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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야(闇夜)
―어젯밤 편지를 받고 S·K씨에게 바치나이다
염 상 섭
1
“오늘은 부디 낮잠 자지 말고, 둘째 집 좀 가보려무나.”
아침을 먹고 어슬렁어슬렁 뜰로 내려오는 그의 뒷모양을, 근심스러운 눈으로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의 모친은, 또 한 번 주의를 시켰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로군…….’ 속으로 좀 불쾌한 듯이 생각하며, 그는 무엇이라고 대답을 하려다가 잠자코 자기 방으로 소리 없이 몸뚱어리를 숨겼다.
별로 춥지는 않으나 미닫이를 꼭 닫고, 그는 무슨 궁리나 하는 사람처럼 뒷짐을 진 채, 눈을 내리깔고 10분 동안쯤이나, 방 안을 빙빙 돌아다니다가, 책상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일전에 창경원에 놀러 갔다가, 동물원에서 본, 철창 안의 검은 곰〔黑熊〕이 생각나서, 불쾌한 듯이 눈살을 찌푸리다가, 기가 막힌 듯이 “아아” 선하품 같은 한숨을 쉬고 두 발을 내던지며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에 그는 무엇을 생각하였는지 신랄한 냉소가 입가에 살짝 지나갔다. 누가 곁에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금 깊은 사색에 헤엄치거나, 혹은 뼈에 맺힌 러브 시크나 앓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였을지 모르나, 실상은 그의 머릿속에는, 아무 그림자도 비추이지 않았다. 무엇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요, 생각하려는 것도 아닌 완전한 실신 상태의 포로가 된 것이다. 얼빠진 사람처럼, 왼팔을 먼지 앉은 책상에 던져놓고 반시간 동안이나, 멀거니 앉았다가, 그래도 무엇을 하여야 하겠다는 듯이, 몸을 소스라쳐 정신을 차리고, 책상에 정면하여 도사리고 앉았다. 그러나 또 화석같이 두 팔죽지를 책상 위에 짚고 머리를 훔켜싸고 앉았다. 그는 대관절 무엇을 해야 좋을지 몰랐다. 다만 머릿속이 불난 터 모양으로 와글와글하며, 공연히 마음이 조비비듯 할 뿐이었다. 어느 때까지 머리를 에워싸고 눈만 껌벅거리며 앉았던 그는, 겨우 결심한 듯이 원고지를 꺼내놓고, 잉크 병마개에서 손에 묻은 먼지를 씻은 후에 펜을 들었다. 그가 원고에 펜을 든 것은 거의 삼사 삭만이었다.
펜에 잉크를 찍어가지고 나서도 한참 꾸물꾸물하다가,
‘진리의 탐구자여’라고 그리듯이 한 자씩 똑똑하게 박아 써놓고, 또 한참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박박 긁어버렸다. 너무 천박하고도 과장(誇張)한 구조(句調)라고 생각함이다. 석 줄 넉 줄 북북 긁은 위를, 처음에는 타원형으로 까맣게 잉크 칠을 하다가, 나중에는 별〔星〕 모양을 그려보더니, 철필대를 던지고, 조끼 호주머니에서 궐련을 꺼내 피워 물었다. 볼이 메도록 힘껏 빨아 내뿜는 연기가 꾸물꾸물 흘러 오르는 모양을 말똥말똥 쳐다보다가, 그래도 못 잊은 듯이 다시 펜을 들었다. 이번에는,
‘소위 진리의 탐구자여’라고 써놓았다. ‘소위’ 두 자를 넣었다고, 별다른 의미가 생긴 것은 아니나, 하여간 붓대를 계속하였다.
‘소위 진리의 탐구자여! 그대의 이름은 얼마나 장미(壯美)하고, 그대의 사업은 얼마나 엄숙한가. 생명을 더하여도 아직 족함을 깨닫지 못하는 그대의 기개, 그대의 노력은, 얼마나 용감하고 얼마나 감격한 일인가.
