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필자는 처음 미국에서 구명시식을 올렸다. 그 날의 구명시식은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다. 뜻밖에 박정희 전 대통령 영가가 나타나고, 김형욱 영가까지 출현해 나를 무척 긴장하게 했다. 가장 압권이었던 장면은 100명의 영가들이 한꺼번에 출현한 것. K장관 여동생의 구명시식이 끝나자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영혼의 소리가 감지됐다. ‘타닥, 타닥!’ 요란한 소리는 내 귀에만 들린 것이 아니었다.
어림잡아 100명은 족히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영가들은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다음 순서는 신흥종교단체 임원인 국제결혼 부부. 유대인 남편과 전라도 출신 한국인 아내는 한 종교단체의 주선으로 결혼했다. 영혼 세계에 무척 관심이 많았던 유대인 남편은 대단한 배경의 소유자였다.
의식이 시작되자 미국 뉴욕시의회 의장까지 지낸 명사 영가가 나타났다. 그는 검은 정장을 입고 나타났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생전에 자신과 가까이 지냈던 뉴욕의 명사들과 함께 온 것이다. 미국 AT&T, IBM 등 굴지 기업의 최고 간부였던 그들은 “우리가 미국의 역사를 만들었다”며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순간 현장은 미국 상류층 파티를 연상시켰다. 영가들은 “죽은 뒤 별 재미가 없었는데 이런 자리에 초대해줘 고맙다”며 향후 미국과 한국의 미래에 대해 조언해주었다.
내가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됐다고 말하자 그들은 서로 돕겠다며 나섰다. 특히 그날은 유대계 영가들이 많이 왔는데, 법당을 지켜준 토지신 역시 같은 유대계라 가족 같은 분위기가 연출됐다. 구명시식을 파티처럼 즐기고 간 상류층 영가들은 매우 즐거워하면서 앞으로 친분 있는 명사들을 법당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미국 상류 인사들의 구명시식을 올릴 때마다 그들과 재회해 오랜 친구처럼 담소를 나눴다.
이들이 사라지자 분위기는 180도 달라졌다. 갑자기 고통에 절규하는 듯한 비명소리가 참담하게 들려왔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영가들이 몰려왔습니다”고 하자 종교단체 임원의 부인은 “우리 가족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전라도 지주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6·25때 지주 가문이라는 이유로 할아버지, 아버지 등 온 가족과 근방 유지들까지 한꺼번에 몰살당했다. “죽은 사람이 모두 서른여섯 명 맞습니까?” 내가 정확한 사망자 수를 언급하자 놀라는 눈치.
비극이 벌어진 날, “부르주아 타도!”를 외치던 마을 사람들이 조부의 집에 쳐들어가 어린 그녀는 물론이고 식구들을 모두 끌어낸 뒤 야산으로 끌고 가 죽창으로 사정없이 찔러 죽였다. 생존자는 단 한 명, 바로 그녀였다. 조부와 부친 영가는 죽창으로 찔린 상처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는 피해자 36명 영가만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죽인 마을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나타난 것. 어느새 영가 수는 100명이 훌쩍 넘었다. 훗날 빨치산이 된 가해자들은 지리산 일대에서 전투를 벌이다 나의 부친 차일혁 총경이 이끈 빨치산 토벌대에 의해 전원 사살됐다고 말하며 나와의 인연을 강조했다.
이내 법당 안은 소란스러워졌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엉켜 서로를 험담했다. 그러나 가해자 영가는 자신도 피해자라며 구명을 요청했다. 부친의 부대에 의해 전멸됐으니 외면할 수도 없는 일. 나는 차례로 36명의 영가를 천도했다.
그 날 새벽, 동이 훤히 터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깊은 사색에 잠겼다. 유재인 토지신 영가는 “한국 전쟁은 영원한 숙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며 나와 빨치산 영가의 인연을 예견했다. 이후 전쟁의 원혼들을 수없이 천도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었음을 안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2003년 10월25일 구명시식을 올리던 중 1971년에 발생한 남원역 기차사고 역시 그 영적 내막에 6·25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40대의 부인이 32년 전 남원역 기차사고로 세상을 떠난 언니를 위해 구명시식을 해 달라며 필자를 찾아왔다. 그녀는 낮에는 레슨을 하고 밤에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1년 동안 열심히 번 돈으로 구명시식을 청한 것이다. 그만큼 언니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것. 그 날 부인의 진술과 구명시식을 통해 밝혀진 사연은 이랬다.
