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르겐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 (1929~ ) 】 "공론장(Öffentlichkeit, Public sphere)
위르겐 하버마스 Jürgen Habermas (1929~ ) 는 하버마스는 1929년 뒤셀도르프의 한 중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굼머스바흐(Gummersbach)의 작은 마을에서 보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는 한때 나치 소년단의 일원이기도 했는데 물론 아직 자각과 분별력이 갖추어지지 않은 초등학교 때의 ‘해프닝’이라 그의 이력에 별다른 흠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1) 푸랑크푸르트학파 아드르노와 호르크하이머를 만나다.
그 가 대학을 다닌 때는 나치의 패망과 더불어 2차 대전이 끝난 몇 년 후 정확히 말하면 1949년부터 1954년까지이다. 그는 괴팅엔 대학에서는 니콜라이 하르트만 취리히 대학에서는 한스 바르트 그리고 본 대학에서는 에리히 로타커와 오스카 베커에게서 철학을 배웠다.
특기할만한 점은 이미 이때부터 그의 철학적 관심이 역사학 심리학 독일 문학 경제학 등을 아우르는 ‘학제적인(interdisziplinar)’ 것이었다는 점이다. 또한 그의 좌경 독서도 이때 처음 이루어졌다. 그는 뢰비트의 헤겔에서 니체까지를 통해 청년헤겔학파에 관심을 가졌으며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Geschichte und Klassenbewußtsein)』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비록 루카치를 통해 우회한 것이긴 하지만 그가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은 것은 학위논문을 준비할 때이다.
그는 1954년 마침내 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는데 이때 제출한 논문이 셸링의 세계관 철학을 연구한 『절대자와 역사(Das Absolute und Geschichte)』이다. 공부가 끝난 후 그는 산업사회학에 몰두 이데올로기 개념의 역사를 탐구하면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Dialektik der Aufklarung)』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는다.
1956년에서 1959년까지의 시기는 하버마스가 장차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 론의 계승자로 우뚝 서게 될 일생일대의 계기가 마련되었던 때이다. 대학 졸업 후 얼마간의 저널리스트 생활을 거친 다음 1956년, 그는 아도르노의 조교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회연구소(Institut fur Sozialforschung)에서 일할 기회를 갖게 된다.
이 연구소는 이미 1923년에 창립된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핵심 연구 기관이자 초기 비판이론의 산실이었다. 물론 하버마스가 연구소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당시의 연구소는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던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망명지에서 귀환하여 1950년에 재건한 것이지만 어쨌든 철학자인 그가 여기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은 ‘사회학자’의 자격으로 사회현상에 대한 경험적 연구 방법을 체득한 것이었다. 이 경험은 전기와 후기를 막론하고 하버마스의 사상 전체에 스며들게 되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호르크하이머의 초기 비판이론의 학제적 연구 방법론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이었다.
하버마스는 1962년 자신의 교수자격 취득논문인 「공론 영역의 구조 변동(Strukturwandel der Offentlichkeit)」을 출판한다. 이 책은 경험적 연구와 이론적 연구를 통합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구성요소인 공론 영역의 부침(浮沈) 현상에 대해 사회사적 접근을 시도한 수작(秀作)이다. 이 논문은 원래 1959년 호르크하이머에게 제출된 것이지만 정작 사회연구소의 지도자였던 호르크하이머가 거절하는 바람에 나중에 마르부르크 대학의 볼프강 아벤트로트에 의해 통과된 것이다.