그러나 무엇을 위한 탐구인고? 탐구함이 유의의(有意義)하다 함과 같이, 탐구치 않음도 역시 유의의하다고는 못할까. 또 탐구치 않음이 무의의함과 같이 탐구함이 또한 무의의하다고는 못할까…… .
그 욕구조차 없는 자, 행동의 효모(酵母)가 고사(枯死)된 자―애(愛)의 존영을 소실한 자, 일체(一切)의 정화(情火)가 심회(燼仄)의 잔해만을 남겨준 자(者)에게, 그 무엇이 의의 있고 힘 있으리오. 그 무엇이 장미(壯美)하고 엄숙히 보이리오…….’
그는 겨우 여기까지 써놓고, 종이에 구멍이 뚫어질 만치 붓을 든 채, 들여다보고 앉았다가, 또 궐련을 꺼내 물고 부산히 무엇을 찾기 시작하였다. 서류가 난잡히 흐트러진 책상 위를 이리저리 휘저어보았다. 금방 쓰고 난 성냥 통을 찾는 것이었다. 앉은자리를 휘돌아보아도 역시 없다. 또다시 조급히 책상 위를 휘저어 찾았다. 그 사품1에 원고지와 소맷자락에 걸린 잉크병은 붙잡을 새도 없이 거꾸러졌다. 청흑색의 고름 같은 농즙은 방금 붓을 뗀 원고지 위에 꿀꺽 토하여 나왔다.
겨우 담배를 피워 문 그는 지면에 번져나가는 잉크를 잠깐 노려보고 앉았다가, 처치하기 시작하였다…… 잉크를 훔치던 손을 멈추고, 그는 젖은 원고를 들어 한번 묵독하여본 뒤에, 그대로 두 손으로 똘똘 비벼서 재떨이에 던지고, 벌떡 일어나서 길로 난 들창에 기대어 밖을 내어다보며, 담배를 뻑 뻑 빨고 섰다.
추석을 지낸 지 며칠 안 되는 높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맑았다. 호젓한 골짜기에는 건너편 빈터에 김장 고추 말리는 것을 지키는 아이가, 고추 멍석 끝에 무료히 앉았을 뿐이었다. 뒷집 절뚝발이 아이다. 내 얼굴을 본 그 아이는, 무인도에서 사람 냄새나 맡은 듯이 부자유한 두 발을 엉거주춤 세우고 간신히 일어나서, 반기며 인사를 한다. 그도 방긋 웃으며 인사 대답을 하고, 그 아이 앉았던 자리에 얼레가 놓인 것을 물끄러미 건너다보다가,
“너 벌써 연〔紙鳶〕 날리니?” 하며 물었다.
“그럼요! 추석이 지났는데요” 하고 그 아이는 호젓한 웃음을 띠고 섰다가, 얼레를 들어서 이 귀 저 귀 만적이며 있다. 그는 ‘저 아이가 어떻게 날리누’ 하는 호기심 이 나서, 좀 날려보라고 하려다가,
“연은 동무가 있어야 날리지, 너 혼자 날리겠니?” 하고, 의미없이 빙긋 웃었다. 그 소년은 무슨 모욕이나 당한 듯이,
“왜요, 재미있어요” 하며 호젓한 낯빛으로 냉랭히 대꾸를 하고, 평지로 절름절름 내려와 두어 간통 떼어서 연을 올리고 얼레를 솔솔 돌리며, 절뚝절뚝 뒷걸음질을 쳐서 언덕으로 올라가다가, 다시 실을 급히 감기 시작하였다. 손바닥만 한 방패연은 속히 감아들이는 인력에 끌려서, 이삼 척쯤 뜨다가, 다시 빙그르를 돌아서, 지면에 화닥닥하며 부딪쳤다. 절뚝발이 소년은 눈살을 찌푸리고, 또다시 절름절름 뒷걸음을 치며 한 간쯤 물러서서 힘없는 다른 팔을 휙휙 돌렸다. 이번에는 아까보다는 좀 높이 올랐으나, 역시 팽팽 돌아 꼬리를 쳐들고, 땅바닥에 거꾸로 박혔다. 가련하고 고적한 병신 소년은, 좀 어색한 듯이 여전히 호젓한 미소를 띠며, 우두커니 내려다보며 섰는 그를 힐끔 쳐다보고 줄을 감아서, 연을 발밑까지 끌어다놓고 이번에는 위치를 변하여 그가 서 있는 창밑으로 오더니 역시 안간힘을 깽깽 쓰며 급속히 실을 감았다. 그러나 원래 바람이 없는 온정한 천기에, 조그만 방패연쯤 오를 리가 없다. 불쌍한 절름발이 소년은, 더욱더욱 초민증(焦悶症)²이 생긴 듯이 오른손에 얼레를 치켜들고 힐끔힐끔 돌아보며, 절름절름 절름절름하고 골짜기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부지중에 연은 자기 키만큼 올랐으나, 또다시 휙휙 돌아서 펄펄 내려앉았다. 그는 어느 때까지 무심한 듯이, 그 아이의 발꿈치와 연꼬리를 쫓아보며 섰다가, 긴 한숨을 휘 쉬이며 창 앞을 떠나, 다시 책상머리로 와서 앉았다.
