도록 하였다.
이때에 임검씨가 하토(夏土)의 형세를 심히 걱정을 하고 마침내 입산(入山)하여 해혹복본(解惑復本)의 도를 전수
(專修)하였다.
임검씨의 아들 부루씨(夫婁氏)1)가 천부삼인을 이어받아 천지가 하나의 이치가 되는 것을 증명하여 인생이 일족
(一族)이 되어 크게 부조(父祖)의 도를 일으키고 사람이 태어나면 일족이 되게하여 널리 천웅(天雄)의 법을 행하여
인세 증리(證理)의 일에 전념하였다.
일찍이 운해족(雲海族)과 긴밀하게 연락하여 하토(夏土)가 하나로 돌아오기를 시도하더니, 이도(異道)가 점차 성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루씨(夫婁氏)가 천부를 아들 읍루씨(浥婁氏)에게 전하고 입산하였다.
읍루씨가 날 때부터 대비(大悲)의 원(願)이 있어 천부삼인을 이어받고, 하족(夏族)이 도탄에 빠진 것을 불쌍하게 생각
하고, 진리가 거짓(詐端)의 지역에 떨어진 것을 슬프게 생각하여
마침내 명지(明地)의 단에 천부를 봉쇄하고 곧 입산하여 복본의 대원(大願)을 전수(專修)하며 백년 동안 나오지 아니
하니 유중(遺衆)이 통곡하였다.
임검씨가 후천(後天)의 말세의 초에 태어나 사해의 장래를 미리 살피고 부도 건설을 시범하니, 천년 사이에 그 공업이
크게 이루어졌다.
이에 이르러 천부의 전해짐이 끊어져 마고 분거(分居) 이래로,
황궁(黃穹), 유인(有因), 환인(桓因), 환웅(桓雄), 임검(壬儉), 부루(夫婁), 읍루(浥婁)의 7세에 천부가 전해진 것이 7천
년이었다.
* 해설
1) 부루씨 : 2세 단군 (B.C 2240~2183)
부루 태자가 도산(塗山)에서 하우(夏禹)에게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을 전수해준 때가 B.C 2267년이다.
맏아들 가륵(嘉勒)을 태자로 삼았다
2) 운해족 : 청궁씨가 출궁한 지역, 즉, 파미르고원(티벳)의 동쪽. 중원 지역을 말한다.
3) 읍루씨(浥婁氏) : 부루씨의 태자, 3세 가륵 단군이시다.
신지인 고글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培達留記)를 편수케 하였다.
4) 7천년 : 우리역사는 11,151년이다
- 7000년 : 마고 - 궁희 - 황궁 - 수인 - 한인 - 한웅 - 단군 - 부루 - 읍루
- 2137년 : 4세 단군 ~ 기원전
- 2011년 : 기원후 ~ 현재
- 7000+2137+2014 = 11,151년
후기(後記)_부도(符都) 복건(復建)이 실패하다.
[원문]
후기(後記)
此 淸寒金時習先生澄心錄追記也
차 청한김시습선생징심록추기야
先生 自幼至長 殆奇於吾家
선생 자유지장 태기어오가
更結歲寒之盟而同歸雲林
갱결세한지맹이동귀운림
此當時事勢之末由故也
차당시사세지말유고야
一朝立志於符都復建之大業
일조입지어부도복건지대업
東奔西走南征北來 尋人逞謨而傾注一生之精力
동분서주남정북래 심인령모이경주일생지정력
及基李澄玉李施愛兩次之失敗 遂晦跡乃己
급기이징옥이시애양차지실패 수회적내기
此爲躬行無餘之道也
차위궁행무여지도야
以故 先生 熟知吾家先世之事
이고 선생 숙지오가선세지사
記狀修牒 殆成於先生之手
기상수첩 태성어선생지수
無異於吾家同族
무이어오가동족
今次本文 億記於騷亂離散之中
금차본문 억기어소란이산지중
或不無贅附指沒之嘆
혹불무췌부지몰지탄
先生之本文己成於離散之中則時色 偶合 事勢相同
선생지본문기성어리산지중칙시색 우합 사세상동
然則先生在天之靈 必憫察而怒之
연칙선생재천지령 필민찰이로지
且將冥助天符之理之闡明於世矣
차장명조천부지리지천명어세의
금당(琴堂) 삼가 씀
[해설]
후기
이는 청한(淸寒) 김시습 선생의 “징심록 추기”이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거의 우리집에서 지내셨다.
다시 세한(歲寒)의 맹세를 맺고 함께 운림(雲林)1)으로 들어갔다. 이는 당시의 사세(事勢)에 연유한 것이었다.
어느날 부도를 복건할 대업에 뜻을 세우고 동분서주 남정북래하며 사람을 찾아 왕성하게 도모하고 일생의 정력을
기울여 쏟더니, 이징옥(李澄玉)2)과 이시애(李施愛)3)의 두 차례에 걸친 실패에 당하고는 마침내 자취를 감추어버
렸다.
이는 무여의 도를 몸소 실천하기 위한 것이였다.
그러므로 선생이 우리 가문 선대의 일을 익히 알아, 행장(行狀)4)을 쓰거나 족보를 만드는 일이 거의 선생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선생은 우리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에 본문을 어수선하고 시끄러우며 이산(離散)중에 기억하여 쓰니, 혹 군더더기를 붙이고 뼈를 없애는 한탄이
없을 수 없겠으나, 선생의 본문이 이산(離散)중에 완성되었으니 시대의 추세(時色)가 우연히 들어맞고(偶合) 사세가
일치하였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시는 선생의 영혼이 반드시 불쌍하게 여겨 이를 용서하고, 장차 저승에서 이 세상에 천부의 이치를
드러내어 밝히는 것을 도울 것이다
금당(琴堂)5) 삼가 씀
[세부해설]
1) 운림 : 문천 운림산
2) 이징옥 : ?~1453. 조선 세종때의 무관.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했으나 정종(鄭種)에게 붙잡혀 살해되었다.
3) 이시애 : ?~1467. 조선 세조때 무관. 대대로 길주에서 살아온 호족 출신이며 이주, 이운로 등에게 살해되었다.
4) 행장 : 사람이 죽은 뒤 그 평생의 지낸 일을 기록한 글
5) 금당 : 박금 씨의 호.
* 김시습(金時習) '아생(我生)'
百歲標余壙
백세표여광
當書夢死老
당서몽사노
庶畿得我心
서기득아심
千載知懷抱
천재지회포
백년 뒤 나의 무덤에 비석을 세울때 꿈속에 살다 죽은 늙은이라 써 준다면 거의 내 마음을 알았다 할 것이니 천년
뒤에 이 내 회포 알아나 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