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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2부 3
그러나 그가 병을 앓는 동안 계속해서 죽 의식을 잃었던 것은 아니다. 헛소리와 반의식을 동반한 열병 상태였다. 그는 훗날 여러 가지 일을 상기할 수 있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그를 붙들어 어디론가 데려가려고, 그에 관한 일로 시끄럽게 언쟁하고 다투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모두 밖으로 나가버려서 그 혼자만 방 안에 남아 있고 모두 그를 무서워한다. 그러다가 이따금 살며시 문을 열고 그의 동정을 살피고는 그를 위협하는 흉내도 내고, 자기들끼리 뭔가 의논도 하고 웃기도 하고 기도도 했다. 나스타시야가 자주 그의 옆에 있던 것도 그는 잘 기억했다. 그리고 또 한 사나이를 식별할 수 있었다. 아는 사람인 모양인데, 과연 누구인지 아무래도 생각이 안 나서 안타까워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벌써 한 달 동안이나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했으나, 때로는 여전히 같은 날이 계속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일은, 그 사건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대신 뭔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괴로워하고, 신음 소리를 내고, 미칠 듯한 노여움 아니면 참을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러면 그는 벌떡 일어나 뛰려고 했으나 언제나 누군가 힘 있게 붙들곤 하므로 그는 또다시 무력해지고 의식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마침내 그는 완전히 의식을 돌이켰다.
아침 10시경 일이었다. 아침 이 시각의 갠 날이면 태양은 언제나 긴 줄을 그으며 방 오른쪽 벽을 미끄러져 문 옆의 한구석을 비쳐주었다. 침대 옆에는 나스타시야와 낯선 사나이 한 명이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긴 농군 외투를 입고 턱수염을 기른 젊은이는 보기에 협동조합원 차림의 사내였다. 반쯤 열린 문에서 안주인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몸을 일으켰다.
"이 사람은 누구야, 나스타시야?" 그는 젊은이를 가리키며 물었다.
"어머, 정신이 들었군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정신이 들었군." 조합원이 말을 받았다. 문틈으로 들여다보던 안주인은 그가 정신이 든 것을 알자 이내 문을 닫고 사라져버렸다. 그녀는 언제나 소극적이어서 복잡한 얘기나 담판 같은 것은 싫어하는 성미였다. 40쯤 되어 보이는 여자였는데, 그 비만과 게으름 때문인지 사람이 좋았다. 그리고 용모는 괜찮은 편이었으나 지나치게 부끄러움을 타는 버릇이 있었다.
"당신은....누구요?" 이번에는 조합원에게 직접 물었다. 그러나 이때 문이 홱 열리더니 키가 큰 라주미힌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하고 들어왔다.
"이건 마치 선실같군." 들어오면서 그는 소리쳤다. "언제나 이마를 부딪친단 말이야. 이래도 역시 방이라고 하니! 자네 정신이 들었다고? 지금 파셴카(여주인의 애칭)한테서 들었네."
"지금 막 정신이 들었어요"하고 나스타시야가 말했다.
"방금 정신이 들었습니다." 조합원도 웃음을 지으며 되풀이했다.
"그건 그렇고, 당신은 누구시죠?" 갑자기 젊은이 쪽으로 향하면서 라주미힌은 물었다. "나는 보시다시피 라주미힌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브라주미힌이죠. 대학생인 동시에 귀족의 아들이고, 이 사람과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나는 협동조합에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상인 셀로파예프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볼일이 있어서요."
"이 의자에 앉으시오." 이렇게 말하고 라주미힌은 자신은 반대쪽 탁자 다른 자리에 앉았다. "아무튼 정신을 차렸으니 다행이군."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벌써 나흘째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으니 말이야. 사실 말이지 차까지 스푼으로 떠 먹이는 형편이었으니. 나는 조시모프를 두 번이나 여기 데리고 왔었네. 조시모프를 기억하나? 면밀히 자네를 진찰하더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더군. 뭔가 좀 뇌를 건드린 모양이라고 하면서, 하찮은 신경증이라는 거야.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서, 즉 맥주와 생강이 부족해서 병이 났다지만, 뭐 괜찮아, 이제 저절로 낫는다니까. 조시모프는 참 훌륭한 의사야! 치료 솜씨가 대단해. 아니, 내 얘긴 이제 그만해야겠군." 그는 다시 조합원에게로 몸을 돌렸다. "무슨 용무인지 말씀하실 수 없을까요? 미리 말해두지만, 로쟈, 이분의 사무실에서 사람이 온 것은 벌써 두 번째야. 먼젓번에 이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 나는 그 사람하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지. 그때 여기 왔던 분은 누구죠?"
"그건 아마 사흘 전이죠, 분명히 그럴 겁니다. 그때는 알렉세이 세묘느이치가 왔을 겁니다. 역시 우리 조합에 근무하는 사람이죠."
"그런데 그분은 당신보다는 말이 좀 통할 것 같더군요.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렇죠, 나보다는 훨씬 똑똑하죠."
"참 훌륭한 말씀이오. 어서 얘기를 계속하시오."
