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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1 <예썰의 전당> [33회] 봄을 향한 진심, 이중섭 2023년 01월 01일 방송 다시보기
이중섭(李仲燮, 1916-1956), 〈흰소〉, 1954, 종이에 유채
"내 소는 싸우는 소가 아닌 고생하는 소,
소 중에서도 한恨의 소이다!"
-이중섭.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싸우는 소〉, 1955, 종이에 에나멜과 유채
이중섭의 황소에 끌리는 이유 - 세심한 관찰로 소의 움직임 파악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1916), 〈노란 소(The Yellow Cow)〉, 1911년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 1880-1916: 독일 표현주의 화가)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색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전했으며, 1911년 그해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과 함께 ‘노란 소(Yellow Cow)’라는 작품을 남겼다.
“파랑이라는 색은 남성, 엄격한 영적색이다.
노란색은 여성을 드러냈다.
부드럽고 명량한 관능적이고 감각적이다.”
-(Franz Marc, 1880-1916)
✵ 예썰의 전당 서른세 번째 이야기는 황소의 화가 ’이중섭‘ 1916년에 태어난 이중섭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연이어 겪으며 조국의 비극적 역사를 함께했다. 그는 피난지 부산에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도 생이별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다가올 봄을 기다리며 고난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웠다. 사랑하는 것들을 화폭에 담아낸 이중섭의 ‘진심’은 그의 작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데. 예썰 박사들과 함께 ‘한국이 낳은 정직한 화공’, 이중섭에 얽힌 흥미로운 예썰을 풀어보자!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특별전, DNA :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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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간의 소이야기/ 백석
병이 들면 풀밭으로 가서 풀을 뜯는 소는 인간(人間)보다
영(靈)해서 열 걸음 안에 제 병을 낫게 할 약(藥)이 있는 줄을 안다고
수양산(首陽山)의 어느 오래된 절에서 칠십이
넘은 노장은 이런 이야기를 하며 치맛자락의 산나물을 추었다
✵ 예썰 하나. 남의 소 그리다 소도둑 누명까지, 이중섭이 ‘소’에 집착한 이유는? 이중섭의 대표작 ‘황소’에서는 소가 앞으로 달려가려는 듯한 폭발적인 역동성이 느껴진다. 늠름한 기상이 느껴지는 이중섭의 황소는 우리 민족을 표현한 것이다. 시인 김소월, 백석 등이 졸업한 대표적인 민족주의 학교, 오산학교 출신인 이중섭은 어렸을 때부터 우리 민족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그는 ‘소’를 통해 민족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워낙 소 그림을 많이 그려 ‘소중섭’이라고도 불린 이중섭은 남의 소를 따라다니며 관찰하다 소도둑으로 몰리기까지 했다고. 그런데 민족의 기상을 나타내는 ‘호랑이’나, 날쌘 ‘말’을 두고 ‘소’를 그린 이유가 따로 있다는데. 이중섭은 왜 ‘소’를 선택한 것일까?
이중섭의 <황소>는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느꼈던 그리움과 사랑, 몸서리치도록 지긋지긋했던 가난,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으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던 삶에 대한 투지 등을 고스란히 표현해낸 작품은 화가 이중섭의 영혼이 담긴 분신과도 같은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소에 근육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얼굴만 클로즈업한 황소도 심장에서 펄떡거리는 맥박소리가 들릴 듯하다. 선 하나하나에 힘의 강약이 살아 있어 붓을 잡은 거친 손이 아직 힘차게 움직이고 있는 듯한 착각, 화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감정들이 그대로 강한 생명력이 되어 선명하게 전달된다.
<황소>에는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늠름한 황소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몸을 부르르 떨다가 고개를 쳐들었을 때의 순간을 포착한 듯 입이 살짝 벌어져 있다. 강렬한 붉은 색조로 인해 황소의 거칠고 강인한 생명력이 극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커다란 눈망울과 살짝 벌어진 입은 우리가 늘 보았던 황소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다.
우리는 소의 커다란 눈망울을 보며 감정을 읽고는 한다. 눈을 통해 소와 교감한다. 저 순박한 눈망울을 빼고 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다. 소의 눈이 슬퍼 보이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인의 감정이 저 눈에 담겨 있다. 선이 굵고 우직해 보이는 황소는 누가 봐도 우리의 황소이다. 살짝 벌린 입은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하다. 과묵하고 듬직한 청년의 모습도 보인다. 거친 붓 자국과 붉은 색조를 조금만 걷어내고 보면 너무나 친근해 보이는 우리 가족의 모습, 우리 한국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중섭은 자신을 황소라 여겼다. 황소 그림을 자신의 자화상이라 여겼다. 황소는 우리의 소였고, 동시에 이중섭 자신이었다.
이중섭(李仲燮, 1916-1956), 〈덤벼드는 소〉, 1956, 종이에 유채
이중섭이 일본 유학시절 일본 학생들 앞에서 한국말로 당당히 부르고 다녔던 ‘소나무야’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른 네 빛
쓸쓸한 가을날이나 눈보라 치는 날에도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하지 않는 네 빛”
- 독일 민요 <소나무(원제: O Tannenbaum(전나무))>의 번안 가사
변치 않는 소나무 같은 우리 민족의 절개를 노래한 이중섭의 진심이 한겨울을 이겨낼 뚝심을 〈황소〉에 담은 이중섭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난 이중섭은 부유했던 외가의 도움으로 부족함 없는 유년 시절을 보낸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민족주의 학교인 오산학교에 진학해 미술 교사 임용련의 영향으로 본격적으로 미술에 입문한다.
1936년에는 성공한 사업가였던 형 이중석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떠난다. 도쿄문화학원으로 학교를 옮긴 뒤에 같은 미술부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1945년에 두 사람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이중섭은 마사코에게 이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준다.
1950년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제주도까지 피난을 간다. 1951년 1월부터 약 11개월 동안 가족이 함께 제주도에 살았던 시기를 이중섭은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떠올린다. 1952년에는 생계를 위해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다.