그는 왼손으로 뺨을 괴고.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았다가,
‘… … 대체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얼마만 한 거리가 있는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재떨이에 놓인 잉크가 뒤발린 원고 수세미에 시선을 던졌다.
‘한 자, 두 자 오르다가 떨어지는 연과, 한 자 두 자 그리다가 찢어버리는 원고, 다리를 절며 오르지 않는 연이라도 올리지 않으면, 심심해 못 견디겠다는 절름발이 소년과……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행복도 없지 않은가. 그런 노력조차. ……오르지 않는 연을 올리려는 데에, 아니 용이히 오르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고민과 행복을 느끼지 않는가…… 아니 이것은 이론이다. 이치를 따지면 아무 말이라도 할 수 있지. 그러나…… 나에게 저 아이를 불쌍하다고 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벌써 틀린 수작이다.’
그는 생각하던 것을 더 계속할 힘도 없는 것같이, 문지방을 베고 반듯이 드러누웠다. 그러나 웬셈 인지 침정(沈精)할 수가 없다. 머릿속이 썩는 것 같다. 간혹 맷돌 같은 것으로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기도 하다. 찌부드듯하여 잠이 올 것 같다. ‘또 자나!’ 혼자 묻듯이 생각하다가, 벌떡 일어나서 주섬주섬 양복을 주워 입고 나서, 궐련갑을 포켓에 집어넣으려다가, 저고리 주머니에서 가름한 사진틀을 꺼내 들고, 한참 들여다본 후, 책상 한구석에 버티어 놓고, 방 안으로 빙빙 돌아다녔다. 사진틀에는 어떠한 처녀가 샐쭉한 눈을 말둥말둥 뜨고, 그의 거동을 쳐다보듯이 마주 보며, 조그마한 갑 속에 끼어 있다. 그것은 그가 늘 지갑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던 그의 약혼자인 N의 사진을, 어떠한 이성의 친구가, 자기의 사진틀에 끼워준 것을 그대로 넣고 다니던 것이었다.
˙러브, 인게이지먼트…… 흐흥, 나 같은 놈에겐 과분한 일이나…….’
양복 저고리 앞을 헤치고, 바지 포켓에다가 두 손을 찌른 채, 두세 번 빙빙 돌며 속으로 이같이 부르짖은 뒤에, 사진 앞에 와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가엾게!…… 너도 내 일생의 연밖에 안 되겠구나…… 대체 내가 너를 사랑하는가…… 사랑한다면 무슨 이유로?·…‥응! 이유 없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래!…… 그러나 아직 사랑할 능력과 권리가 남았다 할 수 있을까? 이성 앞에서 부르르 떠는, 어머니 젖꼭지에서 떨어진 채 그대로 있는 순결한 처녀에 대한 정신적 매춘부와 같은 정열의 방사자! 분염(奔焰)과 같은 초연의 가슴에, 이지의 눈이 푸르게 뜬 찬돌이 안길 제, ……아아, 울 것이다. ……아아 사기다! 최고 도덕으로 죄악이다!’
