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생애와 철학

플라톤의 생애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서양문화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한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소크라테스의 연장이며 발전으로서, 그의 저서는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으로 된 변증론에 의한 《대화편》이어서 그와 스승과의 학설을 구별하기 힘들다.
논리학·인식론·형이상학 등에 걸친 광범위하고 심오한 철학체계를 전개했으며, 특히 그의 모든 사상의 발전에는 윤리적 동기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이성이 인도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따라야 한다는 이성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 따라서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이성주의적 윤리학이다.
생애
플라톤은 BC 428년경 아테네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리스톤은 아테네의 마지막 왕인 코드로스의 후손이며, 외가 쪽으로는 초기 그리스의 입법가인 솔론과 연결된다. 어머니 페릭티오네는 플라톤이 어렸을 때 남편과 사별한 뒤 페리클레스의 지지자였던 그녀의 삼촌 피릴람페스와 재혼했다.
플라톤은 이 페리클레스 시대의 정치가 집에서 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BC 404년의 과두정권을 이끌었던 외숙인 크리티아스와 카르미데스를 통해 어린시절부터 소크라테스를 알게 되었다. 귀족인 플라톤도 청년시절에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었으나, 공직에 들어오라는 보수파의 권유를 그들의 폭력적 행위 때문에 거부했다.
과두정권이 몰락한 뒤 플라톤은 새로 들어선 민주정권에 기대를 걸었지만, 아테네의 정치풍토에는 양식 있는 사람이 일할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BC 399년 민주정권이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처하자,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메가라로 잠시 피신한 뒤 몇 년 동안 그리스·이집트·이탈리아를 여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플라톤은 시라쿠사의 통치자인 디오니시오스 1세의 처남 디온을 만나 그와의 정신적 교류를 시작했다.
아카데메이아와 시칠리아
스승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치가로서의 꿈을 버리고 정의를 가르치기로 결심, 동료들과 메가라에 도피하여 있다가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키레네학파로부터 이데아와 변증법의 기초를 얻고 피타고라스학파에 접하여 실천적 정신과 실생활에의 흥미를 얻은 뒤 그의 독자적인 사상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 사이 《변명》 《크리톤(Kriton)》 《라시스(Laches)》 등을 쓰고 40세에 귀국하였으며, 이어 《골기아스》 《대힙피아스》 《소힙피아스》 등을 썼다. 그는 자신의 이상국가를 실현해 보고자 친구인 디온의 권고로 시칠리아의 참주(僭主) 디오니소스의 초청에 응했으나, 그의 과두정치를 비난함으로써 분노를 사 노예로 팔리기까지 하였다.
뒤에 그의 저작을 본 키레네 사람에 의해 해방되어 귀국, BC 387년경 플라톤은 철학과 과학의 교육·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아카데메이아를 창설했다. 아카데메이아는 좁은 의미의 철학에만 제한하지 않고, 수학이나 수사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해 광범위하게 탐구했다. 여기서 그는 제자들에게 풀어야 할 문제를 제시하고, 대중을 상대로 강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철학
《향연(饗宴)》 《파이돈(Phaidon)》 《국가론》 《파이드로스(Phaidros)》 등 주요 저술이 여기서 이루어졌고, 이 학원은 529년까지 계속되었다. 대학(University)의 처음 형태인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그는 인간의 영혼이 육체와 결합된 충동적이며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정욕(情欲)과, 육체와 결합되지 않은 불사적인 순수한 이성(理性)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또한 이성은 매우 순수한 것으로서 이 세계의 배후에 있는 완전 지선(至善)의 실체계인 이데아(Idea)를 직관할 수 없으나, 세상에 탄생하여 육체 속에 들어감으로써 이데아를 잊고 있다고 하였다.
이 잊었던 이데아를 동경하는 마음이 에로스(eros)이며 현상을 보고 그 원형인 이데아를 상기하여 인식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적인 부분의 덕이 지혜(sophia)이며, 정욕적인 부분의 덕을 절제(sophrosyne), 이성의 명령에 복종하여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氣槪;thymoeides)의 덕을 용기라고 하였다.
정의(定義;dikaiosyne)란 모든 덕이 알맞게 그 기능을 발휘할 때의 상태를 말한다. 그는 이러한 덕론을 통하여 인간 개인의 윤리학을 논하고, 그러나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덕을 달성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사회 전체의 윤리설을 말하였다. 그것이 그의 《국가론(politeia)》이다.
그는 국가를 개인의 확대로 생각하여, 개인에 있어서의 정욕의 부분이 농·공·상업의 서민, 기개 부분은 군인·관리, 이성 부분은 통치자라고 하고, 이는 당연히 선의 이데아를 인식하여야 하므로 <철학자가 왕이 되거나 왕이 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유명한 철인정치론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통치자의 교육제도와 방법에서 그의 교육학을 엿볼 수 있다.
이어 통치자의 사유재산 금지, 처자의 공유 등을 주장하고 전제정치·과두정치·민주정치 등 정체의 성립과 발전·결함 등을 날카롭게 지적하였는데, 오늘날까지도 주목할 만한 탁견이 담겨 있다. 그의 철학은 서양 관념론적 이상론의 비조(鼻祖)로,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와 함께 철학사에서 쌍벽을 이루고, 아카데미아학파 신플라톤주의를 거쳐 철학사에 결정적 영향을 주고 있다.
플라톤의 만년에 벌어진 사건은 시라쿠사의 정치에 관여한 것이었다. BC 367년 디오니시오스 1세가 죽자, 디온은 왕위를 계승한 디오니시오스 2세가 과학과 철학을 통해 입헌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게끔 플라톤을 초빙하려는 생각을 품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정치적 강자인 디온에 대한 왕의 시기심 때문에 무산되었다.
플라톤은 뒷날 시라쿠사에 머물면서(BC 361~360) 두 사람을 화해시키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디온은 BC 354년 살해당했으며, 플라톤은 BC 348(또는 347)년에 죽었다. "천한 사람들의 입으로는 찬사를 보내는 것조차 그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보고 하나만으로도 그의 고귀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