하지만 장인의 부고 소식과 함께 아내의 건강 악화가 겹치면서 아내와 두 아들은 여권이 없는 이중섭만 남겨둔 채 일본으로 떠난다. 이중섭은 이듬해에 가족을 만나기 위해 일본으로 넘어가지만, 불법 체류자가 될 수 없어 일주일만 머물고 다시 돌아온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가족과 함께 보낸 마지막 시간이 되고 만다.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봄, 우리는 지금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그곳이 바로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우리의 황소, 우리의 고향일 것이다.
이중섭(李仲燮, 1916-1956), 〈가족〉, 1952,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 이중섭이 사랑했던 섶섬 풍경, 화가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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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썰 둘. 아내의 애칭은 ‘나의 기쁨 봉오리’?, 사랑꾼 이중섭의 절절한 가족 사랑! 6.25전쟁으로 고향인 북한 원산을 떠나 피난길에 오른 이중섭. 이 무렵 그의 그림에는 주요한 소재가 더해졌다. 바로 아내와 두 아들이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학교 후배였던 마사코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아내를 향한 이중섭의 사랑은 편지에 쓰인 애칭에서도 엿볼 수 있다. “나의 거짓 없는 희망 봉오리”, “가장 크고 유일한 기쁨”, “나의 생명”. 이렇게 절절히 사랑하는 아내 마사코와, 사랑의 결실인 두 아들은 고단한 피난생활의 활력이 됐다. 제주도 피난 시절, 한 평 남짓한 단칸방에 온 가족이 함께 살았던 시기는 이중섭에게는 가장 행복한 한때였다. 이 시기 그려진 작품에는 당시 그가 느낀 행복과 가족을 향한 진심 어린 애정이 그대로 드러난다는데. 이중섭의 가족 사랑이 담긴 작품들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을까?
이중섭, '돌아오지 않는 강', 1955년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서귀포의 환상〉, 1951, 나무판에 유채
이중섭, '아버지와 장난치는 두 아들', 1953-54년
이중섭(李仲燮, 1916-1956), '부부', 1953, 종이에 유채/ 이중섭, '투계', 1955, 카드보드에 유채, 28.5x40.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세 사람', 1945년경, 종이에 연필, 18.2 x 28.0, 개인소장.
이중섭(李仲燮, 1916-1956), '현해탄', 1954, 종이에 유채, 연필, 크레용, 이중섭미술관
이중섭(李仲燮, 1916-1956), '길 떠나는 가족', 1934, 종이에 유채, 29.5x64.5cm
이중섭(李仲燮, 1916-1956), ‘도원’, 1954, 종이에 유채
이중섭(李仲燮, 1916-1956), '바닷가의 추억-가족과 첫눈', 1950년대, 32.3x49.5cm,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섶섬이 보이는 풍경’, 1951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 예썰 셋. 고난에도 꺼지지 않는 예술혼, 이중섭의 전매특허 ‘은지화’의 탄생비화! 이중섭은 화가로서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 당시 예술가들의 활동 중심지였던 부산으로 향한다. 그러나 전쟁 중인 탓에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결국 생활고로 아내와 아들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한국에 홀로 남은 이중섭은 부두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이중섭은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고, 아이러니하게도 미술 재료를 구할 수 없는 가난 속에서 새로운 화풍이 탄생했다. 바로 ‘은지화’다. 담뱃갑이나 초콜릿 포장지에 사용되는 손바닥만 한 은박지를 송곳 등으로 긁어서 그린 은지화. 이중섭의 은지화들은 그 독창성과 예술성을 인정받아 뉴욕현대미술관의 영구소장품이 되었다는데. 예술에 대한 이중섭의 열정이 담긴 ‘은지화’의 탄생 비화를 밝힌다.
“지난 겨울에도 거의
제대로 입지 못하다가
최상복시가 가져다준
개털 외투를 입고 잤는데
온기도 없는 작은 방에서
혼자 밤을 보내야 했어요
산꼭대기에 지은
판자집이다 보니
바람이 너무 불어요
추운데다 배도 고프고...”
-1955년 3월 9일, 아내에게 보낸 편지 中
“열심히 그림을 그려
전시회를 열어서 그림을 팔아
돈과 선물을
많이 가지고 가겠소"
-아내에게 보낸 편지 中
“판잣집 골방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 노동을 하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다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면
합판이나 맨 종이
담비 종이도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면
못이나 연필로도 그렸다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그렸고 슬퍼도 그렸고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111. 은지화 - ‹게와 물고기와 새와 아이들›, 1950년대 전반, 은지에 새김, 유채,
10×1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은지화는 이중섭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독자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광택이 나는 알루미늄 속지에 철필이나 못 등으로 윤곽선을 눌러 그린 다음, 그 위에 물감이나 먹물을 문질러서 완성하는 은지화는 은박지의 광택과 음각선에 묻혀 들어간 짙은 선으로 인해 도자기의 상감기법을 연상케 한다. 이 독특한 그림은 가족과 헤어져 홀로 피란 생활을 이어가던 이중섭의 궁핍한 환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던 그림에의 열정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당시 이중섭은 다방이나 술집, 심지어는 길바닥과 쓰레기통에서 담뱃갑을 주워 그 안에 든 은박지를 사용했다고 하는데, 접히고, 구겨지고 찢어져 있던 종이들을 그대로 살려둠으로써 화면의 우연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1952년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후 그리기 시작한 수많은 은지화에는, 주로 가족과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이중섭은 그 가운데 70여 점을 1953년 도쿄에 있는 아내에게 건넸다고 한다. 나중에 형편이 좋아지면 대작으로 완성하려고 그려본 스케치이니, 절대로 남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아내가 간직하던 은지화들은 1979년 열린 이중섭 작품전에서 엽서화와 함께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된다.