그는 정처 없는 이런 생각을 꿈속같이 머릿속에 이어가다가, 급작스레 천진한 N이 불쌍한 증이 나서, 사진을 들어 한참 들여다보다가, 키스를 하고, 다시 놓았다. 요사이 그의 또 한 가지 고통은, 의식적이 아니고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불쌍한 여자다. 자기의 불순으로 상대자의 순결을 더럽히는 죄악의 대상(代償)으로라도, 그를 사랑하여야 하겠다는 의식이나, 조건이 없고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 그에게는 일종의 고통인 동시에 비애였다. 예술이냐? 연애냐? 그에게 대하여는 이 두 가지를 전연히 부정할 수도 없고, 전연히 긍정할 수도 없다. 그 일(一)을 취하고 그 일을 버릴 수도 없다. 여기에 그의 딜레마가 있는 것이다―—그에게도 연, 절뜩발이 소년의 연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구두를 신으러 안으로 들어가는, 그의 머릿속에는 문득 N의 사진을 끼워준 그의 친구, Y여사의 일이 생각났다.
‘대체 나와 Y 간의 거리가 얼마나 되나? 결국은 연을 얻었다는 것과 얻으려 한다는 차이밖에 없지 않은가. 무슨 까닭에 Y의 장래를 염려하는가…….’
언젠지 Y더러 “정열의 부단의 남용적 방사(濫用的放射)는 방종이라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않는다. 진정한 새로운 연인을 택하여 가지고 인제는 정침한 생활을 하여야 하지 않느냐”고 충고 비슷한 말을 한 것을 생각하고, 혼자 고소하였다.
‘와일드는 현명한 자이다―— 전천(專擅)³이란 것은 사람의 생활에 간섭한다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자기같이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라 하였다. 적절한 말이다…… Y가 소위 진정한 연인을 얻더라도, 역시 연 이상은 못 될 것이다·……충고인지 무엇인지, 주제넘은 되지 못한 생각이다.’
그는 구두끈을 매면서도 얼빠진 사람처럼 이 생각 저 생각, 꼬리를 이어나갔다.
마루 끝에서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에, 그의 모친은 반개(半開)하였던 미닫이를 활짝 열고, “지금 가니?” 하며, 또 둘째 집 방문 건을 제의하였다. “인간대사를 당하였는데, 지척에 있으면서 안 가보면, 시비 난다.”
“가뵙죠.”
그는 힘없는 대답을 하고 나서, 사촌형 혼인의 부조 일을 하느라고, 무색 헝겊 조각을 벌여놓고 앉은 누이동생을 힐끔 돌려다모며,
“너는 언제나 인간대사를 치르련?” 반쯤 냉소를 띠고 조롱 한 마디를 하고,
“지금 나가서, 하나 골라오마. 오빠보다 잘나고 돈 많고, 인물 좋은…… 그리고 말 잘하는…… 핫핫핫, 응, 거기 모자 좀 떼다오.”
“하하하 너희들 노래에 있는 것처럼 반벙어리 새서방을 주워오련! 하하하.” 하며 어머니는 웃었다. 얼굴이 빨개진 십칠팔 세의 해끄무레한 처녀는, 나오는 웃음을 참고 외면을 하며, 일어나서, 장 안의 모자를 꺼내주었다. 그는 모자를 받으며,
“왜? 싫으냐? 흐흥.”
“듣기 싫어요. 누가 시집간답디까?…… 오빠나, 어서…… 공연히 남의 집 계집애를 잔뜩 붙들어놓고…….”
“응! 중매 행세를 톡톡히 하랴는구나…… 쓸데없는 걱정 말고, 어서 졸라라. 하하하.”