논문이 통과되기 직전인 1961년 하버마스는 이미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과 비전임 교수로 가다머, 뢰비트와 함께 있었다. 『이론과 실천(Theorie und Praxis)』(1963)은 바로 이 시기에 발간된 그의 저서이다. 이 책에서 그는 공론 영역의 구조 변동에 이어 다시금 루카치 식 헤겔 마르크스주의와 베버 마르크스주의를 결합하고자 시도한다. 이 저술의 의도는 역사적 유물론의 결정론적 성격을 비판하는 것이며,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국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자기해방이 환상이었음을 입증함으로써 마르크스를 극복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2) 실증주의 비판에 서서
하이델베르크에서의 가다머와의 교제는 하버마스가 자신의 사상에 해석학을 적극 수용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해석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한편으로는 사회과학의 논리와 관련한 것이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과 비교하는 관점에 입각한 것이었다. 즉 하이델베르크 시절, 하버마스는 처음으로 언어철학과 분석적 과학이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을 뿐 아니라 친구인 아펠의 격려로 퍼스, 듀이, 미드 등 미국 실용주의자들의 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그가 “실천철학의 미국적 변형”이라고 한 이들의 실용주의 사상은 이후 하버마스의 사상적 편력에서 헤겔의 관념적 실천철학과 마르크스주의 민주주의론의 약점을 보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964 년 하버마스는 호르크하이머의 후임으로 마침내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철학 및 사회학 전임 교수로 취임한다. 그는 1963년과 64년 독일 사회학회가 주관한 ‘실증주의 논쟁(Positivismusstreit)’에 참여하여 같은 대학의 동료였던 아도르노의 편에 서서 변증법과 비판이론을, 무기 삼아 실증주의를 비판했다. ‘문헌보고 형식으로(Literaturbericht)’ 된 『사회과학의 논리(Zur Logik der Sozialwissenschaften)』(1967)는 이 논쟁의 결과를 담은 책이다.
이 논쟁에서 특기할만한 점은 하버마스의 좌파적 사고가 사회과학 방법론이란 형태로 그 구체적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실증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은 겉으로는 논쟁의 상대자인 포퍼와 알베르트 등 비판적 합리주의를 겨냥한 것이나 그 이면에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이 숨어 있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 실증주의는 테크노크라트 중심의 서유럽 복지 국가 체제를 정당화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을 소진시키는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실증주의 비판은 곧바로 “이데올로기로서의 과학과 기술” 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실증주의를 자양분 삼아 끊임없이 성장하는 과학과 기술 점점 비대해져가는 자본주의의 기술 관료적 복지 체제, 이에 반하여 계속적으로 약화되어가는 노동자 계급의 혁명적 잠재력 그리고 확산일로에 있는 대중의 정치적 무관심 등이 당시 서유럽 사회의 최대 문제였음을 감안한다면 그는 실증주의 비판을 통해 이미 사회 비판가이자 이데올로기 비판가로서의 면모를 대중 앞에 드러내게 된 셈이다.
실제로 1960년대 후반 독일에서 학생 비판적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좌파’ 운동이 일어나자 하버마스는 이 저항운동의 긍정적 잠재력을 읽어낸다. 그러나 학생운동이 그의 의도와는 달리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자 급기야 그는 학생들과 불화를 빚게 된다. ‘혁명’에 동조적이지 않은 비판이론에 대한 학생들의 비난은 급기야 사회연구소를 점거하는 사태로 이어졌고 경찰은 또 이들을 폭력적으로 해산했다. 아도르노는 학생들과의 갈등 속에서 1969년 사망했으며 하버마스는 학생들의 저항운동을 “좌파 파시즘”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969 년에 발행된 『저항운동과 대학개혁(Protestbewegung und Hochschulreform)』은 이 당시의 시대적 생동감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그의 정치적 소논문집이다. 그는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 이상 정상적인 교수직을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판단, 결국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떠나게 된다. 이때가 1971년이다.
3) 『인식과 관심』으로 대표되는 전기 사상
하버마스 전기 사상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인식과 관심』이 출판된 해는 1968년으로 그가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떠나기 전이다. 이 책은 그가 체계적인 의도 아래 철학사의 인식론을 재구성 비판이론을 인식론적으로 정립하려는 시도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인식주도적 관심(Erkenntnisleitende Interesse)”이란 독특한 용어를 창안, 객관주의를 표방하는 인식론을 비판한다. 자연과학을 포함한 모든 인식 형태는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갖는 특정한 관심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고 보면 인식주도적 관심은 그가 이미 수년에 걸쳐 행한 바 있는 실증주의 비판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하버마스가 언어적 전회를 단행하기 이전, 의식철학에 기반하여 비판적 사회이론은 곧 ‘사회 인식론’이라는 신념 아래 그간 실증주의가 무시해온 자기반성적 비판적 정신을 회복 실천적 의도를 지닌 역사철학을 ‘재구성’을 시도하고자 한다.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그가 인간종(人間 種)의 역사창조 행위를 ‘노동(Arbeit)’과 ‘상호작용(Interaktion)’으로 분리, 마르크스를 포함한 기존 좌파 역사철학의 노동패러다임을 자연 지배에 관심을 갖는 실증주의로 해석 비판하면서 노동 영역 대신에 상호작용 또는 의사소통 영역에서 해방의 가능성을 찾는 의사소통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이 러한 노동과 상호작용의 분리 사유는 후일 그가 언어적 전회를 단행한 후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통한 이원론적 사회이론의 구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이 저술은 전후기 사상을 막론하고 그 전체적인 흐름으로 보면 ‘서론’ 격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버마스의 사상이 사회비판의 반성적 기초로서 의식철학에서 언어철학으로 이행한 것을 두고 그의 전후기 사상이 단절되었다고 판단하면 커다란 오해다.
