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사발에 빗물이 고여든다
마른 벽을 따라 축축히 젖어든다
그렇게 영원히... 금이 가지 않는다면
그는 흠칫 하더니 아란시아를 보고 꽤나 당황하는 것 같았다.
그의 검은 여전히 날 향해 있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만두라니...뭘?"
그녀가 인상을 썼다. 그것 마저도 매혹적이었지만...
"....검 치워."
그는 나와 아란시아를 기묘한 표정으로 번갈아 보더니 '왜? 무엇 때문에?'라는 얼굴로 말했다.
"왜그래? 인간일 뿐 이잖아. 먼지가 있으면 청소를 해야지. 안그래? 아란시아."
그는 특히 아란시아라는 그녀의 이름을 은근히 강조했다.
그녀의 눈 빛이 달라졌다.
"내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그녀에게서 살기 같은 것이 나왔고 그는 잠시 긴장하더니 재수 없는 웃음을 지었다.
"후후..그럼 뭐라 불러 드릴까요? 아.란.시.아.님?"
그러면서 그는 내 목에 검을 얹어 놓으며 실실 쪼갰다.
그녀가 싸늘하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인간의 몸에 상처 하나라도 냈다간 널 내 손으로 소멸 시켜 주겠다."
그녀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말도 안된다며 소리쳤다.
"아란시아! 이 인간이 뭔데 그래?"
"건방진 블랙...허락도 없이 레어에 들어 온 것도 모자라 나의 이름을 친근하게 부르다니...불쾌하구나."
그는 굽히지 않고 말했다.
"아란시아! 난 너를 사랑한다고! 이 하찮은 인간이 나보다 중요해?"
나는 그녀의 대답이 궁금했다. 설마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동족 드래곤 보다 만난지 고작 몇 시간 지났을 뿐인 내가 더 중요하다는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러나 그녀의 대답은 정말 의외였다.
"...그렇다."
이럴수가...그녀가 긍정을 해버렸다. 그렇다면 내가 저 드래곤 보다 소중하다는 말? 왜? 그의 말대로 난 인간이고 그녈 화나게 했는데...
그도 어이없다는 듯 벙찐 얼굴로 그녀를 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어떻게...그런..."
그는 날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서 분노가 깃든 살기가 흘러나왔다.
"으득...넌 나중에 내 손으로 죽여주지. 텔레포트!"
쳇! 나중에라면 나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는 빛에 휩싸여 사라졌고 그녀, 아란시아가 내게 다가왔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괜찮아? 인간....아,음...유 란."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주다니 놀랄 일 이었다.
"아, 그럭저럭 견딜만합니다. 그런데 아란시아님은 괜찮습니까? 아까 그...블랙드래곤...께서 당신을 살아한다고..."
그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 재수 없는 블랙 얘긴 꺼내지도 마. 비위 상하니까...그리고 너...이제 부터 말 놔."
허억? 말 놓으라니? 누구에게? 드래곤인 그녀에게?
"하,하지만 아까 그는..."
그녀는 내말을 끊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아아, 그 뿐만 아니라 다른 드래곤들도 나한텐 함부로 못해. 있다면 로드정도? 그래도 넌 그냥 말 놔. 내가 허락한 거니까. 알았니? 유 란."
도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모르겠다. 근래에 기절을 좀 했더니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들이 발생하는 것 같았다.
"왜 대답이 없어?"
은근히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였다.
하아...뭐, 그녀가 까라는데 까야지 별수있나?
"아,...응."
그녀는 마음에 들었는지 호호하고 웃으며 내 목에 가느다란 팔을 감았다.
"호홋, 유 란. 차나 한 잔 하자구."
"응? 나,난 괜찮은데.."
그녀의 팔이 목을 조였다.
"흐흐...마시라면 마셔."
역시나 드래곤인 그녀는 무서웠다.
그녀의 마법으로 끓인 차는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마시기 보다는 은은하게 퍼지는 향을 음미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으흠...초절정급 미녀의 시선이 싫은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실체는 다름아닌 드래곤. 부담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흐응...갑자기 생각나서인데..유 란은 정확히 어디서 왔어?"
그녀의 물음에 난 대답을 주저했다. 드래곤이니...말해도 상관 없으려나?
"아까 말했었죠? 전 지구라는 행성에서 왔어요."
그녀는 나의 반존대에도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솔직히 내가 아무리 이세상 사람이 아니라지만 그 유명한(?) 드래곤에게 반말을 찍찍 내뱉기가 좀 그랬다. 나이도 있는 만큼...
"하지만...그런 곳은 들어 본 적 없는걸?"
"사실..전 우연한 계기로 다른 차원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어요."
그녀는 믿기지 않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다른 차원에서 왔다니? 저,정말이야?"
나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간단히 추려서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타임머신이라는 것을 발명한 것 부터 차원신 아베스를 만난 것과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는 것. 그 중 나의 사랑스런 가족들과 친밀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끔찍하고도 생생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진 않았기에...
그녀는 내가 말을 할 수록 놀라워 하더니 급기야는 내가 살던 지구라는 행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세계와는 달리 그 곳에는 과학이라는 문명이 발달했고 TV, 냉장고, 에어컨 등의 가전제품은 물론 자동차 같은 교통수단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녀는 어린 아이처럼 연신 감탄사를 남발했다.
