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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놈펜(Phnom Pehn)
2009년 4월 3일 (금) 맑음
Lake Side G.H(10여관)
어제 저녁 때 프놈펜에 도착하여 여관을 찾아와서 방 배정을 받고 짐을 정리해 놓은 다음에 여관에서 운영하는 식당에 가서 Ben 부부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하면서 프놈펜에서는 나와 Ben 부부가 같이 다니면서 관광하자고 약속하였다. 그래서 같이 타고 다닐 뚝뚝이도 예약해 놓았고 아침 9시 30분에 로비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서 잠이 오지 않아 밖에 나가 체조도 하고 여관 주변을 돌아다녔다. 식당에서 간단히 아침 밥을 해결하고 방에 들어와서 9시 30분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깜빡 잠이 들어 눈을 떠서 시계를 보니 9시 45분이나 되었다. 황급히 로비로 나가보니 Ben 부부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킬링필드에 가면 그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킬링필드로 갔다.
킬링필드에 갈 때 오토바이를 편도에 2달라 주기로 하고 갔다. 킬링필드에 도착하여 2달라를 주었더니 이놈이 딴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편도는 2달라이지만 왕복요금을 달라면서 우겼다. 주변에 뚝뚝이, 오토바이 기사들이 에워싸더니 이놈 편을 들어 한 목소리를 내는 게 아닌가? 나도 물러서지 않고 ‘나와 이놈과의 문제인데 너희들이 왜 참견이냐?’ 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 때 경찰이 와서 ‘여기서는 조용히 하라.’고 하니까 이놈들이 더 이상 참견을 하지 못하고 물러섰고 그놈도 결국에는 2달라만 가지고 돌아갔다.
킬링필드의 위령탑
킬링필드에서 무려 4시간을 기다려도 Ben 부부는 오지 않았다.
3시 가까이 되어서 프놈펜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정기 교통편이 없었다. 외국인들이 타고 온 차나 뚝뚝이에 얹혀 가자고 부탁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경찰관에게 프놈펜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물었더니 정규 교통편이 없다고 하였다. 경찰관이 프놈펜으로 가는 오토바이를 잡아주어서 돌아왔다. 외국인들이 어느 나라라에서나 마찬가지로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들은 경찰밖에 없다.
킬링필드에서
오토바이 기사와의 실랑이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서 킬링필드의 위령탑에 들어가지 않고 나무 그늘로 가서 쉬려고 하는데 프놈펜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목사님 일행을 만났다. 조금 전에 내가 오토바이 기사와 다퉜던 얘기했더니, 목사님은 요즈음 캄보디아의 사정과 여행할 때의 위험요소와 특히 캄보디아 인들의 성격에 대하여 말하면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들과 맞서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고 주의를 당부하였다. 캄보디아 내에서 외국인과 현지인 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경찰관이 절대로 외국인에게 유리하게 해주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여행 중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연락하라면서 명함을 주었다. 고마운 분이다.
위령탑 내부에 있는 희생자들의 유골
killing tree
킬링필드의 높이 80여 미터의 위령탑에는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 정권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한 사람들의 유골을 모아 안치해 놓았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집단학살 장소인 웅덩이들이 곳곳에 있는데 여기서 총기는 비싸다고 쇠막대기, 팜 나무줄기 등을 이용해 처형했다고 한다. 그리고 크메르 루즈의 보안대 본부였던 뚜얼 슬렝에서 무수한 선량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이곳에 데리고 와서 처형했다고 한다.
킬링필드의 위령탑 뒤편에 산재한 처형장이었던 웅덩이를 돌아보는 동안 온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무참하게 살상이 이루어졌던 웅덩이들
처참하게 사람을 죽인 현장, 죽은 사람들의 원혼이 내 앞에서 무언가를 갈구하며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죽음 앞서 겪었을 분노와 좌절과 고통, 사람이 같은 사람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는 현상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치고 진저리쳤다.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가 솟구쳤다.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이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킬링필드에서 돌아와서 왓 프놈을 찾아갔다. 왓 프놈은 프놈펜의 정 중앙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배낭 여행자들이 프놈펜시내를 관광할 때 이 사찰을 방향 축으로 삼는다고 한다.
왓 프놈의 탑
왓 프놈은 프놈펜의 이름의 유래가 된 곳이라 한다.
