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열리는 9월의 문턱에 서면,
이상하게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레 일상이, 생각이, 만남이, 기호가 이처럼 변한다.
인생의 후반을 달리는 세대이니 지금 내가 서있는 언덕이,
고운 단풍으로 물든 화려한 빛깔의 가을인가? 아니면 낙엽이 서서히 대지 위에 나뒹구는
만추(晩秋) 인가?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 초겨울인가?
사춘기부터 이 나이까지, 아니 죽을 때까지 이 “가을 병(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보다.
그래서 이번 가을엔, 이 “가을 병(病)”에서 벗어 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하여, 날씨 청명한
가을이 열리는 9월1일 오후 늦게, 호젓한 분위기에서 커피도 마실 겸, 남한산성에 올랐다.
그런데, 흘러가는 계절에 시야(視野)를 담아 둘러보니, 눈에 들어 오는 남한산성은 아직은 푸르름을
간직한 늦여름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나, 가만히 속내를 훑어보면 서서히 “가을 병(病)”에 걸려,
변해 가고 있었다. 나무도 잎도 풀도, 색깔은 아직 푸르름에 발버둥치고 있으나 누렇게 되어가는
징조를 나타내며 꽃은 마르고, 바람도 시원하고, 하늘은 높고, 행인의 옷과 표정도 지난 여름의 연일
계속된 폭염에 지쳤는지 분위기도 움츠리고, 삼라만상이 온통 가을의 길목에 들어섰음을 예고하며
변해 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때가 되면 찾아오는 이 가을 병은, 나만의 병(病)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어김없이 걸리는, 시간의 흐름에서 오는 “자연 병(病)”인 모양이다.
흘러가는 이 계절에 찾아온, 나를 변하게 하는 이 “가을 병(病)”은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삼라만상의 궤도(軌道)”인가?
아니면, 세월의 무게에 허둥대는 인간을 지탱시키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삶의 궤적(軌跡)”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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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의 길에서 필연(必緣) 보다, 우연(偶緣)을 더 기다린다.
친구한테 전화 걸기보다, 전화 오길 더 기다린다.
화려하고 분주한 일상보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삶이 더 다가온다.
자식에게 무얼 원하기보다, 더 잘해주지 못한 미안감이 가슴에 더 아려온다.
주장과 의견을 역설하기보다, 침묵하며 빙긋이 웃으며 듣기를 더 즐긴다.
기름진 한우갈비 보다, 호박 넣은 따뜻한 항아리 수제비가 더 먹고 싶다.
항공편으로 제주도 보다, 무궁화 열차 타고 강원도 태백 정선에 더 가고 싶다.
몇 천 원 고급 음료수 보다, 이백 원짜리 따끈한 자판기 커피에 더 손이 간다.
KTX 타고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려는 욕심 보다, 차창으로 스치는 풍경에 더 심취한다.
붉은 넥타이 맨 정장 보다, 노 넥타이 차림이나 잠바를 더 즐겨 입는다.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 보다, 낭만과 추억 어린 신촌의 어느 조용한 클래식 음악감상실을 더 찾고 싶다.
미니스커트 선글라스 낀 멋쟁이 보다, 보라 빛 스카프를 목에 맨 분위기 있는 여성에게 눈길이 더 간다.
화려하고 멋있는 백화점 보다, 시끌벅적한 재래식 5일장 시골시장이 더 그립다.
여럿 지인과 음식점에서 담소하는 것 보다, 호젓한 찻집에서 혼자 커피 마시는 걸 더 찾는다.
유명인의 강연을 듣기 보다, 독서실 찾아 고전을 더 읽고 싶다.
음악회나 영화관 가기보다, 베스트 셀러 사러 교보문고 가는데 발걸음을 더 옮긴다.
호화로운 레스토랑 보다, 사람 냄새 나는 골목 오뎅 집이 어디냐고 더 묻는다.
그 어떠한 와글 즐기는 모임보다, 조촐한 가족모임에 손주들의 재롱을 멍하니 바라봄이 더 재미롭다.
현란한 조명아래 유명 배우의 공연 보다, 스산한 바람소리 들리는 어스레한 창 밖 분위기가 더 좋다.
감동적인 설교듣기 보다, 혼자서 골방의 기도를 더 하고 싶다.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에 의지하기보다, 하나님께 조용히 자신을 더 전폭적으로 마낀다.
헬스클럽에서 조깅하기 보다, 집 부근 탄천변을 더 즐겨 걷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 보다, 먼지 쌓인 시집을 서가에서 더 뒤져 읽는다.
밤시간 소파에 앉아 TV를 보기 보다, 거실 불 끄고 창 밖을 더 바라 본다.
생각나는 사람에게 이메일 보내기 보다, 팬으로 편지를 더 쓰고 싶다.
그립고 보고픈 사람에게 전화하기 보다, 눈을 감고 그리움을 더 띄어 보낸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기 보다, 독서에서 인생의 지혜를 더 얻는다.
그 누구를 사랑하기 보다, 지난날의 추억을 더 아름다워 한다.
산 정상을 향해 등산하기 보다, 바지 주머니에 양손 넣고 개울 변의 잔디 밟기를 더 원한다.
첫댓글 좋은글 좋은정보
머물다 갑니다
늘 사랑과 행복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와우 좋은 글! ~~즐감 ~ 감사합니다 ~ *^-^*
격려, 감사합니다!
가을이 열리는 문턱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늙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고
푸르럼을 잃는다는 것은 시드는 것이 아니라, 화려한 단풍으로 물들려 가는 것이라고.....
그러나 눈을 지긋이 감아보니
익는 것, 단풍은 얼마있지 않아
낙과(落果), 낙엽(落葉)되어 대지 위에 떨어져 나뒹굴테니..... 어찌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