#112. 이중섭(李仲燮, 1916-1956), '가족을 그리는 화가', 1950년대, 은지에 새김, 유채, 15.1×8.1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이 은지화는 꽤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화면 아래쪽을 보시면, 콧수염을 한 화가가 한 손에는 팔레트를, 한 손에는 붓을 든 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화가는 이중섭 자신이다. 그런데 화가의 대각선 위쪽에도 콧수염을 한 이중섭이 등장한다. 그는 아내 마사코 여사와 두 아들과 함께 서로의 몸에 손을 두른 채 하나의 덩어리처럼 엉켜있다. 이 단란하고 끈끈한 네 가족의 모습은, 그림 속의 화가 이중섭이 그리고 있는 그림 속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족의 모습을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마사코 여사는 한 손으로는 머리 위의 아들을, 한 손으로는 다리 위에 앉은 이들을 감싸고 있다. 두 아이는 모두 아버지 이중섭의 목과 어깨로 팔을 뻗어 그를 안고 있고다. 이중섭의 한쪽 손에는 긴 막대기에 매달린 물고기가 보인다. 이 물고기로 미루어볼 때, 그림 속의 화가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했던 제주도 피란 시절을 추억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듯 보인다. 그는 지금, 둘째 아들로 보이는 아이의 허벅지 뒷부분을 완성해 가고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은지화에 원근법을 무시한 채 평면화된 화면으로 인해, 화가 이중섭이 그림을 그리고 있는 캔버스 밖 세계와 그가 그리고 있는 캔버스 속 세계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화면 아래, 이중섭의 오른발 위에 그려진 가로선 하나가 그림 속 그림의 영역을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이중섭(李仲燮, 1916-1956), '낙원의 가족', 은지에 유채, 새김, 8.3 x 15.4cm, 1950년대, MoMA 소장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아이들 Children', 은지에 새김, 9×15.2cm, 1950년대, 이중섭미술관 소장
이중섭(李仲燮, 1916-1956), ‘(桃園:天桃·靈芝)’ , 연도미상, 은지
❁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은 삼성그룹 고(故) 이건희 회장의 유족에게 2021년 4월 기증받은 1,488점 중 이중섭의 작품 90여 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의 이중섭 기소장품 10점을 모아 100여 점으로 구성한 전시이다. 이번 전시는 이건희컬렉션을 중심으로 한 두 번째 전시로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양질의 한국미술을 소개하고, 대중에게 희소가치가 높은 작품의 관람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 기간 : 2022-08-12 ~ 2023-04-23
◦ 주최/후원 : 국립현대미술관 / 신영증권
◦ 장소 ;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1층, 1전시실
◦ 작가 : 이중섭
◦ 작품수 ; 회화, 드로잉 등 100여 점
◦ 관람료 : 0
이중섭(1916-1956)은 힘들고 어려웠던 삶 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정직한 화공’이자 일제강점기부터 ‘소’를 그려낸 민족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1970년대 이후 이중섭에 관한 전시, 영화, 연극, 소설 등이 꾸준히 만들어지면서 오랜 시간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국민화가이기도 하다. «MMCA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소장품으로 이중섭을 다시 보는 시도로서 그간 미술관이 축적해온 미술품 수집과 연구 기능을 전시로 풀어낸 것이다. 전시에서는 이중섭의 작품세계를 1940년대와 1950년대로 나누어 소개한다. 1940년대는 이중섭이 일본 유학시기와 원산에서 작업한 연필화와 엽서화를 전시하며, 1950년대는 통영, 서울, 대구에서 그린 전성기의 작품 및 은지화, 편지화 등으로 나눠 구성했다. 전시는 재료와 연대를 조합해 예술가 이중섭과 인간 이중섭을 고루 반영하고, 이중섭의 면면을 보여주려 한다.
비루한 현실에서도 이상을 그려낼 줄 알았던 화가 이중섭의 삶과 예술이 이건희컬렉션을 통해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기를 희망하며, 이 기회를 통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에 대한 이해와 활용도가 한층 더 높아지길 바란다.
#101. 초기드로잉 - ‹세 사람›, 1943-1945, 종이에 연필, 18.3×27.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50년 12월 한국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피란을 떠날 때 이중섭은 자신이 그렸던 대다수의 그림을 고향에 두고 왔다. ‘나 대신 보시라’며 어머니에게 남겼다는 그 그림들은 현재 확인할 길이 없지만, 1940년대에 남긴 몇 점의 드로잉을 통해 그 시기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세 사람>이라는 작품이다. 엎드리고, 쪼그리고, 드러누운 자세의 세 인물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 그림은, 1942년에서 45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두꺼운 종이 위에 무수히 겹쳐진 연필 자국은 일제 강점 말기의 암울한 현실을 반영하듯, 삶의 피로와 무력감, 허무감을 드러낸다. 언뜻 보면 꿈을 잃은 청년들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의 처지를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화면에 길게 가로누운 소년의 왼손과 오른발은 유독 짙은 선으로 강조돼 있다. 암울한 현실에 맞서려는 강한 의지를 이렇게 힘찬 선긋기로 표현해낸 것이다.
#102. 엽서화 1 - 〈나뭇잎을 따는 사람〉, 1941, 종이에 펜, 구아슈, 9×14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1940년대, 이중섭에게 관제엽서는 또 하나의 캔버스였다. 9센티미터 곱하기 14센티미터 규격의 이 작은 화면 위에 이중섭은 수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엽서의 수신인은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였다. 프랑스 유학을 꿈꾸던 그는 마사코에게 보들레르, 발레리, 릴케, 베를렌느 같은 시인들의 시를 외워서 들려주거나 정결하게 베껴 써주기도 했다. 특히, 40년부터 43년까지는 꾸준히 그림엽서를 보내는데,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올 때까지 몇 번이고 실패를 거듭하면서 엽서를 완성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엽서화는 총 88점 그중, 국립현대미술관이 이건희 컬렉션으로 소장하게 된 작품은 40여 점에 이르는데, 이중섭의 학창 시절 작품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지금, 이 작은 엽서화들은 1940년대 그의 작품 경향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그림들이다. 또한, 주소나 발신인 소인 등을 통해 당시 그가 거처하던 곳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작가 연구에 유용한 자료가 된다.
