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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리 체류 둘째날 워크샵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가 세느강을 보러 나섰습니다. 비르 하킴 다리 아래로 흐르는 강물은 흐리고 어두워지는 강변길은 한적하였지요. 쌀쌀한 외기에 바바리코트깃을 세우고 한시간 반을 걷고 나니 습한 날씨에 얼굴은 차가워지고 옷속으로는 땀이 배었습니다. 이번 빠리에 올때부터 꼭 가보고 싶던 장소... 그곳엘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 곳은 바로... 퐁네프(Pont-Neuf)였습니다.
한국사람들이 프랑스에 처음 오면 가보고들 싶어하는 곳... 퐁네프다리, 미라보다리, 그리고 셀부르... 영화 '셀부르의 우산'이 워낙 한국에서 유명하였기에, 시인 아폴리네르의 시 '미라보 다리' 때문에, 그리고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이 1990년대 초 한국에서 중앙극장에서만 20만이란 관객을 모으는 성공을 거두었기에 모두들 가 보고 싶어하는 곳...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의 장면
나는 이 영화를 작년에 비디오테입을 빌려서 보았습니다. 몇 년전 봄 초청자 측 스케쥴에 따라 이동하면서 관광객의 시선으로 다소 사치스럽게 아름다운 고통과 예술의 도시로 기억한 빠리의 이미지와는 다른, 더럽고 낡은 빠리의 지하도와 거리, 부랑자들의 절망적인 모습과 삶, 특히 부랑자수용소의 인간의 추한 육체들에 대한 묘사는 충격이었지요. 내가 현란한 내부 명품들의 디스플레이에 취해서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던 사마리탄 백화점... 영화 주인공 알렉스와 미셀이 노숙하는 퐁네프다리에서 올려다 보았을때 그것은 낡아보였으며 퇴영적이었고 그래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영화속 그 자리, 퐁네프다리에서 사마리탄 백화점을 직접 내눈으로 보리라 생각하였지요.
축축한 공기 속을 한시간 반 동안 걸어서 드디어 퐁네프에 도착하였습니다. 기대하였던 사마리탄 백화점이 저만큼 보이고... 나는 그 영화에서 알렉스와 미셀이 노숙하고 절망적으로 사랑하던 그 다리 중간쯤에 와서 멈춰 섰습니다.
세느강을 이어주는 9개의 다리 중에서 가장 오래되고 낡은 퐁네프다리... 영화에서 다리는 철망으로 폐쇄되어 있고 <파리시는 91년 여름까지 가장 오래된 퐁네프 다리의 보수 공사를 위해 다리를 폐쇄한다>는 표지가 붙어있습니다. 상처받은 영혼들의 대안없는 안식처, 다리...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 타이틀에서부터 암울한 첼로음악과 함께 푸른 조명의 긴 지하 터널을 카메라가 빠져나갑니다. 거리에서 불뿜기 곡예를 하며 살아가는 도시의 부랑자 알렉스(드니 라방 분)는 빠리의 밤거리, 차도 위를 술에 취해 걷다가 거리에 쓰러집니다. 빡빡민 머리... 이마를 아스팔트바닥에 짓이기듯 문지르면서 그는 스스로를 학대하지요. 무서운 속도로 차가 달려오고 그는 다리를 치어 길바닥에서 널브러져 있습니다. 부랑자 보호소로 실려가는 알렉스... 그곳에는 대도시 빠리의 밑바닥 인생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비틀린 인간의 추한 육체들, 불구, 남편에게 사정없이 얻어맞는 여자... 하층민들의 본원적인 추한 모습을 이 영화는 보여줍니다.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영화 제목에서 달콤한 로맨스를 기대했던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장면이지요.
알렉스가 차에 치이는 것을 보았던 미셀(줄리에트 비노쉬 분)... 미셸은 실명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적 불안감과 애인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하며 집을 나와 거리를 방황하는 화가지요. 한쪽 시력이 희미해져가는 미셀... 그녀는 퐁네프다리에서 노숙하며 술을 마시고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더러운 얼굴로 미친 듯이 웃습니다. 영화속의 그녀 모습에서 여성스런 아름다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알렉스가 부랑자보호소에서 나오고 퐁네프 다리에서 미셀과 그는 만납니다. 미셸을 돌보아주며 같이 지내게 된 알렉스는 미셸을 사랑하게 되고 잠시 보내는 즐거운 시간... 알렉스의 미셸에 대한 집착은 커져 갑니다.
알렉스는 사람들 앞에서 불을 뿜으며 곡예를 합니다. 불... 미셀에게 직접 말할 용기가 없는 알렉스의 강렬하고 시각적인 유일한 사랑의 표현... 혁명 200주년 기념일의 화려한 불꽃놀이에서 극치를 이루는 불의 이미지... 밤하늘의 불꽃 아래 두 사람의 격정적이고 과장된 동작의 춤은 그들의 처지에 대한 몸부림이지요.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의 장면
이들은 세상에서 버림받고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현실에서 마냥 비틀거립니다. 미셸을 찾는 가족에게 미셸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알렉스는 미셸을 찾는 포스터에 불을 지르고... 미셸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알렉스는 방화죄로 투옥됩니다. 세월이 흘러서 면회를 오는 미셸... 둘은 재회의 기쁨을 나누면서 완성된 퐁네프 다리에서 다시 만날 약속을 합니다.
