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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적 신학’의 제물이 된 프랑스 불교 / 박치완
프랑스불교의 현황과 전망
"(가톨릭) 교회의 맏딸인 프랑스는 불교의 나라가 될 수 없다."
— 에릭 롬믈뤼에르
"프랑스인에게 ‘불교’라는 단어는 무엇보다도 티베트불교를 연상시킨다."
— 베르나르 포르
1. 부말(浮沫)에 불과한 프랑스에서의 불교 붐
두 제사(題詞)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불교는 프랑스인들에게 여전히 이국(異國)의 문화에 해당하며, 기독교와 조화로울 수 없는 종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는 예나 지금이나 ‘신비적인(mystique)’ ‘불가사의한(ésotérique)’ ‘비논리적인(illogique)’이라는 수식어가 거의 자동으로 따라붙는 게 현실이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불교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불교가 이와 같은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는 것은 ‘프랑스인들이 불교를 진실로 받아들일 준비가 아직 덜 되어 있다’ 또는 ‘여전히 기독교적 프리즘으로 불교를 대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불교는 프랑스인들에게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래서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선불교에 대해 이와 같은 평가를 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프랑스인들의 불교에 대한 오랜 편견과 폄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본론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불교가 갖는 고차의 지식을 전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가까운 장래에 불교는 철저히 세속화된 불교로 전락하거나 기독교화의 제물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미리 언급해 둔다.
물리학, 천문학, 철학, 종교 분야에서까지 다중우주론에 대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오늘날, 프랑스인들 나아가 서구-유럽인들이 이렇게 불교를 신비주의 또는 비교주의(祕敎主義)와 동일시한다는 것은 그동안 기독교와 불교, 서양과 동양은, 극단적으로 표현해, 문화적으로 전혀 교류하지 않았다는 단적인 반증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서구-유럽인들이 근 170여 년 가까이 불교를 신비(비교)주의의 틀 내에서 논의하고 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인데 최근 유대-기독교 신비주의와 불교를 동일시하는 논문들이 비교종교학 분야에서 출간되고 있다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다.
신비주의를 매개로 한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연구는 기본적으로 아브라함계 종교(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처럼 유일-절대신(Dieu absolu)을 전제하고 불교에 접근해 일종의 ‘불교적 신학(théologie bouddhique)’을 제안해보겠노라는 이들의 몸에 밴 문화우월주의적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기독교적 렌즈로 불교를 재구성해 ‘불교적 신학’을 만들어보겠다? 이는 한편으로는 불교가 아브라함계 종교에서처럼 ‘전지전능한’ 창조신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에 대한 ‘우회적 비판’ 또는 ‘종교적 개입’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불교에 대한 일종의 ‘지적인 공격’의 개시라고 볼 수도 있다. 불교에 대한 유대-기독교인들의 곡해는 19세기 말 상해국제중국연구소(International Institute of China)에서 사역했던 G. 리드의 다음 언급에서 그 단적인 예를 찾을 수 있다.
불교는 우리가 호두 알맹이를 얻기 위해서 호두를 깨야 하는 것과 마찬가질 불교 원리의 본질을 (계시의) 빛으로 밝힐 필요가 있다. (……) 부처에게 돌아가는 것(Back to Buddha),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것(Back to Christ)처럼 설명될 필요가 있다.
리드가 단언하고 있듯, 불교를 연구할수록 오히려 기독교 신앙이 깊어지는 것이 자신들에게는 정상적이라는 뜻이다. 아래 본론에서 재론하겠지만, 서구-유럽인들에게 불교는 이렇듯 거의 반사적으로 ‘기독교의 재중심화’로 귀착된다. 동양과 서양,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는 ‘가까워질수록 멀어진다’는 역설을 이미 내장(內藏)하고 있는, 참으로 이상야릇한 관계라고나 할까. 앞서 언급한 ‘불교적 신학’이란 신조어는 이런 점에서 보면 하늘에서 우연히 주어진 것도 아니고 더더욱 연구자의 기발한 창의성에서 발현된 것이라 할 수도 없다. 서구-유럽인들은 태생적으로 불교를 거부하는 ‘문화적 DNA’를 가지고 있다.
서구-유럽인들을 위해 한국 불교계가 선(禪)이나 명상 수행만을 중시하기보다 교학(敎學)을 대중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구해서 서구-유럽인들과도 상호종교적 · 비교종교학적 교류를 꾀해야만 할 때라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이성과 신비(직관), 교학불교와 선불교가 서로 목표하는 바가 다르지 않다면, 서구-유럽인들이 불교를 서구-유럽식으로 임의 번역해 ‘서구 불교(Western Buddhism)’ ‘유럽 불교(European Buddhism)’ ‘유로불교(Euro-Buddhism)’ ‘프랑스불교(French Buddhism)’라는 명칭을 사용하는가 하면, “불교는 이미 아시아에서 서구-유럽화되었다”는 망담(妄談)을 접하고서도 그저 남의 일처럼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불교가 이렇게 서구-유럽화되고 변형 · 변질되면서, 앞서 리드의 언급에서도 확인되듯, ‘불교의 기독교화’라는 공박(攻駁)이 시작된 지 오래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교의 기독교화 경향은 더 강해졌으면 강해졌지 결코 약세화되거나 불교와 기독교 간의 상호 종교적 이해와 대화를 통해 새로운 국면으로 도약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신비(비교)주의, 무신론, 우상숭배(또는 우상파괴)와 같은 불교에 대한 서구-유럽인들의 편견은, 본론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지만, 이미 ‘역사화’ 되어 마치 ‘사실’이나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프랑스에서는 불교혐오주의(bouddhophobie)까지 고개를 들고 있다. 그뿐인가. 심지어는 불교학자까지 나서서 ‘불교 부재론’을 부르대는 실정이다.
