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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동학역사길을 걷다(1.15~16)
형평사1923.4.25
ㆍ장지필.이학찬.강상호.신현수.천석구 등
ㆍ장지필 등의 활동에 주목해야. 고려혁명당 (1926~1927) 등 천도교 활동과도 관련이 있다. 백정 신분해방은 익산의 남계천때부터 동학의 중요 관심사였다. 갑오년 폐정개혁12개조에도 백정의 신분차별 폐지를 요구했다.
ㆍ형평운동을 "진주의 것, 인권운동"으로만 해석해서는 안된다.
■ 진주 주요 동학 사적지
http://www.e-donghak.or.kr/prh/viewDocument.jsp?pNo=53&pPage=1&pPer=10
1. 진주 동학군 대도소 터(현, 진주시 평안동 111번지, 보리한의원 등이 들어선 건물),
동학혁명 당시 질청[아전들 사무공간]으로, 여기에 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의 대도소가 설치됨.(1894.9.18~24)
2. 진주 동학군 대회 터(1894.9.8) 광탄진 나루: 진주 남강댐에 수몰. 옛 광탄진(廣灘津, 너우니 나루). 진주 73개 마을의 동학군 집결.
ㆍ진주대회가 9월8일 열린 것에서, 8.25남원대회가 실제적 2차동학봉기를 선언한 것임에 유의해야 한다. 옥천 청산의 9.18선언은 2차동학기포를 공식화 한 것.
3. 진주성: 남강로 626. 동학군은 1894년 9월 18일 경상우병사 민준호의 영접을 받으며 진주성 무혈 입성.
위 세군데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기념비(표지석)를 세울 필요가 있다.
4. 진주농민항쟁 첫 봉기지, 진주농민항쟁기념탑: 1862년의 진주농민항쟁(진주민란)의 첫 봉기지 옛 수곡장이 섰던 덕천강변(진주 수곡에서 하동 옥종면을 넘어가는 다리 옆)
5. 진주 교육청 앞. 진주소년운동비.
강영호, 고경인, 강민호, 박춘성, 박태홍 등 진주소년운동의 영웅들을 기억해야 한다. 이 분들은 모두 천도교를 했고 동학의 정신으로 소년운동을 이끌었다.
https://m.blog.naver.com/yamu1023/221219652670
유월항쟁 비, 진주교육청 앞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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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진주동학 혁명, 간략한 정리
충경포 소속인 백도홍(白道弘, 백낙도)
진주 삼장 사람. 덕산을 근거지로 포덕활동을 벌임. 세력을 모으자,
1894년 4월 13일(?) 진주 영장 박희방이 군졸을 이끌고 덕산에 들어가 백도홍을 붙잡아 처형(4.15)하고 30여명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둠.
부산총영사 무로타 요시아야는 조선인 정탐원을 보내 조사한 내용을 서울의 일본공사관에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곳 영장은 민병 1,000여 명을 모아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고 동학도인 백도홍을 덕유(德裕?, 덕산)에서 붙잡아 즉시 효수하고 나머지 도당 수십 명은 감옥에 잡아두었기 때문에 잠시 진정되었음.”
“지난달 진주 지방에서도 인근 각지의 동학당이 봉기하여 매우 불온한 상태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진정되었다. 거두인 백도홍을 비롯한 30여 명의 난도(亂徒)가 포박되어 그 후 무사해졌다는 것이다.”
백도홍이 처형되자 대접주 손은석은 4월 24∼25일경 ‘천여 명’의 동학군를 이끌고 진주 성내로 들어가서 항의.
이때 영장 박희방은 외지로 피신하였고, 우병사 민준호가 동학도를 무마 수습.
민준호는 동학에 우호적, 이후 관직 삭탈됨.
