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 천태지관 차법 전승 학술대회 <논문집> / 워드 필사
- 의천 대각 국사 뇌원차의 재발견 - 4편의 논문과 4편의 논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학술 논문 >을 워드 필사로 옮겼습니다. 워드 필사한 이유는 고려 차역사를 공부하는 좋은 방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옮기는 과정에서 제가 임의로 제 공부하기 좋은 방향으로 문맥을 수정한 부분도 있으며, 년도와 인물의 관계를 다소 수정한 부분도 있습니다. 물론 이 부분은 그동안 나와 있는 거의 모든 글과 자료를 검토한 결과 그렇게 하였음을 밝힙니다.
작년 겨울 3개월에 걸쳐 진행했던 워드필사입니다. 이렇게 공개하는 이유는 물론 논문이 제 글은 아니지만, 이렇게 순차적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그 역사적 관계를 살펴보기에 용이하며, 그 사이에 비어 있는 역사적 빈 공백을 사유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워드 필사를 한지 시간이 꽤 경과하였고, 저도 다시 제대로 살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류가 있다면 차차로 다시 수정되어야 하겠지요. 무엇인가를 하나를 계속 끌고 가기에는 그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들이 끼어들기에 그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7개월 전 글을 다시 꺼내어 전체적으로 살펴보기에는 지금 저의 시간이 빡빡하므로, 단락을 구분 지어 한 편씩 올리면서 재검토해볼 생각입니다.
학술대회 논문집은 일반적으로 배포되거나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일부러 차공부 차원에서 워드 필사한 것임을 다시 한 번 밝힙니다.
***** 이 논문집은 <제1회 천태지관차법전승학술대회>에 '마음거울님'께서 참석하셨었고, 논문집을 저에게도 보내주셨습니다. 학술대회에 초대를 하여 주신 차의 세계 최석환 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논문집과 차의세계를 보내 주신 마음거울님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저는 이 논문집 워드 필사에 작년 겨울을 거의 다 할애하였습니다. 그러려고 그랬던 것은 아닌데, 이런 자런 자료를 찾아서 대조하고, 저만의 생각하는 시간을 갖느라 그리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일들이 있어서 밀쳐 두고 있었던 학술 논문 워드 필사를 이제야 올리게 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학술지의 ‘이끄는 말 <대한불교 천태종 총무원장 천태다도문화보존회 이사장 무원>’을 참조하여 ‘의천 대각국사의 생애’를 정리 하였습니다.
<의천 대각국사의 생애>
의천 대각 국사의 약력 사항은 다음과 같다.
의천義天(1055~1101)은 고려 문종과 문종의 제2 비 인예태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종(9년)의 넷째 아들이다. 그 당시에 문종은 아들들 중에서 누군가 출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문종이 아들들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될 의사를 묻자, 의천이 지원하였다.
의천은 11(문종 19년 - 1065) 세 때 경덕국사를 은사로 출가하였다. 의천은 13세의 어린 나이로 교종의 최고 지위인 ‘승통僧統’이 되었다. 이로 보아서 문종은 불교와 왕권의 긴밀한 관계를 원했던 것 같다. 그 당시의 고려의 정치상황은 불교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신라와 마찬가지로 왕족이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왕실을 튼튼히 하는 기반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왕실과 귀족과의 관계에서 견제와 균형은 불교의 세력과도 상당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면서 교종 중심에서 선종을 통합하려 한 것도 원효의 화쟁사상과 통불교적 취지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불교는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지면서 각자의 교세를 확장하는 중이어서 문종 입장에서는 왕실 중심의 교종이 탄탄해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의천은 경·율·논 삼장三藏과 유학의 전체적인 서적과 역사 서적 및 제자백가의 사상을 두루 섭렵하였다. 의천은 송나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험난한 바닷길과 국제정세가 복잡하였던 관계로 문종과 인예태후가 반대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의천은 송나라의 상선을 타고 밀항했다.
의천은 30세인 1085(선종 2)년에 송나라의 수도 변경의 계성사啓聖祠에 머물면서 화엄의 대가인 ‘유성법사’와 교류하였다. 그 뒤 상국사相國寺에서 운문종雲門宗의 종본宗本을 반문하였다. 또한 흥국사興國寺에서 인도 승려 ‘천길상’을 만나 인도의 사상과 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항정우杭州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의 ‘정원법사’에게 가서 《화엄경》 , 《능엄경》 , 《원각경》 ,
《대승기신론》 등의 사상과 천태天台와 賢首의 교학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그 후 의천은 천태산 ‘지자대사’ 육신탑에서 머리 숙여 고려 천태종 부흥을 발원하였다.
의천은 이렇게 ‘지자대사’ 육신탑에 발원하였다.
“ 일찍이 대사께서는 ‘오시팔교五時八敎’를 가르치신 이래로 천태종이 널리 퍼져 우리나라에도 진작 원효 스님이 이 가르침을 이어받으셨고, 가까이로는 제관법사가 이를 받아 성황을 이루기는 했사오나 그 후 지금은 법등이 꺼져버렸습니다. 소승은 몸을 아끼지 않고 부처님의 길을 찾아 송나라에 왔으며 이제 막 ‘자변대사’로부터 깊은 이치를 배우고 오는 길입니다. 이제 귀국하게 되면 대사의 뜻을 받들어 널리 고려에 천태종을 다시 일으키는 데 온갖 힘을 다하겠습니다. ”
이렇게 서원을 세운 후 의천은 귀국하여 천태종을 창종創宗한다.
송나라에 다녀온 의천의 요청으로 선종이 1086(선종 3)년에 흥왕사興王社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송나라·요나라·일본 등으로부터 구해온 ‘정장正藏’에 대한 소疏 · 초鈔 등의 주석서를 간행하였다.
당시 수집한 주석서는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에 수록되어 있는데, 1,010부 4,857권에 이른다. ‘교장총록(敎藏總錄)’이 기초가 되어 ‘팔만대장경’이 간행되었다.
한편으로 의천은 법안종을 통합하여 천태종을 세우고 천태교학을 전승시켜 나갔다.
올해 의천 탄신 967주년을 맞았다. 서울 관문사에서 2022년 9월 21일 ‘의천 대각국사 뇌원차의 재발견’이란 주제로 ‘<천태지관차법전승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은 천태산 귀운동에서 ‘차씨’를 가져왔다. 그 후로 한국 차문화가 본격적으로 궤도에 들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천태산’은 한국 차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곳이다. 역사적으로 천태산 ‘귀운동’은 고구려 파야선사와 신라의 도육선사가 ‘천태지관 차법’ 실천했던 곳이다.
이 학술대회는 ‘천태다도문화연구보존회’가 주관하고 ‘한국국제선차문화연구회’와 ‘천태종 관문사’가 주관하였다. 의천의 차맥을 전승하여 ‘천태차법’이 널리 선양되길 기원하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 아래 사진은 마음거울님께서 촬영한 것입니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