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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9일 김두관의 정치철학과 비전을 담은 저서 '아래에서부터(부제:신자유주의 시대, 다른 세상을 꿈꿈다)가 출판됩니다. 네이버의 김두관블로그에 연재되는 내용입니다. 팬카페 회원님들과도 공유하실 수 있도록 퍼옵니다.
< 노무현 대통령 서거 3주기 추모공연의 한 장면 >
노무현 대통령과 나
“53.5% 득표로 김두관 후보 당선 확정!”
텔레비전 화면의 하단에 큼지막한 자막이 떴다. 내가 꽃다발을 들고 양손을 치켜들자 일제히 환호성이 터졌다. 선거사무소는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김두관!”
“이겼다!”
“김두관!”
“이겼다!”
방송 인터뷰를 마치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방송에 나온 기자와 전문가들은 나의 승리를 두고 ‘지방선거 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라고 논평했다.
16.9%(2002년)
25.5%(2006년)
53.5%(2010년)
계단을 오르듯 선거를 치를 때마다 득표율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도전 끝에 마침내 나는 경남도지사에 당선됐다. 소파에 몸을 부리자 일순간 피곤이 몰려왔다. 그 와중에도 지난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나는 동지들과 김해 봉하마을로 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당선 인사를 드리러 갔다. 며칠 전에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도일에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하지만 그날은 하늘이 너무나 청명했다. 도착하자 기자들이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노 대통령이 누워있는 박석묘 앞까지 걸어갔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노 대통령의 어록 앞에서 일제히 고개를 숙이고 묵념을 했다. 누군가 묵념을 마친 나를 앞으로 이끌었다. 나는 박석묘 오른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뻗어 묘비에 두 손을 얹었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기저기서 카메라 후래쉬가 터지기 시작했다. 그 기계음 사이로 아내를 비롯해 함께 온 동지들이 흐느끼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문득 며칠 전 읽었던 박노해의 시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가 떠올랐다.
먼 길을 걸어온 사람아
그대는 충분히 고통 받아 왔고
그래도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아무 것도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마라
세상에서 단 하나 두려워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대의 고통이 가치 없이 되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고통 앞에서
나는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헛된 위안을 택하겠는가
쓰라린 진실을 택하겠는가
두려워하지 마라
믿음을 잃지 마라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우정은 절망보다 강하다
희망은 패배보다 강하다
그랬다. 내가 선거운동 기간 내내 두려워한 것은 단 한 가지였다. 경남에서 또 다시 패배함으로써 노 대통령의 죽음이 가치 없이 되는 것. 헛된 위안을 거부하고 쓰라린 진실을 선택한 결과가 허무한 패배로 끝나지 않을까 두려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행 중 누군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우렁차게 외쳤다.
“노무현 대통령님, 우리가 해냈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 죽음보다 강한 사랑, 절망보다 강한 우정, 패배보다 강한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 내가 지역주의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면서 쓰러지지 않았던 것은 바로 노무현의 정신과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소중한 정신과 가치가 끝내는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선이 확정된 직후 나는 이렇게 말했다.
"지역주의라는 나무를 쓰러뜨리기 위해 노무현 대통령이 여덟 번 찍었고 제가 마지막 두 번 더 찍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지역주의라는 거대한 나무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리틀 노무현’과 ‘빅 김두관’의 만남
노무현 대통령과 나의 관계를 어떻게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까? 양면이 있다고 본다. 우선 나를 ‘리틀 노무현’으로 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이 나의 정치적 사부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많은 언론이 나를 그렇게 부르고 있다. 거꾸로 노 대통령을 ‘빅 김두관’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걸었던 동지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각은 아직 제대로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이 없다.
나는 안희정, 이광재 도지사처럼 노 대통령의 비서나 측근 출신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시민 대표처럼 노 대통령의 멘토나 책사도 아니었다. 2002년 노 대통령의 동업자로 한 배를 타기까지 나는 풀뿌리 동지들과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랫동안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노 대통령이 지방선거를 앞두고 나에게 민주당 입당을 요청하면서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됐다.
내가 1995년부터 2기에 걸쳐 남해에서 구현한 군정은 전국적 주목의 대상이 됐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7년 동안 군수로서 모든 열정, 소신, 아이디어를 완전 소진했던 나는 3선 군수에 도전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가오는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남도지사에 출마할 결심을 굳히고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그해 4월 노무현 전 의원이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광역단체장 한 명을 PK에서 당선시키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당선은커녕 당장 후보를 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코너에 몰린 노 후보가 나에게 세 번이나 전화를 걸었다. 어쩔 수 없이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김 군수는 누구하고 정치하려고 그럽니까?”
