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무슨 뜻인가
명절 중에서 단오, 한식, 유두(流頭)는 비교적 흐려졌어도,
설과 추석만은 여전히 똑똑하게 남아 해마다 경배를 받는다.
이런 날이 되면, 왠지 삶이 새로워지고 뜻있어지는 기분이 든다.
시간은 이런 힘이 있다. 흘러가는 시간이 단순히 일직선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설사 이렇게 가는 것이 진실이라 할지라도) 순환하고 회전하며 반복하는 느낌으로
간다는 점이, 희망을 만들어낸다. 생의 착시일지도 모르나, 희망은 힘이 있다.
시간은 굴러가는 것이다. 인간은 그 굴러가는 시간에 금을 긋는다.
시계의 눈금처럼 말이다.
맨 위에 그어진 금이 바로 설이며, 맨 아래쪽에 그어진 금이 추석이다.
느낌이 오는가. 그런데 자세히 보면, 눈금이 시계처럼 설과 추석이
아래위로 마주 보고 있지는 않고, 추석이 조금 더 돌아가 있다.
이건 또 왜 그럴까. 아무 이유없이 그럴 리야 있겠는가.
명절(名節)이란 말은 '이름있는 눈금(마디)'이란 뜻이다.
누군들 이름이야 없겠느냐만 '이름있는 집안'이라 할 때의 이름은 아무나 가지는 이름이 아니다.
그 이름이 중심이 되고, 역할이 뚜렷해서 많은 이들에게 중요하기에 '이름있는 눈금'이 된다.
많은 명절이 시들해졌지만, 설과 추석이 남은 까닭은, 그것이 가장 원형적인 기념일이기 때문이다.
설은 '해'를 기념하는 날이고, 추석은 '달'을 기념하는 날이다.
해가 떠오르는 때를 기념하기에 설은 '아침'에 무게를 두고, 달이 떠오르는 때를
기념하기에 추석은 '저녁'에 무게를 둔다.
새해라는 말은, 다시 시작하는 한 해(歲)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지만,
그 새해에 처음으로 떠오르는 해(日)를 가리키는데서 나온 말이다. 첫 해가 새해다.
그 첫 해가 365번을 굴러가기로 기약된 것이 새해(新年)이다.
사실 365일 어느 하루도 해의 날이 아닌 날이 없다.
태양계에서 사는 일은 해를 이고 사는 숙명을 안고 태어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중에서 겨울의 꼭두서니에 봄의 실낱같은 한 기운이 서리는 즈음에 맞이하게 되는 날,
시간의 눈금 중에서 맨 처음에 찍는 점이라 할 수 있는 그 날은
목숨이라는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생명에게는 유난히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365개의 '한 해 숨쉬기 종합세트'를 선물받은 날이다.
설은 첫 일출(日出)에 감사하는 날이다. 다시 해가 떠올라 새롭게 살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런 기분을 표현하는 날이다. '설'이라는 말은,
'낯설다' 할 때에 남아있는 처음이라 익숙지 않고 능숙하지 않다는 기분이 담긴 말이다.
익숙지 않고 능숙하지 않기에,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선 반가움이 있기에 '설'레는 것이다.
서먹서먹하지만 보고싶었던 손님이 오는 때처럼, 옷매무새를
다시 살피고 흐트러진 옷깃을 여미고 거울을 한 번 더 보게 되는 그런 마음이다.
설과 짝지어지는 명절인 추석에 대해서도 이참에 생각해보고 가자.
추석은 한 해의 수확을 거둘 무렵의 저녁, 떠오르는 달에
기쁨과 감사를 전하며 사람들이 서로의 수고를 치하하는 날이다.
추석은 '가을저녁'이라는 뜻인데, 평범하지만 들어갈 말은 다 들어가 있다.
'가을(秋)'은 원래, 밭같이를 뜻하는 갈(耕)에서 나왔다고도 하고
밭은 갈아엎는다고 하여 갈(更)에서 나왔다고도 푼다.
추(秋)라는 말에는 벼이삭을 털어내고 볏짚을 태우는 의미(벼 禾, 불 火)가 이미 들어있다.
한 해 논밭농사가 가을의 핵심이다.
저녁(夕)은 그 추수를 끝낸 감사의 시각에 보름달이 뜨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한가위란 말은 추수감사의 기분을 우리의 감성으로 담은 표현이다. '한'은 크다는 뜻이다.
한복판이라 할 때처럼 '딱 중앙의 위치'라는 뜻도 있다.
'가위'는 가운데라는 뜻이 있다. '큰 가운데(한가운데)'가 한가위다.
옛사람들은 추석이라고 부르기 이전에 '가배' 혹은 '가위'라고 불렀다.
