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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묵상 5 – 말세 신앙에 대하여
글의 목적
1. 초대교회에서 자주 말하는 말세 신앙은 어떤 의미였을까?
2. 교회 안에서 말세 신앙은 어떤 변천을 겪었을까?
3. 오늘 필요한 말세신앙은 무엇일까?
교회는 처음부터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재림(再臨, Second Coming)은 주님이 다시 오심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재림이라는 말보다는 주로 ‘주의 강림’(파루시아, parousia) 또는 ‘주의 나타나심’(에피파이네이아, epiphaineia)이라 표현이 사용됩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처음부터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간절히 기다렸다는 사실입니다. 그처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때가 가까이 왔으므로 사도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고 교회에게 편지했습니다. 사도 야고보는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부자들에게 ‘말세에 너희가 재물을 쌓았도다’(약 5:3)라고 강력하게 책망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빌 4:5)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는 장차 주님이 상 주실 것을 굳게 믿었으며, 주님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도 자기처럼 상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딤후 4:8).
초대교회 신자들이 바랐던 주님의 나타나심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도 바울의 언급을 생각해 보면 초대교회가 바랐던 주님의 나타나심이 어떤 것인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사도 바울은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의 영웅들에 대하여 11장에서 소개하면서 상 주시는 하나님을 언급했습니다(히 11:6, 26).
믿음의 영웅들이 바라본 상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받은 상은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는 것과 약속의 땅을 물려받는 것, 그리고 그의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라보고 소망한 복은 그의 자손들의 시대에서 하나씩 성취되었습니다. 모세도 이처럼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다고 성경은 소개합니다. 모세가 애굽의 모든 보화를 포기하면서 바라본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이 성취되는 꿈이 아니었을까요?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평생 종살이하던 민족이 세계 만민의 모델이 되는 제사장 나라로 우뚝 서는 모습은 정말 멋지지 않습니까?
이런 신앙 전통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초대교회가 생각하고 바랐을 상도 역시 아브라함의 복에 동참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했습니다(갈 3:14).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지나간 모든 세대의 사람들에게 꿈에도 그리던 소원이었을 것입니다. 부모들은 태어난 지 8일만에 자녀의 몸에 예리한 칼을 대어 피를 흘리면서 그 자녀에게 아브라함의 복이 전수되기를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 전통이 수백 년을 넘어 몇 천년을 이어오는 동안에 유대인들의 뼈에 새겨진 정체성과 소망이 되었을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구원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죄인이 용서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구원은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선한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엡 2:10). 그 선한 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계획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사도 바울이 말한 면류관에 대하여 이런 저런 모습으로 상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받기를 원하던 상이나 사도 바울이 받고자 했던 상은 같은 종류일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고 그 계획이 성취되는 세상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이보다 더 큰 상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그런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 표준새번역성경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상을 위해서라면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본받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어떤 능력이 있길래 그 능력을 깨닫기를 바란 걸까요?
우선 로마서 1장 4절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능력’이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부활의 능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을 통해서 모든 신자들의 죄가 용서된다고 고린도서에서 말했습니다(고전 15:17).
성경에서 죄 용서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죄는 인간을 하나님과 분리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로막는 원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죄 용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인도되어 그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본래 인간에게 의도하신 바로 그 모습과 지위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쁨을 노래한 것이 로마서 5장의 시작부분일 것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로마서 5:1~2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바라고 또 바라던 일입니다. 그것은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중요하며 귀한 일이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시는 날에 받을 상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그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삶은 시편에 나오는 성도들의 주요 기도와 찬양의 주제였습니다. 시편을 보면 성도들은 하나님이 전에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을 사모했습니다(시편 27:4).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있는 충만한 기쁨과 그 오른쪽에 있는 영원한 즐거움을 노래했습니다(시편 16:11).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 서 있는 제사장의 모습이며, 세상을 축복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것이 창조의 날에 아담이 받은 지위와 본분과 특권이었습니다. 그것은 출애굽의 날에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자손이 받은 지위와 본분과 특권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에서 아름다운 비유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삶,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 담긴 변화의 이야기는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아름다운 이야기로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그 비전은 오래 전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아름답고 영롱한 판타지로 제시되었습니다.
