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사찰 강화 전등사 [ 傳燈寺 ](인천사찰)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창건한 사찰.
존하는 사찰 중 가장 오래된 사찰 전등사로 떠나봅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아도화상이 신라의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경북 선산)에 불교를 전파하기 전, 이곳 강화 전등사의 개산조가 되었다는 유서 깊은 설이 있습니다. 당시의 절 이름은 진종사(眞宗寺)였다고 합니다. #전등사 #사찰기행 #불교 전등사에 관한 기록은 고려 원종 5년(1264) 5월 삼랑성 가궁궐에 불정도량과 오성도량을 4개월간 시설케 하고 법회를 열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처음이지만, 이때까지도 '전등사'라는 절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이곳에 가궁궐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왕실과 매우 가까운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뒤 1266년(원종 7)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절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과 1341년(충혜왕 복위 2)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년(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년(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다.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 주고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 곡식 수십 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다.
1784년(정조 8) 정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 5칸에 불과했으나, 1828년(순조 28)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殿)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演弘)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규영(奎營) 등이 대웅전을 중수했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僧軍)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다.
1876년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영담(映潭)이 관음암(觀音庵)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幀)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하였다.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韓永福)이 이 절에 전래되어 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宮內府)에 바치고, 중수비 200원(圓)을 받아 절에 내렸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本山)의 하나로 강화·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지는 김지순(金之淳)이었고, 2대 주지는 국창환(鞠昌煥)이었다.
1915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李智永)이 지장상(地藏像)을 개금하고 명부전(冥府殿)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묵당(寂默堂) 30여 칸을 수리하고, 식당 26칸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李普仁)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極樂庵)을 중수하고, 적묵당(寂默堂)·강설당(講說堂)·대조루·명부전·극락암 등을 중건하였다.
8대 주지 김정섭(金正燮)은 1934년 전문강원(專門講院)을 설립하고 안진호(安震湖)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 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
1973년에 적묵당을 해체·복원했으며, 1977년 명부전을 해체해서 이전하고 종각을 신축하였다. 1979년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1986년에 극락암과 삼성각을 해체 및 증·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보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명부전·삼성각·향로전·적묵당·강설당·종각·대조루(對潮樓) 등이 있다.
대웅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 法華經』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고 전한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강화 전등사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10구의 시왕(十王), 2구의 귀왕(鬼王), 2구의 판관(判官), 2구의 녹사(錄事), 2구의 장군(將軍), 10구의 동자(童子) 등 29구의 존상이 있다.
이 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곳으로 현재는 주지실로 대용되고 있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전등사 철종(보물, 1963년 지정)과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2012년 지정),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2012년 지정)이 있다. 전등사 법화경판은 2002년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2016년 지정 해제되었다. 철종은 우리 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 종으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 빼앗겼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였으나, 1매는 6·25전쟁 때 파주의 모 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또한, 1995년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대조루에는 선원보각(璿源譜閣)·장사각(藏史閣)·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등사 [傳燈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