‘프랑스에 불교 붐이 일고 있다’고 알고 있는 한국의 독자들로서는 필자의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다소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이는 필자가 ‘객관적 정보’를 통해 얻은 결론이다. 서구-유럽인들이 자신들의 문화요 철학이자 종교인 기독교의 유일-절대신론을 포기하고 불교로 전격적인 전향을 할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 중심의 불교는 교리적 차원에서 절대자에게 기초한 기독교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서구-유럽 학자들의 주장은, 본론에서 세 명의 불교(?)학자를 통해 살펴보겠지만, 편재(遍在)한다. ‘불교’라는 타이틀이 붙은 글의 절반 이상이 “(신의) 말씀과 성경 그리고 그리스도”로 결론을 맺고 있다면, 필자의 이러한 주장을 믿겠는가?
이 글은 필자가 ‘프랑스(France)’ ‘불교(Bouddhisme)’ ‘현황(Ten-dances)’ ‘전망 (Prospectif)’이라는 네 단어를 구글링해서 검색된 논문, 기사를 참고해 작성된 것임을 미리 밝힌다. 일찍이 필자가 프랑스에서의 불교는 ‘쇠고기 매운탕’이라 평가한 적이 있는데, 이번 원고를 작성하면서 프랑스에서의 불교 수용은 ‘주인이 없는 집에서의 객들의 잔치’와 유사하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B. 포르의 책 제목에 빗대건대, 프랑스에는 ‘수천의 불교상(佛敎像)’이 뿌리도 계통도 없이 그저 번잡스레 공존하고 있는 상태라고나 할까.
한국 불교계에서도 최소한 프랑스에서의 불교에 대한 수용 상황을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며 용심(勇心)을 내 ‘불교 붐’은 부말(浮沫)에 불과하니 이제 교학적으로 불교를 어떻게 이들에게 전할 것인지를 고민할 때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 이 글이 전개된다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2. 서구-유럽인들에게 대체 불교는 무엇이며, ‘프랑스불교’는 또 뭔가?
절대왕정의 상징이자 ‘태양왕’으로까지 불렸던 루이 14세의 통치 시기(17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는 해외 사절들의 보고를 통해 부처의 존재를 처음 인식하게 되었으며, ‘불교(bouddhisme)’라는 단어(개념)가 등장한 것은 1820년이라고 공식화되어 있다. 19세기 초 불교라는 이국적인 종교에 대한 인식을 갖은 후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불교는 “물질주의적, 무신론적, 염세주의적, 이기주의적, 허무주의적(materialistic, atheistic, pessimistic, egoistic, and nihili-stic)”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성계에 유포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서구-유럽인들은 비로소 불교에서 합리적, 실용적, 도덕적, 인본주의적인 측면을 새롭게 발견하며, 불교야말로 산업화된 서구-유럽의 사회적 문제들을 치료해줄 수 있는 ‘대안 종교’라는 평가를 하기에 이른다. 서구-유럽인들이 소승 전통의 계율이나 교학 중심의 불교보다 대승불교에 관심을 보인 것도 이때이며, 이는 다분히 그들의 필요에 의해 불교를 문화적으로 변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20세기 중후반에 접어들자 불교는 급기야 “세계적 불교(globalized Buddhism, ecumenical Budd-hism)”로 그 가치가 최상급화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교는 이렇게 서구-유럽이라는 새로운 문화권 내에 이식되면서 근대의 시기에 아시아권에서 국가별로 이념과 색깔을 달리해 축적된 고유한 전통은 철저히 간과된 채, 약 반세기 어간에 서구-유럽식의 불교로 각색되기에 이른다. 한마디로, 불교는 서구-유럽에서 ‘구미식 변환(Euro-American converts)’의 과정을 거친 것이다. ‘프랑스불교(bouddhisme français)’ ‘프랑스 선(Zen français)’도 이런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를 우리는 ‘불교의 현지화(locali-zation of Buddhism)’라며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앞서도 언급했듯, 불교의 본질이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괴손(壞損)된 상태를 ‘서구-유럽에서의 불교의 현대적 발전’이라고 볼 수는 없지 않나 싶다.