이 영화에서 까락스는 상처받은 영혼의 이미지와 렘브란트적인 영상을 보여줍니다. 램브란트(Rembrandt Van Rijn : 1606~1669)... 많은 초상화를 그린 네덜란드의 화가... 그는 자신의 여러가지 표정, 주름, 머리 장식, 피부의 질감 등을 미화시키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의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는 미(美)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는 듯 심지어는 노골적인 추(醜)의 모습도 그대로 화폭에 그려내었습니다. 퐁네프 다리도 매우 더럽고 거기에서 생활하는 인물들에게선 아름다움이란 찾아볼 수 없지요. 세상의 모든 절망을 한 몸에 지닌 듯 보이는 그들... 미(美)를 추구할 엄두도 못내고 삶 그 자체에도 미련을 갖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또한 이 영화는 절망적으로 추락한 밑바닥 인생의 남녀 사이의 연애담이라는 면에서 랭보적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흔히 선남선녀들의 러브스토리가 갖는 고정관념, 그 엘리뜨주의적인 관념을 파괴합니다. 이러한 소재는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에서 절망적인 알콜중독자 벤과 라스베가스의 거리의 여자 세라의 사랑에서도 나타나고 있지요.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알렉스의 모습에서는 랭보의 단편적인 초상화가 엿보입니다. 고향 샤브로빌에서 빠리로 오는 기차에 무임승차 했다가 감옥에 가는 랭보... 마르세이유 시립병원에서 행려병자로 다리 하나를 절단 당한채 죽어가는 랭보의 모습은 바로 알렉스의 모습인 것이지요.
시인 랭보의 사진
...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이 흐르는 축제였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혔지만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쓴맛이 났다.
그래서 나는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정의에 거역했다. 나는 도망쳤다.
오. 마녀들이여, 오 비참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들은 바로 너희들에게 맡겨졌다.
마침내 나의 영혼 속에서 인간적 희망은 온통 사라졌다.
인간적 희망의 목을 조르는 완전한 기쁨에 겨워, 나는 사나운 짐승처럼 음험하게 날뛰었다.
나는 사형집행인들을 불러들이고 죽어가면서 그들의 총 개머리판을 물어 뜯었다.
나는 재앙을 불러들였고, 그리하여 모래와 피로 숨이 막혔다.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
나는 진창속에 길게 쓰러졌다. 나는 범죄의 공기에 몸을 말렸다.
그리고는 미친듯이 못된 곡예를 했다.
하여 봄은 나에게 백치의 끔찍한 웃음을 일으켰다...
(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철 -서시- ' 일부 )
무릎에 앉힌 아름다움에서는 쓴 맛이 나고... 인간적인 희망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재앙을 불러들이며 불행을 자신의 신으로 찬미하는... 그래서 진창 속에 길게 드러눕는 그 랭보적 이미지가 이 영화에, '소년, 소녀를 만나다'와 '나쁜 피' 라는 영화로 영화팬들에게 알려져 있는 프랑스 영화계의 악동 레오 까락스가 만든 이 영화에 있었습니다.
세상에 희망이 없는 자들의 시선으로, 석재들이 어지럽게 흩어진 다리에서 노숙자의 시선으로 본 빠리... 이 영화 속의 빠리는 '빠리의 지붕밑'이라는 샹송이 감미롭게 흐르고 에펠탑이 그 위용을 뽐내는 빠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개선문의 웅장함도 샹젤리제의 화려함도 보여주지 않는, 공허한 200주년 기념축제가 남의 일인 듯 아득하게 느껴지는 그런 빠리였지요.
그러나 내가 밤에 혼자서 가본 퐁네프 다리는 다시 잘 정돈되고 사마리탄 백화점의 조명이 현란하게 보이는 인적 뜸한 다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부랑자의 시선으로 본 빠리를 이야기 해보아야 이것 역시 감정의 사치일 뿐... 방관자, 관람자의 시선으로 안이하게 들여다 보는 빠리 이야기일 뿐... 빠리는 보는 자의 시선에 따라 예술의 도시가 되고 또 더러운 환멸의 도시도 됩니다. 시선에 따라 그에 대한 인식이 달라질 뿐... 우리는 예술을 통하여 그 감상행위로서 우리가 겪을 수 없는 행복과 비극을 간접 체험하는 것이지요. 예술작품을 보고 그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고통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본질적으로 안이하고 상투적입니다. 그러니 창작의 고통을 제외하고 그것을 감상하는 한에 있어서는 예술이 부르죠아적이 아니라고 누군들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돌아오는 길에 가까이 다가간 사마리탄 백화점은 문을 닫고, 도로에 면한 화려한 조명의 진열장엔 2000년의 크리스마스를 위해 장식된 움직이는 곰인형 들이 재롱을 부리고, 길에서는 두터운 외투를 걸친 귀여운 어린이들이 그걸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깔깔거리며 웃고 있었습니다. 풍성한 캐시미어 목도리를 두른 젊은 아빠 엄마가 그걸 보며 또 행복하게 웃고 있었지요. 마치 바로 근처 퐁네프다리의 알렉스와 미셀의 절망적인 삶과 사랑, 그 극단화된 비극적 삶의 모습은 막 내린 영화 속에서나 존재한다는 듯이...
나는 잠시 내가 있지 못할 곳에 서서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을 유리진열장 속으로 들여다 본 것 같아 서둘러 그곳을 떠나 호텔로 향했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 그리고 이 세상의 비극에서도 아직 관람자임을 다소 슬프게 그리고 또 기쁘게 생각하면서...
아래는 랭보의 작품을 영문으로 볼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http://www.geocities.com/athens/8161/rimbau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