N은 그의 누이의 학교 동무였다. 그는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모녀의 웃음소리를 뒤에 두고, 다소 화기를 띠며 길에 나왔다.
2
약간 명쾌한 기분으로 집을 나선 그는, 야조현(夜照峴) 시장 부근에 들끓는 사람 틈바구니를 뚫고 나오느라고, 또다시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다.
오른편 앞으로 고개를 비뚜름히 숙이고, 한 손은 바지 포켓에 찌른 채, 비슷이 좌편으로 기울어진 어깨 위에, 무엇이나 올려놓은 듯이, 완만한 보조로 와글와글하는 속을, 가만가만히 기어서 큰길로 나와, 겨우 고개를 들고, 숨을 휘 쉬었다. 그는 지금 잡답한 길에 나와서도, 자기가 사람 사는 인간계에 있는 것 같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가장 추악한, 금시로 거꾸러질 듯한 망량⁴ 놀이, 움질움질하는 뿌연 구름 속을 휘저으면서, 정처 없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생활이란 낙인이 교활과 탐람(貪婪)이라는 이름으로 찍힌 얼굴들을 볼 때마다, 그는 손에 들었던 단장으로, 대번에 모두 때려누이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대체 너희들은 무슨 까닭에, 이다지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느냐? 어느 때까지 이것을 계속하다가 꺼꾸러지려느냐?’ 고 소리를 버럭 지르고 싶었다. 그는 대한문으로 향하여 정신없이 일이 정(町) 가다가 무슨 생각이 났던지 광화문을 바라보고 돌쳐서며, ‘무덤이다’라고, 혼자 속으로 부르짖었다. 전차 선로를 건너서 체신국 앞까지 온 그는, 공조(工曹) 뒷골로 들어서려다가,
‘무엇이 인간대사냐! 조상(弔喪)이나 하러 가라면 가지!’ 목에 걸린 담이나 토하듯이, 뱃속으로 한마디 토하고, 둘째 집 들어가는 골목을 지나쳤다.
‘……피차에 코빼기도 못 본, 어떤 개뼉다귄지 말뼉다귄지도 모르는 남녀가, 일생의 운명에 간음적 최후 결단을 선고하는 것이 무에 그리 경사란 말인가. 인천 미두(米豆)⁵ 이상의 더러운 도박을 하면서도 즐거우니 반가우니…….’
그는 속으로 이같이 생각하며, 분노를 못 이기는 듯이, 입술을 뿌루퉁 내밀고, 미친 사람처럼 혼자 흥흥 콧소리를 내며 걷다가, 우편 어느 관사 틈바구니에, 삭복개천으로 통한, 호젓한 길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 큰길을 건너서, 좌우 벽을 검은 판장으로 둘러 막은 으슥한 골목으로 찾아 들어섰다. 물론 어디를 가려는 향방이 있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사람 그림자 없는 길을 단독히 걸어보려는 것이었다. 이 길이 영원히 연속되었으면 하며 생각할 새도 없이 벌써 천변.이 되었다. 그는 어디로 향할까 잠깐 머뭇머뭇 망설이다가 도로 집으로 향하기도 싫은 증이 나서, A를 찾아가보기로 결심을 하고 다리를 건너섰다…….
A는 마침 화실에서 나와서, 햇빛이 쨍쨍히 비치는 마루 끝에 섰다가, 자취 없이 가만가만 기어 들어오는 그를 보고, 잠깐 적막한 때 마침 잘 왔다는 듯이, 반기며 자기 방으로 인도하였다. 그는 A를 따라 들어가는 길에, 자기 방 속에 문을 닫고 들어앉았는 B와, 두어 마디 인사를 하고 나서, B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B와 책상을 격하여 앉아서 엎드려 무엇을 쓰고 있던 연필을 쉬고 돌아다보며, 목례를 하는 묘령의 두 여자를 본 그는, 그대로 방문을 닫고 A의 방으로 돌쳐섰다.