조선왕조실록에 민준호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법무 대신(法務大臣) 서광범(徐光範) 아뢰기를,
"경상 전 우병사(慶尙前右兵使) 민준호(閔俊鎬)가 비적(匪賊)을 잡지 않은 죄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에 따라 형장(刑杖) 100대에 해당하는 사사로운 죄로서 속전(贖錢)을 거두고 고신(告身)을 추탈(追奪)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http://naver.me/Gp0rstj5
http://naver.me/Fsknksyv
■7월에 들어 영남지역 각 고을에 민란이 격화되자, 경남 서부지역 동학도들의 활동은 다시 활발해졌다.
■진주성 무혈입성 : 1894. 9. 18
동학군의 제2차 봉기 때, 경남 서부지역에서도 9월 1일부터 동학군이 본격적으로 봉기한다. 9월 1일 하동지역 동학도가 호남 동학도와 함께 하동을 공격해 읍을 장악하고, 몇일 후 진주로 향했다.
순천·광양의 동학군이 하동을 점령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진주와 단성 지역의 동학군이 결집하기 시작.
ㆍ9월 2일 진주동학군은 ‘국가의 안위는 국민의 생사에 있고 국민의 생사는 국가의 안위에 있다’는 내용의 방문을 게시하면서
. 9월 8일 진주 73개 마을에서 13명씩 평거(平居) 광탄진(廣灘津, 너우니)에 집결하여 국가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보국안민)하게 할 방도를 논의.
ㆍ9월 8일 진주 관내 73개 면에서 면마다 100명씩 죽창을 들고 읍내로 . 대도소를 설치하고 읍내와 외촌을 모두 장악.
ㆍ9월 10일 대도소에서는 ‘영우(嶺右)의 각 읍 각 촌 에 사는 대소민에게’라는 방문을 내걸었는데 ‘왜적들이 침범하고 있으니 복수하여 국가에 보답하자’ 결의
진주에서 대회가 열림에 따라 진주 인근 각 고을에서도 동학군의 활동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ㆍ남해에서는 9월 11일 호남 동학군 19명이 읍내에 돌입하여 이청(吏廳)을 장악하고 무리를 모아 진주로 출발하였 으며,
ㆍ사천에서도 9월 13일 동학교도가 봉기하여 지방관을 협박하고 무기를 탈취했다고 한다.
ㆍ고성에서도 동학교도 600여 명이 읍내에 진입하여 포량미를 빼내 인근 마을에 나누어 준 사실이 확인된다.
이처럼 진주봉기가 인근 지역까지 확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서부 경남 지역에서의 9월 18일에 최고조에 달하였다.
동학교도 수천 명이 9월 17일 하동으 로부터 진주로 들어와 각 관청에 접소를 설치하였고
9월18일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천여 명을 이끌고 진주성 입성. 김인배가 이끄는 부대를 비롯하여 진주 인근 각 고을의 동학군이 총집결한 가운데 대회가 개최.
대회장에서는 나팔을 불고 북을 쳤으며 포성이 우레와 같았다고 한다. 각종 무기로 무장한 동학군의 진영 앞에는 붉은 큰 깃발이 세워졌는데 ‘보국안민’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동학군은 24일 퇴각.
■ 동학군과 일본군의 충돌
1894년 9월 18일 조선 정부가 호서와 호남의 동학농민군 토벌을 결정하고 일본 군대의 출병을 요청(일성록).
이에 대응해 조정의 명을 받은 토포사가 군병을 이끌고 진주 등지에 와서 일본군과 협동해서 동학군 토벌시작.
조정과 감영에서는 경남 지역의 동학군 봉기 소식을 받고 대구 판관 지석영을 토포사로 내정하여, 일부 군병을 이끌고 진주 하동 등지로가서 일본군과 협동해서 동학군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ㆍ9월 25일 부산에서 일본군 3개 소대 150명이 배편으로 창원 마산포에 도착하여 한 부대가 먼저 29일 하동으로 진출했다. 이날 하동 광평동에서 당시에 하동에 남아 있던 동학군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져 동학군은 섬진강 건너편으로 달아났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강을 건너 동학군을 추적했으나 종적을 잃어버려 동학군이 버린 무기와 양식만 가지고 돌아갔다.
이어 후속 부대와 합류한 일본군은 30일에도 섬진강 건너편에 출몰한 동학군을 추적하였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하동으로 철수했다.
