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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1969년,
박정희가 3선 금지 조항을 철폐하고 3선 개헌을 단행합니다.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제3공화국은
이미 그 시작부터 정치적인 명분성을 잃어버린 정권이었지만
군사 정권 특유의 무대뽀식 밀어붙이기 덕택으로(?)
그 허울만은 GNP의 비약적인 성장이라는 결과로 나타납니다.
허나 그 속내의 부실함은 인권 탄압, 광주 대폭동 사건,
와우아파트 붕괴 등 큰 참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나게 되죠.
눈에 띄게 근대화 되어가는 도시를 보며 중,장년층은 물론이고 청년층에서조차
정치적 명분이냐, 근대화의 결과물이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곤 했으나
1969년, 박정희의 3선 개헌은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대학생들의 '민주화 의식'을
한껏 고취시켜주는 기폭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1972년 유신헌법 공포로 그 절정을 맞이하게 되죠.
10월 유신에 대한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반응은 (당연하게도)격렬했습니다.
이러한 정세 속에 1973년 일본에서 발생한 김대중 피랍귀국사건은
독재타도 열망에 기름을 붓는 꼴이 됐고,
지식인과 종교인과 야당 정치인들,
그리고 대학생들은 유신에 격렬히 반대하는 행동을 보입니다.
이에 손발이 오그라든 박정희는
1973년 1월 8일부로 그 유명한 긴급조치를 공포합니다.
[긴급조치 1호]
1.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4. 전 1,2,3호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선전하거나 방송, 보도, 출판, 기타 방법으로
이를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5.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법원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또는 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 경우에는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6.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7. 이 조치는 1974년 1월 8일 17시부터 시행한다.
유신시대에서 이제는 긴조(긴급조치)시대로 바뀌며
나라는 더 서슬퍼렇게 바뀌었지만 유신반대, 독재철폐 시위는
양지에서 음지로 몸을 피했을 뿐 그 열기만은 수그러들지 않았죠.
각 계 분야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이 상황에서 박정희가 선택할 수 있는 수는 많지 않았습니다.
대학생들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민심을 그들로부터 돌리는 길이었습니다.
민심을 돌리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두말 할 것 없이 '반공정신 강화' 였죠.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간첩, 빨갱이... 타겟은 민청학련 이었습니다.
민청학련.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긴급조치 1호가 1973년 공포되면서 유신반대운동은
거의 전적으로 대학생들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형국으로 바뀌어버립니다.
일단, 가장 많은 시간을 시위에 쏟아부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대학생이었고,
3선 개헌에 반대한 지식인들에게 가해진 보복은 '현실'과 맟닿아 있었기에
두 손 놓고 그전처럼 대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뛰어들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했던.. 그 시대가 긴급조치 시대였습니다.
대학생들의 힘을 합치기 위해선
우선 무엇보다 각 학교간의 연계가 가장 중요했습니다.
연세대 고려대 서울대 이화여대 등
서울 지역 간의 연계와 지방대학과의 연계.
대학과 대학사이의 연계를 위해,
게릴라성, 단발성 시위가 아닌 흐름이 물결치게 만들기 위해 손을 맞잡은 이들.
그들은 자신들을 '민청학련' 이라 칭합니다.
인터넷도 없고, 전화 연결도 쉽지않던 그 시절.
그들은 그야말로 두 발로 뛰며 전국의 대학을 연결했고
마침내 1974년 4월 3일, 그날을 거사일로 잡고 민주화 열망을 불태웁니다.
허나 각 대학교에 기관원들이 포진된 그 시절,
아무리 음지에서 속삭인다 해도
서슬퍼런 중정의 눈을 피해가기란 하늘의 별따기 였습니다.
그러니 유신반대 시위 사상 초유의 거대 프로젝트였던
민청학련 시위는 오히려 들키지 않는게 이상했을 정도였죠.
낌새를 눈치 챈 중정은 거사를 일주일 앞둔 3월 28일부터 주동자 검거에 들어갑니다.
결국 주축 세력이 빠진 4월 3일 그날.
문리대 시위는 80명 이라는 초라한 숫자만이 집결했을 뿐이고,
이마저 이미 동향을 파악하고 있던 중정에 의해 모조리 연행되어 버립니다.
각 지역의 대학 시위 역시 무자비하게 짓밟히고..
결국 제2의 3.1운동, 제2의 4.19가 될 뻔했던
4월 3일 그날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과 함께 유신시대 최대 비극이었던 민청학련 사건은 그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시위정국에 불안해하며 열심히 대가리를 굴리던 박통.
지 딴에는 기가 막힌 묘책이 떠오릅니다.
'민청학련.. 저새끼들을 이용하자! 자근자근 밟아서..'
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가 됐을지도 모를 4월 3일.
그 모든 상황이 종료된 그 시점에서 박통은 긴급조치 4호를 공포합니다.
그런데.. 이 긴급조치 4호의 내용이 참.. 기가 막힙니다.
이미 민청학련 주동자들은 모두 검거된 상태에서 공포된 긴급조치 4호..
