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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 18
우리 문화유산 답사
세계최초의 금속활자를 찾아서
(22)
<충북 청주 일대>
글, 사진: 김 한 종
충북도는 1908년 도청을 충주에서 청주로 옮겼다. 당시만해도 한강의 물길이 충주를 지나면서 교통이 편리했으나 경부선 철도와 도로가 뚤리면서 이전하게 되었다.
충청지역은 신라시대 부 터 소백산 이남은 신라지역으로 그 이북은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 영토가 되었고 덕유산을 중심으로 그 이서는 백제의 영역으로 항상 3국의 격전장으로 화하여 유난히도 산성이 발달한 지역이다.
소백산맥을 따라 위로는 온달산성, 그 아래로는 보은의 삼년 산성, 청주 청원에는 상당산성이 자리잡아 이 지역이 삼국시대부터 격전장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의 땅이었던 시대에는 청주는 상당현(上黨縣)이라 불리었고, 신문왕 5년(서기 685년) 이후로는 신라의 영토가 되어 서원소경이라 불리었고, 경덕왕 때(757년)에 가서야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가서야 청주로 되었고,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와서 청주목으로 승격되고 비로서 중원지방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현재의 청주시의 북동쪽과 청원군 일원에 걸 처 우암산 위에 축성된 상당산성은 백제시대부터 중원지역의 각축장이 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임진란 이후에는 중원지역의 강력한 군사보루를 형성하였다.
(사진: 청주시와 청원군 일대 지도)
청주 청원 지역은 미호천과 무심천 등이 흘러 금강으로 합류하면서 유역의 넓은 평야가 조성되어 충북지역의 곡창지대를 형성하였다.
청주 청원 지역은 예로부터 사람들이 살기 좋은 지역으로 되어 주거역사는 20만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지인 청원군 문의면 동굴 유적지에서 20만년 전에 사람들의 생활흔적이 발견되었고, 이는 충주지역 남한강 상류지역인 단양 지역 수양개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이 대량 발굴되어 이 지역이 오랜 역사를 지닌 주거지역으로 판명되었다.
최근에는 1984년 무심천변에 당시에 주택공사가 운천지구 택지 개발을 위해 땅을 개발하면서 대량의 출토품이 나와 이곳이 흥덕사(興德寺) 터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 옛날 흥덕사에서 <直指心經>을 최초로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리나라가 서양의 독일의 구테베르그 인쇄 보다 무려 80년이나 앞섰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 직지심경이 프랑스의 국립박물관에서 하권이 발견되어 국내에 소개되면서 우리나라가 명실공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인쇄의 본고장임이 인정되어 UNESCO 문화유산에 등재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진:<직기심체 요절> 끝장에 표기된 선광 7년 정사 7월 청주목외 흥덕사 주자 인)
1. 청주 안심사(安心寺): 청원군 남이면 사동리 271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 하나 지금의 대웅전 등은 1626년에 중건된 것이다.
대웅전, 영산전, 삼성각, 요사채 등은 자그마하나 대웅전은 보물로, 영산전 괘불탱은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대웅전 옆에 있는 세존사리탑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a) 대웅전: 보물제 664호
이 대웅전은 안심사의 법당으로 서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목조기와집이다.
신라 혜공왕 11년(775년)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처음 건립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626년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처마끝에 장식된 암막새 기와에 <康熙 11年 壬子>라 새긴 글씨가 써 있어 이조 현종 13년(1672년)에 기와를 다시 올린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후에도 수차 보수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대웅전 전경)
3단의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초석으로 삼았으며 건물구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 지붕 건물로 측면에도 공포가 있어서 이례적이다.
건물내부의 천장에는 대웅전을 장엄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화려한 작은 달집을 만들었다.
b) 영산회괘불탱(靈山會掛佛幀): 국보 제 297호
안심사에 현존하는 괘불탱은 바깥에 세워진 것으로 복제품으로 크게 그리어 전시되고 있다.
원래의 진본은 따로 보관되어있다.
