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는 법을 배우자
어느 가을날, 한 농촌마을에서 두 농부가 논에서 열심히 벼를 베고 있었다. 한 사람은 허리를 펴는 법 없이 계속해서 열심히 벼를 베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중간 중간 논두렁에 앉아 쉬었다. 거기에다 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말이다. 저녁이 다 되어 두 사람은 허리를 펴고, 자기가 베어 놓은 볏단을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틈틈이 논두렁에 앉아 쉬던 농부가 베어놓은 볏단이 많았던 것이다. 쉬지 않고 이를 악물고 열심히 일만 한 농부가 따지듯 물었다 “아니 나는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는데,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틈틈이 쉬었던 농부가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응, 난 쉬면서 낫을 갈았거든..........” 허걱. 이쯤에서 우리들이 한 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나는 오늘도 그처럼 무딘 낫을 들고 온종일 땀 흘리며 일만 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명지대학교 인문교양학부 김정운 교수가 쓴 책 중에「노는 만큼 성공한다.」라는 책이 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15년 동안 오로지 골프에만 둘러싸여 화려한 골프여왕으로 등극한 박세리가 자기 아버지에게 이렇게 항의했다. “아버지! 나 이제 골프에 지쳤어요. 골프 여왕도 됐으니, 이젠 이 골프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그런데, 아버진 제게 다른 건 다 가르쳐 놓고, 왜 쉬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으셨어요?” 그동안 위로는 부모님을 봉양하고, 밑으로는 자식들 챙기느라 앞만 바라보며 살아온 우리 세대들에게 시사 한 바가 크다. 뒤돌아 봤을 때, 이제까지 숨 가쁘게 앞만 보고 달려온 나날들이었다면, 이젠 좀 쉬면서, 옆도 보고, 뒤도 보고, 친구도, 지인도, 형제자매도 보고, 낫도 갈면서 오늘 하루라도 여유를 가지고 조금은 쉬엄쉬엄 사시는 것은 어떨는지요? 휴식은 업무 진행의 균형을 맞춰주고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창의력을 키우고 자기 계발을 하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경쟁력도 높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휴식은 게으름도, 멈춤도 아니다. 휴식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 같아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 -헨리 포드-
-옮긴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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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컬러사진
1951년 6월 고양시 행주산성 부근에서
남동생을 등에 업은 남한 소녀가 무심한 표정으로
M-26 탱크 앞에 서 있는 모습 역시 인상 깊다.
권총을 든 미군 앞에서 손을 들고
항복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북한 소년들의 사진.
1950년 9월 20일 촬영된 것으로 알려진 이 사진에는
매복 중이던 미군에게 붙잡힌 북한 소년들이 담겨 있다.
권총을 겨눈 미군 뒤로는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던 탱크가 보인다.
1950년 8월 부산 방어선 전투에서
다친 군인을 들것에 실어 나르는 미군 병사들.
1950년 9월 미 해병대가
널브러져 있는 적군의 시체를 지나치는 모습도 보인다.
반자동 소총을 메고 가슴까지 흠뻑 젖은 미군이 논두렁을 달려가고 있다.
죽음이 일상인 전쟁의 참상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1950년 11월 눈보라가 몰아치는 함경남도 장진군에서
2주간의 혈투 끝에 중국군에게 패해 퇴각하던
미 해병대 제5연대와 제7연대의 사진도 볼 수 있다.
총을 들고 탱크에 올라 있는 사진 속 8명의 영국 군인은
중국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이날 전투에서
임진강을 건넌 600명의 영국군은
중국군 1만 명을 사살하고 59명의 사상자를 냈다.
인천상륙작전중인 모습.
한 소년이 추락한 북한 전투기의 잔해 위에 올라 손을 흔들고 있다.
1950년 여름, 부산항을 향해 가고 있는 미 해군 상륙함.
파괴된 수원 화성 장안문.
탈환과 재탈환의 과정 속에 수원은 크나큰 피해를 입는다.
연합군의 주요 수송로가 수원을 통과했기 때문에
많은 군인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기념촬영을 하곤 했다.
서울을 탈환하는 과정에서 폭격으로 파괴된 기차들.
철로 끝으로 서울역이 보인다.
국군 부대원들.
미 군사고문단의 감독하에
국군 신병들이 M-1 소총 사격 훈련을 받고 있다.
그들은 여덟 내지 아홉 발 정도를 쏴본 뒤 부대로 배치되었다.