이들은 오직 ‘서구-유럽식 불교’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론화하려는 데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들이 “세계적 · 상호 탈교파적 불교(ecumenical, interdenominal Buddhism)”를 창안했다는 프라이드를 한껏 드러내기도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핏기없는” 아시아권의 불교(bouddhisme sino-japonais)에 “통합성”과 “일반성”을 부여한 것도 자신들이며, 불교가 역동성을 띠려면 대서양(특히 프랑스)에서와 같은 “각색이나 번역(une adaptation ou une traduction)”이 불가피하다는 억지스러운 주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서구-유럽의 불교학자들이 ‘불교의 근대화’ 또는 ‘불교의 현대화’라는 표현을 구사할 때는 십중팔구 불교가 서구-유럽에서 새로운 면모로 진화해 하나의 통(通)불교적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망상의 정당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국의 땅에서 임의로 ‘재구성된 불교’는 기독교적 프리즘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앞서 언급한 ‘불교적 신학’이란 개념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고, 심지어는 “개신교적 불교(Protestant Buddhism)”라는 표현도 주저 없이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불교는 서구-유럽에서 감초처럼 소환되어 기상천외하게 ‘요리’되고 있다. 프랑스의 불교 현황을 통계적으로 파악하는 것보다 불교가 교학적으로 어떤 위기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자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프랑스에 불교가 프랑스어로 쓰인 한 권의 저서로 소개된 것은 1844년 E. 뵈르누프의 《인도불교의 역사 입문》을 통해서다. 19세기에 서구-유럽의 지성계가 힌두교나 불교 등 동양의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물론 A. 쇼펜하우어의 〈동양의 르네상스(Oriental Renaissance)〉(1818)를 필두로 해서 E. 아널드 경의 《아시아의 등불(The Light of Asia)》(1879)이나 C. H. S. 올코트의 《불교교리선(Buddhist Catechism)》(1881) 등도 일익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불교는 어디까지나 아카데미나 지성계의 범주 안에 머물렀을 뿐 일반 대중이 불교에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유럽에서 불교가 대중과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929년에 ‘불교의 벗들(Les amis des bouddhisme)’이라는 단체가 C. 라운즈베리에 의해 조직되면서 불교가 대중에게 한발 다가서는 디딤돌이 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50년대 초반에 일본불교, 즉 신도(神道, Shin Buddhism)가 영국과 독일에 유입되고, 특히 티베트불교는 1952년 베를린에 아리야 마이트레야 만달라(Arya Maitreya Mandala) 공동체를 형성해 서구-유럽지부(Western Branch)로 삼는다. 그리고 K. G. 융이 서문을 붙인 D. T. 스즈키의 《선불교 입문》이 1959년에 출간되어 서구-유럽의 지성계에 불교가 널리 전파되지만, 역설적으로 불교가 ‘신비(비교)주의’로 곡해되는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한다. 스즈키를 통해 선불교를 접한 서구-유럽인들, 특히 프랑스인들이 불교를 신비적인 · 불가사의한 · 비논리적인 것이라고 여기게 된 단초를 융이 제공한 셈이다.
《선불교 입문》은 서구-유럽인들에게 마침내 널리 ‘독서할 만한 수준(readily available)’의 불교 저술이 출간되었다는 점에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구-유럽에서 다양한 초기불교 경전의 번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도 20세기 중후반에 이르러서다. 그리고 티베트, 일본 등에서 서구-유럽인들에게 불교를 직접 강의하고 명상 수련을 지도할 수 있는 스님들이 프랑스, 독일, 영국 등지로 건너간 것도 역시 바로 이 시기이며,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불교가 ‘명상’ ‘요가’ 등으로 ‘생활 불교화’되면서 서구-유럽에서 불교가 본격적으로 대중화의 길로 접어든다. “논리적으로 기도하지 않은 사람을 기독교인이라 부를 수 없듯, 명상하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를 불교도라 부를 권리가 없다”(A. David-Néel)고 할 정도로, 1960년대 이후 명상과 요가에 대한 인기는 서구-유럽 전역에서 하늘을 찌르게 된다.
1970년대에 티베트불교의 열풍이 ‘선 열풍(Zen Boom)’으로 일반화된 것도 그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명상, 요가를 참선과 동일시하는 것을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템플스테이’를 며칠 하고 나면 득도(得道)를 하는 것인가? 그렇게 득도한 서구-유럽인들이 ‘선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것인가? ‘불교적 신학’이 그렇고 ‘개신교적 불교’가 그렇듯, 참선도 이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일까?
남악회양(南岳懷讓) 선사는 좌선(참선)에 몰두하면 성불할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마조도일(馬祖道一)에게 “기와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 수 있다(磨塼作鏡)고 생각하는가?”라며 단지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다고 했다.
“그대가 혹 좌불(坐佛)을 흉내 내려 한다면, 그것은 곧 부처를 죽이는 행위와 다름없고, 하찮은 앉음새에만 집착한다면 정작 깊은 이치에 도달할 수가 없는 법이라네.”
