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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8월 한국유람으로 정작 비자를 손에 쥐고나니 생각과 달리 마음은 기쁨보다는 서글픔이 한가득 괴여오르는건 어쩔수 없었다. 모두가 그렇게 가고싶어하고 또 그렇게 가려고 모든걸 아끼지 않고 달려들면서 대가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설쳐대는 한국행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였으니 말이다. 처음으로 타보는 비행기여서인지 호기심도 많았고 난생처음으로 비행기에서 하늘우에 또 하늘이 있음을 실감해보기도 하였다. 푸른 창공을 날아 한국으로 가면서 느낀점이라면 가까운 거리를 직행하면 단숨에 가련만 에돌아가야만 하는 현실에 안타까움이 절로 갈마드는건 어쩔수가 없었으며 멀지 않아 한민족통일과 화합의 대업이 꼭 현실로 다가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해보기도 하였다.
두시간넘어 비행하여 인천공항에 착륙하면서 내려다본 정경에 나는 그만 입을 벌린채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실로 국제공항으로서는 손색이 없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그렇듯 어마한 국제공항을 건설한 한국국민들의 한강기적정신을 마음속으로 되새겨보지 않을수 없었다. 려행이여서 가져간 짐이 없다보니 해관검사도 인츰 끝내고 나올수 있었는데 나와보니 외사촌동생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필경은 타국땅에서 만나는 외사촌동생이라 솟구치는 감구지회를 억누늘길 없었다. 동생은 나의 손을 덥석 잡는 순간 반가움에 어린아이처럼 퐁퐁 뛰면서 즐거워하였으며 나중에는 자기가 몰고온 하이야에 앉아 가자고 끌기까지 하는것이였다. 허나 유람이여서 대오를 함부로 떠날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니 동생은 공항으로 나와 우리를 맞이한 가이드를 찾아 자신의 주민등록증과 면허증을 보이면서 오빠를 데려갔다가 래일 아침 제시간에 집결장소에 모셔가겠다고 통사정을 하는것이였다. 처음에 가이드는 딱 잡아떼다가 동생이 여러가지 증건들을 보이고 통사정을 들이대자 서로의 전화번호를 교환한다음 승낙하는것이였다.
나는 마중나온 동생의 하이야에 앉아 고속도로에 올라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향발하게 되였다. 고속으로 달리는 차안에서 대낮같으면서도 무아지경의 야경을 내다보는 순간은 내가 지금 진정 한국으로 와있는가 의심할 지경이였으며 그렇게 낯설어보이지가 않았다. 아마 그건 비록 한국으로 직접 와보지는 못하였지만 그사이TV로 한국의 현장을 많이도 보아와서일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지구촌이라는 말의 뜻을 다시한번 되새겨보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서울시내에 들어서서도 동생의 하이야로 친척들이 모여사는 가리봉과 구로동을 돌아보았으며 거기서 우리 교포들을 너무도 쉽게 만날수 있어 혹 우리 중국의 조선족들이 모여사는 연길로 오지 않았나 착각할 정도였다. 모두가 일에 바쁜 사람들이라 저녁식사는 우리 시간으로 밤아홉시도 넘어서 시작하게 되였는데 그동안 배에서 소나기가 그칠새없이 울어댔지만 바삐도는 그들의 모습을 보고는 꾹 참고 견딜수밖에 없었다.
저녁식사는 불고기집에 안배되였는데 고기구이도 연길의것과 비슷하여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특히 인상적인것은 그 불고기집에도 우리 교포아줌마가 일하고있는것이였는데 저도 모르게 자꾸 눈길이 가는건 어쩔수가 없었으며 가족의 앞날을 위하여 집떠나 자신을 혹사하는 모습이 눈물겹게 안겨왔다.
너무도 오랜만에 친척들과 하는 자리여서 그사이 지나온 이야기들로 꽃을 피우다보니 술도 잘 내려갔다. 나는 한국술이 독하지 않다는 느낌만으로 부어주는대로 마시기 시작하였는데 아마도 “진로”를 몇병은 마신것 같았다. 그렇게 이어진 술상이 자리를 파할 때는 새벽녘이였는데 나는 취김에 친척들의 권고도 마다하고 함께 간 동료들이 있는데로 가야한다고 우기였으며 끝내는 차로 모셔다주겠다는 동생의 선의도 마다하고 홀로 택시를 잡아 올라 앉게 되였는데 정작 택시에 앉고보니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가 너무도 막막해나면서 머리가 하얗게 비여왔다. 동생이 가이드와 말할 때 귀동냥으로 들은 강남구만 기억날뿐 구체적인 거리나 호텔이름은 도무지 기억해낼수가 없었다. 그것도 그럴것이 한국서울은 필경 생소한 곳이여서 이름도 거리도 너무 낯설었기때문에 귀동냥으로는 단번에 기억이 될수 없었다.