#103. 엽서화 2 - ‹상상의 동물과 사람들›, 1940, 종이에 먹지그림, 채색, 9×14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상상의 동물과 사람들›은 이중섭이 마사코 여사에게 보낸 첫 번째 엽서이다. 1940년 12월 25일 자 소인이 찍혀 있는 이 엽서의 한 가운데에는 소의 머리에 물고기 꼬리를 한 동물이 물 위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동물 위에는 두 사람이 올라타 있는데, 소의 머리 위에 뿔처럼 튀어나온 귀를 붙잡은 채 뒤를 돌아보고 있는 소년과, 물고기 꼬리를 두 다리로 휘감은 채 길게 팔을 뻗으면서 소년을 뒤따르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물에서 날아오른 이 동물은 물가 왼쪽에 자리한 오리와 마주하고 있다. 오리의 옆에는, 한쪽 팔을 젖힌 채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든 사람이 그려져 있다. 물고기와 소를 결합한 동물의 형상은 신화적 이야기를, 오리와 물가에 핀 연꽃은 고려시대의 청자를 각각 연상케 하는 이 그림에서는 40년대 초반 이중섭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초현실적 경향이 엿보인다. 이 엽서화를 시작으로, 이중섭은 41년 한 해 동안, 75장의 엽서화를 보낸다. 현재 남아 있는 엽서화 가운데 80퍼센트에 해당하는 분량이라는 점에서, 이 시기, 그가 엄청난 양의 습작을 하며 기량을 닦아 나갔음을 짐작케 한다.
#104. ‹가족과 첫눈›,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32×49.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이 작품은 이중섭이 피란 시절, 제주도에 정착해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중섭과 그의 가족들은 머물 곳이 없어서 외양간 신세를 지기도 했다는데, 이후 서귀포의 한 초가집에 정착하면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제주도 피난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이 시기 이중섭은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드로잉과 작품을 남겼다. 그 중 ‹가족과 첫눈›은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 속에는 남녀노소가 자신들보다 더 큰 새와 물고기 사이에서 함께 첫눈을 맞으며 하릴없이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사람과 새, 물고기의 크기가 현실 세계와는 다르게 표현됐기 때문인지, 그림은 무척 초현실적인 느낌을 풍긴다. 실제로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 인간과 동물이 어우러진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다수 그렸는데, 이 작품은 1972년 현대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개인전에 출품된 후 거의 전시된 적이 없다가 이번 기증을 통해 다시 세상에 선보이게 됐다.
#105. 새 - ‹투계›, 1955, 종이에 유채, 28.5×40.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두 마리의 닭이 격렬하게 싸우며 역동적으로 얽혀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 ‹투계›는 이중섭의 대표작이다. 화면의 오른쪽 위에서는 붉은 닭이 날아올랐다가 방향을 선회하며 내려오고 있다. 왼쪽 아래의 푸른 닭은 바닥에 풀썩 주저앉은 채 궁지에 몰려있는 듯하다. 하지만 부리를 쫙 열고 소리를 꽥 지르면서 필사적으로 응수하고 있다. 유려한 선의 흐름과 거친 표면 효과가 서로 대비되면서 강한 운동감과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그림인데, 작가는 흥미롭게도 빨강, 노랑, 파랑 등으로 작품의 주된 형상을 그린 다음, 짙은 회색 물감을 화면 전체에 다시 엷게 펴 발랐다. 그리고 이 회색 물감이 완전히 마르기 전에, 살짝 비치는 닭들의 형상을 따라 넓은 끌과 같은 도구를 이용해 표면을 빠른 속도로 긁듯이 휘저어 놓았다. 이런 기법을, 그라타주 기법이라고 하는데, 일필휘지로 그려나간 이런 선들은 이 작품에 강렬한 생동감을 더해주며, 표면에 풍부한 질감을 선사한다. 마지막으로 화가는 그림 가장자리에 옅은 회색의 테두리를 둥그렇게 그려 넣음으로써, 이 격렬한 장면을 마치 아련한 과거의 일인 듯 표현하고 있다.
#106. ‹다섯 아이와 끈›,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연필, 33.5×51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이중섭은 발가벗은 아이들의 걱정 없는 표정을 단순한 선과 형태로 표현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 작품은 이런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그린 작품 가운데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그림 속에 보이는 다섯 명의 아이들은 뒷모습을 보이거나 앉아 있거나 앞으로 구부리는 등 각기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아이들은 줄을 통해 서로 연결돼 있는데, 자세히 보시면, 아이들의 신체 일부 역시 어떤 식으로든 다른 아이들과 접촉하며 얽혀 있다. 어린이와 동물을 그린 이중섭의 작품 대부분에는 이런 특징이 일관적으로 드러나는데, 이런 특징은 심리적인 ‘분리 불안’의 징후를 나타낸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탁월한 데생력과 섬세한 배경처리, 확신에 찬 선들의 리듬감이 잘 드러나 있는 이 작품은, 특히 마무리를 연필로 했다는 점에서도 독특하다. 앞서 ‹세 사람›에서도 보셨듯이 이중섭에게 연필은 매우 중요한 미술 재료였다. 밑그림을 그리거나 스케치를 하는 용도가 아니라, 섬세한 묘사와 형태를 강조하는 용도로 연필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한, 연필로 눌러 윤곽선을 강조하는 기법은 이후에 제작된 은지화 기법과도 연결된다. 이중섭의 실험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연필의 사용은 무척 흥미로운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08. 소 - ‹황소›, 1953년경, Oil on Canvas, 32.3×49.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황소가 울부짖는 순간을 포착한 이 그림에는, 황소의 얼굴이 가득 클로즈업돼 있다. 포효하는 듯 입을 벌리고 있는 황소의 모습에는 강렬한 기운이 가득하다. 서예의 필체를 연상시키는 검은 선들은 황소의 모습에 깊이 팬 주름을 만들어내며 지나온 인고의 세월을 증명한다. 반면, 여전히 순해 보이는 커다란 눈은 황소의 선한 품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그림은 1950년대 전반 그려진 이중섭의 걸작, ‹황소›인데, 소는, 이중섭이 가장 애정했던 소재 가운데 하나이다. 소를 관찰하느라 너무 뚫어지게 쳐다보는 바람에 소도둑으로 오해를 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니까. 이중섭이 활동하던 당시, 소는 화가들에게 인기를 끌던 소재였다. 화가들은 일제의 식민정책에 신음하는 한민족을 소에 빗대 그림을 그리곤 했다. 또한 소는 이중섭의 자화상으로 읽히기도 한다. 어머니, 또는 대지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1940년 초기작에서 정면을 바라보는 소 그림을 그려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하기도 했던 이중섭은 해방과 전쟁 시기를 거치며 소 그림을 더욱 적극적으로 그리기 시작하는데, 특히 통영과 진주에서 작업에 매진하던 1954년경, 이 작품, ‹황소›를 비롯해 생애 최고의 작품들을 쏟아낸다.