괘불이란 사찰에서 큰 법회나 부처님 오신 날 같은 불교행사가 있을 때 야외에 걸어 예불할 수 있게 만들어진 불화로서 전국적으로 진본이 남아있는 것이 드물다.
안심사에 보관된 괘불탱은 모시 바탕에 채색한 가로 4.72m, 세로 7.26m의 크기로, 신검, 덕희, 지언, 진성, 신율, 삼인, 경원, 명계, 해월 의 9명의 승려가 그렸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왼손은 무릅 위에 두고 오른손은 내리어 땅을 가르키는 손모양)의 석가모니가 영축산(靈竺山)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영산회 괘불탱이다.
불화의 내용은 석가여래를 가운데 모시고 그 주위의 불 보살과 제자들인 교화 성중과 사천왕의 호법 신 들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한 것으로, 색감이 있고 화려하며 기교가 뛰어나서 당대 불화를 대표할 수 있는 귀중한 역작이다. 부처님의 영산 설법장면을 그린 대형 탱화이다.
그러나 안심사에 소장된 괘불은 윗부분이 일부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색상도 거의 원상을 간직하고 있다.
괘불의 하단에 <順治 9年 壬辰 4月>이란 제작 연대가 쓰여 있어 효종 3년(1652년)에 제작되었음을 밝혀주고 있어 불화의 높은 가치를 지니게 하고 있다.
c) 영산전: 충북 유형 문화재 제 112호
이 건물은 주존 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이었으나 최근에 16 나한상을 모시고 있어 영산전, 혹은 나한전으로도 불리고 있다. 영산전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 맞배 지붕이다. 광해군 5년(1623년)에 처음 건립하였고, 헌종 8년(1842년)에 중수, 현재 건물은 1989에 일부 보수하여 단아한 모습으로 서있다.
(사진: 영산전 전경)
d) 세존 사리탑: 충북 유형 문화재 제 27호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지는 돌 종 모양의 부도로서 탑비와 함께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부도는 신라 혜공왕 11년(775년)에 진표율사가 안심사를 건설할 때 석가세존의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전해온다.
(사진: 세존 사리탑과 탑비)
그러나 탑의 내용에 의하면 사리탑의 행방을 모른 채 오랜 세월을 지나오던 중 이곳 구룡산에서 발견하여 조선 고종 18년(1881년)에 구천동에 옮겼던 것을 다시 광무 4년 (1900년)에 광우(廣祐)와 등원(登院) 두 스님이 안심사로 옮겨 세웠다 한다. 조성 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네모난 1층의 모루 돌 위에 8각형의 아래 돌을 놓아 만든 전형적인 종모양의 부도로서 8각의 아래 모루 돌 각 면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으나 뒷면에는 십자형으로 홈이 파여 있다.
탑 돌을 받치는 괴임 대도 없고, 몸 돌에도 아무 무늬나 글씨가 없다. 그러나 상륜부는 28개의 구슬무늬를 조각하여 구획하였다. 상륜은 보주형이며, 상단은 뾰족하게 표현하였다.
2. 흥덕사지(興德寺地): 사적 제 315호
1984년 토지공사에서 “운천지구 택지조성공사” 중 옛 사찰 터가 발견되어 1985년 이곳을 청주대 박물관이 발굴하면서, 당시에 청동으로 만든 “西原府 興德寺”와 청동 불발(佛鉢)에 “황통 10년 흥덕사”란 글자가 새겨진 청동 그릇 뚜껑이 출토되어 이곳이 바로 <直指心經>을 인쇄한 흥덕사로 확인 되었다. 발굴 당시 절터는 택지공사로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
절터의 규모는 남북 일직선상에 중문과 탑, 금당, 강당이 배치되고 주위에 회랑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며 <대중 3년>이라는 글자가 양각된 기와가 출토되어 그 연대인 신라 문성왕 11년(서기 849년)에 이미 사찰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발굴조사 결과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 정면 4칸 측면 2칸의 강당이 있었고, 금당 좌우로 회랑이 배치된 신라시대의 가람으로 밝혀졌다.