서울의 새벽거리는 낮시간이나 초저녁보다는 많이 조용했다. 난 별수없이 택시기사아저씨와 강남구로 실어다달라고 하였는데 택시기사아저씨가 강남구 어디로 모실가고 뒤미처 물어왔지만 강남구 번화거리에 내려달라고 말하는수밖에 없었으며 역한 술내를 풍기는 나를 조금은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는 택시기사어저씨를 일별하고는 그대로 택시등받이에 머리를 맡기고 말았다. 택시는 한식경이나 달려서 정거하게 되였는데 어렴풋이 잠든 나에게 택시기사아저씨는 강남구 번화가로 왔다고 알려주는것이였다. 나는 막무가내로 내려야했기에 지갑에서 백원짜리 인민페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런데 내가 내민 인민페를 보는 순간 택시기사아저씨의 낯색은 일그러지는것이였다.
“아저씨, 누굴 놀리는거예요? 한국돈 주세요”
“저는 어제 한국으로 오다보니 한국돈이 없습니다. 미안한대로 인민페를 받으면 않될가요? 이 돈이면 료금으로는 될것 같은데요…”
투박하게 내뱉는 운전수의 말에 나는 너무도 뻔뻔스럽게 대답하였다.
“아저씨, 왜 새벽부터 수털이를 하나요? 재수없이... 않되겠습니다. 파출소로 갑시다”
“그러지요. 저는 려행으로 어제온 사람이니 겁날것 없습니다. 한국돈이 없어 인민페로 주겠다는것도 죄인가요?”
한국돈이 없는 나로서는 어쩔수도 없는 일이라 당당하게 말하면서 큰 증표라도 되는듯이 웃호주머니에서 려권을 꺼내보여주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나오는 나를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던 운전수는 내키지 않는대로 내가 쥐고있는 인민페를 신결질적으로 나꿔채 받고야 말았다. 내가 그런대로 차에서 내려 몇발자국 걷지 않았는데 뒤에서 운전기사아저씨의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 다 끝났다싶었는데 또 부르니 화들짝 놀란 나는 돌아서지 않을수가 없었다.
“왜요? 않끝났나요?”
“아닙니다. 아저씨를 보니 오갈데가 방향이 없는것 같군요. 련락할수 있는 전화번호가 있으면 전화라도 해야지요. 자, 여기 동전이 있으니 받으세요. 전화라도 해서 빨리 찾아가야지요”
아까와는 달리 너무도 온화하게 말하는 운전수의 말에 나는 그만 그자리에 못박힌듯 굳어지고 말았으며 무슨 말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감을 잡을수가 없었다. 너무도 어릴때 집문을 나와서 길을 잃고 허둥대는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던 기억이 가물가물 떠오르면서 감동으로 온몸이 경련을 일어킬것 같았다. 운전수에게서 동전한웅큼을 받아드는 순간 끝내는 가슴이 뭉클해나면서 눈굽이 젖어오르기에 이르렀다. 결국 나는 목멘 소리로 겨우 한마디 내뱉고야 말았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날이 밝아와요. 어서 전화로 련계하세요”
운전기사아저씨는 너부죽한 얼굴에 빙그레 웃음을 띄우면서 나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주고는 차에 오르는것이였다. 나는 운전기사아저씨가 준 동전으로 동생과 련락할수 있었으며 제시간에 나와 함께 간 동료들을 찾아갈수 있었다. 그때 운전수가 준 동전으로 전화를 걸고도 남은것을 지금도 서랍에 고스란히 보관하고있는데 그 동전을 볼때마다 고마웠던 운전기사아쩌씨가 떠오르면서 세찬 감격의 소용돌이에 빠지군 한다.
스케줄에 따라 유람을 하는 내내 나는 전날 과음으로 부끄러움도 잊고 배를 붙안고 다니였는데 그 모양이 너무도 안쓰러웠던지 유람뻐스를 모는 운전기사아저씨가 항상 측은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으며 차에서 내릴 때마다 물병을 건네주기도 하였고 또 위에 좋은 약이라면서 약도 건네주는것이였다. 이름도 모르고 거래도 없었던 나에게 그렇듯 따뜻한 인정을 베풀어주는 아저씨가 참으로 고마웠으며 어쩐지 그 너부죽한 어깨에 기대여 한잠 달게 자고싶은 생각까지 들기도 하였다.