"실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바흐루신, 아마 자주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만, 그분을 통하여 당신 어머님께서 발행한 어음이 우리 사무실에 와 있습니다." 조합원은 직접 라스콜니코프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당신이 의식을 횐복하면 35루블을 내드리게 되어 있어요. 즉 어머님께서 발행한 어음에 대해서 세묜 세묘느이치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에게서 전과 같은 방법으로 통지를 받은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예......기억하고 있습니다....바흐루신......" 라스콜니코프는 생각에 잠기는 표정으로 말했다.
"보세요, 상인 바흐루신을 다 아는군요!"하고 라주미힌은 소리쳤다. "이래도 정신이 없다고 할 수 있겠소? 하긴 이제야 알겠지만, 당신 역시 이해성이 많은 분이군요. 아니, 이거 미안! 현명한 사람의 얘기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니까요."
"바로 그분, 바흐루신 씨,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말입니다. 그분이 댁의 자당 부턱으로 전에도 한 번 이런 식으로 송금을 하셨는데, 이번에도 거절하시지 않고 엊그제 세묜 세묘느이치에게로 35루블을 전해주면 고맙겠다는 통지를 보내왔군요."
"'고맙겠다'는 말씀이 걸작이군. '댁의 자탕'도 나쁘진 않았어. 그런데 당신 의견은 어때요, 이 사람은 완전히 정신이 든 것 같소, 안 든 것 같소, 네?"
"내 의견 같은 게 무슨 소용입니까? 나는 그저 영수증만 받아 가면 되니까요."
"몇 자 긁적거릴 수는 있겠지! 뭐 장부라도 갖고 오셨소?"
"예, 여기 장부가 있습니다."
"이리 주시오. 자, 로쟈, 일어나게, 내가 부축해줄 테니. 라스콜니코프라고 한 자 갈겨주게. 자, 펜을 들어. 이봐, 지금 우리 처지에서 돈을 꿀보다도 더 단 거야."
"필요 없어." 펜을 밀어내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뭐가 필요없다는 거야?"
"서명 같은 건 안 하겠어."
"아니, 영수증을 안 쓰면 어떡하겠다는 거야?"
"필요 없어.....돈은........."
"뭐? 돈이 필요 없다고! 여보게, 그런 헛소리 말아, 내가 증인이야! 뭐 걱정할 건 없습니다. 그저 좀....아지곧 꿈속을 헤매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긴 이 친구는 정신이 똑똑해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만....당신은 분별 있는 분이니까 어디 한번 나하고 둘이서 이 친구를 지도해봅시다, 뭐 어려울 것 없어요. 이 친구의 손을 붙잡고 움직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서명이 되는 거죠. 자, 해봅시다......."
"그렇지만.....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 그러실 건 없어요. 당신은 분별이 있는 분이니까....자, 로쟈, 너무 손님을 오래 붙드는 게 아니야....보게나, 기다리고 계시잖나." 그는 정말로 라스콜니코프의 손을 잡아주려고 했다.
"괜찮아, 내가 할께...."하고 라스콜니코프는 펜을 들고 장부에 서명을 했다. 조합원은 돈을 놓고 나가버렸다.
"됐어! 자, 이젠 뭘 좀 먹어야지?"
"먹고 싶군."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수프 있나?"
"어제 것이 있어요." 아까부터 죽 거기 서 있던 나스타시야가 대답했다.
"감자와 쌀가루를 넣은 건가?"
"네, 그래요."
"그런 줄 알았어. 그럼 수프를 가져와요. 그리고 차도 갖다 주고."
"그러죠."
라스콜니코프는 깊은 놀라움과 흐릿하고 무의미한 공포감을 느끼면서 모든 것을 바라보았다. 그는 침묵을 지키면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아무래도 의식을 잃은 것 같지는 않은데'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건 현실 같아........'
2분쯤 지나서 나스타시야가 수프를 가져왔고, 곧 다시 차도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수프에는 숟가락 두 개, 접시 두 개, 그밖의 소금 그릇, 후춧가루 병, 겨자 그릇 등의 부속 식기가 딸려 있었다. 이렇게 격식이 갖추어지기는 오랜만의 일이었다. 탁자보도 깨끗했다.
"이봐, 나스타슈쉬카, 주인아주머니한테 가서 맥주를 두 병쯤 얻어오면 고밥겠군. 한잔하고 싶어서 그래."
"정말 염치도 없군요!" 나스타시야는 중얼거리면서 맥주를 가지러 나갔다.
라스콜니코프는 긴장된 거친 눈초리로 계속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라주미힌은 소파로 자리를 옮겨 그와 나란히 앉아서, 혼자 일어날 수 있는데도 곰처럼 우직하게 왼손으로 그의 머리를 받치고는,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병자가 입을 데지 않도록 미리 몇 번이고 불어 식혀서 그의 입가로 수프를 가져갔다. 그러나 수프는 미적지근할 정도였다. 라스콜니코프는 허기진 듯이 한 숟갈을 받아 삼키더니 계속해서 두 숟갈, 세 숟갈을 먹었다. 그러나 몇 숟갈인가를 떠주고 ㅇ나서 라주미힌은 갑자기 손을 멈추고, 이 이상은 조시모프와 상의한 뒤에 먹여야겠다고 말했다.