그는 이미 1960년대 중반부터 쉬츠의 현상학, 촘스키의 일반 문법이론, 오스틴의 언어행위 이론을 깊이 공부했으며, 그 스스로 이러한 학습이 “보편화용론사상의 탄생에 자극제”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즉 상호작용 또는 의사소통의 사회 영역에서 비판의 장소와 해방의 가능성을 찾으려는 그의 사상적 핵심 의도는 전후기를 관통하고 있으며 다만 의식철학에서 언어철학으로의 전회는 이러한 비판이론적 의도를 사변이 아니라 경험적으로 정초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이다.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떠난 하버마스는 1971년 슈타른베르크 소재 막스 플랑크 연구소에서 바이츠체커와 공동으로 연구소장직을 수행한다. 이 연구소는 과학 기술 세계의 삶의 조건을 연구하는 곳이었는데 물론 그의 관심은 여전히 자본주의의 과학기술 및 관료적 사회 체제가 생활체계의 상호작용 영역을 지배하는 메커니즘을 규명 비판하는 것이었다.
1971년 그는 당시 체계이론으로 주목받고 있던 니클라스 루만과 함께 『사회이론인가 사회공학인가 체계 연구는 무엇을 실행하고 있는가? (Theorie der Gesellschaft oder Sozialtechnologie. Was leistet die Systemforschung)』를 출판, 이른바 ‘하버마스-루만 논쟁이라 불리는 비판이론 대 사회체계 이론의 논쟁의 불씨를 지핀다. 체계이론이 사회를 사물화된 체계와 동일시하는 일종의 테크놀로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의 비판은 과거 실증주의 비판과 노동패러다임의 마르크스 역사철학에 비판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역 사적 유물론의 재구성을 위하여( Zur Rekonstruktion des Historischen Materialismus』(1976)도 이 시기 출판된 주요 저술이다. 여기서 하버마스는 역사유물론과는 다른 자신의 새로운 사회진화론을 밝히고 있는데 내용상으로는 이전의 사상과 마찬가지로 노동 또는 생산 패러다임에 입각한 역사유물론의 환원주의를 비판하고, 이에 대해 도덕 발달과 자아정체성의 형성을 내용으로 하는 사회적 상호작용 영역의 발전이 사회진화의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이런 관점에 서면 자본주의의 위기는 경제적 시스템의 위기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시스템의 위기는 그것의 작동을 뒷받침하는 정당성의 위기이기도 하다. 하버마스는 이 점을 이미 『후기 자본주의의 정당성 문제(Legitimationsprobleme im Spatkapitalismus)』(1973)를 통해 피력한 바 있다.
4) 의사소통행위 이론의 전개
하 버마스는 1981년 마침내 자신의 생애 최대의 걸작인 『의사소통행위 이론(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을 출판한다. 2권으로 구성된 이 저작의 제 1권은 부제가 ‘행위합리성과 사회합리화(Handlungsrationalitar und gesellschaftliche Rationalisierung)이고 제 2권의 부제는 ‘기능주의 이성 비판(Zur Kritik der funktionalistischen Vernunft)’이다.