1971년 10월13일 새벽, 장작불을 때던 어머니는 좌불안석이었다. “엄마, 왜 그래?” 막 잠이 깬 작은딸이 물었다. “네 언니, 수학여행 괜히 보낸 것 같다. 트럭에 치이는 꿈을 꿨는데 무슨 일 나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전날 일이 생각났다. 시장에서 어머니는 언니에게 하얀 운동화를 사줬다. 원래 언니는 빨간 구두를 신고 싶어 했지만 자기도 사달라고 조르는 바람에 운동화만 집어 들고 나왔다. “언니는 운동화 신고 갔나 봐. 나도 수학여행가면 신발 사줄 거지?” 작은딸의 말에 어머니는 불안감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같은 시각, 남원역. 안개가 짙게 낀 플랫폼에 남원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차례로 기차에 올라탔다. 고적대 리더인 큰딸은 고적대 친구들과 같이 앉았다. 수학여행에서 멋진 공연을 보여줄 계획이었기 때문에 잠시나마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공연 때 신을 구두를 보여주며 자랑했지만 큰 딸은 운동화가 더 편하다며 한 마디도 지지 않았다.
드디어 기적이 울리고, 기차가 움직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슬금슬금 후진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였다. ‘쿵쾅!’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엄청난 쇳덩어리가 차량을 짓눌렀고 그 충격으로 기차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삽시간에 객차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살려 달라”는 고통 섞인 절규 너머로 피 묻은 하얀 운동화가 뒹굴고 있었다.
사망 20명, 부상 48명. 사고는 짙은 안개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후진하던 차량을 발견하지 못한 채 진입하던 후속 차량이 후미 부분과 충돌, 지붕 위로 치고 올라오면서 앞 차량이 하중을 이겨내지 못하고 탈선해 벌어진 대형 사고였다.
“언니의 관에 빨간 구두를 넣어줬어요. 그렇게 신어보고 싶어 했는데….” 32년 전 그날을 생각하며 동생은 눈물을 흘렸다. 구두를 사 달라 생떼를 부렸던 동생도 이제는 40대. 음악을 전공한 그녀였지만 인생길에는 고초가 많았다. 힘든 고비를 넘길 때마다 언니한테 기도를 해왔고 오래전부터 구명시식을 준비했었다고 고백했다.
의식이 시작되자 너무나 예쁘게 생긴 소녀 영가가 내 앞에 나타났다. “빨간 구두 고맙다”며 빨간 구두를 신고 춤을 추며 까르르 웃었다. 그녀 주위에는 그날 함께 죽은 친구들도 와 있었다. 모두 그녀가 먼저 천도될까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친구들과 같이 천도시켜 주세요. 혼자서는 안 갈래요.” 그제야 친구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천도 직전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저희는 광한루가 내려다보이는 산에 묻혀 있어요. 그런데 그곳이 곧 개발된다고 해요.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죠?”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남원역 사고가 기억 속에서 잊혀 졌다는 이유로 희생자가 묻힌 곳을 개발하다니.
남원 근방 기찻길에서 사고로 죽은 영가들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었다. 1952년 유명한 빨치산 ‘외팔이’가 남원 부근 철도에 폭탄을 설치, 대규모 사상자를 발생케 했던 것. 그때 죽은 승객 원혼들이 기찻길을 방황하며 제 2, 3의 희생자를 만들고 있었기에 대형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1971년 남원역 사고 외에도 1997년 3월24일에는 남원의 한 철도 건널목에서 열차와 버스가 충돌, 16명이 숨지는 사건까지 원혼은 원혼을 부르고 있었다.
남원 부근 기차 사고의 영적 원인 제공자 빨치산 ‘외팔이’. 영가가 되어 나타난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역사’는 계속된다는 듯 번뜩이는 눈으로 희생자 영가들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