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 근초고왕의 고구려 원정 전쟁 당시 태자 근구수에게 도교의 교리를 인용해 가며
진격을 멈출 것을 주장했던 백제 장수 막고해의 도교 인용 발언은 진실일까요?
아래의 삼국사기의 내용을 보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구수왕 전문
근구수왕(近仇首王)[혹은 휘수(諱須)라고도 한다.]은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아들이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 국강왕(國岡王, 고국원왕) 사유(斯由)가 직접 와서 침범하므로, 근초고왕은 태자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는데, 그는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싸우려 하였다. 고구려인 사기(斯紀)는 본래 백제인이었는데, 실수로 왕이 타는 말의 발굽을 상처 나게 하여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고구려로 도망갔었다. 그가 이때 돌아와서 태자에게 말했다.
“고구려 군대가 비록 수는 많으나 모두 수를 채운 가짜 병사입니다. 그 중 날쌔고 용감한 병사는 오직 붉은 깃발의 군대뿐이니, 만일 그들을 먼저 쳐부수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태자가 그 말에 따라 진격하여 크게 이기고, 달아나는 병사를 추격하여 수곡성 서북쪽에 이르렀다. 장수 막고해(莫古解)가 간언하였다.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에 ‘만족할 줄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구하려고 하십니까?”
태자가 이 말을 옳게 여겨 중지하고 그곳에 돌을 쌓아 표석을 만들었다.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 이후로 누가 다시 이곳에 이를 수 있겠는가?”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서 고국원왕 전사 당시 태자였던 근구수왕은 수곡성 서북쪽까지 진격하였지만
장수 막고해가 도교의 반전적인 금욕적 교리 구절을 인용해가며 진격을 멈출 것을 태자 근구수에게
건의하여 근구수는 이를 받아들여 진격을 멈추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과연 기록대로 근구수왕은 막고해의 도덕교리적 의견때문에 진격을 멈추었던 것일까요
당시 상황을 보면 태자 근구수는 부왕 근초고왕이 공격하는 평양성 점령전에 부왕의 명에 따라 합류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중요한 시점에 장수 막고해가 아군의 현실적인 형편이유가 아닌 몽상적인 도가의 도덕적 이유 때문에 진격을 멈추자고 주장하는건 군율로서는 용납못할 범죄행위나 다를바 없지요 왕인 근초고왕이 생사를 거는 싸움을 하고 있는데
막고해가 진격하지 말자고 주장하는건 왕을 지원하지 말자고 주장하는 것이나 다를바 없는 것으로
항명같은 반역적 행보일수도 있는 의견이라 막고해는 그 발언만으로 사형감이지요
당연히 당시 전황 현실에서 보자면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 받아들여지지 않을게 자명한데
근구수왕이 받아들였다는 내용은 아무래도 후세의 친도교적 사가들이 이를 많이 부풀려서 기록했을
가능성이 많지요
태자 근구수왕이 실성하지 않는 한 막고해의 몽상적 도교 교리적 의견에 따라 부왕이 있는 곳으로 가지 않는다는게
말이나 될법한 얘기인가요
도교의 유래를 부풀리려고 막고해의 발언을 윤색하여 부풀려서 기록했을 것이지요
여러 학자들은 막고해의 발언을 백제의 도교 실존 근거라고 해석하여 주장하지만
그러나 4세기에 백제 유적이나 유물에 도교적인 색채의 것이 출토되지 않은 것을 보면
100%단정짓기에 무리가 있는 상황이고
백제의 도교적인 색채의 유물은 6세기나 7세기에 중점적으로 나오는 정황을 고려하면
삼국사기의 막고해 도덕경 인용 발언은 후대 사가들의 부풀리기 윤색 기록일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네, 공실불 회원님의 말은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말씀을 하시려 하는지도 알게 되었고, 분명 설득력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앞서서 조금 거칠게 대응한 면이 있는데, 이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항명" 문제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공실불 님쯤 되는 분이라면 그 사료의 선후관계를 잘 따질 줄 아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순서를 비틀어 보시려는 것을 보고는 혹시 사료를 고의적으로 왜곡해서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해서 조금 욱했던 것은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공실불 님의 말씀은 흥미롭게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서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토착종교의 문제점입니다. 앞에서부터 계속해서 동명묘에 제사지낸 점을 말씀하시는데, 그런 것은 후대에는 비록 구태묘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기는 하지만, 사비 시대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백제 왕실에서조차 불교를 들여왔습니다. 이는 백제의 지배층들이 해외의 사상과 문화에 대해서는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침류왕이 대뜸 불교를 들여왔을 턱은 없고, 이미 그 이전부터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불교를 비롯한 해외의 문화가 백제인들의 사고관념에 녹아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
침류왕 이전에 불교 문화가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 유입이 중국과의 교역을 담당하는 대중국 무역 상인층과 그에 연결된 귀족들만 접하여 심취하지 대다수 주류 고위급 귀족들은 전통적인 신앙의 영향하에 놓여 중점적으로 심취하기가 어렵지요 침류왕대에 와서 불교 기사가 나타난 점을 고려하면 침류왕대까지 불교가 대중적이지 못했음을 알수가 있지요 그리고 근초고왕대에 고구려와의 전쟁에 치중하는 상황이라 대중국 문화에 심취할 여력은 없습니다 고구려 정보에만 신경쓰이는 상황이지요
@공실불 백제의 요서진출 시기 중 한 시기가 바로 근초고왕 시기입니다. 그렇다면 중국 문화 수입은 어려울 것이 아니지요
다. 나중에는 백제에서 동명묘 혹은 구태묘 등에 대한 제사를 꾸준히 지내며 부여족으로서의 정통성을 주장하며 삼국간의 항쟁을 이끌어 나갔을 때에도 귀족들은 저마다 불교와 도교 등을 비롯한 해외에서 들어온 문화에도 깊히 심취하였습니다. 저의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이야기 나누게 되어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