나스타시야가 맥주 두 병을 들고 들어왔다.
"차 마시고 싶은가?"
"마시고 싶군!"
"나스타시야, 차도 얼른 갖다 줘. 차는 의사 선생한테 물어보지 않아도 될 테니까. 아, 드디어 맥주가 왔군!" 라주미힌은 자기 의자로 옮겨 앉아 수프와 쇠고기 접시를 끌어당기더니, 마치 사흘이나 굶은 사람처럼 입맛을 다시며 먹기 시작했다.
"난 말이야, 로쟈, 요즈음 매일같이 여기서 이렇게 식사를 한다네." 쇠고기를 가득 틀어넣은 입이 허락하는 한에서 입을 우물거리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모두 파셴카가, 이 집 주인이 공급해주는 거야. 요즘 열렬히 내 비위를 맞춰주고 있어. 난 물론 특별히 주장하지도 않지만, 거절도 않지. 자, 나스타시야가 차를 가져왔군. 아주 날쌘 여자야! 나스첸카, 맥주 한잔 어때?"
"농담 좀 작작 하세요!"
"차는 어때?"
"차라면 마셔도 괜찮지만."
"따라 마셔. 아니, 잠깐만. 내가 손수 따라주지. 탁자에 와서 앉아."
그는 얼른 준비를 하고 우선 따른 후, 또 한 잔을 따르더니 자기의 식사는 젖혀놓고 다시 소파로 갔다. 그는 아까처럼 왼손으로 병자의 머리를 안고 살며시 쳐든 뒤에 열심히 후후 불며 숟가락으로 차를 떠먹여주었다. 마치 숟가락을 후후 부는 과정에 건강이 회복되는 데 가장 중요한 회생의 요점이 있기라도 한 듯이. 라스콜니코프는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소파에 일어나 앉을 수 있을 만한 힘은 충분히 있고 숟가락이나 찻잔을 들 만큼 손도 움직일 수 있을뿐더러 걸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으나, 잠자코 거역하지 않기로 했다. 일종의 이상한, 거의 야수와도 같은 교활한 본능으로 잠시 어느 시기까지는 자기의 힘을 숨기고 필요에 따라서는 아직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듯이 꾸미면서, 그동안 주위 정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귀 기울여 탐지해내자는 생각이 문득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의 혐오감을 억제할 수 없었다. 열 숟갈쯤 차를 마시자 그는 갑자기 머리를 가로저으며 차 숟갈을 밀어내고는 다시 베개 위에 쓰러졌다. 머리 밑에는 이제 베개가 제대로 놓여 있었다. 깨끗한 잇을 씌운 털 베개였다. 그는 이것도 이미 알아채고 머릿속에 넣어두었다.
"파셴카한테 말해야겠군, 오늘 당장 딸기잼을 보내달라고. 이 친구에게 마실 것을 만들어줘야겠어." 라주미힌은 자리로 돌아가서 다시 수프와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주인아주머니가 무엇 때문에 당신한테 딸기잼을 보내줘요?" 다섯 손가락을 편 손 위에 접시를 놓고 입에 넣은 설탕을 차로 녹여 마시면서 나스타시야는 이렇게 말했다.
"딸기잼은 가게에 가면 있는 거야. 로쟈, 사실 이번에 자네가 모르는 동안 굉장한 사건이 있었다네. 자네가 얌체처럼 주소도 가르쳐주지 않고 나한테서 달아났을 때, 나는 정말 화가 나서 견디지 못하겠더군. 그래서 자네를 찾아 내어 혼을 내주려고 결심했지. 당장 그날부터 수색에 착수한 거야. 한없이 쏘다니며 찾고 또 찾았지! 나는 지금의 이 집을 깜빡 잊고 있었어. 하긴 처음부터 몰랐으니까 생각이 날 리가 없지. 그런데 자네의 이전 집 주소는 알고 있었어. 패치 우글로프 근처에 있는 하를라모프의 집이란 것만은 기억에 남아 있었거든. 그래서 나는 그 하를라모프의 집을 찾아다녔지.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하를라모프가 아니라 부흐의 집이었단 말이야. 발음이란 까딱하면 틀리기가 쉬우니까! 그만 나는 약이 올라서 다음날 또 헛걸음이라도 좋다는 생각으로 경찰 주소계를 찾아가봤지. 그랬더니 불과 2분 만에 자네 이름을 찾아주더군. 자네 이름이 거기 적혀 있더라니까."
"적혀 있다고?"
"그렇다니까. 그런데 코벨료프 장군이라는 사람은 나도 옆에서 보고 있었지만 끝내 못찾아냈어. 아무튼 얘길 하자면 끝이 없지. 그런데 나는 여기 오자마자 자네에 관한 일들을 죄다 알아냈어, 죄다. 죄다 알게 됐단 말야, 알겠나? 그건 이 여자가 증인이지. 나는 니코짐 포미치와도 알게 되었고, 일리야 페트로비치도 소개받았지. 그리고 문지기와도, 이곳 경찰 기록계에서 일하는 자묘토프 씨, 즉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와도 사귀게 되고, 이 집 안주인 파셴카와도 알게 되었어. 이건 내 노력에 대한 월계관이야. 여기 이 여자도 알고 있지만...."