달과 말을 탄 사람들, 1941, 종이에 펜, 크레용, 14×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소와 말과 두 남자, 1941, 종이에 먹지그림, 채색, 9×14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소와 말
높과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 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 1951년 봄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 방에
붙어 있던 시를 조카 이영진이 암송하여
전하는 것이다.
#109. 출판미술 - ‹새›,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22.5×1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꿈에 본 병사›, 1950년대 전반, 종이에 펜, 유채, 29.5×19.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이중섭은 작품 활동을 하는 틈틈이, 책 표지나 삽화 같은 출판미술을 제작하기도 했는데, 표지화 한 점을 제작하기 위해, 같은 도상을 여러 번 그렸다고 한다. 또한, 표지화를 제작하고 난 뒤에는 비슷한 그림을 그려서 편지와 함께 일본의 아내에게 보내곤 했다. 덕분에 비슷한 작품이 여러 점 남아 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문중섭 대령의 전투를 담은 『저격능선』이라는 수기의 표지화와 관련된 두 작품을 만나보실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고지전을 벌였던 저격능선 전투 이야기를 담은 이 수기의 표지화를 위해, 이중섭은 칼을 든 병사의 모습을 그렸다.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켄타우로스처럼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말의 모습을 한 병사의 칼끝과 온몸에는 여기저기 핏자국들이 선명하다. 그런데 사실, 전투능선 표지화를 위해 이중섭이 처음 그렸던 것은, 다른 그림이었다. 바로, 피 묻은 새가 능선 위를 날고 있는 그림인데, 군인의 용맹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못한 이 그림은, 2년 뒤였던 1957년 『자유문학』 9월호에 실리게 된다. 표지화나 삽화의 제작은, 생계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화가의 예술 세계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어주기도 했다. 또한, 날짜가 인쇄되어있는 덕분에, 유사한 도상을 즐겨 그렸던 이중섭의 작품 제작시기를 추정하고 진위여부를 판별하는 데에도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어준다.
#110. ‹나무와 까치가 있는 풍경›,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40.7×28.3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1953년 11월 부터 이중섭은 통영에 머물며 교사 생활을 한다. 남쪽으로 피란을 내려온 후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에게 통영에서 머물던 이 시기는 이런저런 걱정 없이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평화롭고 소중한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 그는 통영의 풍경을 담은 꽤 많은 풍경화를 남겼다. 현재 남아 있는 9점 가운데 하나인 ‹나무와 까치가 있는 풍경›은 제목처럼, 나무 위에 까치가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화면 전면에 자리 잡은 나무의 가지에는 잎이 달려 있지 않다. 그래서 언뜻 보면 겨울의 풍경을 그린 듯하지만, 화면 오른쪽 윗부분으로 시선을 옮겨보면, 녹색 줄무늬의 밭이랑이 펼쳐진 것을 볼 수 있다. 이 통영 시기, 이중섭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왕성한 창작욕으로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리며 ‹흰 소›, ‹부부› 같은 대표작을 제작하기도 했다. 특히 5월에는 유강열, 장윤성과 함께 «3인전»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113. 가족 - ‹판짓집 화실›, 1950년대, 종이에 팬, 수채, 크레용,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켈렉션
‹판잣집 화실›은 1955년에 열릴 개인전을 한창 준비하던 시기에 그린 작품으로서, 54년 11월 무렵 거주하고 있던 마포구 신수동 집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돌로 둘러싸인 집 근처에서는 강아지 한 마리가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고, 집 뒤와 언덕 너머에는 잎사귀 없는 나무들이 서 있다. 푸른색으로 처리돼 더욱 스산해 보이는 이 초겨울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실내는 노란빛으로 따뜻하게 밝혀져 있다. 벽에는 온통 작품들이 걸려 있는데, 이 가운데에는 이중섭의 개인전에 출품됐던 소와 닭 그림도 보인다. 방바닥에는 이제 막 완성된 듯한 그림들과 화구들도 널려 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활짝 벗은 알몸의 화가가 이불을 덮은 채 누워 있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달아오른 백열구처럼, 화가의 얼굴도 빨갛게 상기되어 있다. 아마도 지금 그는 그림을 다 완성한 뒤, 아내와 아이들에게 보낼 편지까지 써놓은 다음, 흡족한 마음으로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다. 곧 있을 전시회에서 작품을 팔아 그 돈으로 일본에 있는 가족을 만날 생각에 한껏 부푼 채 말이다. 1954년의 이중섭은 이렇게나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14. ‹춤추는 가족›,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22×29.7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춤추는 가족›은 푸른 공간을 배경으로 나체의 가족이 춤을 추며 원을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힘찬 선으로 면을 표현한 덕분에, 원을 이룬 네 사람은 마치 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하지만 긴 얼굴과 콧수염을 한 이중섭의 모습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그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 이들은 부인 마사코와 두 아들이다. 이렇게 손에 손을 잡고 원을 그리고 있는 가족의 모습은 앙리 마티스의 대표작, ‹춤›을 연상케 하는데, 춤추는 가족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 이 그림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그렸던 화가 이중섭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그리움을 담아 작품 제작에 매진했던 그는, 거처를 옮기고 건강이 나빠지는 와중에도 아이들이나 가족을 그리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비슷한 도상의 작품이 여럿 남아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춤추는 가족의 모습을 담은 같은 제목의 작품도 함께 전시되고 있다.
