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wyt_L7PtZGg?si=iWL3VOwfHTw8uOF9
Shostakovich: Piano Trio No. 2 (Kremer, Maisky, Argerich)
1944년 여름에 기고하여 같은 해 8월 13일에 이와노바 근처 <작곡가들의 공동 농장>이라는 곳에서 완성했다. 이 곡은 이 해 2월에 죽은 친구인 평론가요, 음악학자인 ‘솔레르틴스키의 추억’으로 바쳐진 것이다. 작곡연대는 제1현악 4중주곡 작품 49 및 1941년 스탈린 상을 받은 유명한 피아노 5중주곡 작품 57의 뒤를 이어 제6, 제7, 제8교향곡 및 제2현악 4중주곡 작품 69와 더불어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작품이다. 극히 간결한 수법으로 쓰여졌으며, 특히 피아노는 아주 빈번하게 2옥타브를 격하여 양손이 유니즌으로 움직인다. 1944년 11월 9일, 모스크바의 <작곡가 클럽>에서 작곡자 스스로의 피아노, 드미트리 지가노프의 바이올린, 세르게이 시린스키의 첼로로 초연되었다.
1악장: Andante moderato
약음기를 부착시킨 첼로가 하모닉스 주법의 높은 음으로 투명한 비애에 싸인 만가를 노래한다. 6마디 뒤늦게 바이올린이 6도(13도) 밑에서 이것을 모방, 다시 13도 밑에서 피아노가 저음부의 옥타브로 이에 참가, 3개 악기는 이 서정적인 선을 서로 노래하면서 느긋하게 얽혀 나간다. 이윽고 모데라토로 8분음표로 새기는 음형이 나타나고, 그 배경 위에 ‘만가’의 주선율이 템포를 빨리하여 전개되는데, 이하 템포가 빨라짐에 따라서 주제의 자유로운 발전이 이루어져 간다. …이 악장은 전곡의 프렐류드 모양의 성격을 갖고 있다.
2악장: Allegro con brio
고전적으로 간명한 디아토니즘으로 쓰여진, 어디까지나 쇼스타코비치다운 스케르쪼이다. 주악상은 형태로는 경쾌한 미뉴에트풍을 하여 우선 바이올린에 나타나는데, 작곡자는 웬일인지 여기에 페산테(육중하게)라는 발상기호를 붙였으며, 피아노의 강한 화음의 내려치기 주법으로 반주토록 하고 있다. 상당한 활력을 가지고 이 주악상이 발전한 다음에 단순한 왈츠풍의 선율이 양현악기로 연주되고, 피아노가 고전의 퇴화된 듯한 음형으로 반주하는 짧은 트릴로 들어간다. 재현은 주로 피아노에 나타나면서 다소 발전하며 끝난다.
3악장: Large
피아노의 코랄풍의 중후하고, 그러면서 다소 기묘한 반음계적 화음 연결이 그대로 6번 되풀이되는 위를, 바이올린과 첼로가 비가적인 선율을 면면하게 읊어 가, 일종의 파사칼리아 형식이다. 이 악장은 말하자면 피날레에서의 서(序)인데 끊임없이 이어져 나간다.
4악장: Allegretto
거의 론도 형식에 의한 피날레로서, 제1악장의 으뜸조 e단조의 같은 으뜸음조인 E장조로 쓰여져 있다는 점에서는 고전적이나, 어느 면으로는 그로테스트하고 동양적인 느낌마저 나는 악장으로서, 때로는 지난 날의 러시아 국민악파를 연상케도 한다. 처음에 중심을 E를 에워 사는 주악상이 바이올린의 피지카토로 신비스럽게 제시되면, 이윽고 양현악기가 심하게 동일한 피지카토 화음의 연타를 배경으로 하여 피아노가 2옥타브를 격한 양손이 유니즌으로 캐러밴의 걸음 걸이를 느끼게 하는 선율을 낸다. 이 선율은 연연히 단조로 계속된다. 반주의 화음도 30마디에 걸쳐서 조금도 변함이 없다. 다시 한 번 주악상이 이번에는 활로 뜯겨지면서 나타나고, 부악상 중의 음형과 맞추어져 약간 발전한다. 제3악상은 5/8박자로서 피아노의 분산 화음 위에 첼로가 반음계적인 패시지를 고창(高唱), 이어서 바이올린이 특성적인 중2도 음정을 포함한 동방풍의 칸틸레나를 읊는다. 이 부분은 짧은데, 이어서 주부가 피아노 저음부의 주악상을 가지고 반음 밑의 Eb 장조로 복귀하여 온다. 그리고 전과는 다른 악기법으로 발전, 이윽고 제3악상이 장대한 투티적 효과로 나타나서 클라이맥스를 이루는데, 말미에 피아노의 화려한 카덴짜풍의 빠른 분산 화음의 패시지가 나타나면, 그것을 반주삼아 바이올린이 높은 포지션에서 제1악장의 주악상을 정열적으로 읊어 내고, 첼로, 이어서 피아노의 왼손도 이에 화한다. 코다는 주악상 및 부악상으로 이루어지는데 말미 부근에서 제3악장 파사칼리아의 주제인 화음 연속이 인용되고 주악상 첫머리의 단편에서 꺼지듯이 전체 곡이 끝난다.