내가 민주당 입당에 난색을 표하자 노 후보가 목소리를 높이며 던졌던 질문이다. 몇 시간에 걸친 간곡한 설득이 이어졌고, 마침내 나는 민주당 입당을 약속했다. 두 사람의 마음은 그날 노 후보가 마지막으로 했던, 다음과 같은 발언에 그대로 함축돼 있었다.
“역사의 길에 동행합시다.”
내가 민주당에 입당한 것은 5월 14일이었다. 선거일이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 후보와 함께 지역주의와 금권정치를 혁파하겠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자의 편에 서겠습니다.”
상대 후보 진영에서 ‘호남당’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다음 집요하게 공격하자 나의 지지율이 썰물처럼 빠지기 시작했다. 22%에서 19%로, 다시 17%로 떨어지더니 최종 성적이 16.9%로 나왔다.
영남에서 노 후보와 동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선을 앞두고 경남선대본부장을 맡아줄 명망가를 찾아야 했는데, 접촉한 인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거절했다. 노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며 이회창 후보는 물론이고 정몽준 후보보다도 낮게 나온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지지율은 다시 올라갈 겁니다. 힘을 보태주십시오.”
“노무현은 안 됩니다. 더 늦기 전에 빠져 나오소.”
사람들은 도리어 나를 불쌍하게 여겼다. 어쩔 수 없이 젊은 내가 선대본부장을 맡아야 했다. 부산과 대구 등 대도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산은 문재인, 대구는 권기홍이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당시 노 후보 지지율이 부산 40%, 경남 20% 수준으로 나왔는데, 12월 19일 최종 성적은 부산 29%, 경남 27%였다.
“청와대에 들어와서 나 좀 도와주세요”
노 후보가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를 누르고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다. 곧바로 정권인수위원회가 꾸려졌고, 청와대 비서실과 국무위원으로 일할 사람들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내 이름도 자주 언급됐지만 실제로 내가 행정자치부 장관이 되리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나를 행자부 장관에 임명했다. 주변의 반대가 엄청나게 많았음은 물론이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고건 총리가 깊은 우려를 표시하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정통 엘리트 관료 출신인 그로서는 4급 서기관 직급인 군수 출신을 곧바로 장관에 앉힌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내가 행자부 장관에 정식으로 임명될 때까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12월 19일 대선에서 승리하자 ‘후보자’는 ‘당선자’가 됐다. 2월 25일 취임일까지 두 달 동안 호칭만이 아니라 의전의 격이 완전히 달라졌다. 우선 이전처럼 마음대로 만날 수가 없었다. 당선되고 보름 정도가 흐르는 동안 나는 당선자나 주변 인사로부터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할 수도 없었다.
주변에선 인수위에 자주 가서 얼굴 도장을 찍으라고 권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체질이 아니라 부르지 않으면 일부러 가지 않았다. 고위직에 발탁되기 위해서 권부 주변을 얼쩡거린다는 것은 내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1월 20일로 기억한다. 발신제한이 표시된 전화가 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당선자를 밀착 수행했던 여택수 비서였다.
“김 군수님이시죠?”
“예, 그렇습니다.”
“오늘 저녁 시간이 나십니까?”
“가능합니다만.”
“당선자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
“종로에 있는 용수산에 방을 잡아놓을 테니 오후 6시에 오십시오.”
현장에 가보니 경호실 직원이 방으로 안내했다. 약속한 6시가 지나고 5분이 흘렀지만 당선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차가 막혀서 늦는다고 했다. 당선자는 자신을 위해 교통 통제를 하지 말도록 하고 있었다. 당선자가 15분경 도착했다.
“김 군수님. 청와대에 들어와서 나 좀 도와주세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노 당선자가 입을 열었다. 노무현 사단의 일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선자는 나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썼다. 내심 생각해둔 것이 있었던 터라 곧바로 나의 의사를 솔직히 밝혔다.
“청와대는 못 가겠습니다.”
나의 즉답에 당선자가 놀란 것 같았다.
“못 가겠다고요?”
“예.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보필하려면 기획력과 아이디어가 있어야 하는데, 솔직히 저는 그런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습니까?”