가배는 신라때의 길쌈놀이다. 유리왕 때 궁궐에서 벌였던 이 놀이는,
추석 한달 전부터 두 팀이 나뉘어 실로 베를 짜기 시작하여 명절날
어느 편이 더 많이 짰나 겨루는 내기다.
진 팀은 이긴 팀에 잔치와 춤으로 갚았다.
게임 끝의 잔치이니 더 유쾌하고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그 '가배'의 추억이, 유쾌한 잔치로 남아 '가위'가 되었다는 스토리다.
추석은, 모처럼 풍요를 누리는 시절에 때맞춰 그 마음처럼
두둥실 떠오른 달을 보며 내년을 기약하는 명절로 자리잡았다.
추석의 시계눈금은 왜 6시에서 살짝 더 돌아가 8시쯤에 있는가.
이것은 천체물리학적인 관점으로 풀 수도 있지만, 인간의 시간이
기계적인 눈금과 다른 심리적인 시간을 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도 읽을 수 있다.
첫 해가 뜬 날부터 인간은 햇살의 양을 재며 논밭을 일구고 곡식을 심고 가꾼다.
그것을 끝낸 시점은 1년의 4분의 3이 지나서이다.
그토록 먹고사는 일이 힘겨운 일이다.
곡식이 충분하지 않을 때 공(空)으로 살아야 하는 겨울은 그야 말로 힘에 '겨울' 날들이다.
설과 추석 두 개의 명절은, 일을 시작하는 날과 일을 끝내고 춥고
배고픈 날을 버텨야 하는 날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하다.
배고픔은 풍요를 향해 가고, 풍요는 배고픔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다.
풍요를 가는 시절이 더 길고 배고픔을 향해 버티는 시절은 더 짧다는 것이 인간을 살게 하는 힘이다.
희망은 길고 절망은 짧다. 아니 절망은 짧고 희망은 길다.
이 시간의 배분이 인간의 생의(生意)를 돋우고 분투를 키워, 이 놀라운 역사를 만들어온 셈이다.
추운 날 맞는 설은 희망의 축제이며, 풍요로운 날 맞는 추석은 절망을 치어럽하는 축제이다.
이렇게 우리 삶은 돌아간다.
설은 해의 날이며, 추석은 달의 날이다. 설은 아침의 날이며 추석은 저녁의 날이다.
해는 우리 겨레에게 하늘의 상징이며 남성의 이미지였다. 달은 땅이며 여성이다.
설날에 우린 하늘과 남자를 우러르고 추석에는 대지와 여성을 우러른다.
여성은 생산과 풍요이며 모성이기도 하다. 설과 추석이면, 머나먼 귀성을 몸 아끼지 않고 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존재, 혹은 땅에 속한 존재인 스스로에 대한 근원적인 감수성이 작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로나 때문에 어렵다지만, 코로나 때문에 서로 못보는 일은 더 어렵고 서러운 일이기도 하지 않던가.
부모가 돌아가면 고향이 사라지고, 설이 되어도 설이 없고 그래서 '서럽고 서럽다'.
차례라는 이름으로 조상에게 감사하는 까닭은 그들이 해와 달의 오랜 스토리를
우리에게까지 전해내려준 전수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늘과 땅의 자손이며 일월(日月)의 민족이다.
중국도 뼛속깊이 부러워하는 '하늘의 뜻을 받은 자손'인 동이족이 바로 우리 겨레다.
천손(天孫)의 자부심은 인류의 다른 신앙과 같이, '믿음'이 지닌 올곧음과 순수를 품고 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내가 받고 싶은 것을 남에게 베풀라.
널리 사람과 사람을 이롭게 하라.
이 말들은 서로 다른 종교들이 정리하는 신의 말씀이지만,
이 취지를 자세히 살펴보라. 같은 말일 뿐이다.
근본 사유가 진실에 닿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첫번째 말은 예수가 전한 말이며, 두번째 말은 칸트의 격률이기도 하지만
공자의 서(恕, 화해하여 같은 마음이 되는 것)를 풀어놓은 말이다.
맨 마지막말은 '홍익인간'을 번역한 것이다.
명절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기를 발견하는 날이다.
해와 달은 그것을 밝혀주는 존재들이다.
명절이 되면 유난히 어머니가 떠오르고 고향이 정겹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곳이 생산과 풍요의 원산지이며 또한 영원히 우리에게 창의적 영감을 주는
'접신(接神)'의 토포스이기 때문이다.
크고 넓고 아득한 마음으로, 처음의 눈이 되어 돋아오는 해를 한번 보시라.
당신은 생각보다 오래된 사람이며 놀라운 영원의 빛이다.
/빈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