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18;8-20. 소금언약 2024. 7. 21.
소금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음식을 먹지 않고도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지만 소금과 물이 없으면 며칠을 버텨내기 힘듭니다. 그런데 물의 중요성은 잘 알면서도 소금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소금만큼 귀한 자원도 없습니다. 소금은 하얀 금(素金)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사람의 생존과 직결 된 중요한 자원입니다. 특히 환경오염이 가중 되고 있는 요즈음 오염되지 않은 질 좋은 소금의 가치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왕정 시대의 유럽에서는 전쟁을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확보해야 하는 필수품이 소금이었습니다. 식품을 보관할 때에도 주로 소금에 절여 보관을 했고,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치료하는데 소금물을 사용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제작할 때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시신을 ‘나트론’이라는 소금물 속에 7일간 담가뒀다고 합니다. 과거 프랑스에서 소금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그 만큼 소금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소금을 말씀합니다. 성도의 삶을 소금으로 비유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도 소금언약으로 말씀을 합니다. 예배도 소금언약을 들어서 말씀합니다. 그러면 소금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막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 하라. 소금의 특성 맛을 이야기 합니다. 그 맛으로 서로 화목하라고 합니다. 화목도 소금이 들어갑니다. 레2:13 네 모든 소 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제에 빼지 못할 것이 소금입니다. 소제는 오늘 우리들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최선을 다해야 하고 말씀대로 드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예배, 주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예배,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에 소금을 말씀합니다. 여러분, 봉급을 의미하는 영어 샐러리(salary)라는 말은 소금(salt)에서 나온 말입니다. 샐러리맨에게는 샐러리가 생명과 같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가 생명력 있는 예배로 드려져야 하는데 이런 생명력 있는 삶의 예배 속에 소금을 말씀합니다. 봉급이 없으면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소금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신 예배와 함께 사용되는 소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구약의 5대 제사 중에서 소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소제는 번제 이후에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여기에 소금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번제는 생명이 있는 것을 바쳐 피를 흘리는 제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생명을 드려, 보혈의 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피의 제사는 죽어서 드리는 제사이며 생명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번제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번제의 제사는 영원한 제사이기 때문에 다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 중에 번제가 없으면 다른 모든 제사가 무의미 합니다. 먼저 번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의 순서 중에 참회의 기도가 묵도 다음에 있습니다. 예배의 순서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는 번제를 드릴 수가 없고 번제에 해당하는 해결 방법이 바로 내가 드려야할 번제를 다시 드릴 필요가 없도록 단번에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번제 위에 소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2024년에 드려야할 예배가 있습니다. 52주 365일 동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가 바로 소제입니다. 소제는 성도가 하나님께 약속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헌신의 표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소제를 드릴 필요는 없지만 이 소제를 드릴 때 어떻게 드렸는지를 알게 되면 오늘, 우리가 좀 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번제가 드려짐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이 지금도 여전히 드려야할 제사의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제입니다. 소제의 히브리말 뜻은 선물입니다. 주고 받는 선물입니다. 오늘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내가 서로 주고받고,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물은 드린 자도 기쁘고 받는 자도 기쁜 것입니다. 그 기쁨과 평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헌신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선물을 주고 후회해 본 적이 있습니까? 공연히 내가 주었구나 하는 것은 선물이 아닙니다. 선물은 언제든지 기억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받은 선물도 괜히 받았다 하는 선물은 의미가 없습니다. 소제는 드리는 사람도 기쁘고 그 선물을 받으시는 여호와 하나님도 기뻐하는 제사입니다. 그래서 히13:15-16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서로 나누어 주는 선물의 제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1-1. 그러면 선물의 의미가 있는 소제의 재료가 무엇입니까? 소제의 재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레 2:1 누구든지 소제의 예물을 여호와께 드리려거든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아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그러니까 고운 가루와 기름과 유향입니다. 먼저 고운 가루는 제일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충실한 열매입니다. 쭉정이나 상한 곡식이 아니고 충실한 열매를 골라서 이 열매를 볶아야 됩니다. 그리고는 이 열매를 빻아야 됩니다. 그리고 채로 쳐서 부드러운 가루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곡식 그대로를 소제로 바칠 수 없습니다. 볶아지는 과정과 빻아져서 고운 가루로 변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곡식의 모양이 그대로 있어서는 가루가 나오지 않습니다. 곡식이 빻아져야 됩니다. 육신이 죽고, 육이 깨어지는 과정이 있어야 영적인 가루가 됩니다. 욕심의 덩어리가 빻아지고, 나쁜 습관의 덩어리들이 깨어지고, 온갖 허물의 덩어리들이 깨어져 가루가 되어야 소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다음에 기름이 필요합니다. 기름을 붓고. 기름을 사람의 머리에 바를 때에 누구에게 부을까요?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에게만 기름을 붓습니다. 다윗도 기름 부음을 받고 새로운 소망과 새로운 세계를 열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을 때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름은 성령을 뜻합니다. 여러분, 고운 가루만 가지고 안 됩니다. 우리의 희생과 정성과 우리의 신실함과 우리의 삶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예배에 성령의 기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예배를 통해서 새로운 소망과 기대가 넘쳐나게 됩니다.