#116. 말년화 - ‹정릉풍경›, 1956, 종이에 연필, 크레용, 43.5×29.3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중섭이 말년에 그린 풍경화이다. 앞쪽으로는 키가 큰 소나무가 화면을 세로로 가득 채우고 있고, 아래쪽에는 전형적인 돌담과 기와집이 자리하고 있다. 집과 나무 사이로는 새벽인지 해 질 녘인지 모를 어스름이 드리워져 있다. 노란빛이 섞인 하늘은 봄을 예견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황량한 느낌을 준다. 거친 연필선 위에 크레파스로 색을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유채로 살짝 덧칠을 가하는 방식으로 제작된 이 그림은, 이중섭이 이 무렵까지 기법적 실험을 계속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주는데, 이 그림을 그리던 1956년 당시, 이중섭은 심신이 무척 지쳐있는 상태였다. 55년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열린 개인전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뒤, 거식증으로 인한 영양실조와 간염 등으로 매우 황폐한 생활을 하던 그는, 서울 정릉의 골짜기에서 친구였던 작가 한묵과 함께 살게 되는데, 당시 정릉에는 화가 박고석과 한묵, 소설가 박연희, 시인 조영암 등이 옹기종기 이웃해가며 살고 있었다. 그 시절 그린 ‹정릉 풍경›은 당시의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따뜻하면서도 쓸쓸한 기분을 자아낸다.
◇ 담뱃갑 은지에 새겨진, 이중섭의 평화주의
이중섭의 〈게와 가족〉, 1950년대 전반, 은지에 새김, 유채, 10×1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의 은지화 속에는 계급도 없고 차별도 없다. 아이들과 물고기, 게들이 동급을 이뤄 함께 어울리며 끈과 같은 소도구로 연결돼 있다. 공동체 정신과 평화 정신, 범생명주의 가치관이 담겨 있다.
“행복이 무엇인지 대향은 비로소 깨달았다오. 그것은… 천사처럼 훌륭한 남덕 씨를 진정한 아내로 삼아 사랑의 결정체 태현이, 태성이 두 아이를 데리고… 끝없는 감격 속에서 크게 숨을 쉬고, 그림으로 표현해내면서… 화공 대향 현처 남덕이 하나로 녹아 진실하고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이라오. 나만의 훌륭하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아내, 나의 남덕 씨, 힘을 냅시다. 남덕 대향의 결합은… 우주의 의지이며 온갖 생명을 기름지게 하는 올바른 삶의 지표가 될 것이오. 생명의 환희가 솟구치는 샘이며 별처럼 끝도 없이 신비하며 태양처럼 밝은 빛이라오. 더, 더 서로 사랑하며 뜨겁고 격렬하게 하나로 녹아야 하오. 나의 멋진 천사 남덕 씨와 화공 대향의 만남은 그 자체로 신비이며 참으로 신기한 기적이라오.”
대향(大鄕) 이중섭이 두 아들과 함께 일본에서 살고 있는 아내(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에게 1953년 9월에 보낸 편지이다. 전쟁은 이들 가족의 삶을 깼고, ‘화공(畵工) 대향’은 ‘멋진 천사’를 그리워하면서 어렵게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던 시절의 연문(戀文)이다. 이중섭의 아내 사랑. 이들의 사랑은 인류사의 모든 사랑을 합쳐도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였다.
이중섭의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54, 종이에 잉크, 색연필, 26.5×21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은
일본에 사는 아내와 두 아들을 그리워하다가 불과 40세에 숨을 거뒀다. 사진: 이영일
1952년 6월, 생활고 때문에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이중섭은 이듬해 3월 9일부터 55년 12월 중순까지 꾸준히 아내에게 그림을 곁들인 편지를 써 보낸다. 이 편지들 속에는 자신의 애칭이었던 ‘아고리’, 아내의 애칭이었던 ‘천사’ 같은 애정 어린 말들도 자주 등장하는데, 52년경 이중섭과 함께 범일동에서 생활했던 박고석 작가는 정성을 들여 편지를 쓰던 그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한다. 마치 연애편지라도 쓰듯, 몇 번이나 찢어버리면서 다시 쓰고 그림을 꼭 곁들였으며, 봉투를 쓸 때는 굵직한 펜으로 마음에 들 때까지 몇 장이고 글씨를 반복해서 다듬었다. 현재 남아 있는 38통의 편지 가운데, 1954년 11월경에 보낸 이 편지는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애정과 화가로서의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이 편지를 쓸 당시, 이중섭은 이듬해 열릴 개인전 준비에 한창이었는데,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면,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작업에 매진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중섭의 많은 대표작은 이 편지를 쓰던 즈음 제작되었는데, 편지에 함께 그려진 그림에서도, 당시 화가가 품었던 기대감과 의욕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그림으로 응축되었다. 전시하고 돈 벌어 일본의 처자를 만나러 가려 했으나 그림은 팔리지 않았다. 정신적·육체적 피폐함은 날로 심해졌다. 결국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 병상에서 이중섭은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나이 불과 40세(1916∼1956), 너무나 안타까운 생애였다. 도쿄의 부인은 두 아들을 어렵게 키우면서, 또 먼저 간 이중섭을 60년도 넘게 그리워하다가 최근 이승을 떠났다. 그의 나이 101세였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도쿄문화학원 캠퍼스에서 만난 이들 한 쌍은 20세기 질곡의 현대사와 함께하면서 개인사적 비극을 안아야 했다. 비극은 한 예술가의 탄생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 불행한 환경도 잘 가꾸면 훌륭한 작품으로 승화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는 ‘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중섭’을 개최하고 있다. 기증품 약 1500점 가운데 이중섭의 작품이 100점 정도 포함돼 있어 가능한 전시였다. 6·25전쟁 당시 원산에서 갑작스럽게 월남했기 때문에 전쟁 이전의 이중섭 작품은 보기 어렵다. 오늘날 서울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은 대부분 전쟁기의 피란지에서, 그리고 처자를 일본으로 보낸 다음 1956년 요절할 때까지의 불과 5년가량의 제작에 해당한다. 이들 가운데 1940년대 초반의 마사코에게 보낸 사랑의 그림엽서는 매우 소중하다. 그리고 이중섭 예술의 정수라 할 은지화는 더욱 소중하다. 이건희 컬렉션의 이중섭 작품은 엽서화와 은지화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이번 특별전을 마련하면서, 나는 은지화에서 새삼스러운 감동을 안았다. 정말 이중섭 세계의 핵심이 다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중섭 예술은 전쟁기의 열악한 환경에서 탄생된 독특한 사례에 해당한다.