한때 주요 저작으로 간주되었던 인식과 관심마저도 이 대작에 비할 때 “단지 초기 작품 정도로 의미가 퇴색”할 정도라면 그가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비로소 “철학도로서의 공개적인 실습 과정을 끝마쳤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 같다.(발터 레제-쉐퍼, 선우현 역 『하버마스 철학과 사회이론』, 15쪽) 그러나 하버마스의 언어적 전회, 즉 비판이론의 규범적 정초를 위해 의식철학을 포기하고 언어철학으로 전환한 사건이 『의사소통행위 이론』을 통해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하면 이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1984년에 출간된 『의사소통행위 이론의 예비 연구와 보완(Vorstudien und Erganzungen zur 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에 수록된 「사회학의 언어이론적 정초에 대한 강의(Vorlesungen zu einer sprachtheoretischen Grundlegung der Soziologie”」(1970/71), 「진리론(Wahrheitstheorien)」(1972), 「보편화용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Was heißt Universalpragmatik?)」(1976) 등 의사소통행위 이론을 예고하는 대부분의 주요 논문들은 인식과 관심 직후부터 10여 년간 이미 쓰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의사소통행위 이론으로 말미암아 하버마스의 비판이론은 명백히 인식적 관심에 바탕을 둔 사회인식론으로부터 화용적(話用的) 언어이론을 기초로 한 사회이론으로의 이행을 완료한다. 이제 자본주의 사회는 넓은 의미로 근대 사회의 범주 속에 포섭되고, 이러한 근대 사회의 발전 과정은 ‘합리화’로 규정되며 노동과 상호작용의 이원론은 전략적 행위와 의사소통 행위의 이원론 및 체계의 합리화와 생활세계의 합리화의 이원론으로 개념화되고 따라서 근대 사회의 지배 메커니즘도 체계가 생활세계를 ‘식민화(Kolonialisierung) ‘하는 합리화의 패러독스로 설명된다.
과거 인식 비판을 통해 진단한 근대 사회의 병폐는 더 이상 ‘의식’의 사물화가 아니라 의사소통 관계의 사물화로 설명됨으로써 루카치식 헤겔 마르크스주의의 주체철학은 종언을 고하게 된다. 우리가 하버마스의 사상을 전후기로 나눈다면 그 건널목은 시기상으로는 『인식과 관심』 직후인 1970년대 초, 그리고 이론 형성의 특징으로 보면 비판이론의 규범적 정초를 의식 철학이 아니라 언어철학에서 찾는 바로 그 지점이다. 적어도 이론상으로 보면 『의사소통행위 이론』은 이러한 점진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완성된 형태이다.
1983년 하버마스는 다시 프랑크푸르트 대학으로 복귀한다 이때부터 그는 자신의 의사소통행위이론적 사회비판 패러다임을 현실에 적용시키는 데 힘을 쏟는다. 이미 1980년 모더니티 미완의 프로젝트(Die Moderne - ein unvollendetes Projekt)라는 논문을 통해 신보수주의(Neukonservatismus)와 포스트 모더니즘(Postmodernismus)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 바 있는 그는 1985년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Der philosophische Diskurs der Moderne)』을 통해 신구조주의의 이성 비판에 대항한다. 의사소통 합리성의 잠재력이 우리 시대에 아직 소진되지 않았다는 시대 진단에 입각한 그의 근대적 프로젝트는 80년대 보수주의 우파로부터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로, 반대로 좌파로부터는 수정주의 또는 보수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입장은 어디까지나 법치국가의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확고한 지지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즉 그가 옹호하는 민주주의는 의사소통행위이론에 기초를 둔 심의(審議) 민주주의로 이성과 토론에 의거한 공론 영역의 활성화를 의도하는 것이었다. 사회 시스템 작동의 매체인 화폐와 권력이 공론 영역에서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를 대체, 의사소통 합리성의 잠재력을 훼손시키는 것이 사회 병리라면, 『사실성과 타당성(Faktizitat und Geltung)』(1992)에서 그가 옹호하는 이성과 토론에 기반한 절차적 심의 민주주의의 제도는 여전히 수행해야 할 가치가 있는 근대적 프로젝트이다.
하버마스는 실존하는 세계철학계의 거두(巨頭)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은 은퇴하여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명예교수로 있지만 여전히 현역 시절 못지 않게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물론 자유주의 우생학에 대한 비판과 9. 11 테러리즘을 둘러싼 데리다의 대화 등 그가 토해놓고 있는 현실 정치와 사회 상황에 대한 최근의 발언들의 이론적 기초는 여전히 의사소통행위 이론이다.