또 유향이 있습니다. 유향은 영원을 의미합니다. 예배에 유향이 반드시 필요한데 이 유향을 만들 때에 출30: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여기에 소금을 쳐서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유황은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향으로 기도 생활을 말합니다. 계 5:8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그런데 기도와 유향도 소금을 쳐야합니다.
1-2. 소제에는 금지된 재료가 있습니다. 레12:11-12에 나오는데 첫째 누룩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둘째 꿀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셋째는 처음 익은 곡식으로 드리지만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단에 올리지 말지며(레 2:12). 왜 누룩일까요? 마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마16: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잘못된 교훈들이 누룩입니다. 순수하지 않은 것과 깨끗하지 못한 것이 누룩입니다.
그리고 꿀도 안 됩니다. 꿀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안 된다고 합니다. 빵은 누룩을 넣어야 부풀게 됩니다. 그리고 꿀을 넣어야 단맛이 나는 빵이 됩니다. 육신을 위한 빵은 누룩과 꿀을 넣어야 됩니다. 빵이 달지 않으면 맛이 없습니다. 그런데 육신을 위해서 빵에는 반드시 들어가야 되는 누룩과 꿀을 넣으면 아니 됩니다. 누룩은 거짓교훈입니다. 잠5;3.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니라. 잠25:27.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 멍에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 꿀을 많이 먹는다는 것은 탐욕을 상징합니다. 달기 때문에 자꾸 먹게 됩니다. 그래서 탐욕을 꿀에 비유했습니다. 거짓 교훈과 악을 예배에 섞지 말라는 뜻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강의하는 것은 온갖 것으로 재미있게 꾸미고 인기를 얻기 위하여 섞을 수 있으나 설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향기로운 냄새로 받으십니다(레 1:9, 13, 17, 2:2). 그런데 왜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 단에 올리면 안 된다고 하셨을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꿀처럼 달고, 향기로운 것으로 가장 된 순수하지 못한 불순한 것들로 예배를 드리면 아니 됩니다. 그래서 이런 예배에 하나님은 소금을 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2. 소금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레2:13 네 모든 소 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금 없이는 소제 자체가 불가능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토록 소금을 강조하셨을까요? 소금에는 소금만이 갖는 몇 가지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2-1. 소금은 맛을 냅니다. 소금이라는 것은 맛을 내는 성분 때문에 인류가 생존하는데 꼭 필요한 필수조건입니다. 없어도 되고 있어도 되는 물건이 아니라 꼭 있어야만 하는 생명보존의 필수품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세상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공급하는 필수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셨던 것이 이러한 유용성입니다. 소금에는 소금만이 갖고 있는 유용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5:13, 눅14:34.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욥 6:6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소금은 맛을 냅니다. 모든 맛을 지배하는 맛이 소금입니다. 단맛도 신맛도 소금을 넘지 못합니다. 소금은 모양을 부풀게 하고 맛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맛을 더 맛나게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 소금이 있어야 합니다. 소금은 자신이 녹아 없어질 때 비로소 골고루 퍼지게 되고 맛이 납니다. 생선을 먹기 힘들게 하는 것은 특유의 비린내인데 소금은 이 비린내를 줄여줍니다. 소금을 뿌리면 비린내를 내는 주성분인 ‘트리메탈아민’ 이 생선살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이렇게 소금을 뿌려 비린내를 제거한 음식을 ‘자반’ 이라고 부릅니다. 해산물 중에는 끈끈한 점액을 내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문어나 전복은 끈끈한 타액을 내어 먹는데 불쾌감을 줍니다. 점액이 묻은 부위에 소금을 뿌리고 긁어내면 쉽게 없어집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맛을 느끼게 하는 성분은 나트륨이온(Na+) 입니다. 이 나트륨이온의 농도가 적당하면 입맛을 다시게 됩니다. 소금은 골고루 뿌려져야 합니다. 골4:6.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한쪽은 짜고 다른 한쪽이 싱거우면 아니 됩니다. 골고루 뿌려져야 합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되 골고루 입니다. 여러분, 소금(염분)이 없으면 지구의 많은 생물은 목숨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소금을 너무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소금의 적당한 맛, 유용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자신이 완전히 녹아지고, 부서지고 빻아져 고운 가루가 된 소제로 하나님께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 소금의 유용성은 정결과 부패의 방지입니다. 소금이 들어가면 정결하게 하고 소금이 들어가면 부패도 방지가 됩니다. 출 30:35에 향을 만들 때도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예전에는 마땅한 약이 없을 때는 소금이 제일이었습니다. 소금으로 소독을 했습니다. 겔 16:4.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에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소금은 정결, 깨끗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1리터의 소금(큰 숟가락으로 하나정도)을 물에 넣고 20분 정도 삶으면 때가 깨끗하게 빠집니다. 기름으로 더러워진 때도 말끔히 빠지면서 섬유는 상하지 않습니다. 프라이팬이의 생선기름도 프라이팬을 달구고 소금을 조금 넣어 닦아내면 깨끗해집니다. 일본과 한국과 중국에 이런 풍습이 있습니다. 아주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집에 왔다 가면 소금 뿌리라고 합니다. 점포 문 앞에 소금 종기를 놓거나 엎어 놓은 소금이 있기도 합니다. 소금을 갖다 놓습니다. 소금을 종지에 담아서 누르고 단단하게 한 다음에 종지를 종이 위에 뒤집어서 올려놓으면 조그만 소금 산이 됩니다. 일본의 점포 앞에 이런 것들을 쉽게 봅니다. 왜 그럴까요? 소금의 유용성, 정결과 부패 방지 때문입니다. 삿 9:45에 아비멜렉이 그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필경은 취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성을 점령하고 그 앞에서도 소금으로 정결케 합니다. 정결의 특성이 있습니다.