“저는 현장을 뛰어다니는 야전 체질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내각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서로 할 말은 여기서 끝났다. 두 사람은 이날 2시간 정도 식사를 하면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1시간 30분은 지방분권에 대해서, 20분은 해양정책에 대해서 이런저런 의견을 나눴다. 헤어지면서 당선자는 최종 결정이 날 때까진 인사 문제에 대해서 함구해 달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2월 10일 전후부터 행자부, 해수부 장관으로 하마평에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무위원 임명 시기는 늦어졌다. 당선자는 기존에 법률로만 존재했던 국무총리 제청 절차를 지키려는 의지가 강했다. 결국 대통령 취임식 이틀 후인 2월 27일이 되어서야 임명장을 받았다. 정찬용 인사수석보좌관이 임명장을 받으러 오라고 직접 전화를 했다. 당시 나는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행자부 장관 재직 기간 6개월 29일
당선자 독대 이후 나는 행자부 장관 임명을 통보받았다. 하지만 정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 언론의 확인 전화에 답해주지 않았다. 보안을 철저히 지키는 것이 임명권자에 대한 예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은 내가 남해군수 시절 기자실을 개방하고 브리핑제도를 도입한 것, 경남선대본부장을 맡고도 후보자가 왔을 때 언론에 노출이 많은 옆자리를 다른 정치인에게 양보한 것과 함께 그 부분을 매우 좋게 봐주었다고 한다.
“행정자치부 장관에 김두관 전 남해군수!”
언론은 나의 장관 임명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 이창동 문광부 장관과 더불어 가장 파격적 인사라고 평가했다. 따지고 보면 이명박 정부의 이른바 ‘고소영’, ‘강부자’ 인사와는 대조적 차원의 파격적 인사였던 셈이었다. 실제로 노 대통령은 국무위원 임명을 발표하면서 기자들에게 세 사람을 인선하게 된 배경과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사실 나의 행자부 장관 임명은 노 대통령이 아니라면 내리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직급보다 업무의 적절성, 참여정부의 국정철학인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을 구현할 가장 적합한 인물을 기준으로 삼았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장관 취임 이후 나는 청와대에 자주 들어갔다. 과거의 총무처 업무가 행자부에 속했기 때문에 대통령이 고위 공직자를 임명할 때마다 주무 부처 장관으로서 배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장관은 현장을 뛰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차관을 대신 보냈다. 주변에서 왜 장관의 특권을 스스로 포기하느냐고 의아스러워 했다. 장관으로서 대통령을 직접 만날 수 있는 것은 최고의 특권이라고도 했다. 당시 나에게는 ‘특권’보다 ‘현장’이 더 중요했다.
나의 장관 재직 기간은 짧았다. 정확히 6개월 29일이었다. 하지만 짧은 기간에 비해 많은 일을 했다고 자부한다. 특히 참여정부의 국정철학 중 하나인 지방분권과 균형발전의 기초를 닦았다. 지방분권특별법, 주민투표법 등 법제화를 추진했고, 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를 마련했다. 행정 권한 30%를 지방자치단체에 이양하고 지방예산편성지침 삭제를 추진했다. 계룡시를 자치시로, 증평군을 자치군으로 승격시킨 것도 내가 재직하던 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한총련 미군부대 기습시위를 빌미로 한나라당은 2003년 9월 3일 나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원내 다수파였던 한나라당은 민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재석 160명, 찬성 150명, 반대 7명, 기권 2명, 무효 1명으로 강행 처리했다. 당시 일부 언론이 실시한 여론조사는 60%가 반대였다. 다수당의 횡포와 무리수를 두고서 인터넷에선 “상어가 해녀를 물면 해수부 장관 해임하라”, “길 가던 화물차가 사람을 받으면 건교부 장관 해임하라” 등 각종 패러디가 쏟아졌다.
나에 대한 해임안 통과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 추진의 전조였다. 한나라당이 진짜로 흔들고 싶었던 대상은 노무현 대통령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김두관 행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통령 탄핵을 추진할 것이다”(홍준표 의원), “내 가슴 속에서 노무현을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김무성 의원) 등의 노골적이고 적대적인 표현이 국회에 난무했다.
노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나는 사퇴를 결심했다. 마음이 아팠던지 노 대통령이 나를 청와대로 불렀다.
“김 장관. 내가 해수부 장관을 얼마나 한 것 같아요?”
“1년 남짓 하지 않았습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도 8개월밖에 못 했어요.”
노 대통령이 예고 없이 춘추관을 방문해 기자들과 만났다.
“김두관 장관은 학벌 없는 사회와 보통 사람의 꿈을 이룬 사람입니다. 앞으로도 더 성공시켜 나가야 되는 코리안 드림의 상징인 만큼 내가 키워줄 수 있다면 최대한 키워주고 싶습니다.”
