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23일 대림4주간 수요일
<세례자 요한의 탄생>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57-66
57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8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59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60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61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62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64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65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66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우리의 새 이름에 합당한 생활을 하고 있나요?
지나는 길목에 "아기 이름 잘 지어요."라는 철학관에 자주 시선이 머물게 됩니다. 누구나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지을 때 아주 신경을 많이 쓰고 이름의 뜻을 잘 알고 잘 지어 복을 많이 받으려고 유명한 작명가에게 의뢰하기도 합니다. 성(姓)에 의하여 돌림자에 따르기도 하고 아예 돌림자를 미리 정해서 내려오기도 합니다. 또한 한자의 획수를 따져서 음양과 오행에 맞추어 작명해야 한다고 전문가는 말합니다. 그리고 점을 치는 사람은 이름을 잘못지어서 출세를 못한다느니 물질적인 복을 얻기 위해 개명을 하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요즘 한글 이름을 얼마나 예쁘게 짓는지 정말 부르기 좋고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글로 우리의 뜻을 표현한 이름을 가지고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마음이 아름답게 녹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처음으로 중국에 갔을 때 대학의 교수들은 작명가로 이름을 날리고 작명 사례비가 봉급보다 많다고 하였습니다. 중국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이름을 잘 지어야 운세가 대통하고 출세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이름은 나를 대표하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함을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인사할 때는 명함을 내밉니다. 그래야 그 사람을 잘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며, 연락하여 서로 관계를 맺기에 아주 중요한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갖고 있고 세례를 받을 때 주보성인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라는 하느님의 명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지어주신 이름을 바로 호적에 올리고 그 이름으로 평생을 동행하는 것처럼 세례 때 우리가 받은 이름도 하느님 나라에 영원히 등재 되었을 것입니다. (묵시21,27참조)
흔히 '표사유피 인사유명'(豹死留皮 人死留名)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입니다. 표범의 가죽은 참 아름답습니다. 그래서 표범은 가죽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남획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이름을 남깁니다. 성군(聖君)도 폐주(廢主)도 충신도, 간신도, 성인도, 악인도 역사에 이름을 남깁니다. 우리가 죽으면 '그 사람은 성인(聖人)이었어'하면서 우리의 이름도 아름답게 남길 수 있을까요?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나라에 등록되고, 그 이름에 걸 맞는 성인의 삶을 닮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는지요. 또한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의 명함으로 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부를 때는 마음 안에 사랑을 가득 담습니다. 스승이 제자를 부를 때도 사랑이 담겨 있는데 하물며 하느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부를 때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과 염려와 축복을 주시겠습니까? 오늘 요한의 이름을 지어주신 하느님께서는 요한을 잘 보살펴 주셨습니다. 우리도 당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 주시고, 당신께서 지어주신 "크리스천(Christian)"이라는 이 귀한 새 이름을 그대로 버려 두실리가 없기에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듯 ‘주님의 손길로 감싸 주시니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부러워 할 것입니다.’
'옥불탁불성기'(玉不琢不成器)란 말이 예기(禮記)에 있는데 이는 "아무리 이름이 좋아도, 소질이 뛰어난다 하여도 갈고 닦지 않으면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름을 잘 지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이름을 하사(下賜) 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성덕을 쌓지 않으면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부모님과 하느님에게 불효하는 것이며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름값을 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세상에 주님을 증언할 모든 자질을 주셨기에 잘 발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름을 빛낼 때 아주 흡족해하시며 "이 아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이란다."하고 자랑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즈카르야가 하느님께서 이름을 지어주신 것을 의심해서 벙어리가 된 것처럼 주님의 가르침을 자주 잊고 의심한다면 벙어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진리와 이름을 전하는데 벙어리가 된다면 곤란하겠죠. 주님께서 풍성하게 내려주시는 은총을 마다하고 벙어리로 살겠습니까? 이제 요한처럼 입을 열고 혀가 풀려서 굳센 정신으로 주님을 증언하며 살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새 이름값을 하면서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23-24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너희가 좋아하는 계약의 사자
보라, 그가 온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2 그가 오는 날을 누가 견디어 내며
그가 나타날 때에 누가 버티고 서 있을 수 있겠느냐?
그는 제련사의 불 같고 염색공의 잿물 같으리라.
3 그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4 그러면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주님 마음에 들리라.
23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24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 땅을 파멸로 내리치지 않으리라.”
축일:12월23일(10월20일) 성 요한 칸시오(켕티)
St.John Cantius(JOHN of Kanty)
San Giovanni da Kety (Canzio) Sacerdote
23 June 1390 at Kanty, Silesia, Poland-
24 December 1473 at Cracow, Poland, of natural causes
Canonized:1767 by Pope Clement XIII
오늘 축일을 맞는 요한 칸시오는 1390년 크라쿠프(폴란드) 교구의 케티시에서 태어났다. 크라쿠프 대학에서 우수하게 학업을 마친 다음 그는 사제로 서품되어 신학 교수가 되었다.