(사진: 흥덕사지에 북원된 금당 전경)
이외 “청동금구”(靑銅禁口-청동으로 만든 북), “청동 종”, “금강저 (불구), “대중 3년”이 명기된 기와, “황통 10년 흥덕사”란 1150년에 제작된 불발(佛鉢)이 발견되었고, 그 윗부분에 글자가 40자나 음각되어 있어 사찰 명이 알려졌다.
금당자리에서 고려시대의 치미(雉尾) 한 쌍이 출토되었다. 이 치미는 현재 국립 청주박물관에 전시되어 그 높이가 1.35m 나 되어 금당 건물의 규모를 추측할 수가 있다.
그 후 이곳에서 <직지>를 인쇄 한 후에 화재로 절이 폐사된 것이다.
현재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이중처마의 팔작 지붕의 금당과 3층 석탑이 복원되었다.
이로 인해 흥덕사지는 1986년에 사적 제 315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도 절터 주변에는 발굴 당시 나온 주춧돌, 기와 파편 등 여러 가지 석재들이 남아있다.
3. 청주 고인쇄 박물관: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866
청주 흥덕사지에 1992. 3. 17일 개관되어 고인쇄(古印刷) 전문 박물관으로 고서, 인쇄기구, 흥덕사지 출토 유물 등 3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으며, 12.400평 (40.990㎡)부지에 연면적 1.468평(4.868㎡)규모로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에 5개의 상설 전시관, 하나의 기획전시실, 수장고, 도서관, 세미나실 등이 구비되었다.
a)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直指心經):
이 책은 고려 말 경한 (호 백운화상) 스님이 송나라 때 나온 <전등록>에서 역대의 여러 부처와 조사 스님들의 설법에서 선의 핵심을 깨닫는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서 역은 책이다.
책은 상, 하 2권으로 되어 있었으나 하권만 발견되어 현재는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은 1887년 주한 프랑스 초대 공사로 부임한 “콜랭드 드 쁠랑시”가 공사로 근무하면서 서화, 골동품을 수집해 본국으로 가져갔다. 그 중에 직지심경 하권 하나가 포함된 것이다.
그가 사망하자 그가 수집해간 이 책은 “앙리 브베르”라는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가, 그가 사망 후 1950년 경에 프랑스 국립 중앙 도서관에 기증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후 1972년 처음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도서 전시회에 처음으로 등장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책의 원명은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백운화상초록불조 직지심체요절)이란 길다란 명칭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 처음 출품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인정 받았다.
이 책에 마지막 장에 <선광 7년 정사 7월 청주목사 글쇄>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 해는 고려 우왕 3년 1377년으로, 서양에서 처음으로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책을 찍은 1450년 보다 무려 73년이나 앞선 것으로 판명된 것이다.
이 직지심경은 한판에 같은 글자의 동일한 꼴이 없고, 활자와 획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주조의 실수로 획의 일부분이 끊긴 것이 보이며, 이런 것은 밀납 주조법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b) UNESCO 세계기록유산
직지심경은 이후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세계 인쇄문화사의 최초인 것으로 인정 되어 2001. 9. 4일에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102개국 및 5개 기구에 2014년 현재 301건이다. 한국은 세계기록 유산으로 <직지>를 포함하여 <훈민정음 해례본>,<이조 실록>,<난중일기>,<동의 보감><조선 의궤>, <승정원 일기>등 총 11건이 등재되어 있다.
부가하여 유네스코에는 현재 우리나라의 후원으로 직지의 세계 기록 유산을 기념하고, 인류공동의 기록유산 보존에 기여한 사람이나 단체에 수여하기 위한 상이 제정되어 있어 세계기록유산 국제 자문위원회의에서 심의 선정하게 되어있다.
2005년부터 2년마다 9월 <직지의 날>에 청주시나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며 상금은 미화로 3만불이다. 1 회로 체코 국립도서관이 수상하였고, 2013년에는 멕시코 “아다비”가 수상 하였다.
(사진: 직지상의 휘장)
C) 치미(雉尾)
흥덕사지의 치미는 금당터의 서북쪽에서 출토된 높이 136㎝의 크기로, 당시의 목조 건축의 기와 지붕에 용마루의 양쪽 끝에 부착하던 대형 장식 기와로 일명 “망새” 라고 부른다.