"잔뜩 사탕발림을 했거든요"하고 능글맞게 웃으며 나스타시야가 중얼거렸다.
"그럼 차에 넣어 잡수시지, 나스타시야 니키 포로브나."
"어머 못하는 소리가 없군요!" 갑자기 나스타시야는 이렇게 외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페트로바지 니키포로브나가 아니에요." 웃음을 거두며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잘 알아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여보게,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기로 하고, 처음에 나는 이 지방의 모든 편견을 근절하기 위해 방방곡곡에 전파를 보내려 했네. 그런데 결국은 파셴카한테 지고 말았어. 난 말이야, 여보게, 그 여자가 그렇게....그렇게 멋진 여잔 줄은....꿈에도 생각 못했어.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라스콜니코프는 불안스런 시선을 잠시도 그에게서 떼지 않았으나 여전히 침묵을 지킨 채, 계속해서 뚫어질 듯이 그를 지켜보았다.
"지나칠 정도로 근사하더군." 라주미힌은 상대방의 침묵에 아랑곳없이, 마치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라도 치는 듯한 어조로 말을 계속했다.
"아주 좋아, 모든 점에서."
"어머나, 무슨 사람이 저럴까!" 나스타시야가 또 다시 외쳤다. 보건데 이런 대화는 그녀에게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을 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곤란한 것은, 자네가 처음부터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거야. 그 여자에게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어. 정말 그 여자는 뭐랄까, 이상야릇한 성격의 소유자거든! 하지만 성격 따윈 나중으로 돌리기로 하고...다만 자네는 무엇 때문에, 예를 들면 그 여자가 자네한테 식사도 들여보내주지 않도록 만들었느냐 말야. 그리고 그 다음은 또 뭐냐 말야? 자넨 돌았나? 어음 따위에 서명하다니! 그리고 또, 그 여자의 딸 나탈리아 예고로브나가 살아 있을 때 약속했던 혼담 얘기도 그렇지....나는 다 알고 있어! 하긴 그건 섬세한 마음결에 속하는 일이고, 그 면에선 나도 문외한이지만 말이야, 용서하게. 그런데 바보 같은 소리지만,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실제로 프라스코비야 파블로브나(안주인 파셴카의 정식이름)는 첫눈에 보기보다 그렇게 바보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안 그래?"
"그래........" 라스콜니코프는 외면을 하면서도 이 얘기를 좀 더 계속 시키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렇지?" 대답을 받아 자못 기쁜 듯이 라주미힌은 큰 소리를 질렀다. "그렇다고 그다지 영리한 편도 못 되지만 말이야, 그렇지? 정말 이상야릇한 성격이야! 사실 솔직히 말해서 약간 어리둥절할 정도라니까....그 여자는 아마 마흔은 되었을 거야, 자기는 서른여섯이라고 하지만. 하긴 그럴 만한 자격은 충분하지. 그러나 맹세코 말하지만, 나는 그 여자에 대해서 오히려 지적으로, 다만 형이상학적으로 판단하고 있네. 지금 우리 사이에는 자네의 그 대수학(代數學)과도 같은 굉장한 표지잉 생기고 있단 말일세!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아니, 이런 건 모두 시시한 얘기야. 단지 그 여자는 자네를 친척 취급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는 갑자기 놀란 셈이지. 또한 자네는 자네대로 방구석에 틀어박힌 채 예전과 같은 관계로 되돌아갈 기색이 없단 말야. 그래서 그 여자는 자네를 여기서 쫓아내려고 생각한 거지. 벌써 오래전부터 그런 계획을 품고 있었지만 그 어음이 아까웠고, 게다가 자네 자신도 어머니가 갚아 준다고 보증을 했으니 말이야........"
"난 비열한 생각에서 그런 말을 한 거야....어머니도 거의 거지꼴이 다 되었기에....나는 이 하숙에 남아서....그냥 얻어먹고 싶은 생각에서 거짓말을 한 거야"하고 라스콜키코프는 커다란 소리로 똑똑히 말했다.