Dmitrii Dmitrievich Shostakovich 1906∼1975
소련 작곡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광산기사로서 음악애호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어머니에게 피아노 초보교습을 받은 뒤 1919년에 페트로그라드음악원에 입학하여 L. 니콜라예프에게 피아노를, M. 스타인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25년에 졸업하였다. 26년 졸업작품 《교향곡 제 1번》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어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명성을 높였다. 다음해에는 쇼팽국제콩쿠르에서 명예상을 받았고 그 후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였다. 계속하여 10월혁명에 붙인 《교향곡 제 2 번(1927)》, 메이데이를 위한 《교향곡 제 3 번(1929)》을 발표하여 작곡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또 이 시기에는 많은 영화음악에도 손을 대었다.
34년에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부인(1963년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로 개정 초연)》이 초연되어 호평을 받자 유럽을 비롯하여 미국에서도 잇따라 상연되었는데, 이 오페라에서 사용되었던 전위적 수법은 36년 1월 《프라우다》지에서 철저한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쇼스타코비치는 37년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방침에 따른 작풍으로 《교향곡 제5번》을 작곡하여 압도적인 성공으로 명예를 회복하였고, 그 후에도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 레닌그라드음악원·모스크바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후진을 지도하였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다시 <서구 부르주아적 형식주의에 빠졌다>고 A.A. 주다노프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평이한 어법으로 소련의 국토개조계획을 칭찬한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1949)》를 발표하였다. 다시 53년 I.V. 스탈린 사후에 발표한 《교향곡 제10번》에서도 논쟁을 일으키는 등 늘 화제대상이 되면서 정력적으로 대작을 작곡하였다. 소련의 이른바 <해빙기>를 맞아 60년대부터는 반체제적 텍스트를 사용하고, 내용도 사색적인 경향을 취하는 등 새로운 전개를 보였다.
작품은 오페라·발레음악·영화음악과 극의 부수음악을 포함하는 관현악곡·협주곡·실내악곡 외에 피아노독주곡과 가곡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특히 극음악의 작품이 많으나 내용과 밀도에서 교향곡과 현악 4 중주곡이 창작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곡이 넘는 교향곡은 생애를 통하여 몰두하였던 장르로 모두가 대작인 동시에 작곡가가 놓였던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작품으로서 매우 흥미로운 점을 지니고 있다. 전 15곡의 현악 4 중주곡은 후반에 집중 작곡했으며, 매우 세련되고 충실한 내용을 보여 B. 바르토크의 현악 4 중주곡과 함께 20세기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작풍은 서유럽의 모더니즘 영향을 받았던 1920년대, 다시 서방측의 새로운 기법에 접근했던 말년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30년 스탈린에 의한 <형식에서 민족적, 내용에서 사회주의적>으로 요약되는 정치적 요구에 따라 평이한 신고전주의적 양식을 취하면서 장대한 효과를 올렸다. 그의 사후 수년 후에 발표된 《쇼스타코비치의 증언》은 그의 숨겨진 내면을 알 수 있는 실마리로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1922년∼27년까지 결혼 전 사랑하던 타디야나 글리벤코에게 보낸 편지가 91년 발견되어 화제가 되었다. 자료 : 야후지식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VU5WjolChlE?si=imXTS64590IYUf4l
Shostakovich - Piano trio n°2 - Kogan / Rostropovich / Gil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