성인들이 부딪혀야 하는 반대는 그에게도 있었다. 그는 경쟁자들에게 쫓겨난 다음에 올쿠시의 본당 신부가 되었다.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던 그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선의는 본당 신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가서 신자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얼마 후에 그는 크라쿠프로 돌아가서 남은 일생 동안 성서를 가르치며 보냈다.
자신이 탁월하게 가르친 올바른 신앙 위에다 여러 가지의 덕행들 특히 이웃에 대한 자비와 사랑을 쌓아 자기 동료들과 학생들에게 참된 모범이 되어 주었다.
그는 신중하고 겸손한 사람이었으며 또한 친절하였으므로 크라쿠프의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재산과 돈은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쓸 수 있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은 시시 때때로 그것을 이용했다.
그는 자신을 지탱하는 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돈과 옷가지만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잠을 적게 잤으며 그것도 마루에서 자고 음식은 검소하게 먹었으며 고기는 전혀 먹지 않았다.
그는 터키 인들에게 잡혀 순교하기를 바라면서 예루살렘을 순례했다.
의사로부터 건강을 돌보라는 경고를 받았을 때 그는 즉시 사막의 교부들은 그들의 극히 엄격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오래 살았다는 것을 지적했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정직함을 좋아하시고 거짓을 싫어하신다는 사실이 성서 여러 군데에 기록되어있다.
과연 성인들의 행적을 보면 그 모두가 다 지성으로 우러나오는 것뿐이며 조금도 사람을 기만하는 일이 없는 데, 더욱이 켕티(칸시오)의 성 요한은 그 정직으로 유명한 분이다.
그는 결코 말로만 신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덕으로 그들을 감화시키고 사제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한편 그는 자비심도 두터웠다. 그는 자신의 의, 식은 생각하지 않고 빈민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하루는 자기 구두까지 벗어 남에게 주고는 자기는 맨발로 집으로 돌아왔다는 일화도 있다.
요한은 그 후 성지 팔레스띠나와 로마를 순례할 계획으로 여행을 시작하였는데, 이를 여행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고행으로 생각하여 맨발로 거닐며 자기는 이런 고행으로 현세에서 미리 연옥 벌을 갚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때 도중에 산적이 나타나 "돈을 내놔라!"하니 그는 가진 것을 전부 내놓았다.
"이 것뿐이냐?" "예, 그 것 뿐입니다." "좋아, 그 사람 솔직한데, 생명만은 구해 주마.“ 하고 그냥 가버리자
성인은 몇 발자국 걸어가다 문득 생각하니 아직 옷 속에 꿰메 넣은 비상금이 다소 남은 것에 생각이 났다.
그는 앞서 산적에게 돈이 그것밖에 없다고 한 것이 마음에 꺼려 곧 그 뒤를 쫓아가며 산적을 부르는 것이었다.
"여보시오, 손님 아까는 미처 생각이 안 났었는데, 여기 돈이 또 남아 있습니다. 이것도 받으시오."하며 돈을 내밀었다.
산적이 가만히 보아하니, 농담이 아니고 정말 마음에서 전에 말 잘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하는 태도였으므로 산적은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흉악한 산적이라도 그 마음 한 구석에 가뭇거리는 양심의 씨가 붙어있는 터이라, 이 순박한 사람의 마음씨와 자기의 흉칙한 소행, 이 양자를 마음속에 비교해 볼 때 그는 갑자기 가슴이 무너지는 듯 후회의 감정이 용솟음쳤다.
산적은 즉석에 땅에 엎디어 깊이 사과하며 빼앗은 돈을 전부 내어 주었다. 이것이 ’요한 깐시오, 캥티의 요한’에 대한 유명한 일화이다.
이렇게까지 거짓을 싫어하는 그인지라, 또한 남을 비방하는 소리를 듣기도 극히 꺼려하여, 식당의 벽에다 ’비방 일절 사절’이라는 글을 써 붙였다 한다. 이런 생활로 그가 노년에 접어들어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움을 알자 가진 바 모든 것을 빈민에게 희사하고 고요히 임종 준비를 하여 1473년 성탄 전야에 67세로 마치 잠자듯이 숨을 거두었다.
그의 분묘에서는 많은 기적이 있었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수호성인으로 공경 받아 오다가, 교황 클레멘스 12세의 선언으로 공식화 되었다. 그는 교황 클레멘스 13세에 의해 1767년에 시성되었다. 성인은 폴란드의 주보시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한 칸시오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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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름에 맞갖은 삶을 살도록 노력하는 새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수산나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저희 모두 새해에는 이름에 맞갖은 삶을 살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감사합니다. 수산나 자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