은지화는 담뱃갑을 감싼 종이다. 전쟁과 전후 복구 시기의 물자난은 화가로 하여금 그림 재료를 쉽게 확보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이중섭 그림의 대부분은 작은 종이에 그린 것이고, 게다가 담뱃갑의 은지에 상당수 그림을 그려야 했다. 엽서화만 해도 이중섭 특유의 필치는 아직 숙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은지화는 무엇보다 유려하면서도 일필휘지의 역동감 있는 선묘(線描)가 특징을 이룬다. 못 같은 뾰족한 도구로 음각하여 검은 물감을 집어넣은 그림이다. 마치 청자의 상감기법을 응용한 것 같다. 손바닥만 한 작은 크기에 이중섭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았다. 소재상의 특징은 무엇보다 아이들의 세계를 집약했다. 벌거벗고 엉켜 있는 천진무구한 동심의 아이들. 그들은 어떤 격식도 없는 자유, 그 자체의 자세를 보이고 있다. 아이들의 세계는 이중섭의 대향, 바로 커다란 마을, 즉 이중섭의 이상향이다. 거기에는 계급도 없고 차별도 없다. 그래서 물고기나 게들도 동급을 이뤄 함께 어울리고 있다. 바로 범생명주의의 도해이다. 이중섭 그림의 소재들은 박수근과 달리 원형 구도를 이루면서 함께 공동체 정신을 담았다. 이들은 끈과 같은 소도구로 연결돼 인연설을 입증하기도 한다.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네가 있다. 바로 전쟁기에 피어난 이중섭의 평화 정신이다.
이중섭의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전반, 종이에 펜, 유채, 32.8×20.3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의 이중섭의 인간관계는 ‘축복’에 가까웠고, 이것이 가족애, 인류애로 이어졌다. 사진: 이영일
이중섭이 아이들을 모티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46년부터였다. 원산의 한 고아원에서 잠시 미술을 가르치던 시기였으며, 갓 태어난 그의 첫아들이 디프테리아로 사망한 때이기도 했다. 세상을 떠난 아들의 무덤에 이중섭은 온갖 장난을 치는 아이들이 그려진 그림을 함께 묻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이 빈번히 등장한다. 특히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라는 도상을 바탕으로 5점의 작품이 남겨져 있는데, 그 가운데 두 점이 지금 보고 계시는 작품들이다. 화면에는 두 아이가 위아래로 자리하고 있다. 긴 줄이 이 두 아이를 연결해주고 있다. 줄을 잡고 있는 또 다른 생명체도 눈에 띄는데. 줄의 양 끝에는 물고기가 매달려 있고, 화면 가운데에는 큰 꽃게가 앞발로 줄을 당기고 있다. 이 그림의 모티브가 된 것은, 1951년 가족과 함께했던 제주도 피란 생활이었다. 바닷가에서 딴 해초와 게를 주식으로 삼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이 시절은 이중섭과 가족들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남았다. 이렇듯 아이들과 함께한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 두 작품 가운데, 왼쪽 그림은 잉크 드로잉과 유채로 그림을 마무리한 뒤, 불투명한 색조로 다시 한번 덧바르는 방식을 취했다. 덕분에 마치 돌에 음각으로 새겨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원색이 조금 더 드러나는 오른쪽 작품은, 1954년 일본에 있던 큰아들 태현에게 보낸 편지에 동봉된 그림이다.
나는 이중섭 작품에서 ‘관계’를 생각한다. 오산학교 시절 당대 최고의 지성 임용련 백남순 부부 화가를 만난 것, 시인 백석의 후배라는 것, 그리고 도쿄 시절 이쾌대 등 신미술가협회 화우들과 만난 것 등 이중섭의 인간관계는 축복이기도 했다. 이런 사회적 관계는 작품세계로 연결돼 ‘가족’을 각별하게 강조하게 되었고, 가족애는 인류 사랑의 범생명주의로 확장되었다. 이는 생사를 다퉈야 했던 전쟁 시기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주 작은 그림 은지화에서 이중섭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 아주 작은 그림, 그 속에 뜨거운 예술정신이 가득 담겨 있다. 은지화를 보면서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모든 생명체는 하나다. 네가 있어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날로 각박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이중섭의 메시지는 소중하다. 그래서 그를 두고 국민화가라고 부르는지 모르겠다. 국민화가 이중섭!
중섭은 참으로 놀랍게도 그 참혹 속에서 그림을 그려서 남겼다.