"그렇지, 그건 잘한 일이었어. 그런데 문제는 7등관 페바로프 씨가 불쑥 등장한 것이지. 그 사내만 없었더라면 파셴카는 아마 아무 생각도 못했을 거야. 말할 수 없이 수줍은 여자이니까. 그러나 그 수완가는 수줍음하고는 거리가 머니까 우선 이 어음을 살릴 가망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했지. 그런데 그 대답은 희망이 있다는 거야. 왜냐하면 자네한텐 어머니가 계셔서 비록 자기는 못 먹더라도 귀여운 로젠카에만은 125루블이라는 연금에서 변통하여 구해줄 테고, 또한 오빠를 위해서는 몸을 팔아도 좋다고 하는 누이동생이 있기 때문이지. 그자도 이 점을 노린거야....자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나? 난 말이야, 이젠 자네의 비밀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네. 자네가 파셴카와 아직 친척같이 지내고 있을 때 신세타령을 한 것이 탈이었어. 지금 나는 자네를 사랑하기 때문에 말하는 건데...다름 아니라...정직하고 다감한 인간은 저도 모르게 곧잘 속이야기를 털어놓지만 수완가는 언제나 그것을 잘 들어두었다가 미끼로 삼는단 말이야. 그리고 마지막엔 통째로 삼켜버리지. 그래서 그 여자는 돈을 받은 것처럼 해서 체바로프에게 어음을 양도한 거야. 그러자 그자는 정식 소속을 밟아 돈을 청구했지. 우물쭈물할 위인은 아니니까. 나는 그 내막을 알고, 양심을 좀 깨끗하게 해주기 위해서 이 사내에게 전파를 방사하려고 생각했지. 그런데 마침 그때 나하고 파셴카 사이에 일종의 타협이 이루어졌으므로, 나는 자네가 지불할 것이라고 보증을 하고 이 사건이 더 커지기 전에 깨끗이 취하시키라고 그 여자에게 명령했지. 이봐, 난 자네를 보증했단 말이야, 알겠나? 그래서 체바로프를 불러 10루블을 던져주고는 어음을 도로 찾아왔지. 자, 이렇게 삼가 자네에게 바치는 영광을 갖는 바네. 이건 구두 약속만으로도 자넬 신용한다는 뜻이야. 자, 받아두게. 적당히 찢어두었으니까."
라주미힌은 차용증서를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흘긋 그것을 보고, 한마디 말도 없이 벽 쪽으로 돌아눕고 말았다. 라주미힌도 거기에는 은근히 화가 날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1분쯤 지나서 그는 말했다. "나는 또 바보짓을 했는가 보군. 실컷 수다를 떨어 자네 마음을 풀어주고 위로해주려고 한 것이 오히려 자네 신경을 건드린 모양이야."
"내가 열에 시달릴 때 자네를 알아보지 못하던가?" 역시 1분쯤 잠자코 있던 라스콜니코프가 얼굴을 돌리지 않은 채 이렇게 물었다.
"못하더군. 도리어 미친 듯이 화를 내기까지 했으니까. 특히 내가 한 번 자묘토프를 데리고 왔을 때는 더했었지."
"자묘토프를? 경찰서의 기록계원 말인가....무엇 때문에?" 라스콜니코프는 홱 얼굴을 돌려 라주미힌을 뚫어지게 보았다.
"아니, 자네 왜 그래....왜 그렇게 놀라는 거야? 자네와 사귀고 싶어 하더군, 그 사내가 말이야. 나하고 여러 가지로 자네 얘기를 했기 때문이지....그렇지 않고서야 누구한테서 자네 일을 이렇게 상세히 알 수 있었겠나? 여보게, 그자는 참 좋은 사내야, 훌륭한 인간이야.....물론 그 범위 내에서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는 친구가 되어 거의 매일같이 만나고 있네. 그래서 나는 이 구역으로 이사까지 했지. 자넨 아직 모르지? 바로 며친 전에 이사를 했어. 루이자 한테도 그 사내와 두어 번쯤 갔었지. 루이자를 기억하겠나, 루이자 이바노브나를?"
"내가 헛소릴 하던가?"
"하고말고!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무슨 소릴 했지?"
"뭐! 무슨 소릴 했느냐고? 무슨 소린지 뻔하지 뭐야...자, 이제 시간 낭비 그만하고 용건이나 마쳐."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모자를 집으로 했다.
"무슨 헛소릴 했어?"
"왜 자꾸 그런 소리만 하지! 아니, 무슨 비밀이 있기에 그렇게 떠는 거야? 걱정하지 마, 백작 부인 얘긴 전혀 안 했으니까. 단지 어느 집 불도그가 어떻다느니, 귀고리가 어떻다느니, 쇠사슬이 어떻다느니 하는 따위지. 그리고 크레스토프스키 섬이니, 어느 집 문지기니, 니코짐 포미치니, 서장 보좌관 일리야 페트로비치니 하며 여러 말을 지껄이더군. 아, 그리고 또 자네 양말이 몹시 걱정되는 모양이더군, 몹시 말이야! 그야말로 애원하듯이 양말을 줘, 양말을 줘, 그저 그 말만 되풀이하는 거야. 그래서 자묘도프가 구석구석을 뒤져 겨우 찾아내서는, 향수로 씻고 반지를 몇 개씩 낀 손으로 다 떨어진 그 누더기를 자네에게 주었지.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꼬박 하루 밤낮이나 그 양말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더군. 빼앗을 수도 없을 정도였어. 아마 지금도 어디 담요에 있을걸세. 그다음에 또 바짓가랑이 조각을 조르기 시작하더군. 눈물을 흘리다시피 하면서 말이야! 우린 자꾸 물으며 찾아보았지만, 도대체 무슨 헝겊 조각인지를 알 수가 있어야지. 자,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여기 35루블이 있는데, 10루블만 가지고 가네. 두 시간쯤 지나 계산서를 가져오지. 그동안 조시모프에게도 알려두고. 아니, 벌써 그자가 올 시간이 지났는데....11시가 지났으니 말이야. 이봐, 나스첸카, 내가 없는 동안 자주 좀 돌봐줘요. 파셴카에겐 내가 직접 필요한 말을 해둘 테니까. 그럼 실례!"