용마루 위에 올려 건물보다 높게 보이도록 하여 건물의 위엄을 나타내며 상상의 새인 봉황을 형상화한 것이다. 건물에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고 안전을 염원하는 뜻으로 만들어 올리었다.
(사진: 치미- 일명 망사)
4. 용화사 석불상군(龍華寺 石佛像群): 보물 제 985호(89.4.10)
청주 용화사 용화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용화사 석불상군(일명 칠존 석불)은 고려 시대에 조성된 불상들로 조각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인정 받아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5개의 불상과 2 구의 보살상으로 된 이 석불들은 모두 양 어깨를 감싼 옷을 입고 있는 입상과 좌상으로 얼굴과 세부기법, 특히 옷 주름 표현과 손 모양 등 불신이 우아하고 정제된 표현으로 보아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크기가 1.4m~5.5m 에 이르는 이 석불들은 일장 육척(一丈 六尺)의 석불로 일명 장육불로 16척 높이의 석불을 일컫는다.
이 석불들은 무심천 주위에 방치되어 있던 것으로 고종 39년(1902년)에 현재의 용화사 자리에 봉안되었던 것을 1972년에 와서야 법당에 안치하고, 1990년에 현재의 미륵보전이 완공되면서 칠존석불 모두를 미륵보전에 봉안하였다. 2008년 극락전을 신축하면서 4구(유아거사, 미륵보살 등)의 석불을 옮겨 봉안하였다.
특히 석불의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 주름의 석가모니 부처의 뒷면에 조각된 거대한 나한상은 매우 특이한 것으로 솜씨가 뛰어나다.
(사진 : 용화사 극락전의 7불상)
용화사 법당 상량문에 이 7불상의 관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조선 고종 38년(1901년) 어느날 엄비가 꿈을 꾸었는데 청주에서 석불 일곱구가 나타나 집을 지어 달라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엄비는 당시 군수에게 절을 짓게 했으며 보국사라는 절을 지어 이 일곱 미륵불을 모시었다. 당시 절 이름을 용화사라 한 것은 미륵 부처가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중생을 구한다는 의미였다.
1993년 10월 사직동 용화사에서 동쪽 100m 정도 떨어진 무심천변의 제방도로 확장 공사 중 사뇌사(思惱寺)란 반자를 포함한 고려시대의 금속유물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진각국사 어록>에 보조 지눌 스님의 법을 이은 진각국사 혜심(1178~1234)스님이 1226년 4월 서원부의 “사뇌사”에서 하안거 를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사뇌사가 고려 시대 청주에 있던 대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근처에 여러 사찰이 들어섰던 것으로 유추할 수가 있다.
그로 인해 용화사의 7존 석불은 이곳에 여러 절에 흩어져 있던 석불을 한데 모은 것으로 보인다.
불상 들은 대개 고려 초기의 것으로 크기가 5.5m, 3.2m, 2.7m, 2.1m, 1.9m, 1.4m로 다양하고 좌상과 입상이 함께 있다. 불상이 여러 경로로 발굴되어 원래대로의 대좌는 없어지고 현재는 새로 만든 대좌에 안치되어 있다.
제일 큰 여래 입상은 나발이 굵게 조각되었고 머리에 육계가 우뚝하다. 그러나 이마는 좁고, 얼굴은 길다. 두 눈은 길고 코가 크며 입은 작다. 두 귀는 두툼하고 목에는 삼도가 있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시무외인을, 왼손은 배 앞에서 여인원을 지었고, 몸집의 규모가 커서 독특한 인상을 준다.
(사진: 대형 3불상의 모습)
두번 째로 큰 불상은 나발에 머리에 육계가 알맞게 솟았고, 얼굴이 둥글고 눈, 코, 입이 균형을 이루었다. 두 귀는 길게 어깨까지 내려 왔고 목에도 삼도가 있다. 왼손은 몸 옆으로 내리었고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어 올려 손바닥이 보인다.