“그동안에 무엇 했소? 왜 한 번도 안 왔어…….” A는 그의 침울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하긴 뭘 해……아! 아.” 그는 선하품을 쉬며, “같은 얼굴을 매일 쳐다보는 것도 귀찮아서…….”
“일엽낙이천하지추(一葉落而天下知秋)⁶가 아니라, 일엽낙이 인생지추(一葉落而人生知醜) 인가. 하하하, 아니, 우용지추(友容知醜)로군.” 하며 A는 웃었다.
회구 상자 뚜껑에는 사생판에 그리다가 둔 초상화가 끼어 있었다.
“이거야말로 추면(醜面)이로군…… B군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어쩐 셈이야?” 그는 B가 귀를 앓는 것을 생각하며, 귀를 그릴 데가, 여백대로 남아 있는 것을, 손가락으로 문대보면서 물었다.
“응, 요사이 선생, 귀머거리가 되어서.” A는 빙긋 웃으면서, “지금 보았지? 선생, 그저께부터 제자가 생기어서, 벌써, ‘아이, 라이크, 유, 두 유, 라이크, 미?’를 가르치기에 앓는 귀가 점점 더 멀어가는 모양이야, 아하하…… 벌써 연화(軟化)하여가는 모양이니까, 지금쯤은, 이만쯤은 되었겠지.” A는 또다시 파안대소하며, 책상 끝에 떨어뜨린 그의 손등을 붙잡으며, 흉내를 내었다. 그도 따라서 껄껄 웃으며,
“추색(秋色)이 방란(方蘭)이라, 마음이 싱숭생승하는데 그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결국 사람은 자기가 자신을 속여야만 살 수 있는 동물이야!” 이같이 한마디 하고 나서 그는 절뚝발이 아이를 생각하고
“B군의 연은 기생 제자(妓生弟子)로군.” 하며, 속으로 민소(悶笑)⁷하였다. 제자가 돌아간 후, B도 A의 방으로 와서,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쓸데없는 잡담을 이삼십 분간이나 하다가, 그는 집으로 향하였다. 도중에서 C, D 양인을 만났다. C는 그를 만나는 길로 “색시 구했어?” 하고 물었다. 요사이 C에게는 장가를 가겠다고 뭇사람더러 구혼하여달라고 부탁을 하는 일종의 버릇이 생기었다. 그러나 본인도 실없는 농담이려니와, 듣는 사람도 귓가로 들었다. 그는 “E에게 칼침을 맞게!” 하며 농담의 대답을 하고 나서, D에게 향하여,
“요사이 셈평이 좋소?” 하고 물었다.
“셈평? 셈평이 좋고 언짢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죽겠느냐 살겠느냐 문제요·…… X군, 요사이 조금도 보이지 않기에, 죽었나 살았나 하였더니 그래도 살아 있었구먼 하하하…….” D의 웃음에는 공허하면서도 침통한 심각미(深刻味)가 있고 경취 (京取)에 실패한 D의 얼굴에는, 표현할 수 없는 음영이 가려 있었다. A의 집으로 향하는 양인과 작별하고 돌아선, 그는 단장을 득득 끌면서, 고개를 숙이고 사복개천 천변으로 나왔다.
‘오늘날의 우리같이 천박한 것들이 또 있을까…… 자기 자신까지 우롱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다는 영리한 듯한 우물(愚物)의 무리다·…‥.’ 그는 불쾌하여 못 견디겠다는 듯이 입을 악물었다가, 헷 하며 혀를 한번 차고 또다시 속으로 생각을 계속하였다.
