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충무로 !
저 어린 날 학교 교정에 울리던 아우성이 과거의 저장고로부터 은은히 들려온다.
서울의 일신초등학교 정문을 나오면 건너편에 아스토리아 호텔을 직면한다.
아스토리아 호텔 전면에서 왼쪽으로 꺾어 직진하여 조금 지나면 한국의 집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1, 2백 미터 나아가면 대한 극장이 나온다.
한국의 집 옆에 있던 수경사(수도경비사령부)가 이전하고 지금은 한옥마을이 들어서서 주변 경관에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대한극장을 중심으로 그 일대엔 아테네극장, 명보극장, 스카라극장,
을지극장 등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기가 충무로 일대이다.
대한극장 골목길을 벗어나서 한국의 집 돌담길을 꺾어 돌아 남산 쪽으로 오르는 길이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을 수도 없이 오가면서 그 소로 중간쯤에 위치한 빵집 진열장에 진열된 빵들이 얼마나 먹고 싶었던가.
결국 그 마을을 떠나기까지 한 개도 먹어보지 못했지만. 필동 2가 84번지.
비가 올 땐 우비를 뒤집어쓰고, 눈 내리는 겨울엔 털모자 위로 눈을 맞으면서 애환 속에 웅크리고 있는
그 초췌한 집을 찾아 오르곤 했었다. 그때엔 그 왜소한 집에 앉아 우린 언제나 이 우울한 세월을 벗어버릴 수 있을까,
하며 절망적 바람을 가져보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렇게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의 어느 해 가을 나는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충무로역에 내려서 대한 극장을 지나 옛 궤적을 밟아 올라갔었다. 그때의 집들이 아니겠지만 지형은 그대로였다.
막연히 예상은 했었지만 그 길 하나하나, 그 집들 하나하나를 대할 때 내 안에서는 무엇인가 꿈틀거렸다.
나는 그 위치에 서있는 집들과 벽들을 만져보았다. 그 하나하나엔 바로 내 어린 날의 생명의 흔적이 보였고,
그 생명의 흔적을 체험하는 순간 내 안의 감성이 폭발해버렸다. 그래서 내 눈은 그렇지 않았지만 마음이 울고 있었다.
그 어린 날 이 길을 지나면서 내 안에 작용하던 감수성이
수십 년이 지난 그때 고스란히 내 안에 재현되는 것에 나는 놀라면서 추억의 중요성을 재확인했다.
우리는 미래를 바라본다. 그런데 미래는 현재로 오지만 그 현재는 머물지 않고 과거로 가버리고 만다.
우리는 우리에게 찾아온 현재를 살고 소유하려고 하지만 현재는 모래알처럼 우리 손에 머물지 않고 빠져나가버린다.
그리고 고색창연한 과거가 되어버린다. 한데 과거도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그렇다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우리의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인간처럼 가난한 존재가 있을까? 도무지 인간의 것은 없다.
그러나 추억은 저녁달처럼 우리 안에 내재하여 우리의 전체 인생에 빛을 비추며 우리의 현재에 영향력을 미친다.
결국 인간은 지나가고 추억이 남는 것인가? 그렇다면 추억을 잘 만드는 것이 관건이겠고,
추억을 잘 만들려면 현재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현재를 잘 살아야 할 것이다.
이 현재가 바로 우리의 과거와 추억이 될 테니까 말이다.
아, 충무로. 충무로는 내 인생에 중요한 교훈이다.
누가 있어 인간의 과거를 바꿀 수 있겠으며, 무엇이 우리의 추억 속의 보석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지금 시간 앞에 초라한 인간, 인간 앞에 준엄한 시간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013. 4. 14
이 호 혁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