"흥, 파셴카라니! 어쩌면 저렇게 뻔뻔스러울까!" 나스타시야는 그의 등에 대고 말했다. 그리고 문을 열고 귀를 기울이더니 참지 못하고 자기도 아래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녀는 라주미힌이 아래층에서 아주머니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건대 그녀는 라주미힌에게 홀딱 반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마자, 병자는 담요를 걷어차고 미친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타는 듯한 경련과도 같은 초조감을 느끼면서 한시라도 빨리 두 사람이 나가서, 그 사이에 일에 착수할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떤 일을 할 것인지 마치 일부러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영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오, 하느님, 단한마디만이라도 해주십시오. 그들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지, 그렇잖으면 아직 모르는지? 만약 죄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체하고 내가 잠잘 동안 실컷 나를 놀려두고는 이제 느닷없이 나타나서, 벌써 죄다 아는 일인데 그저 모르는 체했을 뿐이다....이렇게 말하면 어떡하지....이제부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갑자기 잊어버렸어. 마치 일부러 잊기라도 한 듯이, 갑자기 잊어버렸구나, 조금 전까지도 알고 있었는데.....'
그는 방 한가운데 선 채 괴로운 의혹에 싸여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윽고 문께로 다가가서 문을 열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으나, 그것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난 듯이 벽지가 뚫려 있는 구석으로 달려가서 열심히 살펴보고 손을 넣어 찾아보기도 했으나 역시 그것도 아니었다. 그는 난롯가로 가서 난로 문을 열고 재속을 뒤져보았다. 그러자 바지 끝 조각과 찢어낸 호주머니 조각이 그때 집어넣은 채로 뒹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아직 아무도 여기를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그때 문득 그는 조금 전에 라주미힌이 말해준 양말이 생각났다. 과연 양말은 소파 위 이불 밑에 뒹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 몹시 구겨지고 더러워져서 자묘토프라 해도 아무것도 알아내지는 못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뭐, 자묘토프!....경찰!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를 경찰에서 부를까? 소환장은 어디 있지? 아, 그렇지, 나는 혼동하고 있었구나....내가 호출당한 건 그때였지! 그때도 나는 양말을 조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지금 나는 병을 앓고 있는 거다. 그건 그렇고, 자묘토프는 무슨 일로 왔을까? 라주미힌은 무엇 때문에 그자를 데려온 걸까?' 그는 다시 소파에 앉으면서 힘없이 중얼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아직도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게 현실일까? 아무래도 현실인 것 같다....아, 생각났다. 도망쳐야 한다! 빨리 도망쳐야 한다.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그렇다....그러나 어디로 가지? 내 옷은 어디 있지? 구두도 없다! 치워버렸구나....감췄어! 이젠 알겠다! 아, 저기 외투가 있다. 빠뜨렸구나! 저런, 책상 위에 돈도 있네, 고맙지 뭐야! 여기 어음도 있고....이 돈을 가지고 도망치자. 그리고 다른 곳에 방을 빌리자. 그러면 그놈들도 찾아내지 못할 게다....하지만 주소계라는 게 있지? 또 찾아내겠군! 찾아내고 말 거야. 차라리 아주 도망쳐버릴까....아주 먼 곳으로....미국으로라도, 그러면 그놈들도 닭 쫓던 개 격이 될걸! 어음도 가지고 가자....거기서 소용이 될지 모르니까. 그리고 또 무엇을 가지고 가지? 놈들은 내가 앓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걸을 수 있는 걸 그놈들은 모르고 있어. 헤, 헤, 헤!.....난 눈치챘어, 놈들은 죄다 알고 있는 거야! 층계만 빠져나가면 되는데! 그러나 밑에 문지기나 순경이 서 있으면? 아니, 이건 뭐야, 찬가! 아, 여기 맥주도 남아 있군. 반병쯤, 차가운데!'
그는 아직 한 컵쯤 남아 있는 맥주병을 집어들고 마치 가슴속의 불을 끄기라도 하듯이 기분 좋게 단숨에 들이켰다. 그러나 1분도 지나기 전에 어느새 맥주 기운이 작용하여 가벼운, 오히려 유쾌한 오한이 등골을 스쳐 갔다. 그는 드러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지 않아도 병적인, 걷잡을 수 없는 그의 머리는 갈수록 더 혼잡해져갈 뿐이었다. 그러나 이윽고 기분 좋은 잠이 그를 감싸버렸다. 그는 흐뭇한 기분에 싸인 채 머리를 움직여 편하게 베개를 벤 다음, 여태까지의 누더기 외투 대신 어느새 자기 몸 위에 걸쳐 있는 부드러운 솜이불을 덮고는 조용히 한숨을 쉬고 곧 깊은 잠에 빠졌다. 그것은 치유의 힘을 가진 잠이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그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라주미힌이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들어올까 말까 망설이며 문턱에 서 있었다. 라스콜니코프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무엇인가를 상기하려고 애쓰는 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니 자는 게 아니었군, 나야, 나! 나스타시야, 꾸러미를 이리 가져와요!"라주미힌은 아래층을 향해 외쳤다. "지금 곧 계산서를 줄게......"