그럴진대 템플스테이나 단기 출가 정도의 경험으로 참선을 논하는 서구-유럽인들이 많다. 물론 서구-유럽에서 불교를 수용한 역사가 아직은 짧고, 그러다 보니 참선과 명상, 요가를 혼동할 수는 있다고 치자. 그럼에도 불교를 마치 하나의 문화적 이벤트처럼 여기거나 명상, 요가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서 이를 ‘선 열풍’과 동일시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프랑스의 많은 지방정부에서는 최근 불교를 상업화의 도구로 삼고 있다. 불교의 상업화에 견주어 감히 말하건대, 프랑스에서 불교는 대웅전으로 들어갈 생각일랑 아예 없고 일주문 앞에서 서성이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불교가 프랑스를 포함해 서구-유럽에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는 것은 물론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이처럼 불교가 서구-유럽인들로부터 ‘기독교의 대안 종교’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것과 불교의 본질을 곡해하여 세속화, 상업화, 도구화하는 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프랑스인들이 ‘불교’를 평화주의자이며 인권의 상징인 달라이 라마와 일치시키는 것도 문제다. 제사에서도 B. 포르를 인용해 명시했듯, 프랑스인들은 종교로서 불교나 티베트불교 자체보다 오직 티베트라는 망명정부와 동양의 이국적인 문화에 더 관심이 많다.
티베트불교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관심이 남다른 것은 달라이 라마의 빈번한 프랑스 방문과 티베트 사원이 프랑스에 많은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의 ‘불교 붐’을 그저 관망할 뿐인 프랑스인들에게 티베트불교는 단지 민족지학적 종교(bouddhisme ethnographique)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유일신론에 젖어 있는 서구-유럽인들이 불교를 밀교적인 탄트리즘과 혼동하거나 그들의 표현으로 고등종교인 기독교, 즉 유일신론과 비교해 2등급, 3등급의 종교로 폄훼하기 시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서처럼 이 세계를 창조한 유일신, 즉 인격신(Dieu personnel)이 존재하지 않는 불교가 서구-유럽인들에게는 종교가 아닌 생활방식이나 생활철학으로 비친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른다.
《프랑스에서의 불교(Bouddhisme en France)》(1999), 《불교와 서구-유럽의 만남(La Rencontre du bouddhisme et de l’occident)》(2001), 《소크라테스, 예수, 붓다: 삶의 세 스승들(Socrate, Jésus, Bouddha: Trois maîtres de vie)》(2010) 등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했던 F. 르느와르가 “왜 불교가 프랑스인들을 유혹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한 인터뷰 질문에서 그 이유는 “절대적 신도 없고 교리도 없기 때문(sans Dieu ni doctrine)이다”라고 대답한 것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는 프랑스에서의 선 열풍에 대해 덩달아 춤을 출 일은 아닌 듯하다. 실제 르느와르도 염려하듯, 티베트불교가 갖는 “연민, 자유, 생명 존중, 비폭력, 관용 등의 가치에 대해 동조하는 프랑스인들은 많지만 정작 불교 수행자는 매우 적다.” 그리고 “명상 수행을 통해 개인의 정신적 안정에만 집중할 뿐 타인에 대한 진정한 개방에서 점점 더 멀어져 대승불교의 궁극적인 메시지인 사랑과 연민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것” 등도 프랑스에서의 불교 붐이 다분히 ‘겉불교’라고 볼 수밖에 없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며칠 또는 몇 개월씩 수행센터에 동참해 개인의 심리적 안정을 얻은 것을 불교 자체로 이해하다 보니 “비형식의 형식”이 불교의 요체라는, 그 어떤 형식에 의해서도 제한받지 않은 것이 불교라는, 문자 그대로 ‘제멋대로 불교’를 불교의 본질인 양 호도하게 되는 것 아니겠는가. 심지어는 이 ‘정체불명의 불교(westernized budd-hism)’를 서구-유럽의 전법사, 불교 연구자들까지 앞장서서 홍보하고 있으니 기독교적 렌즈로 불교를 공박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1) O. 리오델: 유한세계의 진리일 뿐인 불교
루뱅대학교 신학부 교수인 O. 리오델은 〈절대적인 것의 형용불가능성과 유한세계의 진리〉라는 논문에서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것(l’indicible)은 언어에 의해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l’incon-ditionné)이며, 기본적으로 인간의 경험 세계를 초월한 것을 의미하는데, 그동안 서구-유럽의 부정신학의 전통에서 이와 같은 논법을 주로 구사해왔다고 전제했다. 그런 후, 자신은 언어에 의해 조건 지워지지 않은 것이 언어에 의해 조건 지워진 것들에 활기를 불어넣는다면, 이것이 어원적으로 ‘절대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는 새로운 전제로 진리에 대해 (선불교에서처럼) 절대적 형용불가능성(l’absolu indicible)을 선언하는 대신 유한한 실재를 확신하는 가능한 진리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바로 불교철학이 지향해야 할 바라고 조언한다.