사막이 변하여 낙원이 되고, 메마른 땅이 변하여 생태평원이 되며, 모든 이들이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뜻에 정통하며,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이 온 땅에 충만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이 바다를 덮은 것처럼 온 세상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경륜입니다.
이 위대한 경륜에 동참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미래를 물려받아 살아가는 삶,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선물이며, 상입니다. 그리고 그 멋진 일을 완성하시려고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이런 전통과 아름다운 이야기를 뼈에 새기고 마음에 가득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현실은 암담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위선과 거짓, 그리고 음모와 욕심 때문에 눈이 멀고 귀가 어두웠습니다. 그리고 일반 백성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대를 하나님이 그냥 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라고 교회는 확신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다시 오셔서 이 어그러진 세계를 바로잡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그것이 바로 초대교회가 기다린 주님의 ‘강림’과 ‘나타나심’입니다.
그 날에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날에 온 세상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믿음과 소망을 가진 공동체였기에 그토록 박해와 고난을 당하여도 꿋꿋이 참고 새로운 날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오심을 그토록 간절히 사모하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기다린 주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날이었습니다. 물론 그 날에 악하고 게으른 종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그 날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슬픈 결말은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리라는 그림으로 그려졌습니다.
이런 희망을 간직하던 성도들은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다스리던 세계가 끝장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세상의 종말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교회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기회였습니다. 예루살렘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무너지고 성도들은 구원을 받아 그 괴로움에서 건짐을 받았을 때 교회는 더욱 큰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과 성전제사에 얽매이지 않고 교회 공동체가 새 이스라엘이며 그들의 모임이 곧 성전이며 주님이 그들 가운데 성령으로 거하신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더 이상의 성전제사는 불필요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완전한 제사가 되었으므로 옛 제사제도들은 폐기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이제 이 세상에 새로운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이 온 세상의 구주이시며 그분이 지금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다스리시며 다시금 세상을 새롭게 하시려고 오실 것이라고 희망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복음은 로마제국의 압제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희망의 약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옛적에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셨던 것처럼, 그리고 그 이전에는 하나님의 자손들이 광야에서 고난을 당했던 것처럼 지금 교회가 동일한 고난 가운데 있지만 하나님이 장차 오셔서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들인 용과 짐승을 사로잡아 불에 던지시고 그들의 중심지인 큰 성 바벨론도 무너질 것입니다. 이런 희망과 소망을 붙들고 살아야 한다고 요한계시록에는 아름답고 찬란한 승리의 판타지가 교회들에게 제시되었습니다.
그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던 카타콤 성도들도 결국 로마가 무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교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소망하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고 난 이후로부터 교회에게는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우선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모인 곳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에는 황제가 들어오고 고관대작들도 합류했습니다. 교회에는 부자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새롭게 하실 것이라는 희망은 점점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언자들이 꿈꾸던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은 교회의 주류세력이 된 사람들의 시대로 대체되거나 사후에 천상에서 이루어질 세상을 그려주는 상징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새로운 세상은 이 땅에 펼쳐질 정의와 자비, 그리고 신앙의 세상인데, 그런 세상은 그저 죽음 이후에 천상에서나 이루어질 유토피아처럼 간주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임박한 종말신앙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언제 오실 지 알 수 없으니 그저 깨어 기도해야 한다는 이야기만을 되풀이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새롭게 하고 풍성하고 번영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교회 본연의 사명은 영적이고 내면의 경험을 하는 것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은 현실 세상에서 점점 사적이고 내면적인 공간으로 밀려났습니다.
그 결과 교회는 세상을 향한 예언자적 소임도 대리인적 소임도 다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경제는 경제인에게, 과학은 학자들에게, 그리고 교회는 오로지 신앙의 영역에만 충실하자는 생각이 교회 안에 널리 퍼지고 신자들의 마음에 견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은 영적인 문제이며,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가 됩니다. 본래 사도들이 가르친 구원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맡겨 주신 대리인적 소임을 감당하는 사람으로 회복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대리인의 삶이란 세상을 생명으로 가득하게 하는 농부의 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일은 사람들이 정의롭고 따뜻하며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그런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 협력하고 열심을 낼 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재림 신앙이 왜곡되자 교회는 신자들을 통하여 세상을 이끄는 지도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도리어 교회는 세속 권력과 결탁하여 자신의 경제적인 이득과 사회적인 지위를 견고하게 하려고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건한 사람들은 별도로 모여 무엇이 참된 교회인가에 대하여 고민하고 추구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교회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났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주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종교개혁은 그 많은 노력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16세기의 종교개혁 이후에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미국의 작가 프랭크 바이올라(Frank Viola)는 초대교회와 오늘날의 교회를 비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교에 물든 기독교’(Pagan Christianity, 2012)라는 대담한 책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회의 본질을 탐구하고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이 교회를 찾지 않습니다. 질병의 치료를 위한 것이라면 병원을 찾으면 됩니다. 마음의 위안을 위한 것이라면 문화생활이나 여가활동에 힘을 더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육은 이미 교회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런 상황 속에서 활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배 형식과 예배당 건물을 바꾸어 봅니다. 젊은이들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줍니다. 문화활동을 위한 자리도 마련해 봅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교회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는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우리가 믿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오늘날 기독교 신앙은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의 핵심은 과연 무엇인가?