‘……유희적 기분을 빼놓으면, 그들에게 무엇이 남는다! 생활을 유희하고, 연애를 유희하고, 교정 (交l靑)을 우롱하고, 결혼 문제에도 유희적 태도…… 소위 예술에까지 유희적 기분으로 대하는 말종들이 아닌가. 진지, 진검, 성실, 노력이란 형용사는, 모조리 부정하고 덤비는 사이비 데카당스다…… 고뇌? 인간고?……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A두, B두, C두, D두, E두…… 모두 한씨다·…… 옛!…… 그러나 대체 그들이란 누구다? 그들이라 하며 매도하는 자기 자신이, 벌써 그 한 분자가 아닌가? 아닌가가 아니다. 그 수괴(首魁)⁸다. ……아―앗―’
그는 어느 틈에 숙주감 다리까지 왔다. 동십자각을 돌쳐서려다가 좀 더 호젓한 길을 걸어보려고, 삼청동을 향하고 큰길로 발을 떼어놓았다. 종친부 다리까지 와서 잔잔히 흐르는 개천 속을 들여다보다가, 종친부 대문 앞 잔디밭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석양을 재촉하는 햇발은, 아직도 뜨거웠다. 낮잠을 못 잔 그는 눈이 아물아물하여오고, 눈찌가 간지럽게 꼿꼿하고 아팠다. 점점 몽롱하여오는 머릿속에, 그는 또다시 생각을 계속하였다.
‘……예술이니 무엇이니 하여도, 결국은 물질생활의 노예밖에는 안 된다. 소위 ‘고뇌’라는 것도 결국 밥이 부족하여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깊은 데 근저를 둔 내부에서 타는 인간고라는 것은 약에 쓰려도 없다…… 그들이 괴로워 괴로워하며 개성의 자유로운 발현이 무리하게 억압되는 것을 한탄하며, 인생 문제니, 염세주의니 떠드는 것은, 밥이 부족하다는 애소에 분칠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주머니가 묵직하면 서재(書齋)에서 뛰어나오는 사이비(似而非)의 예술가가 아닌가…… D군의 그 침울하고 비통(悲痛)한 음영(陰影)도 주권(株券)만 폭등하면 하일(夏日)의 조로(朝露)다…… 흥 생사 문제다! 뒤주 밑이 긁히니까, 생사의 문제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한 번이라도 이 생애의 사업을 위하여, 자기의 예술의 궁전을 위하여, 인생의 아름답고 순결한 정서를 발로하는 연애를 위하여, 심각하고 영원한 고뇌를 위하여, 생사의 문제다!라고 부르짖은 일이 있었나?·…… 모든 것이 연이다. 절뚝발이 아이의 연에서 넘치지 않는다…… 자기기만, 자기 우롱…… 이외에 무엇이 있었는가?’
졸음은 어느덧 스러졌으나 사지가 찌부드듯하여진다. 그는 벌떡 일어나서 다리를 다시 건너, 큰길로 나오며,
‘그러나 취할 점은 하나 있다. 속되지 않다는 것! 속중(俗衆)과는 동화치 않는다는 것! 이것뿐이다…….’
그는 이같이 속으로 부르짖으며, 집으로 향하였다.
집에 들어온 그는 가만가만히 구두를 벗고 자기 방으로 바로 들어가서, 옷을 벗어던지고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누워서 잠을 청하여보다가 다시 일어나서, 불규칙하게 쌓아놓은 책 더미에서, 유도무랑(有島武郎)⁹의 『출생의 고뇌』라는 단편집을 빼서 들고 다시 누웠다.