이 사원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27m 높이의 언덕 위에 있다. 사찰을 들어서니 외국인에게는 입장료를 징수하였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우뚝솟은 언덕 위에 덩그러니 올라앉은 오밀조밀한 사찰 건물들이 그래도 안정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프놈펜 시내를 한눈에 담을 수 있을 만한 높은 위치인데 사찰 주변으로 높이 자란 수목들 때문에 시야를 막혔다.
사찰과 공원에는 원숭이들도 많았다. 어슬렁거리고 다니는 원숭이들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먹이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공원은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도 높아보였으며, 참으로 많은 남녀노소들이 공원에 나와 있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쉬려고 하는데 구걸하는 사람들이 귀찮을 정도로 찾아와서 그냥 여관으로 돌아왔다.
한편 Ben 부부는 같은 직장(은행)에서 일을 하는데 40일간 휴가를 내어 여행하고 있다. 저녁에 Ben 부부의 방을 엿보았더니 인기척이 없었다. 그들을 만나지 못해 속상했다. 그들을 만나서 사과를 해야 할 텐데, 그리고 내가 그들에게 주어야 할 돈(2$)도 있는데.... 오늘 아침에 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한 나를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으로 생각했을까? 나로 인해 그들이 한국인의 이미지를 형편없이 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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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 부부와 함께
저녁 9시가 지나서야 그들 부부가 밖에서 돌아왔다. 나는 그들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변명과 킬링필드에서 만나려고 오랜 시간을 당신들을 기다렸다는 얘기를 했더니, 오히려 그들이 좀더 기다려 주지 않았던 것은 자기들 잘못이라면서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뚜얼 슬렝(Toul Sleng) 박물관에 볼거리가 많아서 킬링필드에 못 갔다고 했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맥주를 샀더니 그들이 더 많이 사서 깊은 밤까지 얼큰하도록 마셨다. 마음이 홀가분했다.
2009년 4월 4일 (토) 맑음
벨기에 사람 Ben내외가 씨하눅빌로 간다면서 아침 일찍 여관을 출발하였다.
나는 그들이 떠난 뒤 느지막하게 강변으로 나가서 중앙시장을 둘러보고 걸어서 왓 우날롬을 거쳐 왕궁을 돌아보았다.
중앙시장으로 가는 길목의 다리에 이런 구조물이 보였다
시내 길을 익힐 요량으로 길을 걷노라면 오토바이와 뚝뚝이 기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오거나 자기의 오토바이나 뚝뚝이를 타라고 손짓을 한다. 간절한 호소를 뿌리치기가 차마 안쓰럽다.
중앙시장은 그야말로 혼잡스럽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구역별로 취급 상품이 나뉘어졌는데, 여느 시장의 모습과 거의 같다. 시장 안이 비좁은데다가 통행이 많아 너무 혼잡하여 더 돌아다니기가 어려워서 바로 행길로 나왔다.
중앙시장
시장에서 나와서 메콩 강변로를 따라서 걷는데 관광객을 위한 근사한 음식점과 고급스런 기념품 가게들이 많았다.
강변로를 따라 한참 내려가서 왓 우날롬에 들였으나 불당의 문들이 꼭꼭 잠겼다. 이 절에는 캄보디아의 국민들로부터 높은 신망을 받는 스님이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절이 고고하고 품위가 있어 보였다.
왓 우날롬
우날롬 사원 안에 있는 조각상 말이 다리가....
왓 우날롬을 나와서 조금 내려가니 왕궁이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방콕에서 본 왕궁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을 같아서 캄보디아 왕궁에는 들어가지 않고 바깥만 돌았다. 밖에서 보아도 그 화려한 외관이 눈부시다.
왕궁
봉황인가? 왕궁 앞 길건에 있는 조각품 - 그 밑에서 사람들이 낮잠을 즐기고 있다
왕궁을 돌아 독립기념탑으로 갔다. 독립기념탑은 도로 한가운데 넓은 공간을 차지하였는데 그 모습이 불교의 탑과 같은 모양이다.
독립기념탑
탑 앞 도로변에 있는 벤치에 앉아 쉬었다.
이 부근은 공공기관들이 있고 도로가 잘 정비되었고 깨끗하다.