초창기 휴전 회담이 열렸던 개성의 모습.
영국군 왕실기갑연대 대원들이
전투에 임하기 전 포즈를 취하고 있다.
(51년 1월 중공군의 2차 공세를 앞둔 시기로 추정)
서울 북방 지역에서 미군 병사들이 북한군 포로들을 심문하고 있다.
북한군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피란민 인파에 잠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
유엔 측이 1951년 초반에 세운 이 수용소는
총 28개 시설에 최대 17만명의 포로를 수용했다.
1951년 봄, 재탈환된 서울 시청 앞에 어린이들이 서 있다.
사진으로는 피해 상태가 경미한 듯 보이지만,
연희고지 등 북한군의 저항이 극렬했던 일부 지역은
유엔군의 집중포격으로 폐허가 됐다.
대구에서 만난 아이들.
한국전쟁 동안 약 10만여 명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는데,
그들을 돌보는 데 필요한 물자나 시설은 거의 전무했다.
헬리콥터를 보기 위해 모여든 아이들과 어른들.
강가에 모여 빨래를 하는 아낙네들.
전쟁 중에도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생필품만 챙겨 어디론가 떠나는 피란민 가족.
어머니의 왼손가락에서 반짝이는 반지는
아버지의 부재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당시 대부분의 성인 남자는 징집 당했고, 이는
피란민들의 고통과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철로변에서 물건을 파는 소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당선자가
1952년 12월 2일부터 12월 5일까지 한국을 방문했다.
전차에 치장한 환영 현수막과 플래카드(placard)
후암동 고갯길
물건팔러 나온 아낙네들
6.25 동란 당시 시장통의 막걸리 대포집
6.25 동란 당시 부산 구덕산 아래의 중구 부평동 시장과
보수천 주변에서 금붕어를 팔러 다니는 금붕어 장수(1952년)
드럼통을 잘라 해머로 두드려 펴서 용접시킨 후 페인트를 발라 제작한
택시 대용의 운송 수단이었던 마차 객실
추위를 견디기 위해 두껍게 입고
나무상자로 만든 가판에서 장사하는 모습
집을 잃고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더위에 지친 피난민 가족(1951년8월16일)
유엔군을 상대로 장사를 하기 위해 철로 옆에 들어선 부산의 공구상들(1951년)
흰 수염을 길게 기른 어르신의 가판 잡화점
을지로 입구 광통관
5사단 본부앞 나무 팻말
지금 현재 우리은행 전신인 조선상호은행 종로지점과 여물을 먹고 있는 소
당시 소방차가 출동하여 화재를 진압하는 모습
1951년 11월 30일 부산시 부전동 제일조병창 대화재로
화약고 1동 및 민가 100여 채가 전소된 모습(4명 사망, 6명 중상)
- 1951. 12. 1. 동아일보
진열장을 콘크리트와 타일을 붙여 제작한 옛날의 시계포
거리의 담배 노점상
당시는 담배 제조기술이 없어서 미국 양담배를 받아 팔았는데
꽁초를 주워 봉지에 넣어 파는 봉초도 팔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우체국이라고 불렸던 옛 중앙 우체국
적벽돌의 청동 지붕으로 제작된 르네상스식 건물이엇던 이 건물은
미적 가치가 있었으나 1년 뒤 전쟁으로 인하여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대구 신천변에
피난민들이 만든 방천뚝 피난촌
종로 화신백화점
일제 강점기 화신그룹의 박흥식씨가 세운 이 백화점은 장안의 명소였습니다.
6.25 동란 1년전까지 온전했었던 남대문
삼각지 근처의 미8군 기지 주변
물을 받기위해 줄을 길게 세운 양동이
서울역 앞의 대동 예식장과 사진관
건물 앞에 노점을 편 사진사와 구두 수선공과 지겟군 및 엿장수
로터리 분수대 빙판에서 썰매를 타는 아이들(1949년, 서울)
미군에게 초콜릿을 나눠받는 아이들
당시 짐운반 인력꾼으로 활약했던 지겟꾼
32사단 앞 모래도로
6.25 동란 당시 경기도 수원 화성 장안문(1953년8월11일)
성벽에 올라가 놀고 있는 해맑은 모습의 어린이들
1950년대 서울 도심에서 바라본 한강의 전경사진.
푸르른 강물이 한 폭의 그림처럼 옛 정취를 갖게하는
노스탤지어를 담고 있다.
심연옥/한강 old k-p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