옛신라의 도읍지였던 경주의 신라왕릉을 참관하고 나오니 그늘밑에 앉아 쉬고있던 운전기사아저씨가 나를 손저어 부르는것이였다. 나도 고마운 운전기사아저씨이기에 한달음에 달려가서 담배를 권하고는 이야기끈을 풀기 시작하였다. 헌데 담배를 피우면서 볼라니 담배대의 재가 조금만 있어도 아저씨는 일어나 쓰레기통으로 가서는 재를 털고 다시 자리로 되돌아오군 하는것이였다. 그때까지도 난 크게 느끼지 못하고 옛습관대로 발밑에 되는대로 재를 떨구면서 이야기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다 담배가 다 타자 나는 역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꽁초를 버리고는 발로 비벼끄기까지 하였다. 그때 문득 나에게 안겨오는 한국운전기사아저씨의 모습은 나를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가게 할 지경이였다. 아저씨는 자신의 담배공초를 쓰레기통에 비벼끈후 나의 발밑에서 내가 좀전에 버린 꽁초를 주어서 다시 쓰레기통에 집어넣는것이였다. 급기야 얼굴이 홍당무우가 되여 어쩔바를 몰라하는 나를 운전기사아저씨는 웃음 띈 얼굴로 바라보면서 눈을 끔쩍하기까지 하였다. 한차례의 생동한 현장체험교육후 나는 어디를 가나 공중도덕과 위생을 지키기에 힘썼는데 결국 한국운전기사아저씨의 칭찬을 받기에 이르렀으며 어디가나 운전기사아저씨는 항상 나와 함께 하군 하였다.
부산 김해공항에서 우리는 제주로 향발해야했기에 결국 운전기사아저씨와 작별하게 되였는데 나와 운전기사아저씨는 김해공항을 배경으로 유람뻐스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서로 련락번호를 주고받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간혹 운전기사아저씨는 전화를 걸어오는데 멀리 바다건너에서 전화선을 타고 들려오는 걸걸한 아저씨의 음성을 듣노라면 나에게 참사람의 참됨됨이를 무언으로 깨우쳐준 아저씨가 고맙기만 하다. 그때 부산 김해공항에서 아저씨와 남긴 사진은 지금도 사진첩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이는 영원한 기념으로 될것이며 나를 항상 바른 사람으로 되게 깨우쳐줄것이다.
제주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밤이였는데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눅눅함이 그대로 안겨와 여기는 말그대로 섬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바로 옆에 자리한 호텔에서 묵는 밤은 참으로 말그대로 황홀한 밤이였다. 창으로 내다보면 푸픈 물결 출렁이는 바다가 그대로 안겨와 한품에 안을수있을것 같았으며 창을 열어젖히면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을수 있었는데 말그대로 소설이나 영화속의 한장면같은 느낌이였다.
이튿날 아침 남들이 아직 꿈나라에서 헤여나오지 못하고있을 때 나는 호텔을 나와 바다가로 달려가 바다물에 손을 적셔도 보고 바다우를 날아예는 갈매기를 바라보면서 바다가를 거닐기도 하였는데 말그대로 가슴이 뻥 뚫리고 마음이 비여가는 홀가분한 순간이 아닐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가는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바다가를 거닐다 다시 돌층계를 올라서는 순간 그만 발을 헛디디여 구두뒤축이 떨어져나가는 뜻밖의 곤경을 맞게 되였다. 너무도 뜻밖에 일어난 일이라 일순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감이 서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것이 그날 하루 제주도의 유람스케줄이 빼곡하였는데 구두뒤축이 떨어져나갔으니 말이다. 별수없이 떨어져나간 구두뒤축을 들고 호텔로 돌아오지 않을수 없었다. 내가 사는 곳이라면 집에서 공구로 대충 수리할수도 또는 신수리방을 찾아서 수리할수도 있으련만 낯선 한국제주에서는 도무지 신통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하는 내내 뒤축이 떨어져나간 구두로 하루 유람코스를 다닐 일을 생각하니 근심이 태산같았다. 식사가 끝나자 유람안내뻐스가 도착하였는데 나는 렴치불문하고 낯선 뻐스운전기사아저씨에게 뒤축이 떨어져나간 구두를 보이면서 일단은 먼저 구두수리방에 다녀올수 없겠는가 청을 들게 되였다. 물론 미안스러운 마음으로 어색한 웃음까지 띄우면서 말이다. 헌데 뻐스운전기사아저씨는 너무도 뜻밖으로 소탈한 웃음을 지으면서 흔쾌히 대답해주는것이였다. 그때 비록 구두가 수리되지 못하였지만 뻐스운전기사아저씨의 웃음과 시원한 대답에서 나는 금방 수리된 구두를 신은 기분이였다. 운전기사아저씨는 나의 구두수리로 일부러 구두수리방을 찾아 에돌아가기까지 하였는데 너무 이른 아침나절이라 구두수리방은 그때까지 문을 열지 않고있었다. 운전기사아저씨는 굳어져있는 나를 바라보면서 다시 시원스럽게 말하는것이였다.
