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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착실과장 봉덕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순옥아, 언제 시간나면 식사 한끼 하게 날좀 잡아라.” 진즉부터 벼르고 벼르더니 이제 일통을 저지르려나 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수덕이 딸 광주은행 취직턱을 계기로, 진순이 딸 시교육청 취직 턱, 순연이 시어머니 병문안시 그 짝궁이 다정회 회원들에게 아부한 턱, 양임이가 라이브 카페 가는게 소원이라고 자기가 한턱 낸다고 해서 갔고..... 등등 이제는 월례행사처럼 정기모임 외에 한번씩 돌아가면서 심심하면 모여서 놀고 식사를 한다.
아무튼 봉덕이의 명을 받고
‘이왕이면 하루 소풍겸 적당히 놀고 올수 있는 장소가 어딜까?’
물색을 하다가 7월달에 학교에서 건강일(친목) 행사로 태안사에 갔는데 광주에서 멀지도 않고 그곳의 숲속 길과 계곡 물이 너무 좋아 한번 더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곳으로 가자고 제안을 했다.
나도 학교에 가서 눈도장도 찍고, 진순이도 회사에 잠깐 얼굴이라도 비치고 오려면, 대략 11시쯤 출발하면, 점심때쯤 섬진강변 압록에 가서, 맛있는 송어민물참게매운탕을 먼저 먹고, 오후에 태안사 계곡에 가서 놀다가, 광주로 돌아와서 참석하지 못한 친구들과 저녁을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아 그렇게 약속을 정했는데,
양임이 왈 “그 더운 대낮에 출발을 해서 차 속에서 떠 죽을 일이 있느냐?”
진순이 왈 “계곡에 사람도 많고 복잡하고 붐빌텐데 그리고 덥고 피곤하기만 할텐데 그곳으로 가냐? 차라리 광주에 있는 깨끗하고 시원한 에어콘 있는 음식점에서 만나 식사나 한끼 하자” 등등 티격태격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게 더 좋을까? 시간, 노력, 재미, 음식맛 등 경제적인 면을 고려하여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노리는 방법은 뭘까? 고심을 한 결과 진순이만 빨리 오면 출발시간을 앞당겨도 될 것 같아 10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점심준비는 양임이 지가 찰밥을 해 온다고 자청을 하기에 맡았고, 봉덕이는 흰밥에 반찬, 나는 과일, 수덕이는 통닭을 사오는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리고 저녁은 봉덕이가 쏘기로 하고 말이다. 수덕이한테 전화해서 아침에 통닭을 하는 가게가 있는가? 물었더니 다행히 아침부터 통닭을 하는 곳이 양동시장통에 있다고 한다. 아침 9시쯤 수덕이랑 만나서 양동시장에 가서 통닭을 사고 모임장소인 동광주 주유소로 갔다. 엄살쟁이 겁보 진순이가 아직 도착하지 않아 어디쯤 오고 있는지 물으니 지금 차를 주차시키고 걸어오고 있다고 한다. 공판장에 가서 과일을 사고 차에 올랐다. 자식자랑하기, 서방 흉보기, 룰루랄라 노래를 부르면서 곡성 태안사로 달려갔다.
'바른생활교과서인 양임이가 왠일로 일하러 가지 않고 놀러를 다 올까? 양임이 성격에 하루 일당 10만원씩 버는데 그 돈이 아까워서 빼먹고 놀러올 년이 아닌데.....' 참 이상하기도 하다.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보다. 어째서 일을 가지 않고 놀러왔냐고 물으니 짝궁인 형환이가 오늘 놀러가라면서 10만원을 줬다고 입이 째지게 자랑을 한다. 맨날 서방흉만 보던 년이 오늘은 서방자랑이다. 양임이는 좋겠다. 세상에 놀러가라고 짝궁이 10만원이나 주다니.....
사실은 얼마전에 창수 장인 문상을 같이 가면서 수덕이가 형환이한테 양임이랑 놀러 한번 갈랑케 일당을 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맨날 똑똑한 척 하는 양임이도 별수 없다. 주머니돈이 쌈지돈일텐데....
한시간 남짓 달려 태안사 도착, 들어가는 입구의 약 2킬로미터정도의 숲속길이 온통 짙은 녹색으로 온세상을 뒤덮고 시원하고 맑은 물이 졸졸 노래하며 우리들을 환영했다. 일단 차를 위쪽으로 가지고 가서 적당한 장소에 주차를 시키고 계곡에 내려가 자리를 잡았다.