그런 뒤 10월 7일에는 제4중대장 영목(鈴木) 대위가 경남 지역에 파견된 일본군을 총지휘하기 위해 곤양에 도착하면서 대구에서 파견된 관군과 일본군의 합류가 이루어졌다.
이 무렵에는 동학군들이 여기저기서 출몰하여 일본군 관군과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져 많은 동학군이 총살 되거나 효수되었고, 경남 지역 동학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던 임석준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 경남 서부지역 동학군의 주력이 크게 궤멸되었던 전투는 곤양의 금오산 전투와 진주의 고승산성 전투였다.
- 10월14일(양11.11)진주의 고성성 전투에서 동학군은 일본군에게 대패. 5~6백여명 전사.(일본기록186명)
ㆍ일본군은 10월 10일 곤양 안심동 남쪽 금오산에 동학군 사백여 명이 모였다는 사실을 알고 두 부대로 나누어 공격해서 많은 동학군을 생포하고 일흔여 명을 사살했다.
그 후 12일 일본군은 진주 백곡리에 동학군이 모여 진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곤양에서 진주 수곡리에 이르렀다.
이때 토포사 지석영이 진주부 동쪽 20리에 있는 송촌과 동쪽 30리에 있는 집현산 아래와 단성 북쪽 10리에 있는 정정, 원본정 등의 여러 지역에 동학군 사오백 명이 모여 모두 진주성을 향해 진격하려 한다는 급보를 알려와, 일본군은 즉시 길을 돌려 진주부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부대를 나누어 송촌과 집현산 부근에 이르렀으나 동학군은 이미 단성 지방으로 이동해버린 상태였다.
같은 날 단성 지방의 동학군들이 진주를 공격하려고 수곡 마을로 진군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다음날인 14일 진주 수곡 마을에 이르렀다.
수곡 마을 산야에 깔려 있던 동학군들은 일부는 고승산성으로 물러나 방어 준비를 하고, 나머지 일부는 북쪽으로 물러났다.
일본군의 공격이 있자 산성의 동학군들은 산꼭대기 낭떠러지에 의지해서 완강히 저항하였고, 북쪽으로 물러났던 동학군이 일본군의 오른쪽을 공격해 왔 다.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본군을 궁지에 몰기도 했으나, 무기나 전투 기술 면에서 월등한 일본군이 얼마 지나지 않아 산을 점령했다.
산쪽대기의 방어 진지가 무너지자 동학군들은 덕산 방면으로 후퇴했다. 일본군 한 소대가 이를 추적했으나 미치지 못하여 그냥 돌아왔다
ㆍ이날(10.14, 양력으로 11.11) 고성산 전투에서 동학군은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일본군이 거두어 모은 동학군 시신만 186구. 실제로는 5~6백여명이 왜군에 희생됨.(백곡지, 천도교기록)
ㆍ이후 일본군과 관군은 하동에 다시 호남의 동학군이 내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19일 하동으로 진격하였고 20일, 21일에 걸쳐 섬진강을 건너 응치 삼봉산 섬진역에 출몰하는 동학군들에 대한 몇 차례의 토벌에 나섰다.
ㆍ일본군이 섬진강 건너편에서 동학군과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하동 지역의 동학군들은 배후를 치는 작전 으로 나왔으나, 이도 곧 격퇴되어 동학군들은 마침내 흩어지게 되었다.
ㆍ10월 24일 철수를 시작하여 관군은 대구로, 일본군은 부산으로.