2-3. 소금의 독특성인데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소금의 특성 중에 가장 귀한 내용입니다. 영원성과 상황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소금의 맛은 변하지 않습니다. 민 18:19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변하지 않는 독특성이 소금언약의 최종 의미입니다. 대하 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축복을 소금언약으로 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은 변하지 않는 소금언약입니다. 내용도 변하지 않습니다. 변하지 않는 아름다움과 변하지 않는 진실과 변하지 않는 실천과 변하지 않는 신앙과 변하지 않는 약속과 변하지 않는 마음과 변하지 않는 신실과 변하지 않는 사랑, 이 모든 것이 소금언약입니다. 변하지 않아야 아름답습니다. 변하지 않아야 진실입니다. 변하지 않아야 신실입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상황의 모든 것이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것이 우리 삶의 소금입니다. 소금은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금의 독특성입니다.
3. 그러면 왜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약속을 소금언약이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축복, 은혜와 사랑, 이 모든 것은 변하지 않고 영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변하지 않고, 맛을 내고 정결하게 하고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소금언약입니다. 민18;19절에서 확실하게 소금언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의 맛이 변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약속이 변하지 않는다. 어느 때와 어떤 곳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액체에서도, 기체에서도, 고체에서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 맛입니다. 물에 들어가면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맛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상황과 본질이 있는데 본질은 어떠한 상황가운데서 변하지 않습니다. 여름 장마 때 비가 많이 오면 쌓아둔 소금이 녹습니다. 소금가마니가 한 층씩 녹아지면서 줄어드는데, 소금이 녹은 그 물 받아서 끓이면 소금이 물위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가리켜 소금언약이라고 합니다. 물에 녹아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없어진 것 같지만, 결코 그 맛을 잃지 않고, 불을 가하면 다시 나타나는 소금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보이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울대, 하나님의 언약은 사라진 것 같습니다. 마치 폐기되어 없어진 것 같습니다.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을 때가 있습니다. 고통이 있고, 문제해결이 안 되고, 근심걱정이 눈앞에 있으면 소금언약,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가 바벨론 여러 강변에 앉아 울 때가 있습니다.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때가 있습니다.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할 때가 있습니다. 내 영혼이 진토에 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녹아진 소금을 다시 끓이면 나타나듯이, 하나님의 언약은 보이지 않지만, 사리진 것이 아니며, 다시 나타납니다. 반드시 나타나고 반드시 축복합니다. 그것이 언제일까요? 힘들고 어려운 관문을 통과할 때입니다. 지나서 보면 하나님께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나와 동행하고, 나를 업고 왔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고통뿐만이 아니고 소망도 그렇습니다. 나의 비전을 이룸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독특합니다. 변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고 내 길에 빛입니다. 마지막으로 간증을 하난 합니다. 어느 날 콜럼버스가 포르투갈 해변을 거닐다가 유럽에서는 볼 수 없는 열매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이 열매를 보며 틀림없이 바다 건너편에는 새로운 세계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다 끝까지 가 보기로 작정하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긴 항해는 그 열매의 원산지인 아메리카 신대륙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는 한 작은 열매 속에서 거대한 세계를 보았습니다. 1492년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나와 소금으로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소금을 치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은 변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의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십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고 궁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건지시고,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십니다. 잉태치 못한 자로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소금언약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소금언약을 굳게 잡고 믿음 다하여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