판잣집 골방에 시루의 콩나물처럼 끼어 살면서도 그렸고,
부두에서 짐을 부리다 쉬는 참에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대폿집 목로판에서도 그렸고,
캔버스나 스케치북이 없으니 합판이나 맨종이, 담뱃갑 은지에다 그렸고,
물감이나 붓이 없으니 연필이나 못으로 그렸고,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부산, 제주도, 통영, 진주, 대구, 서울 등을
표랑전전(漂浪轉轉) 하면서도 그저 그리고 또 그렸다
- 구상, '이중섭의 인품과 예술', <대향 이중섭>, 한국문학사 1979년 4월 141쪽
〈줄 타는 사람들〉, 1941, 종이에 펜, 채색, 9×14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사다리를 타는 남자, 1941, 종이에 펜, 채색, 14×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원과 삼각형, 1941, 종이에 펜, 구이슈, 14×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바닷가의 해와 동물〉, 1941, 크레용, 종이에 펜, 9×14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두 사람, 1943, 종이에 펜, 채색, 14×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꽃동산과 동물들, 1941, 종이에 펜, 색연필, 14×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물고기와 여인과 아이, 1941, 종이에 먹지그림, 구이슈, 9×14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비둘기와 손(아빠 ㅈㅜㅇㅅㅓㅂ)〉, 11950년대 전반, 유채, 26.5×19.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야스타군(아빠 ㅈㅜㅇㅅㅓㅂ)〉, 아주 잘 그렸어요! 또 잘 그려서 보내주세요. 아빠 ㅈㅜㅇㅅㅓㅂ,
1941, 종이에 펜, 14×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켈렉션
〈현해탄〉, 1950년대 전반, 종이에 펜, 유채, 13.7×21.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1953년 이중섭은 가족을 만나러 일본으로 갔으나 5일간의 해후를 끝내고 헤어졌다. 그림 속 그는 현해탄(玄海灘)이라고 불렀던 대한해협을 건너서 세 가족을 만나러 간다. 얼마나 기뻤으면 머리가 뒤로 젖혀져 얼굴이 거꾸로 그려졌다. 이처럼 그는 일본으로 보낸 편지에 다시 만날 소망을 담은 그림을 동봉하곤 했다.
〈사슴과 두 어린이〉,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연필, 유채, 13.7×19.8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사계〉,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26.5×35.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물놀이 하던 아이들〉, 1950년재 중반, 종이에 유채, 30×40cm, 국립현대미술관이건희컬렉션
〈손과 새들〉, 1950년대 중반, 장판지에 유채, 29×39.3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가족〉,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26.5×35.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꽃나무와 아이들〉, 1941, 종이에 펜, 채색, 9×14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두 마리 동물〉, 1941, 종이에 펜, 채색, 9×14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가족〉, 1950년대 전반, 은지에 새김, 유채, 10×15.2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네 아이들〉, 1950년대 전반, 은지에 새김, 유채, 8.8×1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열명의 아이들〉, 1950년대 전반, 은지에 새김, 유채, 10×15.2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꽃과 이린이와 게〉, 1950년대 전반, 종이에 펜, 7×38.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다섯 아이와 끈〉,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연필, 33.5×51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다섯 명의 아이들〉,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연필, 유채, 26.5×43.5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 1950년대 전반, 종이에 유채, 25.8×19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과일 따는 사람들〉, 19541, 종이에 펜, 14×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동물과 두 사람〉, 1941, 종이에 펜, 채색, 14×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오리 두 마리와 아이〉, 1941, 종이에 펜, 채색, 14×9cm,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은종이(담뱃갑)에 송곳으로 선을 북북 그은 위에
암비 색깔을 대충 칠한 뒤 헝겊이라도 좋고,
휴지뭉치라도 좋아라.
적당하게 종이를 닦아내면
송곳 자국의 선은 암비 색깔이 나고
여백은 광휘로운 금속성 은색 위에 이끼 낀 듯
은은한 세피아조(調)가 아룽지는
중섭형의 그 유명한 담배딱지 그림도
이 무렵에 이룩된 가장 창의적이요,
독보적인 마티에르인 것이다.
- 박고석, '이중섭을 가질 수 있었던 행운', <이중섭 작품집>, 현대화랑, 1972년 3월, 107쪽
이중섭이 1952년쯤 부산에서 일본에 있는 부인 이남덕(야마모토 마사코)에게 보낸 편지./서귀포 이중섭미술관
이중섭 친필 편지 두 점. 한 점의 편지에는 이중섭이 서귀포 시절을 그리워하는 내용이 담겨 있고, 또 한 점에는 이중섭 부인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내용.
1952년쯤 부산에서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편지 끝부분에는 ‘제주도의 게에 대한 추억이오. 태현이와 태성이에게 보여주시오.’라고 쓰여 있다. 가족을 그리워하며 ‘그리운 제주도 풍경’이라는 그림을 그려 편지와 함께 보냈다. 이중섭은 가족이 그리울 때면 늘 가족과 함께 지냈던 제주도를 떠올렸다는 점을 보여주는 자료다.
다른 한 점의 편지에는 이중섭이 아내에게 ‘스케치하러 나가기 전에 귀여운 당신이 그리워 설레는 마음으로 폴 발레리의 시와 폴 베를렌느의 시를 적어 보내오’라고 쓰여 있다. 지금까지 아내의 증언으로만 알 수 있었던 사실을 확인해 주는 자료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중섭이 보낸 엽서화 '하나가 되는'. 야마모토 마사코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바람이 담긴 듯.
1941년 6월 4일, 사진 혜화1117 제공
화가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이남덕)의 젊은 시절 사진. 사진 혜화1117 제공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가 결혼식을 올린 모습. 1945년 원산에서, 사진 혜화1117 제공
야마모토 마사코 여사의 모습. 그녀의 뒤로 이중섭의 사진과 두 사람의 결혼식 사진이 선반에 올려진 모습.
2016년 9월 1일 첫 번째 인터뷰를 할 때, 사진 오누키 도모코 촬영.
이중섭(1916∼1956), ‘시인 구상의 가족’, 1955년,
케이옥션 2024년 4월 경매에 이중섭이 오랜 친구인 시인 구상(1919∼2004)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
이중섭이 경북 왜관 구상의 집에 머물며 그의 가족을 보고 그린 그림. 경매 시작가는 14억 원/ 케이옥션 제공.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KBS1 <예썰의 전당> [33회] 봄을 향한 진심, 이중섭,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정보, 동아일보 2022년 09월 13일(화)<윤범모의 현미경으로 본 명화(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영감 한 스푼(동아일보 김민 기자), Daum·Naver 지식백과/ 글과 사진: 이영일 ∙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고봉산 정현욱 작가님
여태 피상적으로만 알고있는 이중섭의 미술세계를 제대로 다 볼수있는 기회 같아 꼭 한번 관람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