<전국책(戰國策)>에 백락일고(伯樂一顧)라는 고사가 있다. 백락은 천리마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던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어느 날 고갯길에서 소금을 잔뜩 실은 수레를 힘들게 끌고 가는 늙은 천리마를 알아보고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천리마라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천리를 달리기는커녕 이렇게 소금수레밖에 끌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부족한 것이 많은 나를 과감하게 발탁한 노 대통령에게 깊은 김사를 드린다.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노 대통령과 나의 인연은 사실 더 길다. 내가 고향에 돌아와 농민회 활동을 할 때 ‘청문회 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노무현 의원을 두 번이나 초청해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받았던 첫 인상은 시골 머슴 혹은 투박한 촌사람 같았다. 머리를 다듬지 않고 다녀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강단 있고 내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금방 느껴졌다. 강연도 재미있게 해서 ‘저런 사람이 정치도 잘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워낙 기존의 관행에서 벗어나 있어서 과연 한국 사회에서 통할까 하는 우려도 됐던 것이 사실이다.
노 대통령이 국민의 정부에서 해수부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도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남해 군수였던 나는 예산 지원을 받기 위해 장관실로 찾아갔는데, 그 문제를 처리하고 나서 언론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남해에서 진행했던 언론개혁 이야기를 설명하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10분 예정이었던 면담 시간이 1시간 넘게 이어졌다. 내 말을 다 듣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김 군수는 그렇게 언론과 잘 싸웠지만 저는 좀 욕심이 있어서 못 싸워요. 언론과 친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노 대통령은 나보다 더 치열하게 언론과 싸웠다. ‘정치와 언론의 유착관계’를 과감하게 타파하려 했던 것,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을 정치하는 이유로 삼았다는 것에서는 내가 노 대통령보다 선배인 셈이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빅 김두관’이라고 할 만하다.
사실 노 대통령과 나는 닮은 점이 많았다.
우선 바닷가 소년, 가난한 농민의 아들, 늦깎이 사회운동가, 자수성가형의 입지전적 인물, 지역주의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인물, 선거에 나가서 당선한 것보다 떨어진 것이 더 많았던 경험, 기득권 주류의 심기를 건드려 탄핵을 받은 비주류 정치인(‘고졸 대통령’과 ‘이장 출신 장관’)이라는 점에서 두 사람은 많이 닮았다.
닮은 점은 또 있다. 노 대통령과 나는 ‘중단 없는 도전’의 인생을 살았다. 패배할 줄 뻔히 알면서도 소신과 원칙을 위해 온몸을 내던졌다. 그것은 절망보다 희망에 대한 의지가 더 강했기 때문인데, 나는 문병란 시인의 ‘희망가’에서 위로를 얻곤 한다.
얼음장 밑에서도
고기는 헤엄을 치고
눈보라 속에서도
매화는 꽃망울을 튼다.
절망 속에서도
삶의 끈기는 희망을 찾고
사막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은 오아시스의 그늘을 찾는다.
눈 덮인 겨울의 밭고랑에서도
보리는 뿌리를 뻗고
마늘은 빙점에서도
그 매운 맛 향기를 지닌다.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
고통은 행복의 스승
시련 없이 성취는 오지 않고
단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
꿈꾸는 자여, 어둠 속에서
멀리 반짝이는 별빛을 따라
긴 고행길 멈추지 말라.
노 대통령과 나의 차이점도 분명히 있다.
내가 행정가의 길을 걷다가 정치에 입문했다면 노 대통령은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인으로 살았다. 지방자치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높으면서도 활동하는 공간은 달랐다. 노 대통령이 이론(지방자치실무연구소) 분야에서 주로 활약했다면 나는 실천(지방자치개혁연대) 분야에서 발로 뛰었다. 업무 스타일도 다르다. 노 대통령이 본인의 결단력과 아이디어를 중시한 반면 나는 동지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실행하는 것을 잘 하는 편이었다.
노 대통령이 ‘비주류의 주류’였다면 김두관은 ‘비주류의 비주류’였다. 주류사회와 네트워크가 없다는 것은 나의 약점이자 강점이다.
노무현 정신의 핵심은 무엇일까? 특권과 반칙이 지배하는 사회,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이 심판과 선수로 동시에 뛰는 사회, 기회주의자가 승리하는 사회,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이 통하는 사회…. 이런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상식적 저항을 말뿐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겼다는 점에서 노무현 정신의 핵심적 가치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지역주의에 대한 그의 불굴의 투쟁은 모든 사람의 양심을 일깨웠다.
‘리틀 노무현’이 그런 정신과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받이들이고자 한다.
첫댓글 계속 옮겨 주십시요.
'아래에서부터' 좋은 책명입니다.
한 30여년전 '낮은데로 임하소서'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높은데에서 운명적으로 낮은 곳을 보게된 분의 자서전이었지요.
김두관님은 당신을 사랑 하십니다.
감사 합니다.
절망속에서 희망을 만들어가는 당신이 있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