ㆍ하동 전투에서 패배한 후 김인배 부대는
11월 전라좌수영을 공격했지만 이마저 실패로 돌아갔으며, 체포된 김인배 유하덕 등 동학군 지도자들이 12월 7일 광양에서 처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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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1.16(일) 추모행사_고성산에서 12시
천지신명이시여
님께서 우리 안에 계서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고 살아가게 하소서
당신의 나라를
이땅에 이루기 위하여
제몸을 기꺼이 제단에 봉헌하신 선열들을 뵙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때로는 취하고 비틀거릴지라도
우리로 하여금
님들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오환건국 구천이백일십구년 섣달 열나흘
삼가 아룁니다. /최광식
김석균 순례단장의 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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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에' 노래에 맞추어 위령의 춤
김태린 진주민예총회장
https://youtu.be/7NXUPCHFu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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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채_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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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남해 부산 안산 전주 등 여러곳에서 추모제에 오셨다
고성산 진혼제 /조기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고성산성을 휘돌아 흐르는 덕천강
다리를 건너 고성산성에 다다랐을 때쯤
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냥 지나쳐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진주에서 하룻밤을 더 머물더라도
갑오년 서러운 넋들을 위로하고 가야 한다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을 모았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나섰던 순례길
뜨거운 마음만 있었고
무언가 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만 가지고
길을 나서 십여 일을 훌쩍 넘어 진주에 도착했고
진주 남강을 지나 덕천강을 지날 때 쯤
1894년 갑오년 서러운 넋들을 두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갑오년 동학군들이 관군의 저항 없이
무혈 입성하였던 진주성을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쫓기고 물러서면서도
고성산성을 등에 기대고 전열을 정비한
오천의 동학 동학군은 쫓기면서도
흩어질 수 없었고
신식무기 앞에 죽어가면서도 돌아갈 곳이 없었습니다.
노비로 천민으로 살아가면서
그것이 운명인줄 알고 수백년 수천년을 살아오면서
동학년 죽창을 들면서 노비의 문서를 불태웠고
천민의 서러운 마음을을 불태워 버렸고
인간이 하늘인 하늘을 섬기듯이 사람을 섬기는
새로운 세상을 푸른 하늘을 보았는데
돌아갈 고향도 없었지만
돌아간들 그곳은 동학 비적이라 색출하여
오라에 묶고, 목을 메달 것이 뻔한 것을
시천주의 세상이 아니고
조선의 그 어느 땅도, 어느 들도, 어느 산도,
사람이 살만한 곳이겠습니까
짧은 시간이지만 너무 많은 것을 보았고
인간으로 새롭게 태어난 새 세상을 보았는데
비록 일본군의 신식무기에
다섯 배 넘는 사정거리, 비교할 수 없는 살인 무기 앞에
죽창으로 심지에 불을 붙여 한참을 기다려야 총알이 나가는
사냥꾼의 화승총으로 그들의 대포와 그들의 기관총 앞에
싸움 자체가 되지 않았지만
죽음도, 막을 수 없는 푸른 하늘을 보았고
도망간들 갈 곳을 잃어버린 동학군은
덕천강을 앞에 두고 고성산을 등에 엎고
마지막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습니다.
고성산성 옛 성터에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동학군의 비장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시호시호 이내시호 부재래지 시호로다
용천검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바람의 소리 같았고 대 숲에서 나는 소리 같았고
흐르는 물소리 같았던 동학군의 마지막
비장했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일본군의 총칼에 죽어가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마지막 전투 고성산성 전투
크다란 바가지에 농주를 가득 담았습니다.
어이, 어이 하늘과 같이 높은 뫼
어이, 어이 바다같이 넓은 마음
어이, 어이 어찌 두고 그냥 갈 수 있으리오
신내림의 순간처럼 장구를 치고
구름 위에 발을 디디듯이
사뿐 즈려 솟구쳐 오르는 몸짓이
죽은 영혼을 불러내고
갑오년 서러운 넋들을 불러 모셔
진혼궂, 진혼무로 그날의 함성을 듣습니다.
죽음이 패배가 아니었고
마지막이 마지막일 수 없었듯이
역사의 푸른 강물이 그예 지금까지 흐르듯이
잊혀진 역사 動學年의 아픈 기억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
걸음을 멈추고 진혼제를 올립니다.
순례자가 걷는 길이
마냥 좋을 수만 없어서
겨울 길을 나섰고
가는 곳마다 피눈물의 서러운 넋들을 만납니다.
고성산 동학농민 혁명군이 원혼비 앞에
발길을 멈춥니다.