리오델은 이 논문에서 불교철학의 아킬레스건을 ‘형용할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그 나름의 해법을 칸트, 헤겔, 비트겐슈타인, 타르스키 등을 동원해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이제까지의 논의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듯, 무한-절대 세계인 기독교가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절대적인 것의 형용불가능성에 대한 확신은 사실 ‘절대적인 것’의 깨달음에 대한 결론이 아니라 유한세계(le monde fini)의 진리에 대한 부정의 결론이다. 이 점에 있어서 불교는 완벽하게 그 자신(즉 유한세계)과 부합한다.
결국 리오델은 “신이 인간을 창조하고, 말씀이 육신을 창조해 그리스도가 전적으로 인간적이며 동시에 전적으로 신적인” 기독교에서 신성성이 기독교 신자들 사이에서 유지되고 전달되는 것과 달리 불교는 단지 유한세계에 머무는 종교라는 것을 예증하기 위해 장황하게 불교를 끌어들인 것이다. 헤겔의 후예다운 발상이다. 이 자리에서 리오델을 굳이 소개한 것은 프랑스에서의 불교에 대한 전망은 외형적 규모는 점점 커지고 있고 관용, 평화와 같은 불교적 가치 또한 프랑스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적으로도 널리 인정받고 있어 밝은 편이라 해도 교학적(敎學的) 차원에서 볼 때 여전히 “‘신의 역사’로서 세계”라는 헤겔의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을 한국의 불교계가 인식했으면 해서다.
분명 ‘불교는 서구-유럽에서 부수 현상’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하나의 종교로 성장했다. 하지만 L. 오바디아도 밝히듯, “불교가 서구-유럽의 종교(기독교나 유대교, 이슬람교 등)와 같은 종교로 받아들여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따라서 “불교가 보편주의적이고 다원적인 영성을 통해 세계 종교의 수렴 운동에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성급한 착각일랑 거두라는 것이다. 오바디아는 오히려 불교의 외형적 성장에 대해 과대평가하는 불교 편애주의자들을 겨냥해 이와 같은 “예측”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i) 불교의 정확한 수용 궤적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ii) 서구-유럽에서의 불교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매개변수가 더 탐구되어야 하며, iii) 서구-유럽에서의 불교에 대한 완전한 지도 제작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변화에 가장 둔감한 것이 철학이고 종교인가 싶다. 과거처럼 상호적 대화가 어려운 시대도 아니고 상대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것도 아닌데, 동양과 서양, 불교와 기독교 두 세계 사이에는 이처럼 철벽처럼 가로놓인 이국성(l’exotique)이 여전하다. 대체 언제쯤이면 이 심리적 거리가 좁혀질 수 있을까?
2) D. 지라: 모든 것을 신 없이(sans Dieu) 설명하는 불교에서 기독교적 신의 사랑으로
도쿄 소피아대학에서 일본어와 동양학을 전공하고 파리7대학에서 극동연구(불교 전공)로 박사학위를 받은 D. 지라는 《불교 이해》 《내 딸을 위한 불교》 《연꽃과 십자가: 선택의 이유》 《예수, 붓다: 어떤 만남이 가능할까?》 등의 저서를 통해 기독교와 불교 간의 영적 대화를 비교종교학적으로 시도하고 있는 불교학자이다. 불교학자로서 지라는 최근 프랑스에서 많은 대중 강연 등을 하며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 역시도 기독교 신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그는 〈환생, 윤회, 육신의 부활〉에서 기독교에서의 그리스도의 부활과 불교(특히 티베트불교)에서의 환생을 비교 연구하면서 환생과 연기의 관계가 모순됨을 반론으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불교도는 삶과 죽음의 순환, 즉 윤회는 무지의 결과이며 각자가 이 무지의 감옥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가 판단할 때 불교도는 “이 윤회의 감옥 안에서 탈출하지 못한 채 빙빙 돌고 있다.” 그리고 지라는 “이것이 바로 환생으로 연기를 번역하는 이유”라고 비판한다.
요인즉 환생으로 연기를 번역하는 것은 “서구-유럽적 상상계(l’imaginaire occidental)”의 차원에서 볼 때 불교에 대해 모든 긍정적인 평가를 하려고 대심(大心)을 낼지라도 그저 혼동만 가중될 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지라는 사성제(四聖諦)에서 멸제(滅諦)를 통해 연기로부터 해방되어야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역설하면서 나름 불교학자다운 해법을 제시하고는 있다. 하지만 지라가 그의 논문에서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환생과 연기라는 이 두 개념을 메타적으로 결합돼야 한다는 데 있고,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는 ‘신의 사랑’이 그 해법이라고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신의 사랑만이 인간을 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그의 생명을 나누도록 초대받았다. 인간의 완성의 진정한 원인은 사랑이다. 그리고 이 생명 속에서 사랑을 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한순간에 인생 전체가 뒤흔들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순간(즉 죽음의 순간)에 인간을 충만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 하나님의 ‘전능한’ 사랑이다. 죽음은 진정한 단절이지만 죽음이 마지막 단어는 아니다. 죽음은 결정적으로 사랑으로 정복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영접받는 자의 삶은 끝이 있을 수 없다.