한편 이 2번째 불상 뒷면에는 높이가 3m가 넘는 거대한 <나한상>이 양각되어 눈길을 끈다. 이 나한상은 나중에 양각된 것으로 보이며 삭발머리에 둥근 얼굴이다. 왼손은 배 앞으로 들어 향로를 받들고, 오른손은 향로 뒷부분을 감싸고 있다.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높게 새겨졌고 아래쪽은 짧게 하여 균형이 맞지 않는다.
(사진: 2번째 불상 뒤에 새겨진 나한상)
세번 째의 불상은 풍만하고 중후한 얼굴에 체구가 크다. 이 불상은 훼손이 많이 되 부분적으로 보수된 흔적이 있으며 두 어깨를 감싸게 불의를 걸쳤으며 가슴을 드러내고 옷 주름이 굵게 표현되어 있다.
다음에는 결가부좌한 보살상으로 머리에 꽃무늬 보관을 썼고 얼굴이 긴 편이며 보수를 하여 본래의 모습에서 먼 느낌이다.
나머지 셋은 크기가 작고, 결가부좌하고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좌상이다.
5.용두사지 철당간(龍頭寺址 鐵幢竿) 국보 제 41호(1962. 12.20 지정)
이 철당간은 지금은 시내 한복판인 상당구 남문로 롯데 백화점 뒤에 있다.
용두사지 철당간은 두 개의 화강암 지주가 양쪽에 세워졌고 그 가운데로 20개의 청동으로 이어 올라가 이루어진 것으로 백화점 뒤 광장에 세워져 있다.
당간의 밑에는 당기가 양각되어 있어 고려 광종 13년(962년)이라는 연도가 밝혀졌다. 당시 고려 의 연호로 “준풍(峻豊)”이라는 표현이 새겨져 있다.
높이가 13.1m, 철통 20개, 화강암 높이 4.2m, 폭 40㎝, 지름이 43㎝, 아래에 해서체로 당기(幢記)
(사진: 용두사터의 철당간)
가 새겨 있다. 그러나 이 당간을 세웠던 용두사는 규모나 창건연대를 알 수가 없다.
당간이란 사찰 앞에 세워 절에서 행사를 할 때 깃발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다. 부처의 공덕과 자비를 표현한 불화를 그린 것으로 만든 재료에 따라 철 당간, 돌 당간, 목 당간이 있으며 간두(竿頭)의 모양에 따라 용 머리 모양은 용두당, 여의주 장식의 여의당, 사람의 모양을 하면 인두당 이라 불리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공주 갑사의 철당간, 나주 동문 밖의 석당간, 담양 읍내의 석당간 등이 남아있으나 이 청주의 철당간 만이 조성 연대가 확실하다.
5. 국립 청주 박물관: 1987년 10. 30일 개관.
청주 박물관은 건축가 고 김 수근(1931~86) 씨가 생전에 설계하여 남긴 이름있는 작품이다.
우암산 동쪽에 자라하며 상설 전시관에는 충북도에서 출토된 선사시대 부 터~조선시대에 이르는 유물 2300여 점이 망라되어 충북 일대의 우리 유물을 총 망라하고 있다.
야외에는 진천 석장리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제철로, 청주 용암동의 통일 신라 시대의 무덤을 복원전시 하였다.
2007년에 개관한 정보자료관은 소장도서 13.300여 점을 보유하고, 영상 자료도 700 여점을 보유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선정한 34개의 유물은 방문자들에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 중
1)단산오옥(고려먹), 2) 청동 기름 말, 3) 청동 항아리, 4) 범종, 5) 부처와 보살, 6) 검은 간 토기와 덧띠토기, 7)”건흥 5년”의 금동 광배, 8) 귀걸이, 9) 송종관, 10) 입 큰 단지, 11) “흥덕사”가 새겨진 청동 금고, 12) 금강령 , 13) “계유”가 새겨진 아마타 불비상 (국보 제 106호)등이다.
(사
6. 상당산성(上黨 山城): 사적 제 212호 (1970.10.1일 지정)
상당산성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되었다. 성의 둘레는 4.2km, 면적은 934.130㎡의 거대한 포곡식(包谷式) 석축 산성이다.