저는 금년도 대림절을 맞이하여 여러 편의 글을 썼습니다. 대림절에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지,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리고 주님이 왜 오시는지, 성경에서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표현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에 대하여 글을 썼습니다. 이 모든 수고는 대림절을 바르게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세상의 종말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종말은 파멸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이후로 끊임없이 새롭게 가꾸시는 분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을 농부로 표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창조는 공허하고 혼돈한 땅에 질서를 부여하시고 생명으로 충만하게 채우시는 활동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생명이 살기에 부적합한 곳이 될 때마다 하나님은 그처럼 공허하고 혼돈하게 된 세상을 바로잡아 다시 생명으로 충만한 땅이 되게 하시려고 개입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재창조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노아 시대 때 세상은 죄로 가득하여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원한을 입은 사람들의 부르짖음이 하늘에 닿았을 때 하나님은 그 도시들을 심판하셨습니다(창 18:20). 애굽 땅에 살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고통과 신음소리도 하늘에 부르짖음으로 상달되었습니다(출 3:9). 가나안 땅에 사는 족속들에게도 심판이 임했습니다. 물론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도 그 땅에서 불의와 불법으로 약자를 착취하고 거짓을 일삼을 때 심판을 당하여 그 땅에서 쫓겨났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은 항상 이 세상을 감찰하시고 돌보시면서 새롭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때를 가리켜 예언자들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 또는 ‘주의 권능의 날’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언자들이 그 날을 선포하고 기다린 까닭은 자신의 시대에 일어나는 불법이 바로잡혀야 한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서 사는 가장 약한 생명부터 죽어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말씀은 이처럼 구약성경의 오랜 전통 가운데서 하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약속은 현재 제자들에게 주님의 분부를 지켜야 할 확신을 더 강하게 해 주었고, 당시의 세상에서 불법을 일삼는 세력들과 권력들의 시대가 곧 끝날 것을 기대하고 그들의 위협에 굴하지 않을 용기를 주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예루살렘에서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 권력자들의 박해를 견딜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에 새롭게 열릴 교회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소망이 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이유로 로마제국의 압제 가운데 살던 신자들도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약속을 힘입어 믿음을 지키고 그리스도 예수께 충성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침내 교회를 박해하던 로마제국의 멸망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카타콤 시대를 지나 교회가 세상의 중심에 서는 새로운 시온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의 기독교회 역사는 이와 같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신앙으로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신앙은 초대교회의 그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초대교회의 기다림은 자기 시대에 속히 이루어질 일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마라나타’를 외치며 서로 격려했습니다. 그들의 수고가 이제 곧 빛을 발하고 보상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가 충만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오심을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님이 언제 오실 지 모르며 또한 오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하여 명확한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기대도 불분명합니다. 이것은 대림절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이유로 대림절 이후에 맞이하는 성탄절의 의미도 흐려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이야기가 들려주는 위대한 서사시라는 빛 가운데서 주님의 오심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가운데 주인공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시대에 주님의 오심을 바라고 참되고 따뜻하며 용감하게 살았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그래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오늘 우리는 가장 먼저 초대교회가 고대하던 주님의 재림과 그들이 이해하던 말세신앙이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오늘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노라면, 주님이 왜 오시는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이 왜 그토록 중요하며 인류에게 좋은 일인지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런 후에 우리는 대림절과 성탄절을 바르게 이해하고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진리를 사모하는 모든 구도자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지혜가 임하기를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