숲속 계곡의 품이 워낙 크고 넓어 피서객이 있는지 없는지 새소리 나뭇잎소리 물소리만 우리들 이야기 소리를 방해했다. 풋풋하게 생명력이 넘치는 여름 숲 속, 훤히 비친 얇은 비단천을 깔아놓은 것 같은 졸졸졸 흐르는 계곡물, 이름모를 새들의 연가, 여기저기 다람쥐들이 달리기 시합을 하고, 물속의 바위 돌맹이들은 흐르는 맑은 물 때문인지 하나도 미끄럽지도 않았다. 도연명의 무릉도원이 중국에만 있는게 아니라 여기에도 있었다.
가시내들이 개구쟁이 꼬맹이들처럼 환호성을 지르면서 가족들과 함께 한번 더 오자, 가을에도 오자, 내년에도 또 오자, 아니 일주일에 한번씩 오자, 등등 난리법석을 피웠다.
세상에서 먹는 재미를 빼면 무슨 재미로 살까?
양임이가 아침내내 새벽 5시부터 일어나서 4솥이나 찐 찰밥을 먹었다. 어린시절 모내기할때 새꺼리로 논두렁에 내온 찰밥을 먹은 기분이다. 참으로 그 찰밥 정말 맛있었는데..... 이 맛도 바로 그맛이다. 아무튼 양임이의 정성은 알아줘야 한다. 항상 일속에 파묻혀 살아 오늘만큼은 좀 편안하게 그냥 돈만 가지고 가서, 이곳 송어민물참게탕이 끝내주게 맛있어서 먹자고 했더니, 왜 낭비를 해야 집에 있는 음식 조금만 손놀리면, 가지고 와서 먹고 놀면 좋은데 하면서 기어코 찰밥을 해 왔다. 바른생활교과서는 역시 다르다. 우리들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고맙다는 말도 없이 먹어댔다.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찰밥을 좋아한 나는 먹고 또 먹고 누가 더 먹을까봐 눈치까지 보면서 먹었다. 짜구날까 두렵다. 헤어질때 양임이를 집까지 바래다 주면서 또 찰밥 한덩이를 얻어와 그 다음날까지 먹었다. 다음에는 내가 이놈의 원수를 갚아할 모양이다.
점심을 먹고 봉덕이랑 사찰을 한바퀴 돌고 온몸의 육수를 줄줄 흘러가면서 숲속길을 걸었다. 나머지 가시내들은 누워서 낮잠도 자고 계곡물에 발 담그고 놀고.....
한시간 가량 산보를 했더니 땀으로 목욕을 했다. 너무 더워 그냥 계곡물에 풍덩 빠졌다. 넘 시원하다. 그런데 아뿔사! 호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물속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어휴 이 칠칠맞은 계집애, 아직은 쓸만한 핸드폰인데....’ 꺼내서 보니 먹통이다. 그래도 기분은 상쾌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핸드폰 고장내서 속이 쌔까맣게 탔을텐데..... 별 걱정도 되지 않는다.
계곡에서 놀만큼 실컷 놀고 담양 한재골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하고 오후 5시쯤 출발을 했다. 영자도 그곳으로 오라고 했다. 곡성에 오니 하늘이 까매지고 소나기가 오기 시작한다. 억수같은 비가 쏟아졌다. 천둥 번개가 쳤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길바닥이 금새 한강이 되었다. 비상등을 켜고 달렸다. 겁이 더럭 났다. 지은 죄가 많아 벼락이나 맞지 않을련지.....가다가 폐교된 학교에서 잠시 비 그치기를 기다렸다. 비가 너무 많이 오니까 한재골 가는 길을 모두 잃어버렸다. 비속을 이리 저리 달려도 한재골은 나오지 않았다. 거리에 개미새끼 한 마리도 없다. 미로를 헤매고 헤매다 못찾고 결국 다시 광주로 왔다.
영자를 일곡지구 정동진 식당으로 오라고 다시 연락을 했다.
영자 왈 “썩을년들 날 빼놓고 날궂이 잘도 하고 다니네.” 자기가 있는 곳에는 비가 하나도 오지 않았다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천둥번개치는 소낙비만 우리들이 따라다닌 모양이다. 내가 사는 곳 봉선지구도 비가 하나도 오지 않았다. 저녁은 봉덕이가 사준 아구찜으로 푸짐하게 먹었다. 즐거움과 무서움이 교차한 하루 소풍,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어 넘어간다.
시간이 나면 곡성 태안사를 한번 찾아가 보세요.