지라의 위 주장에서 이 글의 독자는 목사의 설교를 듣는 느낌을 받을 확률이 높다. ‘비교종교학자’ ‘불교학자’라는 그의 전공에 대해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렇게 ‘신의 사랑’으로 불교의 연기, 업, 환생 등 주요 불교 교리를 치환시키면서 급기야는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듯, 기독교인은 그리스도 육신의 부활에 대한 믿음에 확신을 가지라”고 〈환생, 윤회, 육신의 부활〉을 끝맺는다. 불교에 유일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라와 같은 서구-유럽의 불교학자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래에서 보듯, 지라가 불교를 연구한 것은 불교 해체가 목표인가 싶을 정도다.
불도(佛道, la voie bouddhique)는 신에 대해 말하는 영적인 길이 아니다. 만약 불도가 신과의 일치라는 의미의 종교가 아니라면, 불교는 비폭력이나 환경에 대한 존중에 기반을 둔 삶의 철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더욱이 (마음 챙김과 같은) 치유법으로 귀결될 수 없다. 이렇게 불교를 세속화하는 것은 불교의 엄격한 계율, 다양한 불교적 예법, 명상적 사고의 풍부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라가 자신을 프랑스의 대중들 앞에서 ‘불교학자’라고 소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실제 그는 파리가톨릭 연구원(Institut Catholique de Paris)에서 불교 전담 교수로 봉직하면서 불교를 강의하고 있다. 불교학자로서 그는 “프랑스의 불교도들은 오직 자신의 지친 육신의 평안, 물질적 유복만을 불교에서 찾을 뿐”이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우리 모두에게 불성이 있다”는 부처의 본래 가르침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이 프랑스불교의 현주소라고 진단하기도 하며, “계율(戒律)의 중요성이 서구-유럽에서 철저히 상대화되어 있다”는 지적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눈속임’이라는 것을 우리는 그의 한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라는 한 콘퍼런스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연꽃과 십자가》는 당신의 불교에 대한 실험이자 시도가 아니냐?” 그러자 그는 일순간의 고민도 없이 다음과 같이 즉답한다. “이 책의 제목은 약간의 속임수(trompeur)가 있다. 나는 이 책에서 내가 왜 기독교인인지 설명했다. 실제 나는 불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많은 열정을 가지고 임한다. (……) 많은 프랑스인들이 나를 불교도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나를 난처하게 한다. 나는 두 길 사이에서 선택에 직면한 적이 없다.”
지라를 포함해 프랑스의 불교 연구자들은 대부분 문화적 · 태생적으로 가톨릭교도다. 그래서 불교는 이들에게 단지 연구 대상으로 그친다. 아래에서 살펴보게 될 É.롬믈뤼에르를 비롯해 포르와 같이 한때 삭발 수행을 했던 학자들에게도 불교는 수행의 대상이 아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불교는 전지전능한 신을 가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종교라는 점이다. 돌려 말하면, 불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종교일 수 없다는 것이다. 지라처럼 ‘불교도’라는 호칭 자체를 불편하게 여기는 불교학자(?)에게서 종교 간 대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이제 너무도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지라가 자신보다 불교의 문제점을 탁월하게 밝힌 학자로 추천한,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저자 롬믈뤼에르는 또 어떤지 보자.
3) É. 롬믈뤼에르: 서구-유럽을 대표하는 전법사의 ‘불교부재론’
롬믈뤼에르는 타이센 데시마루(Taisen Deshimaru) 스님에 의해 1979년에 프랑스의 라종드호니에 있는 소토교단(l’école Zen Sôtô, 曹洞宗 系列)에서 1981년에 비구계를 받았으며, 법명은 자운(慈雲, Nuage de Compassion)이다. 채식 전문 레스토랑을 직접 경영하며 한때 요리사로 이름을 널리 날리기도 했다. 그는 영화 제작 및 TV 시리즈물 제작에도 관여한 바 있으며, 일본 전통 승복 연구가로도 유명하다. 고전 일본어와 고전 중국어에도 정통하며, 1995년에 출간한 《공화(空花)》는 그가 프랑스어로 번역한 불교 교리 선집이다. 그밖에도 주요 저서로는 《선 입문》(1997), 《불에서 탄생한 부처》(2007),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다》(2011), 《참여불교》(2013) 등이 있다.
1999년에 서구선 협회(l’association ‘Un Zen Occidental)’를 창립해 동양(일본)의 불교 전통을 서구-유럽의 대중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일종의 시민불교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프랑스 불교인협회(l’Union bouddhiste de France) 내에 설립된 교도소위원회를 오랜 기간 이끌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불교의 전법사, 학자로서 파리에 소재한 유럽불교대학(l’Université Bouddhique Européenne à Paris, 최근에는 불교연구원(Institut d’Études Bou-ddhiques)으로 개명했음)의 부총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서구선 교우회(Western Chan Fellowship)의 감독위원이자 《세계불교연구(Journal of Global Buddhism)》의 편집위원을 지내는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조동종계의 국제적 불교 활동가이다.