“걱정마십시오. 우리가 도착하는 곳에 내가 잘 아는 구두수리아저씨가 있습니다”
아저씨의 말을 들으니 또다시 걱정되고 안타깝던 마음이 마치도 여름날 아침안개가 가뭇없이 걷히고 산뜻해지듯이 홀가분해지는것이였다. 성산일출봉에 도착하여 정차하자 모두가 차에서 내리게 되였는데 그때 아저씨가 나를 부르는것이였다.
“내리지 마세요. 차로 잠간 다녀오면 되니깐요”
일행이 내리자 아저씨는 나만 태우고 어디론가 향하는것였다. 약 십분거리를 달려서 부두가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서 작은 트럭에 신수리공구를 싣고 신을 수리하는 아저씨를 만나게 되였다. 운전기사아저씨는 구두를 수리하는 아저씨와 멀리 중국에서 온 분이니 잘 수리해주어라고 롱담삼아 이야기하는것이였다. 신수리하는 아저씨 역시 롱담으로 잘도 받아넘기시고는 신을 받아들고 수리하기 시작하였다. 불과 몇분되지 않아 구두는 원래모습을 되찾게 되였으며 나는 신수리를 마친 아저씨에게 재삼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운전수아저씨와 함께 다시 차에 올라 성산일출봉으로 향하게 되였다.
그 구두는 언녕 낡고 닳아 쓰레기통에 들어간지 오래되였지만 떨어진 구두로 하루 유람에 지장을 받을가 자상하게 보살펴준 제주유람뻐스운전기사아저씨의 그 고마운 마음은 지금도 나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으로 남아있으며 베품이란 무엇이며 고마움이란 무엇인가를 잊지 않게 하고있다.
5박6일의 뜻깊고 즐거운 한국유람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는 순간 마음은 헤아릴수 없는 감동으로 벅차오르기만 하였다. 말로 듣고 TV에서만 보아오던 한국을 직접 피부로 체험하였으니 그 느낌은 한입으로 말할수 없었다. 그가운데서도 나에게 인정을 베풀어주고 삶의 도리를 깨우쳐준 성씨도 이름도 모르는 한국운전기사아저씨들의 고마운 정은 그대로 가슴에 그들먹이 고여오면서 각인되여갔다.
나는 푸른 창공을 날아예는 비행기에서 두눈을 지긋이 감고 고요히 사색에 잠기게 되였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가 인간의 선조라면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멀고먼 옛날의 단군이 우리 백의민족의 선조임은 틀림이 없다. 하다면 우리는 모두 단군의 후손이며 우리의 몸에서는 같은 단군의 피가 흐르고있음은 속일수 없는 일이다. 또 일제의 침략과 수탈이 없었다면 리산이 없었을것이며 우리에게 조국과 고국이라는 두개의 명사가 있을수 없었을것이며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과 맥을 그대로 이어가면서 살아왔을것이라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지금 우리는 비록 나라가 다르고 국적이 다르지만 단군의 후손이고 백의민족임은 틀림이 없다. 하기에 우리의 몸에서 흐르는것은 같은 피이지 물이 아니다. 피는 못속이며 피는 물과 다른것만은 못속일것이다. 하기에 처음만난 성씨도 이름도 모르는 낯선 우리들이였지만 서로 무람없이 어울릴수 있었으며 멀리서 찾아간 나를 그처럼 따뜻이 보살펴줄수 있었던것이다. 나 또한 그 보살핌을 마음으로 느낄수 있었던것, 오늘까지도 그들을 잊지 못하고있는것 모두가 우리의 몸에서 같은 피가 흐르고있음이 아닐가! 다시말하면 같은 피가 흐르는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서로의 기쁨을 함께 기뻐할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어느날인가 그들이 여기 내가 살고있는 곳으로 온다면 나 또한 나의 모든것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보살펴주리라 마음먹어본다. 그것은 같은 단군의 피가 흐르는 나의 피붙이가 오기때문이다.
첫댓글 집을 나선 길에서 곤난에 봉착했을 때 받은 도움은 진정 고맙지요. 더구나 고국의 첫 기행이니 동포의 피끓는 감격이 넘칠거구요. 피는 물과 다르고 피는 물보다 진합니다. 진실한 님의 글에서 이점을 다시 한번 느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고가는 정속에서 진한 감동을 함께 느껴보는 시간이 되였습니다.좋은글 많이 기대합니다
과찬에 고마운 마음입니다. 보다 좋은 글 쓰기에 노력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