이 산성의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김 유신의 셋째 아들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단 기록과 “상당산성 고금 사적기”에 <김 유신>의 아버지인 <김 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기록이 있고, “신동국여지승람”에 상당성은 둘레가 2600m 정도라고 표시되어 있고, 성안에 큰 연못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충청병사로 있던 원 균(元 均)이 수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효종실록, 숙종 실록, <비변사 등록> 등에 의하면 효종 2 년 (1651년) 충청도 병마 절도사 영(營)이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 지고, 청주가 중요시되면서 숙종 42년(1716년)에 충청병사 유 성추(柳 星樞)에 의해 개축이 시작되어 숙종 45년 (1719년) 까지 대대적으로 성벽이 수축되고 이듬해 성내에 구룡사 와 남악사의 2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성문무사석(城門 武砂石)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사진: 공남문 전경)
영조실록에는 영조 4년(1728년)에 이 인좌(李 麟佐)의 난을 겪고 이듬해 대대적인 수축을 시작하여 영조 7년(1731년) 정청인 운주헌(運籌軒)과 포루를 세웠고, 영조 8년 (1732년) 남문에 공작루(控雀樓)가 세워지고 수성절목도 완성되었으며, 이후 영조 19년(1743년) 까지 성안의 어관사, 군기고, 동서창, 수구, 장대 등이 모두 완성되고 마지막으로 동장대(東將臺)가 완성 되었다.
현재로 상당산성에는 동문(鎭東門), 서문(弭虎門), 남문(控南門)의 3개 문과 동암문, 남암문 의 2개의 암문, 치성(雉城)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고, 그 후 정비공사로 동,남 문루와 동문이 재건되었고 1992년 말에는 동장대도 재건 되었다.
1995년도의 발굴조사로 서장대의 규모가 15평으로 그 위치가 확인 되었다.
a) 남문(공남문): 남문은 상당산성의 정문으로 무지개문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문은 무사석을 다듬어 11단으로 쌓았고, 문의 안쪽으로는 옹벽이 있고, 이 문을 보호하기 위해 좌우에 치성을 쌓았다.
b) 서문(미호문): 서문은 평문으로 거대한 2개의 무사석을 쌓고 그 위에다가 장대석을 올려 놓았다. 이 문은 성벽이 바깥쪽으로 돌출되어 옹성의 형태를 취하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c) 동문(진동문): 동문은 우리나라 산성의 흔한 평문의 형식을 하고 있다. 이 문은 무사석을 5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을 2개 올려놓아 안정감이 있는 구조이다.
d) 동장대: 장대는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곳에 세워 지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동장대는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영조 19년(1743년)에 세우고, 보화정(輔和亭)이라 이름지었다고 쓰여 있다.
이 동장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1992년 12월 15일에 중건 되었다.
e)암문: 암문이란 요즘의 비상구의 개념으로 유사시 사람과 물자가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적이 쉽게 찾지 못하도록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암문은 적에게 알려지는 경우 급하게 메울 수 있도록 안쪽으로 돌과 흙을 쌓아 놓는 것이다. 산당 산성에는 동암문과 남암문 2개가 있다.
동장대에 선 매년 시민의 날에 국운융성, 청주발전, 가정평화를 기원하는 삼원재를 지내고 있으며 이곳에서 성 돌이 행사가 시작된다. 현재의 저수지는 본래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에 1943년에 만든 것이다. 성내에는 전통 한옥마을이 조성되어 민속주인 대추술과 다양한 민속요리를 제공하고 있다.
(사진: 상당산성의 둘레 성곽)
상당이라는 명칭은 백제 때 청주의 지명인 上堂縣에서 유래 되었다. 옛 백제시대부터 있어온 토성으로 남문 밖에서 발견된 기와의 명문에서 통일 신라 시대의 서원경과도 연관이 되어 있다. 이 후 고려 시대를 거처 조선시대에는 영, 호남과 한양으로 통하는 통로를 방어하는 요충지로서, 당시에도 3.500여명의 병력과 승군이 주둔하였다 한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