"몇 시나 됐지?"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며 라스콜니코프는 물었다.
"꽤 잤군 그래. 밖은 벌써 저녁이야. 아마 6시 가까울걸. 여섯 시간 이상이나 잔 셈이군....."
"큰일인데! 이게 무슨 꼴이람!"
"뭐가 어쨌다는 거야! 잘했지 뭐! 어디 갈데라도 있나? 데이트라도 할 작정인가? 이제 겨우 우리만의 시간이 되지 않았느냐 말이야. 나는 벌써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네. 두 번이나 와봤지만 자네는 자고 있더군. 조시모프한테도 두 번이나 가봤지만 두 번 다 없더군! 그러나 괜찮아, 이제 올 테지....무슨 볼일이 있어 나갔다니까. 나는 오늘 이사를 했네, 백부님과 함께 말이야. 지금 백부님이 와 계시거든....자, 그럼 용무부터 마칠까! 꾸러미를 이리줘, 나스첸카. 자, 우리....그런데 기분은 어때?"
"난 건강해, 병이 아니야...라주미힌, 자네 여기 온 지 오래되었나?"
"세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말했잖아."
"그게 아니고, 그 전 말이야."
"뭐라고? 그전이라니?"
"언제부터 이 집에 드나들었느냐 말이야?"
"그런 아까 자네한테 죄다 말했는데 벌써 다 잊었나?"
라스콜니코프는 생각에 잠겼다. 아까의 일이 꿈처럼 그의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혼자서는 생각해낼 수가 없어서 그는 물어보듯이 라주미힌을 바라보았다.
"음!"하고 라주미힌이 입을 열었다. "잊어버렸군! 하긴 아까도 자넨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어....그러나 지금은 한잠 푹 자고 나서 많이 좋아졌군....아니, 절말 좋아진 것 같아. 됐어! 자, 그럼 용건으로 들어갈까! 뭐, 이제 곧 생각날 걸세. 자, 이걸 좀 봐, 여보게."
그는 꾸러미를 풀기 시작했다. 보건대 그는 그 꾸러미에 큰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건 말이야, 여보게, 특히 내 맘속에 항상 품고 있던 거야. 자네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던 거지. 자, 시작하세, 위에서부터 시작해야지. 어때, 이 모자가 보이나?" 하고 꾸러미 속에서 꽤 깨끗한, 그러나 동시에 평범하기 그지없는 싸구려 모자를 꺼내면서 그는 말했다. "어디 한번 써봐."
"이따가, 나중에."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면서 라스콜니코프는 말했다.
"그러지 마, 로쟈, 제발 내 말 좀 듣게, 나중엔 늦을 거야. 게다가 치수를 재지 않고 짐작으로 사왔으니 난 오늘 밤 한잠도 못 잘 걸세. 야, 꼭 맞는군!" 그는 모자를 씌워보고 이것 보라는 듯이 외쳤다. "안성맞춤이야. 머리 장식이라는 것은 여보게, 복장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부분이거든, 일종의 소개장과도 같은 것이지. 내 친구 톨스챠코프라는 놈은 언제나 공개 좌석에 나갈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모자를 쓰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벗곤 했어. 모두 노예근성 탓이라고들 생각했지만, 그는 단지 새 둥지 같은 모자가 창피해서 그랬을 뿐이야. 아무튼 굉장히 수줍은 친구거든! 그런데 참, 나스첸카, 여기 모자가 두 개 있는데, 어느 것이 좋다고 생각하나? 이 팔메르스톤인가(하고 그는 한쪽 구석에서 라스콜니코프의 쭈그러진 둥근 모자를 끄집어냈다. 그는 왜 그런지 그것을 팔메르스톤이라고 불렀다), 아니면 이 보배 같은 물건인가? 로쟈, 한번 값을 맞춰보게, 얼마나 줬겠는가? 나스타슈쉬카는?" 상대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자 그는 나스타시야에게로 몸을 돌렸다.
"아마 20코페이카쯤은 줬겠죠." 나스타시야가 대답했다.
