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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개종 원문보기 글쓴이: sutani
예수는 신화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목사(신학자)들에게...! (예수는 신화가 아니라는 항변의 기독교계 글은 여기를 클릭하세요!)
위 기독교 목사나 신학자연 하는 자들의 항변, '예수는 신화가 아니다', '호루스, 디오니소스, 조로아스터교....등과 차이점이 있다', '신자들이여 미혹되지 말라', '예수를 신화라고 하는 마귀들아! 감히 늬들이 우리들의 밥줄(종교 권력)을 뿌리부터 흔드느냐?', '신자들이여 평상시와 동일하게 흔들리지 말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 출석 잘해야 천당에 갈 수 있으니 그리들 아시오!', '늬들이 그래봐야 우리 기독교는 안 흔들린다'
이런 간절한 항변과 호소가 절절히 느껴지는 그들의 반박 기사들을 읽게된다. (마치 자기 자신의 어릴적 돌사진과 80이 다된 노년의 사진 두장을 꺼내놓고 다르지 않냐고 항변하는 희극을 보는듯 하다.)
목사니 신학자니 하는 자들이 쓴 글들은 신화 자체의 여러 기록과 전승과 변형과 발전 형태등를 숨긴채 예수 신화와 다른 예수 신화의 원형이라 여겨지는 신화들의 원론적 부분만을 골라 예수신화와 고대 중동 오시리스 신화는 이러이러 한 점들이 다르다는 주장을 반복한다. 신앙적인 고백에 입각하여 기독경 구절과 교리와 억측을 내세우기도 한다. 예수는 신화라는 물가에 얼씬도 못하게 으름장을 놓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는 그들의 습관적 계산이 나온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죽었다가 사흘만에 살아나고 발판이나 플렛폼도 없는 수증기일 뿐인 구름을 타고 나발(유대인의 신 야훼 전용 천당에 나발을 만드는 철광석이 있나 모를 일...?) 불며 내려와 무조건 인간을 두패로 나눠 심판하는 무자비한 이원론적 조로아스티즘적인 예수 신화는 고대 중동의 부활신화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마가 누가에는 짧게 언급되어 있으나 후대의 첨가된 문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 승천전설은 고대 어디에나 없는 곳이 없는 흔해빠진 신화다.- 。。。。。。。。。。。。。。。。。。。。。。。。。。。。。。。。。。。。。。。。。。。
기독경 교리와 구절, 특히 바울의 영지주의적 주장은 빼고 문자주의적 주장만을 골라 인용하거나 기독경 조작의 대부로 알려진 교부 유세비우스,이레나이우스도 인용한다. 이들의 주장 무엇이 예수신화와 고대 부활신화의 단절성을 설명한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그리고는 [예수는 신화다]의 책 몇 페이지, 몇 페이지를 들먹이면서 책에 오류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식이라면 기독경 자체의 논리적 오류는 감당불능일 것인데...) 그리고는 고대의 영지주의 복음서들은 믿을 게 못된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한다.
즉,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총 5가지이다.
호루스 신앙의 최초 원류와 이집트 민간이나 왕실에 마지막까지 남은 신화는 전혀 달라졌다는 점은 쏘옥 빼버렸다. 호루스 신화의 원형은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호루스는 땅의 신 게브(Geb)와 하늘의 신 누트(Nut)의 아들로 누이동생 이시스와 결혼하였는데, 형의 왕권를 탐낸 동생 세트(Seth)에게 살해되고 그의 시신은 14조각으로 토막나 온 나라에 흩어져 버렸다.
어머니 이시스(Isis)는 그 시체 조각을 모두 다시 찾아 맞추어 최초의 미이라를 만들고 그의 성기(性器)를 살려 내어 호루스(Horus)가 탄생한다. 부활의 믿음으로 그가 부활하여 죽은 자들의 사후세계, 즉 천국의 왕,심판주가 되었다는 신화다.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왕좌)에 앉으시니라
부활하여 하늘에 올라(승천) 왕이 되었다는 뼈대는 예수신화와 완전히 같지만 세부항목들은 상당히 다르다.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한 디오니소스 디오니소스 신앙은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시리아...등으로 퍼져 일반화 되면서 매우 찬란한 갈래로 발전해 나갔다.