🌱
김석균 페북 글
어제와 오늘
경상 서남부지역의 역사를 걷는다
진주 형평운동에서 시작된 걸음은
진주농민항쟁과 하동 동학혁명군 위령탑을 지나
남명 조식에 이르렀다
물을 뿌리고 마당을 쓰는 이치를 모르고서
하늘이야기를 하지 말라했던 남명선생!
백의종군 하던 이순신이 굳이 발길을
하였던 마음과
남원길을 걷던 수운이
굳이 남명의 그림자를
밟았던
그 마음이
가슴깊이 다가온다
남명은 벼슬은 하지 않았으나
그 문하의 의병장들이 없었다면
조선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목소리가
녹아든 이곳이었기에
1962년 진주농민항쟁이
1984년 동학농민혁명이
이곳에서 살이 꿈틀거릴수 있는 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물을 뿌리고 마당을 쓰는 이치도 모르고서야
공맹의 도를 떠들지 말라던 남명의 서슬푸른 외침은
사람이 하늘이고
땅이 하늘이고.
천지 자연이 모두 하늘이라던
수운과 해월에 닿아 있었구나
그 찬란한
생명에의 깨우침위에
일상속의 개벽위에
개남이 있었고 녹두가 있었구나
개남의 칼이
남명의 빗자락이고
수운의 하늘이며
해월의 밥 한그릇이었구나!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것을~
네가
나였고
쌀 한톨속에 우주가 있었으며
칼속에 하늘이 있었구나
사람을 살리는 칼을들고
너울 너울 춤을 추던
원평취회의
잡놈들이
가슴뜨거운 남녘땅
새 세상을 꿈꾸던
은적암의 개남이
밥 한그릇을
내앞으로 돌려놓고
생명이
밥모심의 주체임을 이야기한
해월이
사실은 다
같은
놈들이었구나
한통속 이구나!
얼씨구나~
그렇구나~
고시랑 고시랑 허지말고
춤 한자락 추어 보자!
좋타~~
_()_
참 좋은 날이다~^^
첫댓글 모시고 잘 보았습니다!
만약 천도교 교단의 기획이고 제안이라면 이 길을 걷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도교만의 동학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 속에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 님께서 하시는 우려와 걱정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좀 더 넓은 마응 좀더 깊은 마음으로 우리는 만나야 합니다.종교가 인간의 삶을 외면 할 수 없듯이 사인여천의 정신으로 보아주시기를 바랍니다/조기현
모시고 공경합니다.
탁암장님의 영남지방 및 진주동학혁명의 흔적은 마음속에 잘 새겼습니다..
다만 금년 1월16일의 추모제에서 깨어 원행을 하시는분들이 술과 과일등 귀신을 모심에 다소 아쉬움이 있네요..
청수 한그릇이면 족했을 것을 꾸밈이 많아지면 온갖 잔꾀에 놀아나는 법입니다..
순례 마지막날까지 모든 동덕님들이 건강하고 서로 마음 상하는 일이 없길 소원합니다.
포덕 163년 해암 심고_()_곽충훈
모시고 안녕하십니까.
수운옛길순례분들은 교인이 아니십니다.
이 분들은 순수한 발심을 쫓아 걸으시는 중이고
토속 전통의 정서에서
굿가락에 맺힌 원혼을 달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통예술인들이기도 하고요.
누구보다 전통의 신명을 잘 알고 계시는 분께서
전후 맥락을 못보시고 콕 집어
이른 아침부터 속단하여 단정짓는 발언으로
분위기를 해치는 일은 삼가하여 주시기바랍니다
차후 해암께서는 함부로 속단하는 발언을 삼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녹채
청수 한 그릇이면 족하다 했지 청수 한 그릇만으로 해야만된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또한, 술과 과일을 올린다고 잔꾀에 놀아난다는 법은 없겠지요.
예단 하고 단정하는 것이 관계에 있어 조화에 있어 큰 문제라 생각됩니다.
어찌 함부로 예단하려 하십니까???
^_()_^ 박달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