하버마스는 독일의 파국을 경험한 전쟁 후 세대다. 사춘기 시절 전쟁을 경험했고, 나치 독일이 패망한 1945년에 우리나라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김나지움(Gymnasium)을 마치고 본 대학에 들어갔다. 하버마스의 눈에 비친 독일 사회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전쟁 이전으로 되돌아간 상태였다. 나치 독일이 저지른 전쟁과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도덕적 파탄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거기에 없었다. 철학적 분위기도 그랬다. 당시 유행처럼 번진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 속에서 전쟁 전과 다름 없이 하이데거 철학은 여전히 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전쟁 이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도대체 독일이 전쟁 기간 무슨 일을 했는지 자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불감증의 원인을 프랑크푸르트 학파 철학자들은 비판적 이성이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찾았다. 부당한 권위의 정당성을 따져보지도 않고 단지 주어진 권위에 순응한 채, 그것을 도구적 합리성과 결합할 때 일어난 참극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학살로 나타났다면, 이성이 비판적 측면을 상실하고 도구적 측면과 다시 결합할 때 또 어떤 비극이 일어날 것인가?
하버마스는 청년 시절 경도되었던 하이데거 철학에서 벗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에 합류했다. 철학은 기본적으로 ‘비판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생각을 그는 선배 세대와 공유했다.
비판으로서의 철학이라는 화두로 하버마스는 지치지 않고 모든 철학적 전통을 비판해 왔다. 그에게 철학은 더 이상 모든 학문에게 최종 근거를 부여하는 기초학문(Grundwissenschaft)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 후 제일 철학을 자임해온 형이상학적 사고를 거부한다. 또 데카르트와 칸트에 이르러 제일철학의 위치를 새롭게 차지한 인식론, 또는 그가 즐겨 쓰는 용어로 바꾸면 의식철학(Bewußtseinsphilosophie)을 거부한다. 도대체 무엇이 형이상학과 인식론에 학문 중의 학문, 또는 모든 학문의 근거를 제공하는 ‘자리 지킴이’(Platzhalter)로서의 지위를 부여했는가? 그래서 하버마스는 탈 형이상학 사고(Nachmetaphysisches Denken)와 의식철학에 사로잡히지 말 것을 요청한다.
그렇다면 철학이 그토록 사랑하는 참된 지식은 어떻게 구할 것인가? 진리와 이성, 그리고 좋은 삶을 위한 기준은 어디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도전적으로 선언한 것처럼 철학의 죽음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지식을 추구하는 인류의 노력에서 발견의 횃불을 들고 있는 과학에 그 역할을 넘기면 되는가? 아니면 과학은 또 하나의 형이상학이기 때문에 진리 추구라는 버거운 짐을 훌훌 벗고 주어진 맥락 속에서 각기 서로 다른 답을 찾아가면 되는 것인가?
하버마스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모든 인식은 언어에 삼투되어 있기 때문에 의식철학에서 언어철학으로 이행한 언어학적 전회 이후 그의 철학을 집대성한 [의사소통이론] 앞머리에서 하버마스는 “오늘의 철학은 더 이상 세계와 자연, 역사와 사회 전체를 모두 아우르는 총체적 지식의 지위를 주장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그가 형이상학 이후, 또는 의식 철학 이후, 도대체 철학은 왜 필요하며,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스스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그가 찾은 단서는 언어화용론을 통한 의사소통의 합리성이다. 하버마스는 2권으로 나누어진 방대한 분량의 이 책에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관심을 달리하는 많은 사상가들을 초대해서 끈질기게, 그리고 체계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는 이 새로운 길을 통해서 사회이론과 도덕, 법,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는데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지난 20세기 후반기에 나온 저서 중에서 이미 고전적 지위에 오른 그의 책 읽기에 도전해보기를 권한다. 그러나 숙제 하듯 의무감에서 읽을 필요는 없다. 모든 비판적 학문은 철학과 같은 일을 한다. 이것은 필자의 말이 아니라 하버마스가 한 말이다. 모든 철학, 모든 철학자에게 다 적용되는 이야기지만, 이해하기 힘든 철학 용어와 철학 사상을 암기하듯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철학 하는 길이 아니다. 그 점에서 하버마스 철학은 읽고, 쓰고, 토론하는 법을 보여주는 모범적 사례다.
첫댓글 공론장 이론(The Public Sphere Theory)
하버마스는 공론장(Öffentlichkeit) 개념을 통해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여야 하고 정치적, 공적 분야에 대한 문제를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그의 저서「공론장의 구조변동(1962)」에서는, 18세기 유럽에서 출현한 공론장이 민주주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한다. 하버마스는 현대 사회에서 공론장이 정치적, 경제적 특권 세력이나 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약화되었다고 지적하였고, 공론장을 복원하여 민주적으로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장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