성찬식을 비롯한 다양한 의식과 교회 모임, 부활절 행사가 생겨났는데, 이런 의식을 통해서 인류 역사 최초로 급기야 연극이란 예술 체계가 생겨났다. 디오니소스 신앙 의식이 얼마나 고의식으로 발전했는지를 보여준다. 누명을 쓰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해 산자를 구원하는 구세주라는 교리가 이미 굳어져 있었다. 이런 디오니소스 신앙이 예수신화 창작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제우스의 넓적다리, 세멜레와 헤라,술의 신, 포도재배를 보급한 신....이라는 원론적인 디오니소스 신화론을 거들먹거리는 기독교계의 주장은 이점을 숨긴 간악한 속임수다. 。。。。。。。。。。。。。。。。。。。。。。。。。。。。。。。。。。。。。。。。。。。。。。。。。。。
이집트의 부활 신앙은 메소포타미아 부활신앙과 그 맥이 닿고 있다. 예수신화와 비교하면 거리감이 느껴진다.
예수신화는 상당히, 그리고 적어도 3류소설 수준의 현실감이 있기 때문에 문장이나 구성이 엉성하다 해도 전혀 비판없이 그대로 믿게 된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세계최초의 연극 예술을 탄생시켰다.
┗키클라데스제도 에게해 델로스섬의 디오니소스신전의 제단 디오니소스 신화가 신화로 끝나지 않고 제단에서 예배를 드리고 여러 신앙적 의식이 행해졌다.
┗웅장한 바알베크 바커스(디오니소스)신전 디오니소스 신앙이 얼마나 거대한 신앙체계로 온 세계에 파급되어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사산왕조페르시아 500~650년 왕조의 호리병으로 디오니소스 신이 새겨져 있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중동의 페르시아 왕국에까지 두루 퍼져 유대인들의 예수신화 만들기에 이어진 것이다. 。。。。。。。。。。。。。。。。。。。。。。。。。。。。。。。。。。。。。。。。。。。。。。。。
유대인들이 주변 여러 민족의 신화라는 소스를 버물여 히브리적인 경전을 기록하는 방식에는 두가지가 있었다. 신약의 예를 들면 디오니소스가 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이민족 전승을 유대화 하는 방식을 예로 들어보자.
따라서 디오시소스와 결혼식 그리고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레 나왔다. 깊은 연관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이치와 같다. 예수와 물과 포도주로 바꾸되 교활하게 유대땅의 구체적인 지명과 사건 인물과 연결시킨다. 자 보자!
。。。。。。。。。。。。。。。。。。。。。。。。。。。。。。。。。。。。。。。。。。 기존 디오니소스의 기적 원소스:결혼식. 물. 포도주. 디오니소스.여사제들 예수 신화로의 변형:→→→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장소:갈릴리 가나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있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첩받았더니 ↔인물:마리아, 제자들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왜:모자라서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가 말하길 ↔여자여(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대인 작가는 예수가 마리아를 어머니라고 직접 부르지 않게 설정했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아직 기적을 베풀 때가 되지 않았다'는 말을 뒤집어 버린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그렇다면 하인이 요한복음을 기록했다는 말?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요2:1~11)
당시는 히에로판테스 기적이 널리 알려져 。。。。。。。。。。。。。。。。。。。。。。。。。。。。。。。。。。。。。。。。。。。。。。。。。。。。。。。。。。。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예수신화를 쓴 사람은 디오니소스의 결혼식과 물을 포도주로 만든다는 전승을 거의 그대로 쓰고
이런 파렴치하고 머리가 얍싸한 유대인들의 신화 변형은 신.구약 모두를 읽어보면서 행간에서 모두 찾아낼 수 있다. 유대인들이 원래 이민족 신화를 놓고 어떻게 변형했는지 그 소설 수섭을 위에서 잘 읽혀두면 좋을 것이다.
두 신화간의 미묘한 거리감(차이)은 위와 같은 엉성한 5류소설(기독경전)의 문장과 구성 대비, 윤색없는 토속적인 고대 원형적 부활 신화의 짝퉁과 오리지날의 외관차 뿐이다. 이것은 단 한두줄에 불과한 주몽, 선화공주 이야기(서동요)이나 선덕여왕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놓고
↗예수신화를 드라마화 한다 하더라도 주몽이나 선덕여왕과 같은 극화수준에는 미치지 못 할 것이다. 그럴싸한 예수관련 재현 영화들은 맹목적 신앙적 긍정이나 기독교에 대한 무비판 대중이었을 때 가능했다.
드라마 작가들이 머리를 쥐어 짜내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허구와 역사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세련되게 그리고 리얼하게 극화한 예와 완전히 같다. 예수 신화도 이와 똑같다.
※처녀의 자궁에 야훼가 정자를 주어 수정란이 생기고 예수가 나온다는 웃지못할 이 신화만도 못한 이야기.
※그럴싸한 유대교나 헬라철학, 고대의 여러 민간 지혜, 상식을 골라놓은 비유의 가르침이라는 것들.