은빛모래와 하늘이 비치는 맑은 물의 섬진강을 끼고 곡성읍에서 17호선의 국도를 따라 16km가다보면 섬진강과 보성강이 합류하는 압록유원지가 나온다. 이곳에서 보성강을 끼고 국도 18호선을 따라 6km정도 가다보면 태안사로 들어가는 태안교를 접하게 되고 다리를 건너 다시 6km정도 가다보면 죽곡면 원달리에 위치한 태안사에 다다를 수 있다.
동리산 자락에 위치한 태안사는 신라 경덕왕 원년(742년)에 동리산파를 일으켜 세 선승에 의하여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처음에는 대안사로 불리웠으며, 이 나라 불교의 선문 아홉가지의 하나인 동리산파의 본산지로 선암사, 송광사, 화엄사, 쌍계사 등을 거느리고 꽤 오랫동안 영화로움을 누렸던 사찰로 혜철선사와 도선국사가 득도한 정량수도의 도량이기도 하다.
통일신라말 그 당시 왕실불교인 교종이 형식과 격식을 중시하고 일부 지배층만 향유하면서 경전을 중시하고, 너무 권력과 밀착하여 왕실귀족들이 부정부패하고 자신들의 사리사욕 채우기만 급급하였다. 덕분에 경주에는 화려하고 수려한 불상과 탑들이 많아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들고 있다.
보다 못한 당시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돌아온 젊은 신라 유학승들이 주축이 되어 당나라에서 유행한 선종을 새로운 종파로 퍼뜨리면서 누구나 참선과 수행을 하면 글자를 몰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민중들에게 파고들었다. 당시 수도인 경주와 멀리 떨어진 산속에 사찰을 지어 지방호족들과 결탁을 하여 그 세력이 번창하였다.
특히 이곳 태안사는 9산 선문중의 하나로 가장 먼저 창건한 동리산문파로 그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9개의 선문 중에 우리 전라도에 4개의 선문이 있다. 이는 곡성태안사 동리산문, 장흥보림사의 가지산문, 남원실상사의 실상산문, 화순쌍봉사의 사자산문이 있다. 그 당시에도 전라도는 왕실에서 소외되는 지역이었나 보다. 전라도에 이렇게 선종사찰들이 발달한 것을 보니 말이다.
지금은 쇠락하여 옛 영화는 찾아볼 수 없고 송광사의 말사로 전락하고 말았다.
6.25때 대웅전을 비롯하여 산채들이 불에 타 옛 영화로움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경찰 48명이 빨치산과 싸우다가 이곳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곳이기도 하다. 하여 이곳에 경찰충혼탑이 세워져 보는 이로 하여금 역사의 아픔, 동족상잔의 아픔을 느끼게 한다. 후세의 사람들이 왜 같은 민족끼리 싸워 이렇게 죽어야만 했을까? 하고 질문하면 어떻게 대답할까? 가슴이 먹먹하다.
그리고 이곳 곡성에는 국보급 문화재는 하나도 없고 보물이 8개가 있는데 이곳 태안사에 보물 5점이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바라(불교의식때 쓰이는 무구)로 효녕대군이 세종과 왕비 왕자의 수복을 비는 내용이 담겨져 있고, 동종은 세조때 만든 것으로 우리나라 사찰에는 임진왜란 이후의 동종이 대부분으로 이전의 동종은 거의 없는데 이 종이 조선초기의 동종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광자대사탑비는 몸돌(비석돌)은 파괴되어 없고 거북받침돌에 머리돌만 얹혀 있다. 다른 사찰에 가도 몸돌이 파괴되어 받침돌과 머리돌만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일제시대 우리 정신을 말살시키려고 일본놈들이 파괴한 것들이다. 광자대사부도비는 태안사를 가장 크게 일으킨 2대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신 무덤이다. 적인선사의 조륜청정탑은 동리산파의 산문을 개창한 혜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비이다.
물론 소풍가서 노는 것도 좋고 자연경관 감상도 좋지만 우리 문화재에 관심을 갖고 보면 재미가 더 소록소록 나리라.
혹시 짬이 나신 동창들 중 8월 20일 광주 다정회 회원들이 콧바람 쐬러 군산 선유도를 가려고 예약해 두었으니 동참하실 분 다정회 회원들에게 연락하세요.
첫댓글 다정회 아자 아자 아자! 근데 아휴 숨차다
조은글 문화제 이야기 다정회 친구들 영원히 건강하길
읽다가 간다~~~
오늘 시간내서 다시 읽은 소감 광주로 이사를 내려가자~~~~~~~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