모니봉 거리에 럭키 마켓이 있다고 하여 찾아갔더니, 럭키 마켓은 없고, 그 자리에 대형 공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발주사는 ‘한일건설’이고 공사명은 ‘Golden Tower'라 했다. 모니봉 거리에서도 가장 요지라고 할 수 있는 지역에 우리나라 기업이 발주한 대형 건물이 세워지고, 거기에 한국 상품을 판매하는 대형 업체가 들어설 것이다. 상상만 해도 어깨가 으쓱 올라갈 것 같다.
쑤얼 슬렝 박물관에 가려고 했더니 오늘은 토요일이라 문을 닫았다고 한다.
꽤 먼 거리를 걸었는데 최종 목적지인 슬렝 박물관에 들어가지 옷하고 헛걸음만 했다. 그러나 걸으로면서 시내 지리를 익히고 다녔으니 그리 손해 본 것은 없다.
여관에 돌아와서 호주 사람 Rick과 Robert 그리고 영국 여인 Chris와 어울려 맥주를 마셨다. 영국여인 Chris가 우리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를 썩 잘 불렀다. 우리나라의 노래를 제법 많이 알고 있었다.
영국에 유학온 한국학생들에게 어학연수를 시키면서 그들로부터 배운 노래하고 하였다.
외국 여행을 하면서 외국인들과 어울려 이야기하고 친분을 쌓아가는 것이 좋다. 나이 같은 것을 의식하지 않고 외국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 좋다.
저 뒤에 앉은 사람은 티베트사람 (티베트 독립운동가) 호주사람 (왼쪽은 Robert 오른 쪽은Rick)
영국 여인Leen과 함께
여관에 붙어있는 호수 맞은 편
저녁에는 한국인 식당 "Le Seoul"을 찾아갔다. 오랜만에 좀 비싼 음식을 먹었다.
오랜만에 맛본 한식 소주도 한잔(소주 한병12000원)
2009년 4월 5일 (일) 맑음
오늘은 프놈펜에서 씨엠리업으로 왔다. ➉여관에서 8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터미널로 나갔다. 7시 20분 경에 터미널에 갔는데 좌석이 몇 개 남지 않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서서 씨엄이럽까지 갈 뻔하였다. 일찍 나오기를 잘 했다. 8시에 출발해야 할 버스가 시간이 지나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20분도 더 지체하는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았는데 어저께 마신 술 때문에 속이 거북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속도를 냈다. 달리는 버스에서 눈을 감고 속이 울렁이는 것을 참고 진정시키려고 애를 썼더니 옷이 다 젖을 정도로 땀이 흘렀다.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하였다. 참을 수가 없어서 기사에게 화장실에 들러서 갈 수 없느냐고 사정하였더니 버스 뒤쪽 화장실을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과연 버스 뒷면에 화장실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물론 관리가 허술하고 역한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3시경에 씨엠이럽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하였다.
오토바이 삐끼가 다가오기에 Hilton Angkor G,H를 아느냐니까 아는 척하기에 3000리얼에 그놈의 오토바이를 탔더니 이놈이 엉뚱한데 가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게 아닌가? 이놈 하는 수작이 이상하게 보여서 내리겠다고 했더니 다른데서 본 것 같다면서 큰 거리로 나와서 오던 길로 되짚어 갔다. 아주 가깝고 찾기 쉬운 집을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기에, "너가 의도적인 행동 같다.(You must intentionaly exchange remark.)"라고 말했더니 그렇지 않다면서 극구 변명을 하였다.
여관에 와서 약정 금액만 주었더니 ‘이 집 찾느라고 애썼으니 더 달라는 게 아닌가? 프놈펜 킬링필드에서도 이와 유사한 일을 당했던 기억 때문에 캄보디아에 대한 인상이 고약해졌다. 결국 그놈이 1000리얼을 더 받고 물러났다. 그 일로 인해 앙코르 왓을 구경하고 나서 바로 캄보디아를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을 움켜잡았다.
Hilton Angkor G.H의 여관비는 싼데 밥이나 다른 물건을 같이 팔아 이득을 챙기는 것 같다. 이 여관 주변에는 상점도 별로 없고 음식점도 보이지 않아 울며겨자먹기로 이 여관 안에서 식사를 해결할 수밖에 없다. 내가 거리로 나가니까 종업원이 손짓을 하며 자기의 집에서 싼값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면서 불러들였다. 이 여관도 장사속이 빤히 보이니까 더 머물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그런데 텔레비전에 YTN이 나온다.
첫댓글 구경 잘 했습니다. 강건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