이처럼 롬믈뤼에르는 누구보다 앞장서서 프랑스에서 불교 전법사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런 그가 ‘불교부재론’을 역설하는 연유가 뭘까? 그를 프랑스의 대표적 불교학자로 소개한 지라의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다》에 대한 추천사에서 우리는 그 핵심을 엿볼 수 있다.
선 전통에서 불교를 전하는 롬믈뤼에르는 독자가 (이 책을 통해) 불법과 19세기에 동양주의자들이 만들어낸 ‘불교’라는 신조어―단지 인식의 새로운 대상을 가리키는 것일 뿐 이 세계의 각 존재의 체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역동적인 가르침과는 무관한―에서 벗어나도록 돕고자 한다. 너무도 추상적이고 단순한 ‘불교’라는 이 단어는 (‘불교’라는 이 단어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풍부하며, 훨씬 요구가 많은 현실을 은폐한다.
제사에서 우리는 롬믈뤼에르의 다음 문장을 인용하며 이 글을 시작했다. “(가톨릭) 교회의 맏딸인 프랑스는 불교의 나라가 될 수 없다.” 이를 프랑스의 대표적 불승(佛僧)이라 할 롬믈뤼에르가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라나 롬믈뤼에르나 기본적으로 이들의 ‘집단적 상상계’ 속에는 불교가 들어설 공간이 없거나 불교에 자신들의 품을 온전히 내줄 생각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불에서 탄생한 부처》에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첫 페이지로 다시 끌어와 ‘불교부재론’을 주장할 리가 없지 않은가.
사실, 불교(le bouddhisme)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 하나의 단어(un mot)는 분쟁과 대립의 근원일 뿐이다.
물론 우리는 롬믈뤼에르의 이 주장을 불교를 ‘xyz와 같은 주의(~isme)’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쯤으로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불교’라는 단어는 “분쟁과 대립의 근원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선의(善意)라 할 수 없다. 그의 이와 같은 악구(惡口)는 분명 노림수가 있다. 불교에 ‘프랑스’를 붙이고(Bouddhisme français, Bouddhistes français), 선에 ‘서구-유럽’을 붙이기(Zen occidental or western) 위해서다. 그리고 이렇게 수식어가 붙어야 그와 문화적 배경이 같은 프랑스 독자들을 유혹할 수 있고, 또 이렇게 자신들의 고유 지분을 분명히 해야만 동양의 불교가 ‘서구-유럽에서 거듭난 불교’로, ‘세계적 불교’로 재탄생했다는 주장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만으로는 부족했던지 롬믈뤼에르는 ‘불교는 불법이 아니다’ ‘불법은 아무것(rien)도 아니다’라며 기어(綺語)의 죄를 짓고 있다. 이렇게 그의 무의식이 의식화된 결과 그는 ‘불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닌 이질적이고 새로운 문화’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며, 그와 동일한 문화를 공유한 프랑스 독자를 향해 불교는 “야릇한, 호감이 가는, 교묘한(plaisante, attirante, intrigante)” 종교라는, 차마 두 눈 뜨고 볼 수 없는 발언들을 연발(連發)한다. “그들(아시아인들)의 존재와 사고방식”에 “아주 조금은”은 관심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며…….
이렇게 불교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롬믈뤼에르이기에 프랑스에서 ‘미디어 불교’가 들썩거리는 것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 미디어 불교를 통해 티베트불교를 서구-유럽에 확산시키고 있는 달라이 라마의 프랑스나 유럽 방문이 그에게 달가웠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그는 (티베트)불교에 열광하는 프랑스인들을 겨냥해 “프랑스는 불교의 나라가 될 수 없다”고 일침을 놓은 것인가? 그가 승적으로 가졌던 일본의 조동종만이 불교의 적자이며, 그 밖의 불교 수행은 ‘헛것’이고, 그래서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더 나아가서는 모든 종교에서도 꽃필 수 있는”, 자아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실현하는 소토선이 최상선이라는 것인가?
3. 불교의 세속화를 불교의 세계화로 오인해도 될까?
유럽의 대표적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에서 종교의 권위는 나락으로 떨어진 지 이미 오래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프랑스인들의 불교에 관심은 점점 늘고 있다. 프랑스인들에게 ‘불교-붐’은 ‘신비적인 · 불가사의한 · 비논리적인 것’에서 ‘서구-유럽 안에 있는 동양의 발견’으로 재구성되어 더 없는 호시절을 맞이하고 있다.
하지만 앞서 리오델, 지라, 롬믈뤼에르를 통해 살펴보았듯, 불교는 여전히 기독교 문화의 우산 아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리오델과 지라의 기독교적 렌즈로 해석된, “불교적 ‘신학’”에 가까운 정체불명의 불교론, 롬믈뤼에르의 일본의 조동종 전통에 기초한 ‘불교부재론’의 주장과 영어권 및 프랑스어권에서 가장 주목받는 불교학자인 B. 포르의 유럽선(Zen européen) 논의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라는 지리 안에는 현재 서로 출발이 다르고 지향하는 곳이 다른 불교가 “분쟁과 대립”의 양상(롬믈뤼에르)을 보이며 공존하고 있다.