"20코페이카? 바보같으니!" 그는 화내며 소리쳤다. "지금 세상에 20코페이카론 너 같은 것도 못 살 게다. 80코페이카야! 그것도 약간 쓰던 거니까 그렇단 말이야. 하긴 조건부지만. 그것을 못 쓰게 되면 내년에 딴 것을 거저준다는 조건이지, 정말이야. 자, 이번엔 미합중국에 착수해보세, 중학 시절 우린 곧잘 이렇게 말했지. 미리 말해두지만, 이 바지는 내 자랑거리야." 그는 가벼운 여름 모직으로 만든 회색 바지를 라스콜니코프 앞에 펴 보였다. "구멍도 없거니와 얼룩 한 점 없어. 중고품이라곤 하지만 꽤 입을 만하지...그리고 조끼, 유행이 요구하는 대로 같은 색이야. 중고품이라는 건, 실제로 입을 때는 오히려 더 편하거든, 부드럽고 날씬해서 말이야....그런데 로쟈, 사회에 나가 성공하려면 내 생각에 항상 계절에만 주의하면 충분하다고 봐. 정월에 아스파라거스를 찾지만 않는다면, 언제나 몇 루블쯤 돈은 지갑에 남아 있게 마련이지. 옷을 사는 데도 그렇거든, 지금은 여름철이니까 나도 여름 것을 산 거야. 왜냐하면 가을이 되면 계절은 좀 더 따뜻한 천을 요구하니까 이런 것은 버리지 않으면 안 되지...게다가 그때가 되면 이런 것은 절로 해지고 말 걸세. 사치욕의 증가 때문이 아니라 내적인 부조화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야. 자, 값을 맞혀봐! 자네 눈엔 얼마나 돼 보이나? 2루블 25코페이카야! 잘 기억해두게, 이것도 같은 조건이니까. 이게 다 해지면 내년에 다른 것을 거저 얻기로 했거든! 페쟈예프의 가게는 그런 방식으로 장사를 하지. 한 번 돈을 내면, 평생 그것으로 그만이야. 하긴 산 사람도 두 번 다시 가지 않을 테니 말이야. 자, 이번엔 구두야.....어때? 고물이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지만, 아직 두 달즘은 문제없이 신을 수 있네. 이래 봬도 외국 제품이고, 재료도 외국 것이야. 영국 대사관 서기관이 지난주에 고물 시장에 내놓은 거라더군. 엿새밖에 안 신었는데 무척 돈이 아쉬웠나 봐. 값은 1루블 50코페이카, 잘 샀지?"
"그렇지만 발에 안 맞을지 모르잖아요!" 나스타시야가 참견했다.
"안 맞는다고? 그럼 이건 뭔데?" 그는 호주머니에서 낡아빠져 온통 구멍투성이인 데다가 흙이 잔뜩 말라붙은 라스콜니코프의 구두 한 짝을 꺼냈다. "난 다 준비해 갔지. 이 귀신 딱지 같은 것으로 치수를 잰 거야. 나는 모든 일에 성의를 다했어. 셔츠가 세 벌인데, 리넨 천이지만 유행 깃이 달려 있어. 그러니까 모자가 80코페이카, 옷이 2루블 25코페이카, 합계 3루블 5코페이카, 그리고 구두가 1루블 50코페이카....이건 아주 물건이 좋으니까. 합계가 4루블 55코페이카. 그리고 셔츠가 5루블, 흥정을 잘해서 값을 깎았어. 그래서 총합계 9루블 55코페이카야. 거스름이 45코페이카인데 모두 5코페이카짜리 동전이네. 자, 받게 이제 자네도 의관을 다 갖춘 셈이군. 왜투만은 내가 보기에도 자네 것이 아직 입을 만할뿐더러 독특한 기품이 이;ㅆ거든. 샤르메르 같은 데다 주문하면 굉장한 값일 거야! 양말이나 그 밖의 것에 대해서는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돈은 아직 25루블 남아 있어. 파셴카나 하숙비에 대해서도 걱정할 건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무한한 신용이 있으니까. 자, 그럼 셔츠를 갈아입게. 병이란 놈이 바로 그 셔츠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니까."
"그만둬! 싫어!" 라주미힌의 의류 수집에 관한 신 나는 농담조의 보고를 혐오의 빛을 띤 채 듣고 있던 라스콜니코프는 귀찮은 듯이 손을 내저었다.....
"자네 그러면 안 되네. 그럼 나는 무엇 때문에 발이 닳도록 쏘다녔단 말인가!" 하고 라주미힌은 굽히지 않았다. "나스타슈쉬카, 뭐 부끄러워할 건 없어, 좀 도와줘, 자, 어서," 라스콜니코프가 저항하는데도 그는 셔츠를 갈아입혔다. 라스콜니코프는 베개에 쓰러진 채 2분쯤 아무 말이 없었다.
'아직 오랫동안 들러붙어 있을 모양이군!'하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슨 돈으로 이 물건들을 다 샀나?" 마침내 그는 벽을 향한 채로 물었다.
"무슨 돈이라니? 기가 막혀서! 자네 돈이지 뭐야. 아까 조합에서 왔었잖아, 바흐루신을 통해서 어머니가 보낸 거야. 아니, 그런 것까지 다 잊어버렸나?"
"이제 생각나는군......."한참 동안 침울한 생각 끝에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라주미힌은 미간을 찌푸리고 근심 어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앗다.
문이 열리더니 훤칠한 키에 다부진 몸매의 사나이가 들어왔다. 라스콜니코프와도 어느 정도 안면이 있어 보였다.
"조시모프! 드디어 왔군." 라주미힌은 기쁜듯이 소리쳤다.