3
오륙 페이지쯤 한숨에 읽은 그의 눈에는, 까닭 없는 눈물이 글썽글썽하였다. ―그는 일부러 씻어버리려고도 아니하고, 그대로 벽을 향하여 누운 채, 다시 첫 페이지부터 재독을 하였다. 그의 눈물은 아직도 마르지 않았다. 10페이지, 25페이지쯤 가서, 그는 손에 들었던 책을 편 채, 가만히 곁에 놓고, 눈물이 마른 눈을 꼭 감고 누웠다. 그의 일생에 처음 경험하는 눈물이었다. 인정미에 감격한 눈물은 여행 중 찻간에서도 흘려본 적이 있었다. 의분(義憤)이나 열분(熱憤)에 못 이겨서, 몸을 떨며 운 일도 있었다. 그와 반대로 월하(月下)에 이별을 애석하여 눈물짓는 처녀의 손을 붙들고도, 냉연히 돌아설 만큼 누선(淚線)이 고갈(涸渴)한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 눈물은 자기 자신도 알 수 없는 눈물이었다…… 그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상 받으라고 흔들려 깨인 때는, 방 안이 어둑어둑하였다. 선잠을 깨인 그는, 사지의 피로(疲勞)는 풀린 모양이나, 기력이 더한층 무거웠다. 눈을 뜨며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은 그의 머릿 속에는, ‘이같이 구구히 무슨 까닭에 사느냐?’는 몽릉한 의식이, 가장 민속(敏速)하게 전뢰(電雷)와 같이 반짝하다가, 쓰러졌다. 담배에 피로한 머릿속은, 납덩어리가 목에 걸린 듯이 무겁고 괴로웠다. 그는 일없이 가만히 앉았다가 불이 번쩍 켜지는 데에 정신을 소스라쳐 방 안을 휘돌아보았다. 책상에 놓인 사진은, 여전히 눈을 말뚱말뚱 뜨고, 그의 일거일동을 냉연히 마주 보고 앉았다. 그는 사진과 시선이 마주칠 때, 깜짝 놀랐다. ‘이 사람이 전생애를, 전 운명을, 나에게 걸고 있구나!…… 이, 나에게! 나를 이 세상에서 하늘같이 쳐다보는 사람도 이 사람밖에는 없다…….’ 사진을 마주 보며, 이런 생각을 할 때 그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동시에 수치와 모욕을 당한 것 같았다.
그는 안으로 끌려 들어가 저녁상을 받았다. 오늘은 무슨 생각이 났던지 얼마 동안 끊은 반주(飯酒)를 찾았다. 식사를 마치고 화끈화끈 다는 얼굴에 바람을 쏘이려고 길거리로 정처 없이 나왔다. 솔솔 뺨을 핥고 가는 가을 저녁 바람은 유쾌하였다. 사십자각(四十字角)을 돌쳐서서, 경복궁을 바라보고 느럭느럭 내려왔다. 종점에 와서 닿는 전차마다 토하여내는 기갈(飢渴)과 피로에 허덕이며 비슬비슬하는 허연 그림자가, 하나 둘씩 물러져감을 따라, 육조대르(六曹大路) 의 긴 무덤 에는 차차 밤이 들어가고 드문드문 높이 달린 전등불 빛은, 묘전(墓前)의 도깨비불같이 엷은 저녁 안개에 어룽어룽 번쩍거렸다. 그는 단장을 힘껏 휘저으며, 먼 하늘의 별을 쳐다보고 걷다가, 몸부림을 하며 울고 싶은 증이 나서, 캄캄한 길 한중턱에 우뚝 섰다…… 공상은 또 그의 머리를 점령하였다. 그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아, 대지에 엎드러져, 이 눈에서 흘러 떨어지는, 쓰고 짠 눈물을, 이 붉은 입술로 쪽쪽 빨며, 대지와 포옹하고 뺨을 문지를까! ……머리 위에 길이 내린 야광주(夜光珠) 같은 뭇 별의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 금은의 굳센 실〔系〕로 이 전신을 에워 메우고, ‘영원’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 이시여! 이 가련한 자은 생명에게 힘을 내리소서. 그렇지 않으면 이 작고 약하고 추한 그림자를, 영원히 비추이지 마소서. 하며 기도를 바치고 싶다’ 하고 그는 혼자 생각하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그링그렁 괴고, 그의 심장에는 간절하고 애통한 마음이 미어져서, 전 혈관을 압착하는 듯하였다…….
그는 확실치 못한 발밑을 조심하며, 무한히 뻗친 듯한 넓고 긴 광화문통 태평통(太平通)을, 뚜벅뚜벅 결어 나갔다.
-끝-
2016년 5월 19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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