[긴급조치 4호]
1. 전국민주청소년학생총연맹(민청한련)과 이에 관련되는 단체를 조직 하거나
또는 이에 가입하거나, 그 구성원과 회합, 또는 통신 기타 방법으로 연락하거나,
그 구성원의 잠복, 회합·연락 그밖의 활동을 위하여 장소·물건·금품 기타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기타 방법으로 단체나 구성원의 활동에 직접 또는 간접으로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2. 단체나 그 구성원의 활동에 관한 문서, 도화·음반 기타 표현물을
출판·제작·소지·배포·전시 또는 판매 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3. 제1항, 제2항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또는 선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6. 이 조치에서 금한 행위를 권유, 선동 또는 선전하거나
방송·보도·출판 기타 방법으로 타인에게 알리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7. 문교부장관은 대통령긴급조치에 위반한 학생에 대한 퇴학 또는 정학의 처분이나
학생의 조직, 결사 기타 학생단체의 해산 또는 이 조치 위반자가 소속된 학교의 폐교처분을 할 수 있다.
학교의 폐교에 따르는 제반 조치는 따로 문교부장관이 정한다.
8. 제1항 내지 제6항에 위반한 자, 제7항에 의한 문교부장관의 처분에 위반한 자 및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사형, 무기 또는 5년이하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유기징역에 처하는 경우에는 15년이하의 자격 정지를 병과할 수 있다.
제1항 내지 제3항, 제5항, 제6항 위반의 경우에는 미수에 그치거나 예비, 음모한 자도 처벌한다.
9. 이 조치에 위반한 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긴급조치 내용에 민청학련 단체가
분명히 언급되어 있는 부분도 부분이거니와
이미 주동자들을 손아귀에 잡아 놓고
명분을 만들기 위해 긴급조치를 공포하는 행동도 행동이거니와
주목해야 할건 제 8항입니다. 사형, 무기징역...
그저 죽일 당위성을 만들기 위해 검거 후 바로 그 당일날 긴급조치령을 공포하는 박통.
그로부터 몇주 뒤, 중정은 중간수사상황을 발표합니다.
단 몇주 만에 유신반대시위를 위해 결성된 민청학련은
중정에 의해 박통에 의해 단번에 인민혁명단체로 둔갑이 되어
남한을 공산통일을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로 변해있었으며,
조총련, 인혁당 및 일본 공산당과 연계되어 있는
아주 뿌리부터 새빨간 정부 전복단체로 둔갑이 되어있었습니다.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해 검거된 대학생의 수는
1024명이라는 사상 초유의 인원이었고,
이중 무려 253명이 긴급조치 4호를 위반한 죄목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됩니다.
또한 민청학련과 인혁당을 연관 지으려는 중정의 노력(?)은
그야말로 투철해서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게 온갖 고문이란 고문은 모두 자행됩니다.
인혁당계 인원들의 피의 서약서는 민청학련을 결국 빨갱이로 만들었고..
그 결과... 인혁당 사건 관련 8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선고 바로 다음 날 사형이 집행됩니다.
사형 선고 소식을 들은 바로 다음 날, 인혁당 관련자들의 가족들이
서대문 형무소로 오던 그 시간에 그들은 목이 메달렸고..
민청학련 사건 주도자 6명에게도 역시 사형이 선고되었고,
관계자 모두가 무기징역 혹은 10년 이상의 형에 처해집니다.
단지.. 단지 유신을 철폐하고 독재를 타도하고 싶어 부르짖던 목소리였음에도
그들은 어느새 세상을 혁명으로 전복시키려는 빨갱이로 둔갑이 되어 있었고
세상을 향해 시원스레 통곡 한번 제대로 내질러보지 못한 채
또 다시 유신의 손아귀에서 스러져 갔습니다..
전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또렷한 일화 하나는
민청학련 사건의 재판정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당시 주도자로 구속된 서울 상대생 김병곤은
사형을 구형받자 "영광입니다" 라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 순간 법정은 모두 얼어붙습니다.
뒤이어 이어진 변호사 강신옥의 변론은
"지금 제 심정은 차라리 피고인 석에서 그들과 같이 재판을 받는게 편할 것 같습니다" 였고,
이 변호사는 지금까지도 유래가 없는 법정에서 변호하다가
법정구속 되는 초유의 선례를 남긴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김병곤의 "영광입니다" 이 한마디는
인혁당 사건을 구형, 집행하고도 관련된 판검사 중 옷 벗은 이들이 한 명도 없었던
썩어빠진 법조계에 날리는 통렬한 폭탄이었고,
충실히 '유신의 개' 노릇을 하던.. 그때, 그날, 그시간에 있던 판검사들에게 울리는 경종의 한마디였습니다.
인혁당 8명의 사형.
민청학련 6명의 사형선고.
김병곤의 한마디.
강신옥의 모든 것을 걸었던 변론.
하지만... 물론 세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그 잔재는
아직까지 이 땅에서 아른거리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것은 지금 이 시대는
"영광입니다" 이 한마디에 스며든 그 정신에
가슴이 동하는 사람이 유별난 취급을 받는 시대라는 점입니다.
리얼리스트가 꾸는 불가능한 꿈을
고리타분하고 매사에 진지한 피곤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이 시대에
인혁당과 민청학련의 혼은 이땅의 어딘가에 있긴 있는 것일까요..
written by parismatch
이 땅에서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진짜가 되려거든
목숨을 걸고
목숨을 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