대립과 분쟁의 불씨는 ‘불교 붐’을 일으키는 데 공이 컸던, 현재 서구-유럽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서구-유럽의 문화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며 자신들의 전통을 고수하는 티베트불교 때문이다.
불교에 대한 많은 오해는 불교의 다양성을 살아 있는 전통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내부의 흐름과 긴장이 비교적 잘 알려진 다른 종교와 달리 불교는 달라이 라마와 같은 몇 가지 강력한 이미지들을 통해 단일체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인에게 ‘불교’라는 단어는 무엇보다도 티베트불교를 연상시킨다.
종교사가로서 포르는 정치화된 티베트불교 외에도 일본불교, 중국불교, 대만불교, 베트남불교, 한국불교와 같이 서로 다른 불교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포르의 이러한 비판도 단지 연구자들을 위한 경종일 뿐, 350여 개에 달하는 불교 수련원, 명상센터를 찾아와 “왜 부처는 큰 귀를 가지고 있나요?” “부처는 왜 늘 웃고 있나요?” “부처님의 발은 원래 평발인가요?”와 같은 질문 세례를 퍼붓는 프랑스의 대중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불교도들이 프랑스불교연합(Union bouddhiste de France, UBF)의 통계에 따르면, 10년에 약 10%씩 증가하고 있다. 이는 《렉스프레스(L’express)》의 표현대로, “시대의 변화를 알리는 명백한 표식”이라 할 수 있다. UBF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불교는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에 이어 제4의 종교로 급부상했다. 이는 프랑스인들에게 불교가 생활권과 지근(至近)에 있다는 증거이며, ‘생활-대중불교’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명상, 요가, 건강관리, 심리치료 등이 불교 수행의 처음이자 끝이다. 이렇게 불교가 세속화되면서, 틱낫한 스님이 이끄는 ‘플럼 빌리지(Plum Village)’도 그중 하나이지만, 불교가 서구-유럽인들의 삶 속으로 점점 파고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교는 세속화되면서 오히려 세계화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실제 많은 서구-유럽의 학자들이 불교를 21세기의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가져온 경제적 · 사회적 · 심리적 위기와 그로부터 야기된 계층 · 계급 간의 갈등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종교라며 호평을 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L. 라파엘은 불교에는 “개인-세계주의적 가치의 완전무결한 팔레트”를 갖추고 있다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라파엘의 관점에서 보면, 불교는 이제 더 이상 동양이나 아시아의 종교가 아니라 “최초로 서구적 종교라 명명”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불교의 신봉자들》(2016), 《그들은 불교를 어떻게 형성했는가?》(2018)의 저자이자 현재 파리의 가톨릭연구원과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서양 불교의 역사’와 ‘인류학’을 강의하고 있는 M. 답상스 같은 학자는 라파엘과 달리 세속화되고 세계화된 불교가 곧 “서구화된 불교(le bouddhisme occidentalisé)”의 참상(慘狀)이라고 일침을 가하며, “‘종교’로서 불교”가 궤도를 벗어난 원인으로 세속화를 지목한다. 이는 프랑스에 불교도가 몇 명이고 얼마나 그 수가 늘었는가와 같이 계량화 가능한 것으로 ‘프랑스불교’를 논하는 것은 아직 이르다는 말과 같다. 필자의 생각도, 프랑스에서의 불교는 아직은 걸음마 단계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인류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 중 하나”62)인 불교가 본질은 망각된 채 변형 · 변질되어 ‘세계적 불교(globalized Buddhism)’라는 명패를 갖게 된다면, 17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한국불교는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불교를 비논리적이라고 얕잡아보았던 K. G. 융을 “서양의 부처(Bouddha occidental)”라고 추켜세우는 것이 낯설지 않다면,63) 부처와 고덕(古德)한 선사들의 가르침을 “사술사부(詐術師傅, Maître trompeur)의 이야기”64)일 뿐이라는 헤겔의 비판에 대해 얼굴빛이 붉어지지 않는다면, 한국 불교계가 세계 불교계를 위해 할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융이나 헤겔 그리고 리오델이나 지라, 롬믈뤼에르 등의 불교관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한국 불교계는 서구-유럽에서의 불교 현황을 파악하는 것으로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이라 할 수 없다. ■
박치완 chwpark001@hanmail.net
한국외국어대 불어과 및 철학과 졸업. 프랑스 부르고뉴대 철학박사. 한국외국어대 글로컬창의산업연구센터 소장,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 역임. 《호모 글로칼리쿠스》 《글로컬 시대의 철학과 문화의 해방선언》 등의 저서와 〈프랑스에 불고 있는 정체불명의 불교 붐〉 〈아직도 보편을 말하는가: 서양인들에 비친 동양 그리고 불교〉 등 불교 관련 글이 있음.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