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산상설교의 대상이 “제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열두 제자가 나옵니다. 아마도 마태복음 4장의 어부 출신 네 명의 제자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갈릴리 지역의 그리 높지 않은 언덕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 앞에서 전하는 것처럼 하십니다. 마태복음의 긴 강화가 다섯 개인데, 마치 모세 오경과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이 한 장소(마태복음 5:1절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에서 산상설교를 전한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에도 산상설교의 내용이 등장하는데(누가복음 6:20~26), 평지에서 가르치십니다. 아마도 이와 유사한 가르침을 여러 번 행한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의 특징이 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 말씀을 한 군데에 뭉치는 성향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13장, 20~21장, 24~25장을 보면 비유가 모여있습니다.
산상설교의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왕권 통치인데, 그 핵심 가치가 팔복입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핵심 가르침이 팔복입니다. 팔복은 나누어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입니다. 하지만 나눈다면 세 가지 범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부터 네 번째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복입니다. 다섯 번째부터 일곱 번째 복은 사람(이웃)과의 관계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복입니다. 여덟 번째 복은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의 하나님 나라 복입니다.
누가복음 6장에는 네 가지 복이 소개됩니다. 원어대로 직역하면 “복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아, 복이 있다! 배고픈 사람들아!, 복이 있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복이 있다! ~ 하는 때에”입니다.
중요한 것은 산상설교의 복은 행복과 다릅니다. 행복은 헬라어 “유다이모아”로서, 고대인은 “유다이모아”에 이르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말합니다. 즉, 첫째는 관조적인 삶입니다. 둘째는 명예, 인간의 탁월함입니다. 셋째는 정치적 삶, 향락적인 삶입니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관조적인 삶이 인류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삶으로 생각하였습니다. 헹복을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 방법은 외부 환경에 의지하지 말고 한걸음 떨어져 스스로 만족하고 여가와 사색을 즐기며 행복을 느끼는 것으로 말하였습니다. 행복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하지만 팔복은 인간의 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카리스, 선물입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첫 번째 복을 말씀합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입니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여,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두 번째 복을 말씀합니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복되도다! 슬퍼하는 사람들이여, 그들에게 위로가 있을 것이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복되도다”는 헬라어 “마카리우스”로서 “복되다”의 의미입니다. 받아야 되는 복이 아니라 이미 받은 복입니다. 첫 번째, 여덟 번째 복은 현재시제입니다. 두 번째부터 일곱 번째 복은 미래시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으로서 현재 누리는 복이면서 먼 미래에 성취되고 완성되는 복임을 강조합니다.
“가난하다”, “애통하다”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 번번이 등장하는데, 특별히 시편에 많이 등장합니다. 유대 문헌에도 번번이 등장합니다. 솔로몬의 시편, 쿰란 문서를 보면 “가난한 자”는 번번이 언급되는데. 어떤 특정한 그룹을 가리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는 이사야 61:1~2절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사야 61:1~2절을 보면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61:1~2절은 이 땅의 모든 슬픔과 애통을 기쁨과 찬양으로 바꾸어 준다는 내용입니다. “가난한 자”, “마음이 상한 자”는 누구입니까? 세상 속에서 박해받고 있지만 지속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려고 하고, 궁극적으로 신원, 구원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백성들의 의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악, 사악한 자들, 교만한 자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 슬퍼하며 신원하며 부르짖을 수밖에 없음을 인정합니다. 그런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가난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합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선포합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합니다. “은혜의 해”는 오늘 “희년”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통해 이 땅에 진정한 기쁨이 임합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헤 바실레이아 톤 우라논”즉, “하늘들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이 희년의 축복,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희년 선포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누가복음 4:18~19절). 누가복음 6:20절을 보면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너희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고 “너희 것이다”라고 말씀함으로써 이미 천국이 임한 것으로, 즉 하나님의 다스림을 경험하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는 동일 인물입니다. 각각이 아닙니다. 한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이사야 61:1~2절에서 “마음이 상한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됨으로, 그 결과로 기쁨이 회복되는 희년의 축복을 말씀합니다.
4절에 “그들이 위로받을 것이요”는 히브리적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적 수동태입니다. 그들이 위로받는데, 하나님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위로받는다”라는 헬라어는“파라칼레오”로서 “겉으로”와 “부른다”의 합성어입니다. 신적인 행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수여하도록 결정적 역할을 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국 예수님을 통해 받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사건에서 보았듯이 심판받으심으로, 예수님의 시험 사건에서 보았듯이 철저하게 순종하므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우리를 위로하기 위함입니다(누가복음 2:25). 성령이 오신 목적도 우리를 위로하기 위함입니다(요한복음 14:16. 궁극적으로 완전히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위로가 주어집니다. 요한계시록 4:17, 21:4절을 보면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씻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예수와 하나 된 우리를 통해 위로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입니다(마태복음 4:18~22절). 결국 제자들을 통해 위로하시는 사역을 감당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를 통해, 주님이 무리(제자)를 통해 이루어가시기를 원하는 위로를 통해 기쁨이 임합니다. 이것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 있게 될, 아니 있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 즉, 천국=하늘들의 나라=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인 은혜의 해=희년이 임합니다. 우리 공동체 가운데 꼭 한 가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위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