↗조로아스터의 승천 ↗예수의 승천 ↗홍길동의 구름타기 구름을 타고 승천했다거나 이동했다는 공상은 유대인들만의 욕심이었을까?
※또 죽었거나 살았거나 수백 수천억명의 인간들을 두패로 나눠 심판하고 불구녕에 넣기 위해 다시 나발을 불며
이런 유치한 고대 신화들의 뒤섞음을 놓고 드라마 작가들이 드라마화 한다면 어떤 작품이 나올까?
이런 것이 기독교의 믿음과 교리의 핵심이다.
우리는 우리민족의 고대 강원도 깊은 산골의 백년묵은 여우가 인간이 되려고 피눈물나는 노력을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는 전설과 예수가 섹스없이 하늘의 정자를 받아 태어나고, 사흘만에 살아나서 구름을 타고
☞기독교가 로마의 종교가 되기 직전 수백년 동안 고대 로마를 휩쓴 부활신앙은 미트라교였다. 동전 전면에는 황제의 초상이 뒷면에는 미트라의 십자가가 양각되어 있다.
☞미트라의 상징 십자가. 가로 길이는 약 4cm정도 된다. 。。。。。。。。。。。。。。。。。。。。。。。。。。。。。。。。。。。。。。。。。。。。。。。。。。。
고대인의 거친 숨결이 느껴지는 네이티브한 부활과 기적의 신화는 수천년 민간과 왕실에 전승되고 신앙되면서 예수신화의 세부항목과 대단히 흡사한 부류들이 많이 나왔다. 부활신앙이나 아티스, 바커스...등으로 발전된 것은 물론 미스테리라는 여러 종교로 비약 발전했다는 점이다. (나무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한다는 개념이나 부활절이니 부활절 계란이니 하는 기독교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 고대 북유럽의 신화가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라는 고대 로마의 태양신 축제와 함께 기독교가 절기로 지키고 있다는 이 파렴치한 현실이 그들의 뿌리 자체가 신화의 표절에서 유출되었다는 스스로의 항복선언이라고 할 것이다. 원조나무숭배 할아버지를 숭배하는 갸륵한 마음으로...?) 이 미스테리 종교는 오늘날 기독교와 비슷하게 교회를 이루고 의식을 치루고 부활 행사를 치르고 교리도 갖춘 상태였다. 십자가에 죽었다가 3일만에 부활한 신앙체계를 갖추었다. 3일만에 부활한 신앙으로 발전 정착되었다. 기독교계는 이 사실을 빼고 디오니소스, 호루스 신화 원형론으로 예수신화를 패도하며 속임수를 쓴다.-
자! 목사나 신학자연 하는 자들의 속임수가 훤~~~히 드러나게 된다.
두번째는 예수신화의 기본 골격인 동정녀 잉태, 침례, 여러 기적, 12제자, 여러 비유와 가르침, 십자가에 죽음, 부활승천, 재림이라는 이 코드가 전혀 아주 전~~~~~~혀 유대교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코드는 유대교하고는 전혀 상관없이 주변에서 유대인들을 죽기 직전까지 괴롭힌 선진문명으로, 결국 이 문명의 코드를
로마가 점령하여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어지고 있던 바로 2천년 전 중동과 지중해 주변에 예수신화가 만들어지 전까지 모두 완성된 형태의 비유대교적 형태라는 점이다. 십자가에 죽음, 부활승천, 재림...등의 개념이 거의 없었다. (바빌론에 유수되어 거기서 배워온 여러 코드로 유대교가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바빌론파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이다.)
↗프리지아 부활의 아티스 ↗사르곤 26세가 그린 야훼신 있었는지, 어떻게 예수신화로 정리되었는지 그 경로를 알려준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한 분파로 일어났다. 그리고 로마가 경전을 쓰고 교리를 만들고 신격화. 권력화. 체계화한 종교이다.
따라서 고대 중동의 수많은 전설 파편과 부활신앙과 로마의 당대 강력한 태양숭배 사상이 혼합된 종교가 기독교임은 명백하다. 마치 조선말기에 서구문명의 충격앞에 선 조선 선비들이 실학과 천주학을 변형해 유교를 지키려고 안깐힘을 썼던 과거와 거의 같다. 유대교의 경전과 전통의 가치를 기독교의 경전과 전통으로 받아들이면서 당시 유대인들이나 현재의 이스라엘 유대교가 콧방귀도 끼지 않고 비웃고 조롱하는 기독교의 어머니인 유대교가 아직도 인정하지 않는 페르시아와 그리스, 이집트, 고대 지중해의 부활신앙의 원류권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기가막힐 코메디라고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