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42:1-5)
여러분은 무엇에 목마르신가요? 사랑인가요?
돈인가요? 성공인가요? 이것을 얻는 자는 다시 목마릅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예수님이 만난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여섯 번째나 두어도 여전히 무엇에 목마른 사람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목마르지 않은 물을 주신다고 했을 때 그것을 구하였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물은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없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마름은 무엇으로 해갈할 수 있을까요?
본문에서 고라 자손인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고라’자손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맡아서 봉사하였습니다.
지금 이들이 바벨론에 끌려와서 더 이상 예배할 수 없는 형편에 처했을 때 과거를 회상하며 이 노래를 지은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사슴은 시냇물을 찾으면 갈급함이 해갈할 수 있지만 사람은 무엇으로 해갈될 수 있을까요? 사람의 목마름은 오직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해갈이 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 인생의 갈급함을 해갈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만나려면 타는 목마름을 느껴야 합니다. 2절에서 시인은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토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갈망해야 할까요?
시인은 한 때 성일(聖日)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발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던 자였습니다. 종교적으로 지도자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한 날에 무리와 동행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님의 집으로 나아가던 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 뵙고자 하는 타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하나님을 찾는 갈급한 마음이 있으신가요? 성도들과 어울리는 재미와 찬양하는 즐거움에 매몰되어 찬양받으실 하나님, 우리의 영원한 의지 되시고, 생수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은 멀리하지 않았나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와 같은 하나님을 향한 타는 열망, 간절함, 절박함이 이전에 있었다면 그들이 이방 땅에 끌려가는 불행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대하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빠지지 않고 나와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도들과 교제하며 그 안에서 참 행복과 만족, 기쁨을 누리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모습은 오래 지속되어야 하며, 더욱 강화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반드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급한 심령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면 죽을 것 같고, 마지막인 것 같은 그러한 심령이 우리에게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 계시느냐고 묻고 또 회의하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너무 쉽게 대하니까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쉽게 만나주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정말 타는 목마름과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애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면 만나주십니다.
예레미야 29:12-13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둘째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기회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4절에 “내가 전에 성일(聖日)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인은 지금 하나님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며 조롱할 정도로 시인은 비참한 상황에 직면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이전에 성일(聖日)에 무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성전으로 향하며 찬송을 불렀던 아름다운 날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시인은 현실의 비참한 처지와 맞물려 마음만 더 상하였습니다.
그러면 시인은 왜 이렇게 과거의 아름다웠던 때를 회상하고 마음이 상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까? 이는 시인과 그의 백성들이 예배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시인과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이전에 예배자의 삶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날을 주셨을 때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우상숭배에 빠져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라와 성전을 잃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었기에 하나님을 자유롭게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도 이런 형편에 처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백성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여 예배하는 평안과 번영을 주셨을 때 하나님을 멀리하였습니다. 범죄 함으로써 아들에게 쫓겨 궁과 성전을 나와 요단 동편으로 도피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건강한 날, 아름다운 날들을 주셨을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범죄 하면 마음 상하는 날이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날들을 주셨을 때 그것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더욱 근신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면 환난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즉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기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신 32: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셋째로, 모든 낙심과 절망의 원인은 믿음의 약화에 있습니다.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낙심하며 불안해한다고 솔직히 말합니다. 그는 왜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이유를 찾고 있습니다. 이때 시인이 발견한 것은 돈이나 건강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원수의 조롱이나 장래가 암울하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시인이 마침내 찾아낸 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므로 낙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밀착되어 있지 않음을 발견했습니다.
시인은 신앙이 떨어져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모든 불안, 염려, 외로움이 사실은 외부적 환경보다도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고 부족한데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온전히 밀착되어 있다면 아무리 최악의 상황일지라도 우리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엄마 품에 있는 아이는 평안할 수 있지만 엄마가 없으면 아이는 공포에 떨면서 한없이 웁니다. 하나님께 밀착되지 않은 성도들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낙심하고 불안할 때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자기에게 선포해야 합니다. 자신을 엄히 일깨우고 믿음을 추스를 수 있어야 합니다.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는데 왜 우리가 마음으로부터 불안합니까? 왜 알 수 없는 슬픔과 절망이 마음속을 채웁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약화되었거나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보지 말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앞에 있는 큰 산 같은 장애물을 바라보지 말고 평지가 되게 하실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김상원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