"햐아~정말 그런게 있단 말이야? 으...나 그 지구라는 곳에 가고 싶어지는데..."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았다.
"혹시...방법이 있나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로서는..모르지. 너가 만든 타임머신이라는 것도 있으니 로드라면 알고 있을지도..."
로드라면...드래곤들의 왕?
"그 로드라는 드래곤은..."
"응? 아, 모든 드래곤 일족의 왕이야. 골드드래곤이지. 참고로 우리 일족은 골드, 레드, 블랙, 그린, 블루, 실버로 나뉘어져 있어. 또 각 일족의 수장이 존재하고...어쨋든 로드가 가장 오래 살았고 그 만큼 아는 것도 많으며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 게다가 로드가 된 드래곤은 육체가 재구성되서 보통의 드래곤 보다 훨씬 긴 세월을 살아."
그녀의 눈에는 얼핏 그 로드라는 드래곤에 대한 존경이 가득했다.
"그렇다면...그 로드라는 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흐음..글쎄? 내가 있으니 그다지 걱정 할 일은 없겠지만...그런데 왜? 원래 있던 차원으로 돌아가려구?"
나는 살짝 끄덕였다.
"네...하지만, 당장 돌아갈 생각은 없어요. 이곳에 넘어오는 동안 갚지 못할 빚을 좀 많이 졌거든요. 게다가...아란시아의 말대로라면 전 1000년도 넘는 시간이 남은 거 잖아요? 서두들건 없죠."
그녀는 그런가 보다 하며 잠자코 있었다.
"또...이곳 세계에 대해 흥미가 생겼거든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겪는 다는 것이 너무나 기대되는 걸요?"
"그래...그러면 로드를 만나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어 줄래? 로드는 지금 수면기거든. 자고 있는 걸 깨우긴 좀 그렇잖니?"
나야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도 무개념해진 생명력 때문에 시간이 남아도는 것을...
좋아, 그럼 이 세계에 대해서나 물어봐야지.
"알았어요. 그럼..아린시아. 이 세계에 대한 설명 좀 부탁해도 될까요?"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흔쾌히 수락했다.
"물론이야. 나도 심심하던 차였는데..음, 먼저 이곳은 라이브란트 대륙으로..."
그녀의 설명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대충 종합해보자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하나의 거대한 대륙인 라이브란트의 프라하산맥이었다. 대륙은 중앙대륙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기준점은 주로 산맥이나 큰 강을 경계로 한 것이다. 대륙에는 수많은 국가가 존재하는데 그 중 눈에 띄는 나라들은 중앙대륙의 크레나 제국, 유트 왕국, 사디스 왕국과 남부대륙의 샤인 왕국, 동부대륙의 아르노 신성 왕국, 하칸왕국, 그리고 서부대륙의 라트비아 제국과 척박한 북부대륙의 호른 공국 등이 있었다. 이들 국가들은 전제 왕권을 중심으로 절대적인 신분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과학이 아닌 칼과 마법이 난무하는 시대로서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했다.
다른건 몰라도 엄격한 신분제가 있다는 것은 이곳의 성이 없는 나에게는 매우 불리하게 작용 될 것 같았다.
나는 아란시아의 조언대로 드래곤 로드가 깨어날 때 까지 유희를 하기로 결정했다. 인간인 내가 이런 말을 한다기엔 좀 이상했지만 난 이미 정상적인 인간은 범주를 벗어났다.
내가 그녀의 레어에서 지내길 한 달이 지난 지금 나는 내 몸에 몇가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행이라면 좋은 쪽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랄까.
얼마전 우연히 거울을 보았는데 조금 놀라고 말았다.
생김새에는 변화가 없었지만 약간 갈색빛을 띄던 머리가 완전한 흑발로 변해 허리까지 내려온 다는 것과 골격이 약간 바뀐 듯 했다. 마치 환골탈태라도 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안그래도 미인소리 듣던 얼굴인데 옷칠을 한 듯 검고 윤기나는 찰랑이는 머리가 길어지자 웬만한 미녀 뺨치는 모습이 된 것이다. 게다가 외공이 아닌 내공을 익힌 덕분에 겉보기에는 호리호리해 보이는 몸매여서 여성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는 것이다. 난 어디까지나 강인하고 멋진 미청년 스타일이 좋았는데 말이다.
내가 한숨을 쉬며 짐을 꾸리고 있는데 언제 왔는지 그녀가 말했다.
"우리 이쁜이~지금 가려구?"
"응...아란."
최근에는 그녀에게 반말도 하고 애칭으로 까지 부르는 나였다.
"그럼 말이지..."
그녀가 뜸을 들였다. 뭔가 불안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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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감상평 남겨주시고 잘못된점 지적해 주세요.
다음편에서 뵈요~
첫댓글 재밋어용!ㅋㅋㅋㅋㅋㅋ아란도같이갔으면좋겠다!
우리의 아란 사랑스럽죠?ㅋㅋ
빨리 연재를 +_+ 전이런 퓨전 판타지가 조아요!! 빨리빨리빨리+_+ <<예가 광끼가 좀있어서 판타지보면 사족을 못쓴답니다...ㅋㅋ
예예! 오늘 올립니다!
담편을 기대할게요~~ㅋㅋ
우후훗! 마니마니 기대해주세욧~
"지금까지와는 다른세게를 겪는다"세게오타요~
후훗~감사해여!
아란이랑 유란이랑 이어졌으면~~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